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1-13 11:19:32

조선의용대

파일:external/search.i815.or.kr/001_018.jpg
조선의용대 기념사진.


1. 개요2. 창설3. 분리
3.1. 화북 이동과 조선 의용군3.2. 본대 잔류와 한국 광복군
4. 결말5. 출신 인물6. 관련 문서

1. 개요

김원봉조선민족혁명당장개석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1938년 10월 10일 중국 호북성 한구[1]에서 창설한 무장 독립 운동 단체. 장개석이 이끌던 중국국민당으로부터 최초로 공인받은 조선인 독립 무장 부대다. 조선 민족 전선 연맹 산하의 군사 단체로도 분류된다.

그러나 중일전쟁 와중에 1940년 분열되었다. 주력은 김원봉과 국민당을 이탈한 후 화북지방의 연안으로 가서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와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라 부른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무력을 기반으로 '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되었고, 북한 연안파의 모체가 되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1942년 '조선의용군'으로 이름을 바꾼 후 해방 후 북한의 '조선인민군'의 주력이 되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이탈한 후 김원봉에게는 자신이 직접 이끌던 본대 90여명의 병력이 남았으나, 국민당의 지원이 끊기게 되어 존폐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김원봉은 과거 자신이 극렬하게 해체를 주장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고, 조선의용대 잔여 병력 약 100명은 한국광복군에 흡수되었다.

2. 창설

일본인 반전 운동가이자 공산당원인 아오야마 가즈오(靑山和夫)[2]가 조선 의용대 조직 계획 방안을 작성해서 국제 문제 연구소장 왕봉생, 정치 부장 진성, 부부장 주은래와 장여생, 정치부 제2청장 강택, 정치부 비서장 하충한 및 군사 위원회 위원장 장개석의 동의를 얻어냈다.

아오야마 가즈오의 초안에는 100명 정도의 조선인 독립 부대를 창설하여 조직 중인 '일본, 조선, 대만 반파시스트동맹'의 중앙 집행 위원회가 지도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래서 조선 의용대는 국제 의용군이라고도 불렸다.

김원봉은 1926년에 황포 군관학교 4기생으로 입교해 졸업하고 국민당군 장교 신분으로 장개석의 북벌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다. 지휘관 김원봉의 이러한 경력으로 조선 의용대는 장개석의 국민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국민당의 방첩 정보 기관 남의사의 지원을 받게 된다. [3]

국민당군과 연합 활동을 하던 조선 의용대는 주로 일본군에 대한 심리전ㆍ포로 심문ㆍ후방 교란 등을 담당했다.

3. 분리

그러나 대륙 본토에는 조선인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규모를 확대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대원들의 상당수는 국민당군의 후방 지원 역할보다는 일본군과 직접 싸우기를 원하였다. 이들은 "후방에서 선전만 하지 말고 만주로 가서 싸우자"고 주장하며 화북 지역으로 이동한다.

역사학계에서는 조선 의용대의 대다수가 중국 국민당에서 이탈하여 화북의 팔로군에 합류한 이유에 대해서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을 찾아가 세력을 키우고자 함이라고 보고 있다.

3.1. 화북 이동과 조선 의용군

화북으로 이동한 다수 대원들은 최창익의 지도하에 중국공산당 산하의 팔로군에 합류하면서 중국 국민당 및 남의사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참고로 이때는 2차 국공합작 시기로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은 협력 관계였다. 공식적으로는...) 이후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라는 명칭으로 활동하면서 일본군과 여러차례 교전하였다.

1942년 7월 10일에 김두봉이 이끄는 조선독립동맹과 연합하여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팔로군 산하에서 활동할 당시 이들의 병력은 최대 80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4][5] 일제 강점기 동안 존재했던 수많은 조선인 무장 부대들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6]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YH2015072309030037100_P2.jpg
중국 산시성(山西省) 윈터우디춘(운두저촌, 雲頭低村)에 남아있는 조선 의용대의 한글 구호.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하는데, '왜놈의 상관 놈들을 쏴 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 의용군을 찾아 오시오'라는 내용이다. 1940년대 초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는 일본군에 징집된 조선인 병사를 상대로 선전전을 펼치며 곳곳에 한글 구호를 남겼다.

조선 의용군은 중국 공산당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일전쟁에서 싸웠고, 상당수는 일제 패망 이후 벌어진 2차 국공내전에도 참여하였다. 이들은 1948년 북한 정권이 성립하자 귀국하여 조선인민군의 근간이 되었으며, 최창익, 김두봉, 김무정 등은 고위직에 올라서 연안파라는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의 권력 강화 과정에서 8월 종파 사건으로 모두 몰락하였다.

3.2. 본대 잔류와 한국 광복군

한편 대다수가 화북으로 이동하면서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 의용대 본대에는 대략 100여명 정도가 잔류하였다. 이들은 중국 국민당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1942년 김구가 이끌던 중경의 임시정부에 합류, 한국 광복군 제1지대로 편제되었다. 이 과정은 조선민족혁명당 항목에 자세히 기술되어있다.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를 이끌었던 김원봉은 임시 정부에서 계속 활약했고, 해방후에 귀국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가 1948년 남북 협상 회의 참석차 북을 방문한 이후 그대로 잔류하였다. 조선 의용대 대장 김원봉 역시 8월 종파 사건 이후, 1950년대 후반 임정 출신 납북자들과 같이 중립화 통일안을 주장하다 숙청당했다.

4. 결말

일제 강점기 말기 독립 운동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단체이지만, 분열 속에서 지도자들과 구성원들이 남북으로 흩어졌고, 그나마도 모두 버림받은 비운의 단체이다. 북으로 간 사람들은 8월 종파 사건을 계기로 김일성의 1인 독재에 걸림돌이 된다며 해서 숙청당했고, 살아남은 일부가 중국으로 돌아가서 여생을 마쳤다. 한편 남으로 온 사람들은 빨갱이로 묻혔다.

5. 출신 인물

6. 관련 문서



[1] 현재의 무한(武漢)이다.[2] 1933년 5월에는 일본 전투적 무신론자 동맹에 참가하였다. 1934년에 검거되었으나, 전향을 강요하는 문서에 서명하여 출옥하였다. 그러나, 1937년 3월에 중화민국상해로 망명하였으며, 상하이 함락 후에는 홍콩베트남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무한에서 활동을 하면서 일본군의 남경 대학살을 폭로하는데 참여했다.[3] 훗날 김원봉은 북한 정권에 참여했을 때 이 전력 때문에 입지가 매우 좁아졌다.[4] 1948년 3월 15일 기준. 제1연대 1301명 제2연대 1709명 제3연대 1608명 등을 포함하여 총 인원 8274명. (출처:특별연구 조선의용군,염인호,1994)[5] 일제 패망할 당시에는 1000명 정도 (출처:조선의용군과 한국광복군의 비교 연구,김광재,2006)[6] 1920년대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이 이끌었던 만주의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 러시아 연해주에서 창설했던 대한독립군단, 1929년 양세봉, 김학규 장군의 조선혁명군 , 1930년대 김일성, 김책, 최용건 등이 이끌었던 동북항일연군 산하의 공산주의 계열 유격대, 1940년대 지청천, 이범석 장군이 이끌었던 임시 정부 산하의 한국 광복군, 그 외 재미 교포들이 조직했던 박용만(1881)의 국민 군단 등등, 일제 강점기에 존재했던 수많은 무장 부대들 중에서 이만한 규모의 조선인 군사 단체는 없었다. 참고로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의 연이은 승전 이후 만주 지역의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들이 일제의 토벌을 피해서 러시아 연해주에 집결해서 대한독립군단을 창설했을때 병력이 3500여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