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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1916)

독립운동가[1]
김학철
金學鐵
파일:김학철(1916) 프로필.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명 홍성걸
출생 1916년
함경남도 원산부 용동
(現 강원도 원산시 남산동)
사망 2001년 9월 25일 (향년 85세)
직업 독립운동가, 문학가
배우자 김혜란
자녀 아들 김해양
학력 황푸군관학교
조직 조선의용군

1. 개요2. 생애3. 저서4. 어록5. 외부 링크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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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에는 중국공산당 소속으로 항일운동을 했다. 광복 후에는 북한에서 로동신문 기자로 활동하다가 김일성에 반감을 가지게 되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소설가로 활동한 옌볜조선족 작가다. 가장 오래 살아남은 조선의용대 분대장 출신으로 (계급은 중사) 알려져 있다.

본명은 '홍성걸'이다. 상하이로 건너가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하는 순간부터 가족이나 지인에게 피해가 갈 것을 걱정해 이름을 김학철로 바꾸어 사용했음이 사망 직전에 밝혀졌다.

미서훈 독립운동가이다.

2. 생애

1916년 함경남도 원산부 용동[2]에서 누룩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상경하여 경성부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재학 중이던 1929년 원산 총파업을 지켜보면서 사회 및 독립운동 의식에 눈을 떴다고 한다. 이후 항일 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1930년대 초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약산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에 가담하였다. 본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고자 했는데, 중국으로 건너가자 당시 임정이 윤봉길의 의거로 항저우로 거처를 옮긴 터라 임정에 합류할 수 없게 돼서 의열단에 들어갔다고 한다. 조선민족혁명당은 그를 1936년 난징으로 데려가 입당시켰다.

그는 민족혁명당의 지령을 받고 난징(南京)에 있는 중국국민당의 중앙군관학교에 들어가서 제1대대 제 4중대에 편입되었다. 이곳에서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으며, 좌경화되어 민족주의자에서 마르크스주의자로 전향하였고,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 중앙군관학교를 1년 앞당겨 졸업하였다. 그는 1937년 10월 우한으로 건너가 조선의용군 결성에 참가하였다. 1938년 한커우에서 조직한 조선의용대에 가담해 무장독립투쟁에 참여했다.

그러던 중 1940년 8월 29일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고 1941년 중국공산당의 팔로군과 함께 태항산에 들어갔다 1941년, 김세광(金世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제2대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허베이성 일대에서 일어난 태항산 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전투 도중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 붙잡힌 뒤, 포로 신분으로 일본으로 압송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된다.[3] 거기서 "전향서를 쓰면 다리 치료를 해 주겠다"는 일본의 제안을 끝내 뿌리쳐 3년 6개월 동안 피고름을 흘리는 고통을 견디다 결국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다. 형무소에서는 원래 다리 절단 역시 허용하지 않았으나, 그와 친분을 쌓은 의무관의 배려로 절단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김학철은 평생동안 목발을 짚고 다녀야 했다.

1945년 8월 15일,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8.15 광복을 맞았고 그해 10월 19일 출옥해 서울로 귀국하였다. 이어 서울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다 박헌영이 집회 연설에서 "위대한 소련군[4]미군에 의해 우리나라가 해방됐다"고 강조하면서 한국의 무장투쟁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것에 분개해 다음과 같이 박헌영에 반박했다 한다.
"우리 조선의용군은 일본이 투항하는 날까지 끊임없이 무장 투쟁을 견지했습니다. 이 나라의 해방을 위해 숱한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또 목숨을 바쳤습니다. 우리는 누구처럼 팔짱을 끼고 앉아서 남이 해방을 시켜줄 때만을 기다리지는 않았습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 후 군정기 시기 1946년 10월에 월북하여, 친구인 북조선로동당 간부부장 리상조의 주선으로 조선인민군 군보 기자로 일했으며 김일성과 김정일을 만나기도 했는데, 김일성이 자신의 절단된 다리에 대해서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깊은 위로를 하는 것을 보고 자기 자랑이 좀 심하긴 해도 진솔하고 괜찮은 정치인으로 여겼으나 김창만, 박정애같은 아첨꾼들이 그를 타락시켰다는, 박의완, 최창익, 박창옥, 리상조 등과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 김정일도 만났는데 4살 밖에 안된 김정일이 밥을 먹는데 숟가락질이 서툴러 온 얼굴이 밥알 투성이가 되자 그 모습이 재밌어서 "수상동지, 유라의 얼굴에 밥풀이..."라고 했는데 김일성이 "아이들은 어렸을때부터 무엇이든 제 손으로 하게시리 내버려둬야 하디요."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김일성의 끝없는 자아도취와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테러[5], 동지들에 대한 숙청을 비롯한 비열한 행위 때문에 김일성 정권에 깊은 환멸과 혐오감을 느끼고 6.25 전쟁 중 중국으로 피난간 이후 귀국하지 않고 눌러앉는다.

이후 중국에서 문학가로서 작가 생활을 보내면서 여생을 보냈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너무나 굴곡진 삶을 살았다.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을 가리켜 그는 "인민이 굶어 죽는데 웬 우상숭배냐"고 비판했다. 특히 <20세기의 신화>에서는 '마오쩌둥김일성은 자살로 인민들 앞에 사죄해야 한다'는 강경한 비판까지 내놓았다. 이로 인해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반동분자'로 숙청, 10년간 옥고를 치렀고, 24년간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말년에는 한국에 방문해서 여러 언론과 인터뷰를 진행한 바 있다. 이후 연변에서 조선의용군 활동을 정리하고 자서전을 집필하였다. 2015년 방영된 SBS 스페셜 <나의 할아버지, 김학철 -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에서 나눈 인터뷰를 살펴보면,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을 지키면서 북한, 중국, 소련의 1당 독재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다.
…앞으로 먼 장래에는 사회주의 사회가 된다고. 안 될 수가 없지. (PD: 사회주의인 중국이나 북한도…(불평등이 심각한데)) 그 동안에 잘못해서 그런 거야. 시행착오야. 시행착오를 해서. 개인 숭배를 하고 이러니까 되겠어? 이번에 20세기에 공산주의자들이 뼈아픈 대가를 치렀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고 대가를 치렀어? 이제 다음 세대에 가면 다시는 그런 형태가 나오지 않아. 첫째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말이 없어져야 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일당 독재고, 일당 독재는 1인 독재야. 이건 20세기의 뼈아픈 경험이야. 그러나 다수당제 가운데서 공산당이 잘해서 정권을 쥐면 쥐는 거고, 놓치면 놓치는 거고, 이러면서 의회 투쟁, 국회에서 투쟁해 나가야지. 뭐 죽이고 하는 거는…(안 돼).[6]
- SBS 스페셜 <나의 할아버지, 김학철 - 조선 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중 41분 50초 ~ 42분 55초
2001년 종양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자 연명 치료를 거부하고 한국에서 연변으로 돌아갔다. 별세 20여일 전부터는 곡기를 끊는 한편, 최후까지 조선의용군 투쟁사 복원에 힘썼다. 9월 25일에 연변에서 별세했다. 사후에는 유언에 따라 시신을 화장한 후 상자에 담아 두만강에 띄워 고향인 원산시 앞바다로 보냈다.

3. 저서

  • 장편 소설 <격정시대>
  • <20세기의 신화>
  • <해란강아 말하라>
  •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
  • 2001년 서울 방문 때 출간한 수필집 <우렁이 속 같은 세상>이 있다.

4. 어록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 나의 생각은 우리 젊은이들이 좀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일들 좀 잘 해주길 바라. 더 희망이 없어. 그뿐이야.’’

5.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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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담

김일성의 비서실장, 평양시 당위원장, 황해남도 당위원장을 지냈던 연안계 정치인 고봉기의 동창으로, 그의 유작으로 알려진 <고봉기의 유서>를 집필한 것 역시 사실은 김학철이었다는 것이 근래에는 정설이다. 이는 김일성 평전을 쓰기도 한 조선족 작가 유순호의 취재 및 주변인들의 증언으로 윤곽이 드러나고 있으며 고봉기 유서의 문체나 김학철의 문서가 거의 일치한다고 한다. 또한, 결정적으로 고봉기 유서의 저자는 "1959년에 고봉기가 석방되어서 소비조합 부위원장이 되었다"고 쓰고 있지만, 소련 문서고에서 해금된 자료를 보면 고봉기는 박창옥, 최창익과 함께 1960년 1월에 총살되었다. 고봉기의 유령이 쓰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글인 것이다.

대구에서 파는 대구식장국밥인 대구탕을 좋아했다고 한다.#


[1] 대한민국이 독립유공자로 지정하지는 않았다.[2]북한 강원도 원산시 남산동.[3] 당시 태항산 전투에서 김세광의 조선의용대는 병력이 고작 20명이었고 일본군은 300명이나 되었다. 게다가 공격도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이 마을에서 쉬고있던 조선의용대를 기습하였기에 조선의용대도 예상못한터라 무기만 챙겨서 나올 정도였다. 특히 전투가 처절했는데 조선의용대는 병력과 무기에서 열세이다보니 싸우다가 후퇴할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조선의용대는 4명이 전사하고 대장인 김세광, 분대장 조열광, 대원 장례신이 부상당한다. 김학철은 부상당했을때 대원들이 데려가지 못해서 포로가 된 것이다.[4] 박헌영답게 소련군을 미군보다 먼저 부른 것이 눈에 띈다.[5] 나중에 이런 너절한 짓을 제 동지들에게 가차없이 써먹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한탄했다.[6] 인터뷰의 내용을 보면 사실상 사회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이를 따르는 대표주자로는 독일의 사민당, 영국의 노동당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