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가휘의 주요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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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가휘 梁家輝|Tony Leung | |
본명 | 양가휘[1] (간체:梁家辉, 번체:梁家輝, 영문:Tony Leung Ka-fai) |
출생 | 1958년 2월 1일 ([age(1958-02-01)]세) 영국령 홍콩 |
국적 | 홍콩 |
원적지 | 광둥성 포산시 난하이구 |
신체 | 178cm |
언어 | 중국어(보통화/광동어), 영어 |
학력 | 홍콩이공대학 디자인학과 학사 |
배우자 | 강가년(江嘉年) 1987년 결혼 |
자녀 | 쌍둥이 딸 양영희(梁穎晨), 양정희(梁靜曦) 1992년 07월 17일 ([age(1992-07-17)]세) |
직업 | 영화배우 |
데뷔 | 198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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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화 <연인> 에서 |
양가휘는 홍콩의 배우이다. 한국에서는 1992년 개봉된 연인으로 유명해졌지만, 주윤발이나 성룡에 비해서는 인지도가 약간 처진다.[2] 하지만 홍콩 및 중화권에서의 위상이 아주 높은 배우이다.
2. 초기이력
홍콩 파칵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세무서 직원이었고, 어머니는 극장 매표소 직원이었다. 그리하여 생후 2개월부터 어머니가 일하는 극장에서 지낼 수 밖에 없었기에 어릴 때부터 영화를 무료로 관람하며 자라날 수 있었다. 그에게는 쌍둥이 동생이 둘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어릴적에 원인모를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막대한 병원비로 인해 집안형편이 어려워져 열 다섯살부터 막노동, 배달부, 식당 종업원, 마트 청소원 등등의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었다고 한다.어릴 때는 홍콩 단거리 육상선수로 뛰어서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할 정도로 운동신경이 뛰어났지만, 신체조건이 좋지 않았고 위에서 서술했듯이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중도에 그만두고 공부로 방향을 틀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현재의 홍콩이공대학의 전신인 홍콩이공학원에 입학하여 건축설계와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막대한 대학등록금에 부모님께 부담주기 싫어 대학생활 내내 열심히 공부하여 장학금을 받았고, 그것도 모자라 패션모델이나 광고모델로 출연하여 생활비를 충당했다 . 이후 친구가 TVB 연기 연습생 선발에 응모하는 것을 보고 본인도 응모하게 되어 1980년 10기로 입사하게 된다. 같이 입학한 동기가 유덕화, 장지량[3], 서금강[4], 오가려[5], 가수로 전직한 황효명 등등이었다. TVB 1981년 드라마 과객(過客) 1화에서 10기생들이 단역으로 잠깐 보이는데 대사는 없다. 동기인 대지위[6]는 하모니카를 불러서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동년 드라마인 화봉황과 천왕군영회에도 단역으로 등장한다. 특히 천왕군영회에서는 주윤발의 부하로 유덕화랑 같이 등장하는데 대사는 없다.[7]
이 기수들 중에서 양가휘는 유덕화와 함께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하지만 1년도 안되어 연습생 규정을 어겨서[8]퇴출되었고, 이때 스스로 의상을 디자인하며 친구들과 여성 모델 리디엔과 함께 'La Bouche'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편집장, 기자, 취재를 모두 하는 일인 다역을 하게 된다.
* TVB 드라마 강인(强人,1978년 작품) 9회 35분 45초에 등장하는데,훈련반 이전에 아르바이트로 출연했다고 야후 홍콩 위키에 적혀 있다.
* TVB 드라마 무쌍보(無雙譜,1981년 작품) 10회 7분 45초에 유덕화랑 같이 말타고 등장한다.
3. 데뷔 후
잡지사를 경영할 때 홍콩 영화계의 유명 감독인 이한상의 딸인 (당시 무명 모델이었던) 이전랑을 표지인물로 쓰게 되었다. 이 인연으로 양가휘와 이전랑은 이후 죽 친구로 지내며, 이전랑의 아버지 이한상 감독과 인연을 트게 되었다. 이한상은 당시 중국 베이징에서 <화소원명원>을 촬영하고 있었고, 함풍제[9] 역에 맞는 인물로 약간 우울한 기질이 보이는 양가휘를 택한 것이다. 이때만 해도 양가휘는 보통화를 전혀 못해서 대륙배우들과 대사 합을 맞출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서태후 역을 맡은 대륙배우 유효경[10]이 연기를 하면서 특정 동작을 정해서 양가휘의 다음 대사가 나올 타이밍을 알려줘야 할 정도. 이어 동시에 출연했던 <수렴청정>에서 열연하여 26세가 되던 1984년 제3회 금상장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며 이는 2023년 현재에도 역대 최연소, 유일한 20대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기록중이다.하지만 당시만 해도 양안관계는 한국의 남북관계 못지 않게 냉전적이어서, 양가휘는 금상장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홍콩영화계의 주목을 받자 마자 곧바로 큰 곤경에 처하게 된다. 중국과의 합작영화에 출연한데다 영화를 중국 에서 촬영했기 때문에, 대만에서 그의 출연작에 대한 수입 금지령을 먹였고, 당시만 해도 홍콩영화계의 최대 고객이었던 대만의 눈치를 본 홍콩영화계는 그를 그 어떤 작품에도 출연시키지 않는 등 중국과 활동을 병행하던 홍콩 연예인들 중에서 그가 첫 타깃이 되고야 말았다.[11] 그 때문에 그는 1년 반 동안 생계를 위해 홍콩 외곽에서 액세서리를 파는 가판노점상을 할 정도로 힘들게 살았다. 이때 RTHK방송국 작가였던 강가년이 어렵게 사는 그를 찾아와 라디오 드라마의 단역으로 캐스팅을 해주었고, 얼마 후 그녀는 그를 영화 단역으로 출연시켜 영화판에 남게 해주었는데, 이 인연으로 결혼에 이르게 된다.
1987년 대만 계엄령이 해제된 후 양가휘에 대한 규제도 풀렸고 그의 영화 커리어도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12] 1990년에 개봉한 '애재별향적계절'로 27회 금마장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연기력도 인정받았다. 당시 홍콩 영화가 정점기였기에 그는 당장 주연 혹은 주조연급을 맡게 되었고 영어 연기가 된 덕에 1991년 프랑스의 장 자끄 아노 감독의 연인 에서 프랑스인 소녀와 사귀는 재벌 화교 역을 맡아 영화가 그해 프랑스 흥행기록을 갈아치우는 등 세계적인 인기를 얻기도 했으며 1992년에는 '연인'과 '완령옥'을 포함하여 제12회 금상장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92 흑장미 대 흑장미'[13], '신 용문객잔'이 모두 흥행에 성공하여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한다. 게다가 서극 감독과 엄호 감독이 연출하고 엄호 감독과 함께 각본에 참여한 영화 '기왕(棋王)'에서 절정의 연기력을 선보였다. 다음해 출연한 영화들이 대부분 코믹영화로 대표적으로 동성서취, '추남자', '정전자2', '대소비도'가 있는데 특히 '동성서취'와 '추남자'에서 제대로 된 코믹연기를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홍콩 톱배우들이 그랬듯이 1년에 10편 이상의 다작 출연으로 코믹한 이미지 소모와 건강 문제와 더불어 본인 스스로 연기력 한계를 느껴 1995년에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육아와 가정생활에만 매진한다. [14]이 시기 한국에는 1992년 '연인'이 개봉하여 흥행에 성공을 거두면서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렸고, 그해 영화 '신용문객잔' 홍보차 한국에 처음 방문했다.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 홍콩영화가 몰락했어도 다른 배우들과는 달리 홍콩을 떠나지 않고[15] 계속 홍콩 영화에 출연했다. 이 시기에 미남배우의 이미지[16]를 지우고 서서히 자기 자신을 연기하기 시작하면서 이미지도 바꾸게 된다. 그 시작이 1997년에 개봉한 영화 '흑금' 인데, 대만의 국회의원이 되기위해 물불 안가리는 조폭으로 등장한다.[17] 또한 전성기처럼 과도한 겹치기 출연은 하지 않고 배역 비중을 떠나 1년에 2~3편에 출연하거나 좋은 작품이 아니라면 거액의 출연료를 제시해도 출연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필모그래피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2000년 부터 홍콩영화의 침체로 인해 제작편수가 줄어들자 한동안 대륙에서 제작하는 영화와 대만영화에도 출연하면서 운신의 폭을 넓혔다. 2004년에 개봉한 '쓰리 몬스터-만두'에서 젊음을 위해 물불 안가리는 남자역할과 2007년에 개봉한 '로스트 인 베이징'에서 비정한 안마시술소 사장 역할로 선보일때 상당수 관객들이 '저 사람이 한때 만인의 연인이었던 배우 맞느냐?'는 반응을 보일정도로 큰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다. 2006년 흑사회로 13년만에 홍콩 금상장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으며, 2012년 콜드 워 로 금상장 영화제 네 번째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역대 두번째 최다 금상장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등극한다. [18] 60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 주연배우로 왕성한 연기활동을 하고 있다. 이제는 홍콩영화계의 베테랑배우가 되었다.
홍콩 구룡(까울룽)의 스타의 거리(Avenue of Stars)에 이름과 손바닥이 새겨져 있는 배우 중 한 명이다.
4. 출연작
<rowcolor=#ffffff> 연도 | 작품 |
1983 | 수렴청정,화소원명원 |
1984 | 설아 |
1986 | 화룡 |
1988 | 천년귀사, 춘추다실 |
1989 | 천라지망, 삼랑기안, 영웅본색 3 |
1990 | 애재별향적계절[19], 춘추다실, 황가여장, 화소도 |
1991 | 재숙:횡소천군, 성시연가, 북경예스마담, 기왕, 에어리언 와이프, 신탐마여룡, 변호지존, 하일군재래, 대료광창룽 |
1992 | 연인, 92 흑장미 대 흑장미[20], 완령옥, 신용문객잔, 황비홍소전 |
1993 | 신난형난제, 용등재패, 추남자, 흑표천하, 정전자2, 대소비도, 협성2, 천이적월광, 아이니 아이워[21], 동성서취, 신용도성[22] |
1994 | 금수전정, 동사서독, 자매정심, 도신2, 도협3, 연년유금일, 대부지가 |
1995 | 남경적기독, 광야생사, 외전혜옥란 |
1996 | 인약황혼 |
1997 | 흑금, 충상구충천 |
1999 | 천상인간 |
2000 | 성월동화2, 나비효과, 강호고급 |
2001 | 궁사 |
2002 | 더블비전, 주유의 여름 |
2003 | 절종철금강 |
2004 | 은신협, 유도용호방, 쓰리-몬스터, 화도대전, 203040, 대장부 |
2005 | 장한가, 아수, 신화: 진시황릉의 비밀, 흑사회 |
2007 | 로스트 인 베이징, 드러머, 천공의 눈[23], 심상사성 |
2009 | 8인:최후의 결사단, 금전제국 |
2010 | 적인걸:측천무후의 비밀, 이소룡 전기 |
2011 | 아이러브 홍콩 |
2012 | 콜드 워, 타이치2 히어로 |
2014 | 타이거 마운틴 |
2015 | 빙하:살인의 추억 |
2016 | 코드네임:콜드 워2 |
2019 | 심야식당:식도락, 추룡2:패왕 |
2025 | 사조영웅전 : 협지대자 |
5. 디스코그래피
* 1996년 誘惑我一輩子 (록레코드 발매)
6. 여담
- 1989년 중국의 천안문 6.4 항쟁의 폭압적인 진압에 분노하여 자신은 홍콩을 절대 떠나지 않고[24] 민주주의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밝혔다. 30년 후에는 정치적 입장이 바뀌어 성룡, 임달화, 알란 탐 등과 함께 2019년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에서 홍콩 정부(즉 중국측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래서 일부 영화팬들은 그의 행보에 실망하기도 한다. 다만 1950년생 이전 세대의 홍콩인들은 영국이 방관하는 가운데 홍콩 사회가 삼합회에 좌지우지되던 60-70년대를 겪었고, 본인도 양안관계로 인해 연기활동을 중단 한 적도 있었던데다 화소도에도 설명되어있듯이 삼합회의 협박으로 가족들이 갇혀지내고 자신도 끌려다니면서 영화 촬영을 해야했던 끔찍한 경험이 있었던지라, 아무래도 삼합회가 마음대로 설치지 못하도록 홍콩을 통제하는 중국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배우가 굳이 정치적인 견해를 밝혀야할 의무는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25]
- 지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술고래라고 한다. 음주운전으로 여러 번 교통사고를 냈다. 구류형을 살기도 하고 운전면허 박탈 및 10,000 홍콩 달러의 벌금을 물었다.
- 대만의 규제를 받아 영화 출연 기피인물이 되어 노점상을 할 정도로 어려웠던 시절 자신을 캐스팅해주었던 프로듀서 강가년과 1987년 결혼해서 쌍둥이를 두고 있다. 스캔들이나 이혼이 많은 홍콩영화계에서 별다른 추문이나 스캔들이 없어서 모범적인 부부로 알려져 있다. # 그나마 가장 유명한 스캔들이 장만옥과의 스캔들이었는데, 당시 양가휘 부부와 장만옥이 함께 식사중이던것을 기레기들이 악의적으로 사진을 편집하여 스캔들을 만들어 낸 것. 하지만 그의 부인과 장만옥은 가장 친한 친구 관계다. 1992년 아내 강가년이 쌍둥이 딸을 낳은 이후로 몸이 급격히 나빠져 한동안 약을 복용했는데 그 부작용으로 외모가 변하게 되었다. 이에 기레기들이 '강가년은 양가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대놓고 기사화함과 동시에 당시 영화 '신용문객잔'에 함께 출연중이던 장만옥과 억지로 엮기도 했다.
- 연예계 가장 절친한 친구로 장국영,장만옥,구숙정,장학우, 매염방을 꼽았다. 차마 말하지 못할 비밀도 서로 공유할 정도로 절친하다고 한다. 장만옥과는 1987년부터 오랜 친구로 지내오고 있으며, 장국영과는 아내 강가년과 함께 어울릴 정도로 절친이기도 했는데, 특히 장국영이 세상을 떠날 때 믿을 수 없다는 심정을 밝히기도 했고, 생명의 가치는 길고 짧음에 있지 않고 정신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가버렸지만 한은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추모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26] 얼마 후 매염방이 세상을 떠났을때 대사를 제대로 외우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우울증에 걸리기도 했었다.[27]
- 이전랑이 결혼할 때 남사친 양가휘에게 결혼식에 꼭 참석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결혼식 때 베이징에 체류하고 있었던지라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28]
- 대학교를 졸업한 고학력자다.[29] 고학력인 만큼 다방면에서 배웠기 때문에 영어 연기도 가능하다. 잡지 편집장을 역임했던 만큼 여러 저서를 펴낼 정도로 출중한 필력을 가지고 있다.
- 같은 중화권 배우인 양조위와 영어 이름이 Tony Leung으로 같다.[30] 동사서독, 화양연화, 중경삼림으로 잘 알려진 왕가위 감독과 이름이 비슷해 헷갈리기도 한다. 같은 홍콩 배우인 장가휘와 성만 다를 뿐, 이름의 한자가 같아서 헷갈리는 경우도 많다. 참고로 원어인 광둥어 발음으로는 각각 렁가파이(양가휘), 렁치우와이(양조위), 웡가와이(왕가위)로 그다지 비슷하지는 않다. 참고로 양조위와는 은행풍운, 동사서독, 신 난형난제, 아이니 아이워 등 에서 같이 연기했다.
-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연인에 캐스팅 된 배경이있는데, 그 전에 그는 마지막 황제의 주인공 부의 역할을 제안 받았으나 그 작품이 자신을 연기자의 길로 안내한 이한상과 원작자의 저작권 문제가 일어나 스승의 은혜를 저버릴수 없다고 출연을 거절했다. 감독은 그의 거절을 아쉬워했지만 자신의 욕심이 아닌 스승의 은혜를 택한 그의 인성이 깊게 남았다고 한다. 몇 년 후, '연인'의 장자크 아노 감독이 중국인 남자 역할에 적합한 배우를[31] 찾아 아시아 전역을 돌아다녔으나 결국 적임자를 찾지 못하고 돌아가려고 하다가 '마지막 황제'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주선으로 수차례의 테스트 끝에 캐스팅 되었다. 당시 그는 유가령, 고려홍 등과 함께 '황가여장'이라는 영화에 출연중이었는데, 장자크 아노 감독이 촬영현장에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 영화가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32], 홍콩 내 영화배우로써의 위상은 높아졌지만 촬영 당시 제인마치 대역배우와 실제 삽입까지 했기에* 영화 출연당시 이미 결혼한 유부남이었던지라 제인 마치와의 정사씬을 촬영할때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고 한다.] 이후에 출연제의가 들어온 상당수 작품들이 성애물[33]였던지라 양가휘도 한동안 적지 않은 마음고생을 했다. 그래서 '연인' 촬영이 끝나고 본국으로 돌아와 출연한 작품들이 이미지 탈피를 위해 출연한 코믹물이 많았고 유명세가 커진만큼 작품선정에 신중을 기하기도 했다고. 영화의 이미지 때문에 차기작을 포함한 연기생활에 큰 지장을 받은 제인 마치와는 정 반대로 '연인' 출연 이전에 금마장과 금상장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을 정도로 홍콩영화계에서 어느정도 위치가 있었기에 큰 후폭풍은 겪지 않은게 다행인 듯.
- 영화 화소도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연인' 촬영 당시 베트남 군인들을 동원한 조폭들에게 끌려다니며 촬영을 했었어야 했다. 하루는 홍콩공항에 도착하여 가족들에게 전화하며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었다고... 배우 생활을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고 토크쇼에서 밝혔다.[34]
- 한국에 알려진 작품들이
문제작동성서취를 포함한 코믹액션들이 대부분이라, 그를 코믹전문 배우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는 정극 연기에서는 최적화 된 연기력을 선보인다. 위에서 언급한 '애재별향적계절'을 포함하여 '하일군재래', '완령옥', '장한가', '주유의 여름'과 비록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여배우 토미타 야스코와 함께 공연한 '난징의 그리스도'[35]등등에서는 섬세한 멜로 연기를, 그에게 금상장 남우주연상의 영광을 안겨준 흑사회, 콜드 워를 비롯하여 '흑금', '로스트 인 베이징'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악역 연기를 선보인다. 그만큼 장르를 넘나들며 폭넓은 연기력을 선보이다 보니 수상내역에서도 겹치는 장르가 없을 정도로 중화권 연기파 배우들중에서도 수위에 꼽힌다. 참고로 2020년대 현재 대표적인 연기파 배우로는 그를 포함하여 황추생, 양조위, 오진우, 유청운을 꼽는다.
- 영화 '연인'이 프랑스를 포함하여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으면서 헐리우드에서도 출연제의가 빗발쳤으나 오랜 고민 끝에 헐리우드에 진출하지 않고 홍콩을 포함한 중화권에 남아 연기생활을 계속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본인도 이 영화가 자신의 연기인생에서 가장 큰 인기와 명예를 가져다 준 작품이라는것을 인정했지만 막상 배우로써 자신에게 터닝포인트가 된 작품은 자신의 첫 코미디 영화이자 금상장 두번째 남우주연상의 영광을 안겨준 1992년 작 '92 흑장미 대 흑장미'로 꼽았다. 당시 '주성치 식 코미디 영화'가 홍콩 박스오피스 기록을 갈아치울 정도로 홍콩영화계에서 주류로 자리잡을정도로 막강했는데, '흑장미...'는 정 반대로 컬트코미디인데다 주연진이 약한탓에 개봉 전에도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관객들의 입소문으로 당시 홍콩에서 유래없을 정도로 장기상영까지 갈 정도로 대박 난 영화이기도 하다.[36] 특히 60년대 인기를 얻은 실존인물 '여기' 라는 인물을 양가휘 본인이 해석한 캐릭터로 승화시켜 흥행성공에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캐릭터 분석을 어떻게 해야 작품이 제대로 나온다는걸 깨달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 1990년대 전성기 시절 몸값이 비싼 배우였었지만, 본인 스스로 배역 비중을 가리지 않기 시작하면서 좋은 작품이 있는데 제작비가 부족한 경우가 생기면 출연료를 받지 않거나 아주 적게 받는 등 영화계에 도움을 주는 배우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유덕화, 황추생, 유청운, 장가휘, 임가동, 임달화 등도 마찬가지다.
- 2023년, 제트기의 승무원의 그의 인성을 칭찬한 것이 화제가 됐다. 조리실에서도 승무원을 돕고 싶어할 정도라고. #
[1] 병음: 량자후이 광동어: 렁카파이[2]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홍콩영화 장르가 무협 혹은 코미디, 느와르였는데 막상 양가휘는 해당 장르의 출연빈도가 다른 홍콩배우들 보단 적다. 게다가 당시 홍콩배우들이 앞다투어 신작 프로모션을 위해 매번 방한했지만 양가휘는 정 반대로 방한 횟수가 한국에서 홍콩영화가 전성기를 맞이한 시기에는 딱 한번일 정도로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 점이 한국에서 양가휘가 과소평가 받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3] 배우보다는 감독으로 더 유명하다.[4] 옥보단의 호색한 포목상 역, 통칭 워리어 남편(...)으로 한국 관객들에게 알려진 대륙 출신 배우. 도신2에서 중국 쪽 공안 역인데 양가휘도 이 영화에 출연했다.[5] 이 배우는 주로 에로배우로 활동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옥보단.[6] 사조영웅전 1983 툴루이 역, 녹정기 1984 정극상 역, 의천도룡기 1986 은리정 역[7] 이에 관한 일화가 있는데, 유덕화와 캐릭터 연구를 밤새도록 했지만 다음날 감독에게 40자 넘는 욕을 듣고 상심했다고 한다.[8] 재계약 조건이 터무니 없는 급료라 양가휘가 이에 대항하며 계약서를 쓰지 않았고, 방송국에서는 담배를 피었다는 구실로 퇴출했다고 알려졌다.[9] 그런데 1996년에 구숙정과 출연한 외전혜옥란에서는 함풍제의 동생인 공친왕 역을 한다. 함풍제는 우영광이 맡았다.[10] 당시 중국은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고, 대륙배우들은 쫄쫄 굶으며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배고팠던 유효경이 외국인 특별배급을 받던 양가휘의 배급표를 훔쳐서 배불리 먹었다는 눈물겨운 일화가 있다.# 하지만 중국이 개혁개방되면서 연예산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유효경은 자본주의에 재빨리 적응하여 여러 사업으로 떼돈을 벌어서 20여년만에 포브스에 실릴만큼 수천억대의 거부가 되었다. 그게 지나쳐서 2000년대 초반 탈세로 구속되어 3년 징역형을 받았다가 보석된 흑역사가 있다.#[11] 1980년대의 양안관계는 이념문제 때문에 악화되었지만 2020년대 현재 양안관계는 대만독립을 두고 문제되고 있다. 그것과는 별개로 대만 연예인들이 대륙에서 활동하는 것은 아무 문제 없다. 대만, 즉 중화민국은 1990년대 중국국민당일당독재를 벗어나 민주국가가 되었기 때문에, 중국활동에 대한 판단을 연예인 개인의 자유에 맡기는 것. 다만 대륙배우들은 2018년에 일어난 금마장시상식에서의 스캔들을 기점으로 대만활동을 기피하고 있다.[12] 영웅본색으로 아시아의 톱스타가 된 주윤발이 직접 대만 관료를 만찬에서 만나, 양가휘는 자신의 동생(小弟)이며 같은 회사 동료(同公司)라고 말하며 설득했다고 한다. 이후 주윤발과 양가휘는 도신2, 감옥풍운, 영웅본색3에 함께 출연한다.[13] 이 영화를 시작으로 유진위 감독과는 '동성서취'로 인연을 맺는다. 참고로 이 영화의 감독이 '진선지'로 표기되었으나, 실은 유진위 감독이 자신을 숨기기위해 의상담당 스태프 이름을 감독으로 표기한 것이다.[14] 1991년부터 1993년까지 3년간 40편 가까운 영화에 출연했다. '홍콩영화' 항목에도 있듯이 당시나 지금이나 한 편을 계약하면 최대 5~6편을 묶어서 출연할수밖에 없는 시기였기에 함께 출연하는 영화 줄거리는 둘째치고 배역 연구 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양가휘 같이 연기 잘 하는 배우조차 형편없는 연기를 보여주는 작품도 많다. 하지만 이러한 캐스팅을 거부하면 캐스팅이 영원히 되지 않는다는 큰 약점이 있기에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출연할 수 밖에 없다. 겹치기 출연으로 자신이 소모품이라고 생각한 절친 장만옥이나 본인도 이런 각오를 하고 활동을 중단했다.[15] 1993년에 영국 영주권을 얻었지만 1996년 영주권을 포기했다.[16] 정확히 말하자면 청초한 미남 스타일에 망가지는 코믹한 이미지[17] 배역 연구를 위해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10만자 이상 쓰기도 했으며, 대만의 정치현실을 비판하고 수위가 잔인하다보니 본토에서는 상영금지되었다.[18] 참고로 현재까지 역대 금상장 남우주연상 최대수상자는 양조위.[19] 혹은 '애재타향'으로 불리는 영화.[20] 혹은 '블랙로즈'로도 불리는 영화. 홍콩에서 양가휘의 코믹연기가 일품이라는 평을 받는 작품이다.[21] 한국에서는 99년 지각개봉[22] 장미 대 장미-아이러브유. '동성서취'의 유진위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23] 한국에서 2013년에 '감시자들'로 리메이크 된다.[24] 당시 홍콩의 부유층과 일부 배우들은 홍콩을 떠나거나 이민이 쉬운 영연방쪽으로 국적을 바꾸고 있었다.[25] 유명인의 정치적 발언이나 견해는 개인 생각이므로 좋다, 나쁘다고 할순 없다. 게다가 삼합회를 포함한 조폭들의 난입으로 한동안 홍콩사회가 혼란을 겪었던지라 어느정도 사회안정화를 바라는 기성세대들도 많다. 하지만 양가휘 같이 홍콩내에서 권위를 가진 유명인이 대놓고 시위현장에 찍힌것만으로도 중국이 홍콩 민주화를 저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을 준 건 부인할 수 없다.[26] 生命的價值不在於長短,而在於是否精彩。哥哥此去可以無憾[27] 이는 작은 토니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28] 한국에서는 양가휘와 이전랑과 사귀었다는 설이 있는데 사실이 아닌 듯 하다.[29] 당시 양가휘가 활동했던 홍콩은 저학력자가 많았는데, 동시대의 탑스타인 주윤발은 중학교 중퇴, 성룡은 최종학력이 중학교 졸업이고 영어 이름이 같은 양조위도 중졸이며, 홍콩의 학제가 한국과 달라서 한국으로 치면 각각 고등학교 중퇴나 고졸 정도의 학력이라 볼 수 있다.[30] 양조위는 Tony Leung Chiu Wai, 양가휘는 Tony Leung Ka-fai이다. 두 배우를 구별하고자 양가휘는 Big Tony, 양조위는 Little Tony로 부르기도 한다.[31] 원래 존론이 하기로 되어있었으나 다른 작품에 출연하게 되면서 포기했다.[32] 홍콩에서는 3급판 영화임에도 홍콩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등 대박을 기록했고, 한국에서도 1992년 여름시장에서 선전했다.[33] 1995년 구숙정과 출연한 '외전혜옥란'이 대표적이다.[34] 다만 '화소도'라고 직접 밝히진 않았다.[35] 유튜브에서 '南京的基督'으로 검색하면 볼수있다. 토미타 야스코는 이 영화로 동경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36] 홍콩은 한국과는 정 반대로 '스크린 쿼터'같은 보호장치도 없기에 인기가 없으면 1주일 이내로 모든 극장에서 간판을 내려버린다. 그런 상황에서 '흑장미...'는 개봉 첫주에 하루 10명을 넘지 않을정도로 성적이 저조했었는데, 1주차 막바지에 관객들의 입소문으로 관객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