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30 11:53:30

연인(1992년 영화)

연인 (1992)
The Lover | L'Amant | 情人
파일:연인 재개봉 포스터.jpg
{{{#!wiki style="margin: -5px -9px"
<colbgcolor=#ffffff,#010101><colcolor=#900020,#dddddd> 장르 드라마
감독 장자크 아노
각본 장자크 아노
제라르 브라슈
원작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제작 끌로드 베리
출연 제인 마치
양가휘
프레데릭 메이닌저
아르노 지오바니네티
멜빌 푸포
리사 폴크너 외
촬영 로베르 프레스
편집 노엘 브와슨
음악 가브리엘 야레드
제작사 필름 A2
렌 프로덕션
버릴 프로덕션
수입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팝 엔터테인먼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주식회사 풍경소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삼호필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엔케이컨텐츠[재개봉]
배급사 파일:프랑스 국기.svg AMLF
파일:영국 국기.svg 길드 필름디스트러뷰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팝 엔터테인먼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엔케이컨텐츠[재개봉]
개봉일 파일:프랑스 국기.svg 1992년 1월 22일
파일:영국 국기.svg 1992년 6월 19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2년 6월 20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4년 2월 20일 [리마스터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6년 8월 24일 [4k]
화면비 ○○
상영 타입 2D
상영 시간 115분 (1시간 55분)
제작비 ○○
월드 박스오피스 $5,013,090
북미 박스오피스 $4,899,194 출처
대한민국 총 관객 수 337,233명[5]
스트리밍
[[넷플릭스|
NETFLIX
]]




상영 등급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파일:영등위_18세이상_2021.svg 청소년 관람불가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R등급 로고.svg Restricted

1. 개요2. 포스터3. 예고편4. 시놉시스5. 등장인물6. 줄거리7. 제작 비화8. 평가9. 흥행10.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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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1992년장자크 아노 감독이 연출한 프랑스, 영국이 합작하여 만든 작품이다.

장자크 아노 감독은 '불을 찾아서', '장미의 이름', '베어'[6], '티벳에서의 7년' 등으로 작품성, 흥행성을 두루 갖춘 프랑스의 대표 감독이며, 제인 마치[7]양가휘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었다.[8] 제인 마치와 양가휘는 이를 계기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배우 잔느 모로가 내레이션을 맡았다.

2. 포스터

파일:The Lover Poster.jpg
파일:연인 재개봉 무삭제 버전 포스터.jpg
개봉 포스터[9] 무삭제 재개봉 포스터[10]

3.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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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초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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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스터링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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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v(78103736)]
메인 예고편

4. 시놉시스

잊을 수 없는 첫 사랑, 첫 경험의 순간

가난한 10대 프랑스 소녀, 부유한 남자를 허락하고
처음으로 육체적 쾌락을 경험하게 된다.
불우한 가정 환경과 자신에 대한 혐오가 더해 갈수록
소녀는 욕망에 빠져들고 격정적인 관능에 몰입한다.
욕정일 뿐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평생 잊을 수 없는 운명으로 남게 되는데….

욕망으로 남기에는 아름다운 세기의 로맨스,
마르그리뜨 뒤라스 소설 <연인>이 스크린으로 다시 돌아온다!

5. 등장인물

  • 제인 마치 - 어린 소녀 역
  • 양가휘 - 중국 청년 역
  • 프레데릭 메이닌저 - 어머니 역
  • 아르노 지오바니네티 - 오빠 역
  • 멜빌 푸포 - 남동생 역
  • 리사 폴크너 - 헬렌 라고넬 역
  • 시엠 맹 - 중국 청년의 아버지 역
  • 필립 르 당 - 프랑스어 교사 역

6.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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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노년기에 접어든 소녀가 파리에서 자서전을 집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1920년대 후반의 베트남, 소녀는 방학을 보내고 기숙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사이공으로 가는 배를 탄다. 때마침 검은색 차 한 대가 비집고 들어오는데 그 안에 한 동양인 남자가 운전기사와 함께 탑승하고 있었다. 그는 배 난간에 기대 서 있는 소녀를 보고 차에서 내려 담배를 건네며 말을 붙여본다.

소녀는 기숙학교에 바래다 주겠다는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여 함께 차 안에서 이야기도 나눈다. 남자는 중국인 대부호의 아들[11]이라고 했고 오랫동안 파리에서 경영학 수업을 받다가 부친의 명령[12]으로 베트남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이후 그들은 사랑에 빠졌고[13] 1년여 간 육체 관계를 맺으며 '연인'이 된다.[14]

그러나 남자는 소녀의 가족들[15]과의 만남 이후 소녀에게 차츰 마음이 멀어져가기 시작했고, 집안에서 정해진 여인과 결혼하지 않으면 재산을 한푼도 물려줄 수 없다는 부친의 강력한 반대로 육체적인 관계도 외면하며 자신의 현실을[16]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연인 관계를 정리한다. 그리고 소녀는 큰 오빠가 프랑스로 돌아간지 얼마 후 역시 프랑스로 돌아간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우연히 들려오던 피아노 소리(쇼팽의 '왈츠 10번')에 그녀는 비로소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눈물을 흘린다.

다시 첫장면으로 돌아와, 어느덧 소녀는 백발의 노인이 된 인기 작가가 되었다. 어느 날 중국 남자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떨리는 목소리로 '예전부터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며, 앞으로도 사랑할 것이다.'고 고백이 들려온다. 영화는 베트남의 메콩강 한가운데에 배가 떠다니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7. 제작 비화

남자 주인공은 기획 단계부터 마지막 황제존 론을 고려하여 그가 확정되는가 싶었는데[17] 그가 다른 미국 영화 출연을 결정하여 원점으로 돌아갔고, 장자크 아노 감독은 헐리우드에서 활약하는 아시아 계열의 남자배우 중 캐릭터에 어울릴만한 배우들을 수소문했으나 그들 대부분은 주인공이 아닌 무술 하는 우스운 역할 혹은 식당 종업원등등 주로 못생긴 캐릭터나 단역으로 나온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고, 중국, 일본, 대만, 홍콩 등등 아시아 여러 국가들을 방문하여 적임자를 모색했지만 가장 큰 문제가 발생했으니... 바로 영어로 대사를 소화할 능력이 대부분 없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미국에서 태어난 배우들 중에서 이미지가 비슷한 배우들도 오디션에 지원했으나, 그들은 애당초 영화 속 이미지와 거리가 아주 멀었다. 장자크 아노 감독이 생각하는 중국 남자는 키가 크고 우아함을 지닌 남자여야 했는데, 그런 조건을 가진 동양 배우들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면 영어는 잘 해도 외모가 중국 남자 캐릭터와 맞지 않다거나. 그 사이에 여자 주인공은 영국에서 미소녀 모델로 활약하던 제인 마치가 캐스팅됐는데 'Just Seventeen'이란 잡지 커버 사진에 나온 제인 마치를 본 장자크 아노 감독의 아내의 추천이 크게 작용했다.

결국 제작을 포기할까 망설이던 감독은 마지막 수소문지인 홍콩을 떠나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고, 캐스팅에 난항을 겪는다는 소식을 접한 마지막 황제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이[18] '기억에 남는 배우가 한 명 있는데, 그 배우를 만나보러 다시 홍콩으로 가 보는 게 어때?'라며 한 배우를 추천했는데, '그 배우'가 바로 양가휘.[19] 당시 양가휘는 홍콩에서 '황가여장'이라는 영화를 촬영 중이었고, 그 영화 촬영 현장에 장자크 아노 감독이 직접 찾아와 출연을 제의했지만 오랜 기간 동안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유는 "내가 영어 실력이 많이 모자란데, 어설픈 영어 대사 처리로 영화를 망칠까봐 두려워 만날 수 없었다." 라고...

이미 '황가여장' 제작진들에게 받은 그의 프로필 사진과 그가 그동안 출연한 작품들을 보고 중국인 남자 배역에 적임자라고 확신한 감독과 조연출을 맡은 패트리샤 파오는 그를 직접 보자마자 배역과 일치하는 느낌이 단번에 들어서 이 기회에 반드시 캐스팅을 하겠다는 각오로[20] 아예 시놉시스까지 가져와서 그를 설득했다. 만약 그가 거절하면 영화 제작을 엎을 각오까지 했다고.... 오랜 고민 끝에 양가휘는 오디션을 보겠다고 답변했으며, 직접 제인 마치와 연기하면서 오디션을 본 끝에 출연이 확정됐다.[21]

그러나 촬영 과정이 그다지 순탄치 만은 않았는데, 1980~90년대의 홍콩 배우들이 그랬듯이 양가휘도 조폭들이 제작하는 영화에 출연하라는 협박을 받았고, 촬영 초반에는 필리핀과 대만으로 조폭들에게 끌려다녔었다. 또한 주 촬영지인 베트남에서는 베드신 촬영이 금지라서 해당 장면은 프랑스에서 촬영했다. 영화 제작에 들어가기 1년 전부터 감독은 베트남 현지에 머물면서 1920년대의 베트남을 재현했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자동차는 미국에서 많은 돈을 들여 구입했다. 후반부 중국 남자의 결혼식 장면에서는 300여 명의 베트남 현지인들을 직접 동원했다.

양가휘는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던 상태에서 중국인 남자 배역을 자신이 연구하여 캐릭터를 맞췄다고 한다. 원작에서의 중국 남자는 유약하고 깡마른 체구였지만, 당시 양가휘는 체격이 건장해서 원작 속 중국 남자 이미지와는 거리가 다소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픈 사랑은 막상 이룰 수 없는 현실'을[22] 섬세한 연기력으로 재해석했다. 촬영내내 장자크 아노 감독은 그에게 "당신은 아시아의 존엄성을 가진 사람이다" 라고 캐릭터를 연기할 방향을 잡아주었다.

8. 평가

메콩 강의 유려한 시각화가 보편적으로 호평을 받은 반면,[23] 내밀하고 섬세한 성애 묘사는 평단으로부터 엇갈린 뉘앙스의 평을 받아들었다. 그 비중과 노골성이 지나쳐서 영화를 헐리우드 성인 멜로처럼 만들어 버렸다는 악평과 근래 보기 힘든 최고의 성애 신이었다는 찬사까지 받는다.

그래서 당시에 서구권에서는 평가가 영 좋지 않았지만, 동양권에서는 정반대로 평가가 아주 좋았다. 영화 속에서 서양인들이 동양인을 어떻게 취급을 하는지에 대한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에서 온갖 수모를 당하는 중국 남자에게 동정심을 느껴서 내용에 몰입이 된다는 평가도 많다. 반대로 프랑스 소녀가 인종의 간극을 넘어 중국 남자를 사랑하고, 중국 남자의 도움을 얻어서 프랑스 식구가 살아갈 방도를 마련하는 내용은 아시아권에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을 것이다.

물론, 시간이 많이 흐른 현재에는 동서양 구분 없이 평가가 아주 좋다. 어쨌거나 만장일치의 호연을 선보인 제인 마치19세 때 출연한 이 영화를 통해 일약 세계적인 청춘 스타로 올라섰지만, 이후 브루스 윌리스와 함께 출연한 '컬러 오브 더 나이트' 정도를 제외하면 변변한 작품을 남기지 못하면서 세계 영화계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고 말았고 2020년대 현재는 거의 배우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영국과 헐리우드에서 어린 나이에 베드씬을 촬영 한 것 때문에 '악녀'라고 부르는 가십에 시달려 결국 한동안 정신과 치료와 요양 생활을 했었어야 했다.

상대 역을 맡은 양가휘는 원작과는 전혀 다른 섹시한 이미지를 선보임과 더불어 본래 자신의 특기인 섬세한 멜로 연기로 기존의 서양인들에게 익숙한 동양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깼다. 덕분에 이소룡, 성룡 등으로 인해 쿵푸나 우스운 이미지로 국한되던 아시아 배우에 대한 인식이 이 영화를 계기로 '아시아 배우들 중 멜로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 서양 배우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섹시한 몸으로 연기할 수 있는 배우도 있다'는 것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같은 아시아권에서는 이 영화를 단순한 에로 영화로 취급했고 특히 한국에서는 이미 자국에서 배우 입지를 다진 양가휘를 그냥 에로 배우로 취급했다. '마지막 황제'에 이어 서구권에서 제작한 멜로나 드라마 영화에서 아시아 배우가 타이틀 롤로 나오는 건 30년이 지난 지금도 드문 것을 감안하면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그도 마찬가지로 이 영화 이후 성애물 출연 제의가 갑작스레 많이 들어오는 등, 홍콩에서도 나름 후폭풍을 겪었다. 토크쇼에 의하면 시사회에서 '엉덩이가 너무 예쁘다'는 평을 많이 받았는데, 그게 성적인 표현으로 대놓고 기사화되어 마음고생을 좀 했다고 한다. 그래도 다행히 이미 배우로서 어느 정도 입지를 갖추었던지라 오래 가진 않았다.[24] 다른 배우들이 세계적으로 크게 성공하면 자국 활동에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고, 대외 활동에 적극적인 게 대부분이었지만 오히려 그는 정 반대로 늘 그래왔듯이 미디어 노출은 최소화하고 홍콩 및 중화권에서만 배우 활동에 전념했다.

본인도 노출이 심한 장면을 촬영하면서 마음 고생을 한지라 상대 배우인 제인 마치가 심한 마음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언론 인터뷰는 거의 하지 않았고, 설사 인터뷰를 하더라도 본인이 먼저 거론하지 않거나 단답형으로 넘어가는 등, 상대 배우를 배려했다. 하지만, 이 사정을 알 리 없는 홍콩이나 한국 언론들은 이런 그를 두고 멋대로 태도가 불량한 나쁜 배우라며 많이 깠다. 실제 첫 방한 당시 기자회견장에서 스포츠신문 기자들이 대놓고 '삽입 여부'를 질문하는 바람에 너무 화가 나서 바로 홍콩으로 돌아가려다 참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양가휘 본인도 '연인'이 터닝 포인트가 된 건 맞지만 자신의 출연작들의 한 편일 뿐이고 큰 의미를 두면서까지 다른 작품에 소홀히 하고 싶지 않다고 인터뷰했다. 이후에 출연한 '92 흑장미 대 흑장미'[25]에서 그의 출연 장면이 패러디되기도 했다. 개봉한 지 30년이 넘은 지금도 가장 아름다운 베드신으로 손꼽히는 영화다.

9. 흥행

프랑스에서는 1992년 1월에 개봉하여 300여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그 해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하기도 했었다. 영국을 포함한 유럽 전역에서도 흥행에 성공했고, 아시아에서는 중국을 제외한 대부분 국가에서 개봉하여 흥행에 성공했다. 한국에서는 1992년 6월 20일에 개봉하여, 서울 개봉관 기준 37만 관객으로 당시 여름 시즌에 대박을 거뒀다. 부산에서는 제일극장에서 개봉하여 인기리에 장기 상영되었다. 이후 2014년과 2016년에 재개봉해 전국 1만 6천여 명을 기록했다. 미국을 포함하여 전 세계적으로 대히트하면서 원작 소설도 많이 판매되었다.

10. 여담

  • 당시 한국에서는 양가휘의 필모그래피 이름이 "토니 륭"이라고 번역되고 언론 자료에도 그렇게 배포되었다. 웃기는 것은 당시 수입된 홍콩 영화에서는 분명히 "양가휘"라는 한국식 이름도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영어 영화 번역자들이 홍콩 영화 사정을 잘 몰라서 토니 륭이 곧 양가휘의 영문 이름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는 그 해 가을에 개봉한 '신용문객잔'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이후로는 양가휘로 쓰이고 있다.
  • 이 영화는 중국에서는 상영이 금지됐다. 정작 홍콩이나 마카오, 대만 등등의 중화권 국가에서는 이미 1992년도에 개봉했지만, 엄격한 심의 제도와 '중국인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이는 서양 여성'이라는 인식이 거부감이 들어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중국인들도 알음알음 이 영화를 많이 보고 호평을 보내는 중이다.
  • 장자크아노 감독이 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양가휘를 가리켜 '절제된 천재 배우'라고 평하기도 했다.


[재개봉] [재개봉] [리마스터링] 무삭제 재개봉[4k] 재개봉[5] 1992년 서울관객 수[6] 당시 프랑스 역대 흥행 1위[7] 1973년에 태어난 영국의 혼혈 배우. 어머니가 베트남중국인이라고 한다.[8] 참고로 1992년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소재로 한 프랑스 영화가 여러 편 개봉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베트남 정부가 도이머이 정책을 실시하면서 서구 세계와 교류를 재개함에 따라 프랑스 또한 베트남과 다시 국교를 맺었다. '인도차이나', '디엔비엔푸' 같은 영화들이 대표적으로 전부 베트남 올로케이션으로 찍었다. 참고로 이해는 한국이 중국, 베트남과 공식 수교한 해이기도 하다.[9] 1992년 북미 개봉일 포스터[10] 2016년 개봉일 포스터[11] 모친은 돌아가셨고 부친은 오래 전부터 아편에 찌들었다.[12] 어릴 적부터 정략결혼하기로 집안끼리 약속한 부호의 딸과 결혼하기 위해.[13] 처음부터 섹스가 매개됐고, 나이 차가 많이 났기 때문에 소녀는 사랑이라기보다는 정부 관계(섹스를 해주고 경제적 지원을 받는)로 인식한다는 느낌이 제법 있다.[14] 특히 소녀에게는 첫 경험이었고, 나이 차가 나는 원숙한 남자로 인해 첫 경험과 이후의 섹스가 본인의 성적 호기심과 욕망을 충족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한다.[15] 모친은 크고 아름다운 땅을 가지고 있었으나 사기를 당해 모두 잃고 삶에 대한 의지를 잃은 채 하루하루를 보낸다. 큰 오빠는 아편에 중독되었으며, 남동생도 몸은 멀쩡하지만 마음이 유약해 제구실을 못하는 사람. 하지만 자신들은 모두 프랑스인이자 백인이었기에 중국인 남자가 부호의 아들이어도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멸시한다.[16] 처음엔 이 상황을 부정하고 싶어서 소녀에게 '돈 때문에 좋아한다고 고백하라'고도 하고, 아편을 피우는 등 정신적으로 방황하기도 했다.[17] 동시에 '패왕별희'의 출연 제의도 받았었으나 거절했다.[18] 두 사람은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절친 관계이기도 하다.[19] 참고로 양가휘는 푸이의 인생 후반기를 다룬 '화룡(1986년 홍콩 개봉작)'에서 푸이를 연기한 적이 있었다. 그를 배우의 길로 이끈 이한상 감독이 연출했고,(이한상 감독은 청나라 말기의 상황을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어 했기에 3부로 나뉘어 '화소원명원', '수렴청정', '화룡'을 연출했다. 모두 양가휘가 출연한 작품이었고 앞의 두 편이 홍콩 현지에서도 흥행에 성공한 데다 1984년 제3회 금상장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재를 거둬 마지막 파트인 '화룡'도 개봉하려 했으나, '양안관계'가 심해진 상황에 중국에서 촬영한 영화였기에 양가휘가 대만 정부에 불려가고 홍콩 영화계에서 한동안 퇴출돼 제때 개봉하지 못하다가 2년 후 주윤발의 도움으로 양가휘가 다시 배우 활동을 하게 되면서 뒤늦게 개봉되었다.) 이한상 감독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과 '마지막 황제' 각본을 같이 작업하려 했으나 각자 의견이 엇갈려 결국 빠졌다. 때마침 양가휘가 마지막 황제의 푸이 역을 제안받았지만, 스승의 은혜를 저버릴 수 없다고 하여 끝내 거절했고, 이 배역은 홍콩 배우 존 론에게 돌아갔다. 즉, 본래 연기하기로 했던 영화와 배역이 서로 뒤바뀐 셈. 감독은 그런 양가휘에게 당장은 서운했었지만 그 정도로 스승의 은혜를 쉽게 저버리지 않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20] 이런 식으로 캐스팅된 배우들은 양가휘 외에도 숀 코너리(장미의 이름), 주드 로(에너미 앳 더 게이트), 브래드 피트(티벳에서의 7년)가 있다.[21] 양가휘 항목에도 있듯이 그는 대학 생활 내내 영어로 수업받은지라 어느 정도 영어 실력이 있는 편이었다.[22] 중국인 남자는 부친의 거대한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지만, 오래전부터 집안에서 정해진 정혼자와 정략결혼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캐릭터다.[23] 1993년 아카데미 촬영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24] 당시 양가휘의 출연이 확정됐을 때 홍콩에서 크게 기사화 될 정도였다.[25] 그는 이 영화로 1993년 제12회 금상장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