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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선언 • 황옥 경부 폭탄사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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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4년 10월 23일 |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면 가곡동 (現 경상남도 밀양시) | |
사망 | 1927년 2월 11일 (향년 32세) |
중화민국 상하이 | |
호 | 금산(錦山) |
부모 | 아버지 한춘서, 어머니 김해출 |
형제자매 | 3남 1녀 중 장남 남동생 한봉인 |
학력 | 신흥무관학교 (졸업)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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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4년 10월 23일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면 가곡동에서 아버지 한춘서(韓春瑞)와 어머니 김해출(金海出)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만주 지린성으로 망명한 그는 신흥무관학교를 재학한 뒤 군사학에 전념하던 중 김원봉, 이종암 등 밀양 출신 인사들과 친교를 맺는다.1919년 11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의한 후 의열단을 조직하고 김원봉이 단장을 맡았으며 한봉근은 부단장을 맡았다. 1920년 밀양폭탄사건을 주도하기 위하여 김원봉, 신철휴 등과 폭탄·권총·탄약 등을 입수하고자 했다. 마침내 폭탄제조법, 각종 무기와 폭약들을 얻었고 그것을 국내로 반입한 이후 밀양으로 갔으나 폭탄이 일본 제국 경찰에게 발각되며 거사는 실패하였다. 그는 이후 만주로 들어가 군자금 모금과 폭탄 구입, 항일거사를 주도하기 위하여 당시 중국 안동(安東)에 있던 이륭양행(怡隆洋行) 지하창고에 보관 중이던 고성능 폭탄 36개와 권총 5자루, 혁명선언서 600여 매 등을 국내로 반입하고 1진의 김시현, 황옥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일제 밀정으로 잠입해 있던 김모(金某)의 밀고로 인해 김시현, 황옥은 모두 검거되었고 이 계획 역시 실패하게 된다.
1926년 12월 8일에는 김창숙 등이 모금한 3000원의 돈으로 권총, 실탄을 구입하여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하고자 하였으며, 이때 폭탄 3개와 권총 7정, 실탄 490발을 웨이하이웨이(威海衛)까지 옮겼고 최종적으로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했다. 그 뒤에도 국내에서의 의열단 활동에 계속 관여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927년 2월 11일 상하이에서 급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그의 동생이자 같은 의열단 단원이였던 한봉인에게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