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11:14:44

김창만

金昌滿

1. 개요2. 생애3. 매체에서

1. 개요

북한의 정치인이자 일제강점기 시절 항일운동가

2. 생애

1913년 9월 21일, 함경남도 영흥군의 중농(또는 부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중동중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으로 건너가 1928년 중국 광저우에 있는 중산대학(中山大學)을 졸업했다. 이후 광동에서 한국 국민 청년단을 결성했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 김구 진영에서 이탈하여 조선민족혁명당과 그 안의 지하 조직인 조선 청년 전위 동맹에 가담했다. 1937년 12월 중앙 육군 군관 학교 강릉 분교에 입학하여, 1938년 5월 졸업했다. 군관 학교에서 한만 국경 유격대의 활동을 찬양하고 학생들에게 동북 진출을 호소하는 「도문강변의 활극」이라는 연극대본을 썼다. 동년 10월 조선의용대에 가담하여 항일 선전 활동에 종사했다. 1939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일본어와 중국어에 모두 능통하였다.

1939년 말 조선 의용대 유동 선전 대장을 맡아 후베이성의 제5전구와 서안 일대에서 활동했고, 1940년 2월 조선 의용대 정치조 활동 선전 주임, 조선 청년 전위 동맹 중앙 간부로 활동했다. 이후 1942년 7월 김두봉, 최창익 등과 함께 연안에서 화북 조선 독립 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 집행 위원 겸 경제 부장, 조선 의용군 화북 지대 정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4년 초 일본군 후방 지역의 조선인에 대한 선전 조직 활동을 위해 건립된 적구 공작반 선전 책임자가 되었다. 또한 동만주에서 조선 독립 동맹 간부로 활동하면서 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했는데, 이 과정에서 조소앙의 아들로 임시 정부의 특명으로 만주로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던 조시제를 암살했다.

1945년 광복 이후 북한으로 귀국하여 1946년 2월 15일,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 제4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전임 선전부장 윤상남이 종파분자로 처벌받으면서 신임 선전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46년 8월, 북로당 1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 상무위원에도 선출되었으며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장에 유임되었다. 1946년부터 1년 동안 한재덕과 함께 김일성을 민족 지도자로 내세우는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하지만 고려인 박창옥과의 경쟁에서 밀려 1947년 사동 간부 학교 교장으로 밀려났다. 소련 외교문서에 의하면 그는 소련을 굉장히 싫어했고, 소련군을 사람가죽 신발을 신고 누더기를 입은 해방자라고 불렀다가 소련에서 격노하는 바람에 선전선동부장에서 제명되었다고 한다. 1948년 3월, 2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에서 탈락하였다.

1953년 6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선전선동부장으로 복귀, 1954년 11월, 정치위원회 결정에 따라 신설된 황해남도 조직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54년 3월 전원회의에서 외무성 부상에 임명되어 외교 업무를 잠시 보기도 했다. 후임 선전선동부장에는 하앙천이 임명되었다. 1956년 1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백남운의 뒤를 이어 교육상에 임명되었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상무위원회 후보위원, 조직위원에 선출되면서 권력 핵심에 진입하였다. 1956년 5월 11일, 교육상에서 해임되어 한설야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당연히 김일성의 '아첨쟁이'의 한 사람으로 8월 그룹의 많은 미움을 받았으며 1956년 8월 전원회의 사건 이후 8월 그룹의 숙청에 열렬히 가담했다.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최고인민회의 2기 1차 회의에서 외교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57년 10월 전원회의에서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다. 1958년 9월 7일, 김일, 박정애, 김달현, 정준택, 김익선, 홍명희, 박금철, 림해, 리주연, 하앙천, 정일룡, 리효순, 한상두, 남일, 홍기황, 김광협, 리종옥과 함께 북한 건국 10주년 기념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반소주의자답게 소련인과 결혼한 북한인들을 공격하는 캠페인도 벌였는데 가슴이 소젖처럼 큰 여자들이 뭐가 좋아서 공화국에까지 데려왔냐고 공격을 퍼부었고 이 때문에 리상조는 자신의 수기에서 김창만을 두고 '인간배태주의자'라고 혐오감을 숨기지 못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재선되는 한편 상무위원회가 정치위원회로 개편되면서 정치위원에도 재선되었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는 한편, 3기 내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에 임명되었다.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현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표현이나 1970년대에는 김창만이 친중파이기 때문인지 남한 학계에서는 '문혁파'로 구분하기도 했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사회주의권으로부터 실제로 북한의 정책결정에 의견을 낼 수 있는 7인방(김일성, 최용건, 김일, 박금철, 리효순, 김광협, 김창만) 중 한명으로 평가받았으나 1965년 말에 갑작스럽게 숙청당했고 소련 외교문서 등을 보면 1966년 2차 당대표자회에서 숙청이 추인되었다. 이는 문화대혁명으로 북중관계가 악화되는 와중에 하앙천 등과 함께 대표적인 친중파였던 것이 문제로 알려져 있다. 소련 외교문서를 보면 북한에서 중국 사상이 유입되는 직접적인 창구 역할을 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고 하며 캉성과 비밀리에 활동했다는 정보도 있다. 김진계의 증언에 따르면 조혼으로 결혼한 조강지처를 버리고 어린 여자와 재혼하는 등 부화방탕한 생활을 즐기다가 김일성의 눈밖에 나서 숙청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하며, 김학철의 주장에 따르면 하방되어 농민으로 일하다가 소달구지에 치어 죽었다고 한다. 최영림 회고록에서 김창만은 허구한날 소고기국만 퍼먹는 부화방탕한 반동으로 나오는데, 적어도 높은 지위를 믿고 세도를 부린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인다.

3. 매체에서

  • 1986년작 북으로 간 여배우에서는 배우 문영수가 분했다.
  • 1990년작 KBS 드라마 여명의 그날에선 정동환이 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