최근 수정 시각 : 2024-04-01 12:39:45

베르티 포크츠

베르티 포크츠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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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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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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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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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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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대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프란츠 베켄바워
(1972~1977)
베르티 포크츠
(1977~1978)
제프 마이어
(1978~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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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티 포크츠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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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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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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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 1975 ·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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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66 · 1967-68 · 1969-70 · 1970-71 · 1972-73 · 1973-74 · 1974-75 · 1975-76 · 1976-77 · 1977-78

1971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우베 젤러
(함부르크 SV)
베르티 포크츠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귄터 네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79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제프 마이어
(FC 바이에른 뮌헨)
베르티 포크츠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FC 바이에른 뮌헨)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멤버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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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티 포크츠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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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HALL OF FAME DES DEUTSCHEN FUSSBA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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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축구인
파일:5de9ac68a310cf3e97aa3882.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베르티 포크츠
Berti Vogts
본명 한스후베르트 포크츠
Hans-Hubert Vogts
출생 1946년 12월 30일 ([age(1946-12-30)]세)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뒤셀도르프현
라인크라이스노스군 뷔트겐
국적
[[독일|]][[틀:국기|]][[틀:국기|]]
신체 168cm
직업 축구 선수 (라이트백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행정가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VfR 뷔트겐 (1954~1965 / 유스)
B. 묀헨글라트바흐 (1965~1979)
감독 서독 U-21 대표팀 (1979~1990)
서독 대표팀 (1986~1990 / 코치)
독일 대표팀 (1990~1998)
바이어 레버쿠젠 (2000~2001)
쿠웨이트 대표팀 (2001~2002)
스코틀랜드 대표팀 (2002~2004)
나이지리아 대표팀 (2007~2008)
아제르바이잔 대표팀 (2008~2014)
행정가 미국축구협회 (2014 / 특별기술고문[1])
미국축구협회 (2015~2016 / 기술이사)
국가대표 96경기 1골 (서독 / 1967~1978)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2.2. 국가대표
3. 플레이 스타일4. 선수로서의 평가5. 지도자 경력6. 감독으로서의 평가7. 기록
7.1. 선수
7.1.1. 대회 기록7.1.2. 개인 수상
7.2. 감독
7.2.1. 대회 기록7.2.2. 개인 수상
7.3. 수훈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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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축구 선수 출신 감독, 행정가. 선수 시절 포지션은 라이트백.

현역 시절, '테리어(Der Terrier)'라는 별명처럼 수준급의 오버래핑 능력과 우수한 킥력, 강철같은 체력으로 뛰어난 대인 수비 능력을 자랑하던 풀백이다.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원클럽맨으로 70년대 분데스리가 5회 우승, UEFA컵 2회 우승에 기여하며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서독 대표팀에서도 유로 1972, 1974 서독 월드컵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현역 은퇴 후에는 1990년부터 1998년까지 독일 대표팀을 지휘하며 유로 1996 우승을 달성했으나 1994 미국 월드컵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모두 8강 탈락을 당하면서[2]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이후로 여러 국가대표팀의 감독직을 맡았으나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으며 미국축구협회에서 행정가로 잠시 일하기도 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포크츠는 20세의 나이에 1965-66 시즌에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 데뷔해 어린 나이에도 주전을 차지했고 맹활약한다. 그리고 4년만인 1969-70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하며 마이스터샬레를 얻는다. 또 다음 시즌 역시 우승에 성공하며 분데스리가 2연패에 성공한다. 당시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1970년대 최고의 팀 FC 바이에른 뮌헨에게 대적할 수 있는 자국의 유일한 클럽이었다. 유프 하인케스, 귄터 네처, 베르티 포크츠 후에는 알란 시몬센, 울리 슈틸리케까지 오며 유럽에서도 통하는 강팀으로 커져나가고 있었다. 1972-73 시즌은 DFB-포칼 우승, 1974-75 시즌은 유러피언컵 3연패가 끝난 뮌헨에게서 마이스터샬레를 다시 한번 빼앗았고 UEFA컵 결승전에서 트벤터를 상대로 5-1 대승을 거두며 첫 UEFA컵 우승을 경험한다.
파일:external/www.derwesten.de/0026841105-0055922895.jpg
묀헨글라트바흐의 황금기를 이끈 선수시절, 좌로부터 울리 슈틸리케, 우도 라테크(감독), 유프 하인케스, 베르티 포크츠.
그 다음시즌 부터는 라이벌인 FC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이었던 우도 라텍이 오며 더 좋은 경기력을 선보여줬고 1975-76, 1976-77시즌 까지 우승하며 분데스리가 3연패를 따낸다. 1976-77시즌에는 유러피언컵 결승까지 진출하나 아쉽게 리버풀 FC에게 패배하며 준우승에 그친다. 그러나 다음 시즌은 알란 시몬센의 결승골로 두번째 UEFA컵 우승컵을 들어올린다. 30세가 넘은 나이에도 맹활약하던 포크츠는 유종의 미를 거두며 1979년 현역은퇴를 선언한다.

2.2. 국가대표

포크츠는 1970 멕시코 월드컵 당시 월드컵 엔트리에 뽑혔고, 서독은 3위를 차지했다. 유로 1972에서는 프란츠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 유프 하인케스, 귄터 네처, 등 물이 오르기 시작한 멤버들과 함께 우승을 거머쥔다. 여기서부터 감독 헬무트 쇤은 베켄바워에게 수비형 미드필더가 아닌 제대로 된 리베로의 롤을 맡겼고 이는 성공적이었다. 뮐러의 대활약으로 벨기에소련을 꺾고 앙리 들로네를 당당히 들어올린다. 하지만 포크츠는 이 대회에서는 호르스트 회트게스에게 주전자리를 내주었다.

1974 서독 월드컵에서는 호주, 동독, 칠레와 한 조가 되었는데 동독에게 패배하며 2승 1패로 조 1위로 2차 리그에 올라가게 된다. 2차 리그에서는 서독이 각성하며 3전 전승을 해낸다. 결승전 상대는 당시 돌풍이었던 네덜란드와의 경기였다. 서로 둘다 토탈 풋볼리베로 시스템이라는 획기적인 전술을 들고 싸웠고 명경기를 만들어낸다. 또 크루이프와 베켄바워의 맞대결로 세계의 이목을 모았다. 휘슬이 불리고 1분만에 크루이프페널티 킥을 얻고, 네스켄스가 성공하며 한점을 뒤지고 시작한다.
파일:크라위프 VS 포크츠.jpg
크루이프를 막는 포크츠

그러나 이후 서독은 힘을 내었고 포크츠-베켄바워-슈바르첸베크의 철벽 수비진이 크루이프를 포함한 네덜란드 공격을 효율적이면서도 철저히 방어하는데 성공하여 네덜란드는 이렇다할 날카로운 움직임을 보이지 못했다. 포크츠는 크루이프에게 초반 페널티 킥을 내준것 이외에는 크루이프를 마크하는 역할을 똑똑히 해냈고 크루이프는 포크츠에게 고전한다. 이런 와중에도 포크츠는 전방 측면으로 오버래핑을 침투하여 슛을 날리며 네덜란드 골키퍼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도 했다. 서독은 네덜란드를 몰아치며 여러차례 결정적인 장면을 만들어냈고 불운과 심판의 외면이 있었지만 페널티 킥 찬스를 브라이트너가 침착하게 성공시키며 동점을 만든데 이어 전반 43분 뮐러가 터닝슛으로 마무리하며 역전골을 넣으며 서독은 우승을 차지한다. 서독의 월드컵 우승에는 포크츠의 공도 아주 컸고 포크츠는 대회 올스타팀에 선정된다.

유로 1976에서는 유고슬라비아를 꺾고 체코슬로바키아를 결승에서 만나지만 결국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며 준우승에 그친다. 다음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는 베켄바워가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에 반대하며 참가하지 않았고, 포크츠가 그의 주장 완장을 대신 차고 출전한다. 팀은 조별예선에서 1승 2무 조 2위로 겨우 2차 리그에 진출한다. 2차 리그에서는 이탈리아, 네덜란드, 오스트리아에게 1승도 거두지 못하고 2무 1패로 탈락한다. 포크츠는 오스트리아전에서 치명적인 실수로 자책골을 넣으며 3-2 패배의 원흉이 되었다. 만약 그가 자책골을 넣지 않았고 팀이 1골을 더 기록한다면 적어도 3·4위전을 갈 수 있었다. 그래도 포크츠는 대회 내내 좋은 활약을 선보여 올스타팀에 선정된다.

유로 1976 이후 베켄바워, 회네스, 하인케스 등이 은퇴하였고, 이후 대표팀은 세대 교체의 과도기에 들어갔다. 포크츠는 베켄바워의 후임으로 대표팀 주장에 임명되어 세대 교체에 들어간 대표팀을 이끄는 중책을 맡았다. 하지만 서독은 디펜딩 챔피언으로서 78 월드컵 예선을 면제받으면서 세대 교체에 들어간 팀의 조직력을 다질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었고, 결국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서독 대표팀은 좋지 못한 성적을 내었다. 이 대회를 끝으로 포크츠 역시 제프 마이어 등과 함께 대표팀을 은퇴했다.

3. 플레이 스타일

70년대 독일 축구에 크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포크츠는 1974년 월드컵 결승에 크루이프의 전담 마크맨으로 기용된 사실로 가장 널리 회자되고 있다. 크루이프 팬들이 워낙 막강한 관계로 안타깝게도 포크츠에 대해 볼 리프팅을 3번밖에 못하는 선수라는 폄하가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전혀 사실과 다른 완전한 왜곡이다. 당장 크루이프를 개같이 마크했다던 74 월드컵 결승전만 풀타임으로 제대로 봐도 포크츠가 수비 뿐만 아니라 돌파에 슈팅 능력까지 갖춘 완성형 풀백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포크츠는 공수 양면에서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의 기량을 보였던 당대 최고의 풀백 가운데 한명이었다. 특히 그의 주무기는 2:1 패스를 통해 상대 측면을 뚫어내는 것이었고 이는 상당히 날카로운 오버랩이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크로스와 슛팅이 발군. 여기에 그를 더 빛나게 해준것은 '사냥개' 라는 별명답게 상대 공격수를 물고 늘어지고 안놔주는 역대 최고수준의 질식 대인마크. 태클 능력이나 헤딩 능력 등 종합적인 수비적 부분에서 완벽했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명인 크루이프에게 악착같이 달려들어 꼼짝 못하게 만들었고, 스피드와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그의 돌파를 막기 어려웠지만 공간을 내주겠다 싶으면 반칙도 서슴없이 썼고 찰거머리 같은 체력으로 크루이프보다 한두발짝씩 앞서서 그를 차단했다. 1974 월드컵 결승에서는 안타깝게도 크루이프의 전담 마크를 하느라 그의 오버래핑 기회가 크게 줄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루이프를 완전 봉쇄하는 와중에도 그는 순식간에 상대 진영을 돌파하여 슛까지 날리면서 네덜란드 수비수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도 했다.

4. 선수로서의 평가

1970년대 분데스리가바이에른 뮌헨의 독무대였다고 착각하기 쉬우나 정작 당시 70년대 분데스리가를 5회나 우승하며 지배했던건 바로 포크츠가 뛰던 묀헨글라트바흐다.[3] 아쉽게 유러피언컵에선 준우승을 했지만 UEFA컵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며 거의 대부분의 대회에서 우승 커리어를 쌓았다. 여기에 70년대 최강이었던 서독의 주전 라이트백이라는 확고한 위상을 갖고 유로와 월드컵 역시 제패. 또 그의 능력은 독일의 키커 랑리스테가 입증하는데 WK 등급(월드클래스)을 무려 11번이나 선정되었다. 그보다 많은 WK 등급을 받은 선수는 역대 통틀어 프란츠 베켄바워우베 젤러 뿐이다. 또한 발롱도르 드림팀에서는 라이트백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어 6위를 차지하였다.

따라서 포크츠는 카푸, 자우마 산투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 릴리앙 튀랑, 다니 알베스, 필립 람과 함께 축구 역사상 최고의 라이트백 중 한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5. 지도자 경력

파일:external/www.dfb.de/csm_599-Vogts_Berti_910e03ac49.jpg
유로 1996 우승 직후 환호하는 포크츠[4]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더니, 지도자로써는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다.

먼저 33살이던 1979년, 은퇴 직후 곧바로 서독 U-21 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어 1990년까지 장장 11년 동안 활동했다. 그리고 그 중간인 1986년에는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로 프란츠 베켄바워를 보좌하며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서독 대표팀을 통산 3번째 우승으로 이끌었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이후 베켄바워가 감독직을 사임하자 포크츠가 코치에서 감독으로 승격하였다. 포크츠가 물려받은 팀은 직전에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그 외에도 지난 10년간 월드컵에서 두 차례 준우승과 1차례 유로 우승을 일궈낸 팀이었다. 게다가 여기에다 독일 통일로 인해 마티아스 자머, 울프 키르스텐 등 동독 선수들까지 가세하게 되어 가히 무적의 팀이 될 것이라 예상되었지만, 그건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첫 번째 메이저 대회인 유로 1992에서는 조별리그에서 스코틀랜드에게 2:0 승리, CIS(독립국가연합)에게 1:1 무승부, 네덜란드에 1:3 패배로 불안하게 4강에 진출했고 스웨덴을 3:2로 이기고 결승에 진출했으나 덴마크에 0:2로 패해 준우승에 머무르게 된다.

두 번째 메이저 대회인 1994 미국 월드컵에서는 위르겐 클린스만을 앞세워 스페인과 무승부, 볼리비아한국을 상대로 승리하며 16강에 진출했으나 당시 한국과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도 3:2로 상당히 진땀나는 승부였다. 특히 막판에는 40도를 넘나드는 경기장 온도 속에서 체력이 방전된 독일 선수들은 거의 걸어다니는 상황이었다. 만약 한국과의 경기도 추가시간이 좀 더 있었거나 전반전도 후반전과 같은 경기력이었다면 비기거나 패했을 수도 있는 경기였다. 하필 한국전에서 당시 팀의 중원을 담당하던 슈테판 에펜베르크가 관중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드는 만행으로 중도 귀국 조치 시키기도 했다. 16강에서 벨기에를 상대로 3:2 승리를 거뒀으나, 8강에서 스토이치코프가 이끄는 불가리아에 1:2로 역전패를 당하며 탈락했다.

유로 1992 준우승이야 넘어갈 수 있어도 당시 1990 월드컵 우승 멤버와 자머, 키르스텐 등의 동독 선수들이 전성기를 맞이할 나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1994 월드컵에서 그것도 한참 전력이 아래인 불가리아를 상대로 일격을 당했다는 건 용납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유난히 노장들에게 집착을 했는데, 1994 월드컵에서 푈러, 베르톨트, 브레메 등 은퇴 직전이거나 대표팀 일선에서 물러난 선수들을 등용해 평균 연령을 너무 높였고, 미국의 더위를 못 이겨 결국 체력 저하로 토너먼트에서도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더니 8강에서 제대로 당했다. 그리고 1990 월드컵 우승 당시의 전술을 그대로 답습했지만, 이미 상대들은 독일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에펜베르크가 관중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든 사건이나 팀의 핵심인 로타어 마테우스위르겐 클린스만의 갈등으로 대표되는 부족한 팀 장악 능력, 소홀한 미디어 관리 등의 문제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로 포크츠는 1994 월드컵 직후 감독직을 사임하려 했고, 실제 언론에서도 사임이 확실시되는 분위기였고, 당시 바이에른 뮌헨, 레버쿠젠 감독설이 나왔지만, 축구 협회의 만류로 사표는 반려되고 계속 독일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유지하였다.

유로 1996을 준비하며 레네 슈나이더, 토드, 세바스티안 치게, 마르쿠스 바벨 등 A매치 경력이 없던 선수들을 적극 기용하며 세대교체를 준비하기 시작했으나, 이런 신인들이 A매치에 바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실수를 연발하면 다시 내치는 등 세대교체를 준비하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엔 노장들만 지나치게 믿고 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결국 포크츠가 준비한 포메이션은 1-4-4-1로 마티아스 자머스위퍼로 두고 그 위에 치게 - 콜러 - 헬머 - 로이터를 4백으로 두는 극단적인 수비적인 포메이션이었다. 결국 잠머의 수비 능력과 한방이 가능한 위르겐 클린스만으로 경기를 끝내겠다는 포크츠의 전략은 유로 1996에선 먹혀들어 경기당 1.17실점이라는 극강의 수비력을 바탕으로 결승전에서는 올리버 비어호프의 예상치 못한 활약을 바탕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거기에 포크츠는 이 대회 우승을 통해 UEFA 유로를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우승한 최초이자 유일한 축구인이라는 대기록도 갖게 되었다.[5]

그러나 공수의 핵심인 마티아스 자머위르겐 클린스만의 하락세, 대체 선수가 없었던 상황에서 유로 1996의 우승은 비록 우승이지만 오히려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과 포크츠 본인에게는 독이 되어 버렸다. 유로 1996의 영광을 노리고 마티아스 자머 대신 로타어 마테우스까지 복귀시키는 강수를 뒀지만,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요행이 먹혀들지 않고 8강전에서 크로아티아에 0:3 완패를 당하며 두 대회 연속 8강에 그쳤다.

1998년 월드컵 직후에도 독일 대표팀 감독을 유지하던 베르티 포크츠는 결국 9월에 감독직을 사임한다.

2년간 휴식을 취하던 베르티 포크츠는 2000년 11월, 바이어 04 레버쿠젠의 감독으로 복귀한다. 리그 4위를 기록해 다음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예선 티켓을 따냈지만 한 시즌만에 사임하고 2001년 8월, 쿠웨이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된다. 7개월 동안 쿠웨이트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던 베르티 포크츠는 2002년 3월,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직을 옮긴다. 참고로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다. 아마 잉글랜드스벤예란 에릭손 감독을 최초로 외국인 감독으로 영입하면서 잘 나가는 것을 보고 자극 받아 스코틀랜드도 개혁의 필요성을 느껴 유로 1996에서 우승을 하며 능력을 검증한 포크츠를 영입한 모양이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포크츠가 감독이 된 이후에 여러번에 걸쳐 굴욕적인 패배를 많이 겪었다. 스코틀랜드 감독 시절 시작부터 프랑스한테 0:5, 한국에 1:4로 참패 당하는 등[6] 내내 형편없는 성적과 경기력으로 내내 언론의 질타를 받던 포크츠는 유로 2004 예선전에서 독일,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리투아니아와 같은 조로 편성되어 조 2위를 차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데 성공했고, 네덜란드와의 홈 1차전에서 1:0으로 승리를 거두는 이변을 연출하며 생명을 연장하는 듯 했으나 비기기만 해도, 심지어 원정다득점 제도에 의해서 득점한 상황에서는 1골 차이로만 져도 본선 진출이 가능한 원정 2차전에서 0:6으로 거짓말같은 참패를 당하며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유로 2004 예선 직후 몰도바와의 월드컵 예선 원정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스코틀랜드 언론의 비난을 받은 포크츠는 계약기간이 절반이 남았지만 스코틀랜드 감독직을 자진 사퇴한다.

그리고 다시 잠시 야인의 길을 걷다가[7] 2007년 1월, 나이지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4년 계약을 맺고 감독직으로 복귀했으나, 2008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8강에 머무르며 1982년 대회 이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8] 결국 여론의 압박을 못이겨 자진사퇴한다.

이후 2008년 4월, 아제르바이잔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나, 2010 남아공 월드컵, 유로 2012, 2014 브라질 월드컵 등의 예선에서 모두 영 좋지 않은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아제르바이잔 축구 협회에선 만족한 듯 꾸준히 연장 계약을 체결하여 지금까지 아제르바이잔 감독직을 수행 중이었으나 유로 2016 예선에서의 부진한 성적으로 인해 경질되었다. 하지만 경질의 효과도 전혀 보지 못하였고, 그렇게 아제르바이잔은 유로 대회 본선 진출에 실패하였다.

위르겐 클린스만과의 친분으로 2014 브라질 월드컵 기간에는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특별 기술고문으로 임명되어 월드컵 기간에 클린스만을 보좌하며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결국 2015년 3월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기술이사로 정식 임명되었다. 그러나 2016년 가을, 클린스만이 미국 대표팀 감독직에서 지역예선에서의 성적 부진 끝에 짤리면서 포크츠 역시 기술이사직에서 같이 사임했다.

6. 감독으로서의 평가

독일 대표팀 감독으로 유로에서는 우승 1회, 준우승 1회로 성공적인 결과를 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월드컵에서는 2번 모두 8강 탈락하며 결과가 좋지 못했다. 특히 독일보다 명백히 약체였던 불가리아와 크로아티아에게 패해서 탈락했다는게 포크츠의 평가를 더욱 낮추는 요소가 되었다. 거기에 독일 감독 후반기에는 노장들만 중용하며 세대교체에 실패, 독일 축구의 암흑기를 가져왔다는 점도 비판받을 부분이다.

다만 후임 에리히 리베크유로 2000을 제대로 말아먹어[9] 역대 최악의 감독 자리는 리베크가 가져갔고, 그 후 루디 푈러까지 독일 축구의 암흑기가 이어지자[10] 요아힘 뢰프2014 브라질 월드컵을 우승하기 전 독일에 마지막 메이저 타이틀을 안겨준 감독으로 잠시 재평가되었다.[11][12]

하지만 이후로 쿠웨이트, 스코틀랜드, 나이지리아, 아제르바이잔 등 여러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역임하며 꾸준히 활동했으나 특별히 눈에 띄는 성과는 내지 못하면서 이 쪽도 결과적으로는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라는 징크스에 걸려들고야 말았다.

7. 기록

7.1. 선수

7.1.1. 대회 기록

7.1.2. 개인 수상

7.2. 감독

7.2.1. 대회 기록

7.2.2. 개인 수상

7.3. 수훈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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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4 브라질 월드컵 기간 중에만 활동.[2] 독일에게 월드컵 8강이면 불만족스러운 만년 우승후보라는 점을 상기하자. 이전 3번의 월드컵에서 3연속 결승 진출에 준우승 2번과 우승 1번을 기록했다. 특히 2번 모두 상대가 독일보다 언더독으로 평가받았던 동유럽 국가들인 불가리아, 크로아티아에게 패해 탈락했다는 점이 크다.[3] 다만 바이에른 뮌헨은 유러피언컵까지 3연속 우승하면서 대내외적으로 인정받았던 바가 플러스 요소다. 세리에 A 9연패를 거둔 2010년대 유벤투스와 6년 간 5번의 EPL 우승을 차지한 맨체스터 시티가 챔스 우승이 없다고 안방 호랑이 취급받았던게 현실이다. 그나마 맨체스터 시티는 22-23 시즌 챔스 우승과 트레블로 만회를 했기에 망정이지..[4] 그의 감독 경력 유일한 리즈 시절이기도 하다.[5] 다만 선수로서 우승을 차지한 유로 1972는 호르스트 회트게스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었다는 한계점이 있다.[6] 당시 이 결과에 대해서 스코틀랜드에서 충격이 컸는지 BBC에서 의견 수집까지 할 정도였다. B팀이라고, 주전 선수들이 빠져서 그렇다고 정신승리를 하는 의견도 보이는데, 당시 스코틀랜드는 2002 한일 월드컵 예선에서 탈락한 뒤로 스코틀랜드 축구 대표팀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감독인 베르티 포크츠 체제가 막 들어서면서 세대교체를 시도 중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비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7] 이 과정에서 2005년 가을에는 조 본프레레가 한국 대표팀 감독직을 사퇴한 자리를 메울 새 감독 후보군들 중 하나로 포크츠 본인도 물망에 올랐으나, 네덜란드 출신의 딕 아드보카트가 선임되면서 무산되었다.[8] 나이지리아와 같은 팀에게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8강이라는 성적은 호성적이라고 볼 수가 없다.[9] 잉글랜드에 0-1로 패하고 특히 포르투갈에게는 세르지우 콘세이상에게 해트트릭을 내주며 0-3 참패를 당했다.[10] 2002 한일 월드컵 준우승이라는 업적이 있기는 하나 결승전 이전까지 우승후보급 팀들을 단 한번도 만나지 않을 정도로 대진운이 좋았다.[11] 국제대회에서의 꾸준한 활약과는 별개로, 독일 대표팀이 포크츠의 유로 1996 이후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무려 18년 후 2014 브라질 월드컵이다.[12] 푈러와 뢰프 사이의 감독이었던 위르겐 클린스만2006 독일 월드컵 3위라는 성과가 있긴 하지만, 이 대회는 자국인 독일에서 열린 대회라서 홈빨이라는 평가도 많았고, 또한 클린스만도 월드컵 3위와는 별개로 역량 면에서는 호평을 받지 못하며, 또한 차후에 수석코치였던 뢰프가 모든 것들을 다 맡고 클린스만은 별로 한 게 없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평가는 좀 하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