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게오르크 슈바르첸베크의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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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트 뮐러 (1979) | → | 한스게오르크 슈바르첸벡 (1979~1980) | → | 파울 브라이트너 (1980~1983) |
한스게오르크 슈바르첸베크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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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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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멤버 |
1972 |
한스게오르크 슈바르첸베크의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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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前 축구 선수 | ||
이름 | 한스게오르크 슈바르첸베크 Hans-Georg Schwarzenbeck | |
본명 | 한스게오르크 "카쳬" 슈바르첸베크 Hans-Georg "Katsche" Schwarzenbeck | |
출생 | 1948년 4월 3일 ([age(1948-04-03)]세) | |
독일국 바이에른 주 뮌헨 | ||
국적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키 183cm | |
직업 | 축구 선수 (센터백 / 은퇴) | |
소속 | 선수 | 슈포르트프로인스트 뮌헨 (1962~1966 / 유스) FC 바이에른 뮌헨 (1962~1966 / 유스) FC 바이에른 뮌헨 (1966~1981) |
국가대표 | 44경기 (서독 / 1971~19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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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前 축구 선수. 프로 데뷔 이후 오직 바이에른 뮌헨에서만 15년 동안 뛰었던 원클럽맨이다. 클럽과 국가대표팀 모두 프란츠 베켄바워의 붙박이 파트너로, 베켄바워가 스위핑 이후 공격으로 뛰쳐나가면 그 뒤를 굳건히 받쳐준건 슈바르첸베크의 몫이었다. 베켄바워 평생의 라이벌 요한 크루이프의 파트너적인 존재로 요한 네스켄스가 있었다면 베켄바워에게는 슈바르첸베크가 있었다.2. 선수 경력
2.1. 클럽
13세의 나이까지는 동네에서 친구들과 축구를 하는게 다였지만 1961년에 바이에른 뮌헨 유스팀으로 움직여 5년동안 뛰었다. 1966/67 시즌에는 프로팀에 승격돼 10월 8일 베르더 브레멘 원정에서 데뷔했지만 팀은 4-1로 졌다. 커리어 첫 골은 1969년 10월 25일에서야 알레마니아 아헨을 상대로 터졌다. 이 시점 이후로부터 슈바르첸베크는 은퇴 2년 전까지 수비수임에도 불구하고 매 시즌 한골씩은 꼭 기록했다. 그는 바이에른에서만 416경기에 출전했고 리그 포함 통산 21골을 넣었다. 이는 포칼컵 52경기 7골과 유러피안컵 70경기 2골을 포함한 숫자이다. 선수시절 철의 정강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상대 다리를 향해 과격하다 싶을 정도로 정확하게 발을 넣어 상대를 쓰러뜨리는 동시에 공을 뺏어오는 태클로 이름을 날렸으며, 또 다른 별명으로는 황제의 기사가 있는데 프란츠 베켄바워의 별명이 Der Kaiser, "황제"였다보니 그의 파트너이자 뒤를 보좌하는 슈바르첸베크에게 자연스럽게 생긴 별명이다.슈바르첸베크의 커리어하이 경기는 바이에른 뮌헨의 구단 역사상 첫 유러피언컵[1] 우승을 차지할 때 결승전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상대로 1대0으로 패배 직전까지 간 팀을[2] 환상적인 땅볼 중거리슛으로 1대1 원점으로 만들어 벼랑끝에서 구해냈을때였다. 그로서 재경기를 이끌어냈고, 이어지는 재경기에서 4대0으로 승리해 바이에른 뮌헨이 우승할수 있었다. 슈바르첸베크의 마지막 분데스리가 경기는 1979년 8월 18일 샬케를 상대로 뛴 경기였고 1980/81 시즌 시작 전, 아직 조금 더 뛸수 있을만한 32세의 나이에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은퇴해야만 했다. 그는 현역 기간 동안 분데스리가 우승 6회, DFB-포칼 우승 3회, 유러피언컵 우승 3회로서 황제 베켄바워와 함께 바이에른의 수비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하였다.
2.2. 국가대표
슈바르첸베크는 1969년 5월 7일에 U-23 국가대표팀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그라즈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팀은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2-2로 비겼다. 1971년 4월 24일 그의 U-23 두번째이자 마지막 경기에서는 튀르키예를 상대로 3-0으로 승리하였다. 그 이후 1971년 6월 12일에 카를스루에에서 알바니아를 상대로 정식 국가대표로 데뷔하여 2-0으로 승리하였다. 그 이후 그는 국가대표로서 44경기를 소화하였으며 서독의 UEFA 유로 1972 우승과 UEFA 유로 1976 준우승, 그리고 1974 서독 월드컵 우승에 큰 공헌을 하였다.3. 기타
여담으로 젊었을적 외모가 뮌헨의 핵심 미드필더 중 하나였던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와 매우 흡사하다. 심지어 신장도 183cm로 똑같다!
은퇴 후 28년간 뮌헨에서 문방구를 운영했었다.
자신의 데뷔 시즌이었던 1966/67 포칼 결승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동안 너무 많은 결승전을 뛰어서 헷갈린다나.
4. 플레이스타일
1970년대 바이에른 뮌헨 최전성기의 공격진을 지탱해주던 강철 센터백, 뛰어난 스피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대인 마킹, 황소 같은 힘과 점프력, 섬세한 태클링, 그와 다르게 뛰어난 전진 드리블이나 롱패스 등 빌드업 능력까지 겸비하고 있었던 슈바르첸베크는 바이에른 뮌헨특유의 '람바참바' 축구 그리고 그의 파트너 '베켄바우어'를 완벽히 보좌 해주는 당대 최고의 스토퍼로서 자신의 기량을 여김없이발휘 했으며 당시 베켄바우어가 1차 방어를 하며 특유의 뛰어난 인터셉트로 공을 끊어내는 앞선 수비를 할때 뒤에서 뒷공간을 완전히 틀어막아주는 침착한 수비를 주 무기로 삼아 베켄바우어의 플레이를 보좌하였으며 그 덕분에 '황제의 기사' 라는 칭호까지 얻게된다 또한 강력한중거리 슈팅 능력과 헤더를 바탕으로 클러치 상황에서 게임의 판도를 뒤집었으며 아약스 역대 최고의 수비수인 배리 훌쇼프의 라이벌 로서 세계를 양분하는 두 클럽의 라이벌리를 고조 시켰다. 뮌헨 역대 베스트를 논할때 우선적으로 언급되는 인물이며 독일 역대 베스트 11 에도 잠머와 함께 두번째 자리를 가장크게 경쟁하는 인물이라 할수 있다.5. 기록
5.1. 대회 기록
- FC 바이에른 뮌헨 (1966~1981)
- 분데스리가: 1968-69, 1971-72, 1972-73, 1973-74, 1979-80, 1980-81
- DFB-포칼: 1966-67, 1968-69, 1970-71
- 유러피언컵: 1973-74, 1974-75, 1975-76
-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966-67
- 인터컨티넨탈컵: 1976
-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1974
-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1972
5.2. 개인 수상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72
- 바이에른 뮌헨 올타임 XI: 2005
- 바이에른 뮌헨 명예의 전당
[1] UEFA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2] 공교롭게도 아틀레티코의 선제골로 이어진 프리킥을 내준 게 슈바르첸베크 본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