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독립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4D4D4D, #696969 20%, #696969 80%, #4D4D4D)" {{{#!wiki style="margin: 0 -10px -5px;min-height:calc(1.5em + 5px); color:#fede58"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의병 및 민중기반 단체 | |||
갑오의병 | 을미의병 | 을사의병 | 정미의병 | |
포수단 | 동의단지회 | 중광단 | 보합단 | |
정규 군사조직 및 준정부 | ||||
13도 창의군 | 대조선국민군단 | 대한광복군정부 | 대한광복회 | |
대한독립군 | 대한독립군비단 | 군무도독부 | 광한단 | |
대한독립군결사대 | 광복군사령부 | 대한통의부 | 참의부 | |
정의부 | 신민부 | 국민부 | 한국독립군 | |
조선혁명군정부 | 조선의용대 | 조선의용군 | 한국광복군 | |
비밀결사 및 혁명단체 | ||||
대한독립의군부 | 광복단 | 광복회 | 대한독립공명단 | |
철혈광복단 | 대한국민회군 | 의열단 | 흑색공포단 | |
해외 및 민족적 단체 | ||||
한인애국단 | 재만한족연합회 | 재미한족연합위원회 | 화북조선청년연합회 | |
조선독립동맹 | 한국청년전지공작대 | 한교전지공작대 | 고려독립청년당 |
1. 개요
大朝鮮國民軍團1914년 6월 10일 독립운동가 박용만(1881)이 하와이에서 조직한 군사교육단체.
2. 상세
한인소년병학교는 학기 중에는 각자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여름방학 때 입소하여 평균 8주간의 군사훈련을 받는 하계군사학교 체제로 운영되었고, 수학과정은 3년이었다. 첫해 생도는 13명이었다. 1910년 4월 1일 헤이스팅스 대학내로 이전한 한인소년병학교는 6월에 두 번째로 개교하였는데, 인근지역 한인유학생들이 자원 입학하여 생도 수가 26명으로 늘어났다.창설자 박용만은 학교운영자금 마련을 위해 캘리포니아지역을 순회하여 총 15자루와 의연금 약 600달러를 모금하였고, 그것으로 군복과 유니폼을 구입하고 교사들 급료도 지불했다.
1911년 여름 세번째 하기훈련에 44명이 등록하였고, 8월 제21회 졸업식에는 1909년 여름 입학한 13명이 졸업했다. 1912년 6월 네번째 하기훈련에는 34명이 입학하였고, 8월 16일에 13명이 졸업했다. 1913년 6월 16일 개강한 다섯 번째 훈련에는 30여명이 등록했다. 1914년 6번째 훈련에 20명이 입소하였는데, 이것이 마지막 학기로서 일본측 항의로 폐교해야 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6년간 170여명 학생들이 등록했고, 졸업생은 40명 가량 되었다.
한인소년병학교의 일과는 오전에 노동과 학습, 오후에 군사훈련, 밤에 문학활동과 학습을 하였다. 생도들은 인문과목은 물론 사관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군사학과 야외실습 등 고된 군사교육을 이수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자치기관을 만들어 법에 의한 구속력을 가지고 둔전병식으로 군인을 훈련해 독립전쟁에 대비하고자 하는 박용만의 구상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소년병학교 출신인 정한경 · 유일한 · 한시호 · 신형호 · 홍승국 · 김용성 · 김현구 등은 이후 재미 한인교포사회의 중견 지도자로 활동하며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박용만은 1908년부터 1912년까지 네브래스카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면서 ROTC에 입단해 군사훈련을 받았다.
1911년 3학년 때 <신한민보> 주필로 선임되어 샌프란시스코로 가게 되자, 그는 시험 연기수속을 하면서도 모든 과목을 우수한 성적으로 이수하는 열성을 보였다. 그는 신한민보 주필로서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대한인의 자치기관'이란 논설에서, 그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지방자치, 임시정부 수립, 법으로 구속해 의무금을 납세케 한다는 구상, 그리고 '국민개병설' 등 평소의 주장을 펼쳤다.
대조선국민군단과 사관학교 운영은 하와이 각 지방의 군사훈련을 담당하던 하와이지방총회 연무부에서 담당했으며, 사관학교 주요 인물은 박용만을 비롯하여 박종수 · 안원규 · 구종곤 · 이호 · 김세근 · 이정권 · 노훈 · 임응천 · 한태경 · 한치운 · 이치영 등이었다. 이들은 군단 창설에 필요한 재정 마련과 후원은 물론 사관학교 주요 기간요원과 교관으로 활동했다. 다만 하와이군사령부가 실제 군총 사용을 불허했기 때문에, 훈련시에는 목총으로 대체했다.
대조선국민군단은 파인애플 경작지를 물려받거나 일부 농업인들의 기부를 받아 군단의 재원을 확보했다. 대조선국민군단의 운영은 한인소년병학교 시절부터 지켜왔던 둔전병제가 원칙이었는데, 단원들은 군단에 기숙하면서 농장에 나가 노동을 하고 틈틈이 군사훈련과 학습을 하였고 100여명으로 시작하여 많을 때는 300여명에 이르렀다.
대조선국민군단 사령부는 모든 한인 독립군을 ‘국민군단’으로 편성하려는 목적하에 조직된 것이었다. 이 사관학교의 교과내용은 박용만이 헤이스팅스 한인소년병학교의 교과과정을 발전시킨 것이며 교재는 28종에 달하였고, 특히 박용만이 저술한 <군인수지>는 사관학교의 주요 교재로 사용되었다. 군사훈련 도구로는 사관의 45식 단총 39정, 군도 10개, 나팔 12개, 북 6개, 목총 350정이 있었다.
1915년에는 대조선국민군단과 대조선국민국단사관학교를 합쳐 120~300명에 이르렀으며 하와이에서 시가행진을 하기도 했다. 당시 하와이 당국에서 실총 사용을 허가하지 않아 목제 모형총을 가지고 군사훈련을 하였다.
1916년 쇠퇴하여 뚜렷한 성과 없이 1917년 해체되었는데, 그 원인은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 이후 이어진 미국과 일본 제국의 우호관계였다.
일본은 미국에게 '저들이 미국의 연합국인 우리 일본을 적대하는 조직이니 대조선국민군단을 없애달라'고 청하여 미국 측은 실태를 조사하고 조치를 취하기로 하였으며 결국 군단 병영 등의 토지 계약이 종결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1915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1]의 실권이 이승만측에 넘어가[2] 박용만의 활동범위가 크게 위축되었던 것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