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의 군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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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북양군벌 사열식에 참여한 북양군벌의 거두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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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의 북양군(北洋軍)에 기반을 둔 중국의 군벌 세력. 중국식 독음으로 베이양군벌이라고 한다.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중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게된 세력으로, 중화민국 북양정부의 주축이었다. 그러나 1916년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이후에 구심점을 잃고 분열하여 안휘군벌, 직계군벌, 봉천군벌로 분화되었다. # 이 세 군벌들이 서로 권력다툼을 벌이며 1926년까지 중국의 향방을 틀어쥐었다.
북양군벌이 분열하고 내분을 겪으면서 중원의 패자가 계속해서 바뀌는 동안 중국국민당의 북벌이 시작되면서 궁지에 몰렸고 1928년 최후의 북양 군벌인 봉천군벌이 동북역치를 통해 중화민국 국민정부에 합류하면서 외견상으로는 소멸되었다.[2] 이로써 중국의 지배자는 북양군벌에서 국민정부로 옮겨갔다.
2. 역사
1916년 순승왕부에서 회의를 마친 위안스카이와 북양군벌의 실력자들 |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청나라 말기의 실세 이홍장(李鴻章)까지 이르지만 실질적인 시초는 위안스카이(袁世凱, 원세개)가 조직한 신군[3] 세력이다.[4] 양무운동과 청일전쟁을 거친 신군 세력이 북양군벌의 중심이었고,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이를 진압하려 했지만 위안스카이와 쑨원의 합의가 이루어짐에 따라 오히려 선통제의 퇴위를 강요하였다.
위안스카이의 독재 권력 강화의 든든한 군사적 뒷받침이 되었으며 위안스카이는 이를 바탕으로 쑹자오런 암살 사건, 선후대차관 사건 등의 전횡을 일삼았다. 이에 맞서 1913년 국민당이 계축전쟁을 일으켰지만 간단히 진압했다. 1914년 중화민국 국회 해산이 단행되었고 1915년에는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통해 황제를 칭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1915년 12월 25일, 운남성에서 량치차오, 차이어, 탕지야오, 리례쥔 등이 호국전쟁을 일으켜 맞섰고 열강이 지지를 철회함에 따라 상당수의 북양군벌들도 위안스카이에게 등을 돌려 제제 취소를 요구하거나 급기야 독립과 위안스카이와의 단절을 선포하였고 충격을 받은 위안스카이는 1916년 3월 23일 제제를 취소하고 6월 6일 사망했다. 이후 대총통 자리는 부총통 리위안훙이 계임했으나 위안스카이라는 구심점을 잃은 북양 군벌은 돤치루이와 펑궈장을 중심으로 분화되었다.
처음에는 국무 총리 겸 육군 총장 돤치루이를 중심으로 하는 환계가 권력을 잡았으나 1916년부터 그의 기세를 우려한 리위안훙이 펑궈장과 연계하여 돤치루이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문제로 부원지쟁을 벌였고 1917년 장훈복벽 이후 돤치루이가 량치차오와 연합하여 국회와 약법 복구를 거부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환계의 권력 확대 수단으로 무리하게 이용하는 등의 행동으로 인해 반감을 샀다. 결국 1917년 쑨원이 탕지야오, 루룽팅 등과 합작하여 1차 호법운동을 전개하자 호법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과정에서 환계는 봉계와 동맹을 맺었으나 쉬수정의 전횡으로 동맹은 결렬되었다. 결국 1920년 봉계와 직계가 동맹을 맺었고 1920년 7월 안직전쟁에서 환계가 패배하면서 패권은 직계와 봉계의 연합이 차지하였다.
이후 직계와 봉계의 사이가 악화되면서 1922년 봉계와 환계가 연합하여 1차 직봉전쟁을 일으켰으나 직계가 다시 승리했다. 하지만 장쭤린이 군의 현대화와 정예 장교 육성을 통한 와신상담을 통해 1924년 2차 직봉전쟁으로 다시 승리. 환계, 봉계, 풍계의 연합이 직계를 패퇴시키고 패권을 차지했다. 하지만 풍계의 지도자 펑위샹과 장쭤린, 돤치루이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1925년 직계 쑨촨팡이 우페이푸와 연합, 손봉전쟁을 일으켰고 장쭤린 산하의 궈쑹링이 반봉사건을 일으켰다. 1926년에는 펑위샹이 옌시산을 침공하면서 직계, 환계, 염계가 연합하여 펑위샹을 공격하는 직봉풍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펑위샹은 패배하여 소련 외유를 떠났고 장쭤린이 다시 중국 천하를 장악하는 것을 목전에 두었다.
그러나 1926년 광저우 국민 정부가 북벌을 선포하면서 상황이 뒤집혔다. 장제스는 먼저 직계의 우페이푸와 쑨촨팡을 격파하면서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북양군벌들은 직계, 봉계, 환계를 가리지 않고 연합하여 장쭤린을 대원수에 추대하여 맞서려 했으나 국민당은 내부 분열에도 불구하고 결국 풍계, 염계 등을 제때 산하 세력으로 끌여들여 1928년에는 베이징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만주로 퇴각하던 장쭤린은 1928년 6월 황고둔 사건으로 일본군에게 암살당했고, 장쭤린의 뒤를 이은 장쉐량은 다나카 기이치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장제스와 합작을 결정하면서 북양 군벌은 실질적으로 소멸되었다.
물론 개별적으로 국민 정부 산하에 가담한 북양 군벌의 계파들은 잔존했으나 다시는 북양 군벌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나마도 1929년 ~ 1930년 사이의 반장전쟁에서 광탈하면서 몰락하거나 지역 군벌로 남았다. 중원대전 때 장제스의 편을 들어 국민정부의 2인자에 오르게 된 장쉐량 역시 1931년 만주사변, 1933년 열하사변으로 몰락하면서 북양 군벌은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 계파
[[북양군벌| 북양군벌]] | ||
안휘군벌 | 직계군벌 | 봉천군벌 |
대부분의 군벌은 그 뿌리가 북양군벌에 있거나 적어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옌시산이나 펑위샹처럼 북양군벌 몰락 이후에도 살아남아 중화민국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군벌들 역시 한때 북양군벌에 소속되어 있어 이들의 산하 세력인 염계, 풍계도 넓게 보면 북양군벌로 분류된다. 엄밀히 구분하면 북양 군벌에서 직접적으로 파생된 안휘군벌과 직계군벌을 북양군벌의 직계로 분류한다. 만주의 봉천군벌은 엄밀히 말하면 앞선 두 군벌과 태생이 다르긴 하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보통 북양군벌에 포함시킨다.
3.1. 안휘군벌
자세한 내용은 안휘군벌 문서 참고하십시오.돤치루이, 쉬수정 등이 영도한 파벌.
3.2. 직계군벌
자세한 내용은 직계군벌 문서 참고하십시오.펑궈장, 차오쿤, 우페이푸, 쑨촨팡 등이 영도한 파벌.
3.3. 봉천군벌
자세한 내용은 봉천군벌 문서 참고하십시오.장쭤린이 동북지방에서 일으킨 파벌. 장쭤린 이후에는 장쉐량, 장쭝창 등이 영도했다.
4. 참고 문헌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 출판사.
5. 관련 문서
5.1. 관련 인물
5.2. 하위 파벌
5.3. 사건
[1] 앞줄부터 왕스전, 펑궈장, 위안스카이, 티에량, 차오쿤, 언돈원. 둘째줄에서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돤치루이다.[2] 다만 장제스에게 협력한 장쉐량, 리쭝런, 엔시산, 펑위샹 등의 군벌은 자신의 지역에서 세력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반장전쟁에서 장제스에게 패배하며 과거와 같은 위세는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3] 위안스카이가 조직한 신군을 북양군이라고 한다.[4] 참고 https://tanukiknowledge.tistory.com/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