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동시 출신 독립운동가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권재만(權在萬)·권종백(權鍾伯) |
자 / 호 | 종백(宗伯) / 동산(東山) |
본관 | 안동 권씨[1] |
출생 | 1886년 2월 10일 |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부내면 용상리 (현 경상북도 안동시 용상동)[2][3] | |
사망 | 1935년 12월 11일 (향년 49세) |
경상북도 안동군 | |
묘소 | 경상북도 안동시 안막동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1886년 2월 10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부내면 용상리(현 경상북도 안동시 용상동)에서 아버지 권회영(權檜英)과 어머니 안동 김씨 김원서(金元瑞)의 딸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5촌 당숙(堂叔)인 권갑영(權甲英)에 입양되었다.
그는 1919년 안동에서 3.1 운동에 참가했고, 그해 11월에 만주로 망명한 뒤 의열단에 가입했다.[4] 1922년 6월, 의열단장 김원봉의 명령을 받은 그는 상하이에서 서울로 잠입한 뒤 당시 국내에 밀파된 의열단 단원 및 동지들에게 무기를 공급하기도 하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동지 유병하·유시태(柳時泰) 등과 협력하여 경성부 내자동에 거주하는 이인희(李麟熙)로부터 군자금 오십원을 받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납부하였다.
1923년 만주 안동현에서 의열단원 김시현, 황옥, 김지섭 등과 함께 조선총독을 위시하여 일제 고관의 암살과 주요 관공서 파괴를 목적으로 폭탄 30개, 권총 13정,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문(朝鮮革命宣言文) 및 조선총독부 소속 관공리(官公吏)에 대한 격문 700매를 서울로 반입했다. 그러다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동지들이 체포되자, 그는 김지섭과 함께 만주로 피신하여 한때 영고탑(寧古塔)[5]에 거주하였다.
이후 1929년 만주 안동현에 있는 홍종우(洪鍾祐)의 집에서 의열단원 10여명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의열투쟁 방안에 관해 밀의하던 중 안동 소재 일본영사관 관헌의 급습을 받고 체포되었다. 이후 1932년 12월 23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항소했고,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4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35년 급성 위장병에 걸려 형 집행정지를 받고 풀려났지만 1935년 12월 11일에 고향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권정필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영덕군 출신 독립운동가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안동 권씨 |
출생 | 1884년 11월 29일 |
경상도 영해도호부 북이면 거무역동 (현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거무역리)[6] | |
사망 | 1939년 3월 20일 (향년 54세) |
경상북도 영덕군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1884년 11월 29일 경상도 영해도호부 북이면 거무역동(현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거무역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상북도 영해군 북초면 송천동(현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송천리)의 안동 권씨 집성촌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그는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과 구세군 참위(參尉) 권태원 등이 주도한 1919년 3월 18일 영해읍에서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해 남효직, 남진두, 남계병, 남교문, 정규하, 장성열 등 군중 3천 명과 함께 성내동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을 전개한 후, 경찰주재소로 달려가서 일본 경찰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위협하여 그들도 독립만세를 부르게 했다. 이후 장터로 돌아가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다시 시위 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갔다.
이때 주임순사 스즈키 츠루지로(鈴木鶴次郞)가 해산을 명령하며 태극기를 빼앗으려 했다. 이에 권정필은 격분한 군중과 함께 곤봉과 돌멩이로 주재소를 파괴하고 순사부장을 넘어뜨린 후 2명의 일본 순사의 모자와 칼을 빼앗았다. 그후 공립보통학교로 시위 행진해 평소 일제의 정책을 극찬하던 교사들을 규탄하고 건물을 파괴했으며, 일본인 소학교, 우편소, 면사무소를 차례로 파괴하고 다시 주재소로 몰려갔다. 이후 군중은 주재소 안에 걸려 있던 경찰복을 모두 찢어버리고 비치되어 있던 장총 4정과 87발의 실탄을 빼앗아 파기했다. 이때 영덕경찰서에서 서장 무의손(茂義孫)과 4명의 경찰이 긴급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다가,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려 철수했다. 그러자 권정필은 군중과 함께 그들을 포위해 총과 칼을 빼앗고 제복을 찢은 후 곤봉 세례를 가하면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수본(水本) 여관에 감금했다.
이때 병곡주재소에서는 인근 평해의 일본 헌병분견소에 응원을 요청하고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군중이 병곡 주재소 앞에 다다르자, 일본 경찰이 이를 제지했다. 이에 권정필은 군중과 함께 투석으로 대항하며 곤봉과 낫 등을 들고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건물을 파괴하고, 기물을 파기한 후 면사무소로 가서 그곳 건물도 완전히 파괴했다. 그러나 평해에서 응원 출동한 3명의 일본 헌병과 주재소 순사가 합세하여 총을 겨누며 위협하자, 정규하의 만류로 오후 6시경 자진 해산했다.
이후 일제가 대대적인 검속을 펼칠 때 체포되었고, 1919년 4월 5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 경주지청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며#,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 공무집행 방해,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및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그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영덕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39년 3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권정필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부호장공파 두환(斗煥)계 33세 정(正) 항렬.[2] 인근의 노하동·율세동·안막동·서부동·동부동·신세동·법상동과 함께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3] 1934년 용의조선인명부에는 안동군 안동면 용상동, 즉 현재의 안동시 용상동이 출생지로 기재되어 있으며, 1932년 수형인명부에 율세동은 그의 주소지라고 기재되어 있다.[4] 1920년 12월 25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소위 사기 및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을 받기도 했다.#[5] 현 중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닝안시(寧安市) 닝구타(寧古塔).[6] 1919년 수형인명부에 병곡면 거무역리가 출생지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