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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금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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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갑산파2.3. 8월 종파사건2.4. 권력의 정점2.5. 몰락
3. 참고문헌

1. 개요

한국독립운동가. 북한의 정치인.

생몰연대는 불확실하나 대략 1911년에 출생해서 1970년대 초반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박금철은 일제강점기 감시카드에 따르면 1911년 7월 1일, 함경남도 단천군 북두일면 대흥리에서 출생하였다. 소련 외교문서들도 어떤 문서는 1911년생, 어떤 문서는 1912년생으로 적고 있다. 사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호적상 나이와 실제 나이가 다른 일이 꽤 많았고 아예 제대로 출생신고도 못한 일도 부기지수였으므로 크게 이상할 일은 아니다. 1962년 중국 방문 때 소개된 인민일보의 략력은 또 1912년생이라고 기재하고 있지만 거기선 정확한 생일을 적진 않았으므로 일단 일제시대 감시카드의 기록을 따르기로 한다. 1932년부터 야학운동을 하면서 계몽활동을 했으며 박달과 함께 적색농민조합운동을 전개하다가 항일운동에 나서 1936년 12월, 갑산공작위원회를 결성, 1937년 2월 한인민족해방동맹으로 발전시켰고 출판 및 경제책임자가 되었다.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에 내응하였으며 한인민족해방동맹 기관지 <화전민>을 발간하여 공산주의 및 항일정신 의식화교육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1937년 10월에 체포되었다. 1941년 8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 투옥되었고 이후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감옥에 있던 시절에 전향서를 써서 바친 일이 있는데, 이 때문에 김일성에게 비판적이었던 8월 그룹은 박금철을 사실상 친일분자인 아첨꾼이라고 매우 경멸스럽게 여겼으며, 박금철이 숙청된 다음에는 김일성도 이를 트집잡아 박달이 일찍부터 자신에게 박금철은 속이 검은 인간 쓰레기, 변절자라고 알려줬다고 주장했다. 해방 이후 석방되자 즉시 월북하였는데, 박갑동의 증언에 따르면 평안북도 강계시로 가서 강계시 당위원회 조직부장을 했다고 한다.

2.2. 갑산파

1948년 3월, 조선로동당 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박달이 김일성에게 그를 추천하여 가능하였을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후 리효순, 리송운, 허학송, 김왈룡 등과 함께 갑산파를 결성하는데 이들은 옛 동지인 김일성의 빨치산 파벌과 힘을 합쳐서 한동안은 만주파의 하위 그룹으로 여겨졌다. 1949년 2월 7일, 강상호, 허봉학, 김창봉, 서철, 전문섭, 전창철과 함께 국기훈장 3급을 받았다.

6.25 전쟁 발발 이후 1951년 총정치국이 설치되자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부국장, 육군소장에 임명되었다. 박갑동은 박금철이 박헌영의 추천으로 부국장이 되었다고 증언했지만 이에 대해서는 박갑동이 박금철을 배신자로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있다. 실제로 박갑동은 박금철이 ‘김일성을 만나고 나서 자신이 보천보에서 본 김일성이 아니라고 그가 가짜임을 간파했다가 일시적으로 숙청되었으나 '가짜 김일성'을 숭배하는데 앞장서서 승진한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등 다소 무리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박금철은 1951년 11월 전원회의에서 박창옥, 박정애, 박영빈과 함께 허가이를 맹렬히 공격하여 그의 몰락을 유도하였고 이들과 함께 김일성의 개라는 뜻의 '사바카'라고 불렸다.

1952년 7월 정치위원회에서 박금철은 이번에는 박헌영을 맹공격했으며 1952년 12월, 조선로동당 2기 5중전회에서 배철의 뒤를 이어 연락부장에 임명되었으며 휴전 이후에 열린 1953년 8월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가 부활하면서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때 박헌영이 출당조치된다. 1954년 3월 전원회의에서 박영빈과 함께 정치위원에 보선, 간부부장에 임명되었다. 1954년 11월 전원회의에서 허가이의 자리였던 조직부장으로 이동, 그가 가지고 있던 간부부장 자리는 같은 파의 한상두가 차지한다. 김일성군사대학 학장으로 있던 방호산을 심문하여 숙청한 것도 박금철의 공이었다.

1955년 12월, 박금철은 한상두와 함께 평양시 당위원장 고봉기를 비롯, 연안계 간부들에게 고려인들을 비판할 것을 사주하였고 고려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연안계는 김일성의 소련계 비판 캠페인에 호응했으나 김일성은 고려인 세력이 위축되자 연안계가 동지들을 핍박한다고 토사구팽해버린다. 이후 1956년 2월, 박금철은 한상두와 함께 계속하여 김일성 외의 조선혁명운동 세력은 모두 종파주의자라고 비난하는 등 김일성 일인독재 수립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2.3. 8월 종파사건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상무위원회 위원 및 조직위원회 위원,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면서 권력의 최상층부로 진입한다. 3차 당대회 6일차 회의에서 연설을 하였으며 김일성의 편을 들어서 당시 소련대표단장으로 온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앞에서 조선로동당의 운영은 잘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최창익의 증언에 따르면, 아예 당대회에 참석할 사람들에게 사회주의 형제국 대표단 앞에서 입조심을 하라고 군기반장질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계속되는 개인숭배에 지친 연안계의 서휘는 박금철에게 3차 당대회는 잘못되었다고 오류를 시정해달라고 했다. 서휘는 박금철 뿐만 아니라 김일성, 최용건, 김일에게도 찾아갔다. 하지만 김일성은 말만 그럴듯하게 하면서 당연히 이를 무시했다. 김일성에게 토사구팽당한 간부들의 불만은 폭로하여 고봉기는 박창옥을 만나 박금철과 한상두가 시켰음을 폭로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전후로 하여 김일성 반대파들에게 김일성 우상숭배를 조장하고 당을 이끌 자격이 없는 인물로 큰 비난을 받았고 1956년 8월, 김일성을 만난 흐루쇼프는 박금철이 아첨꾼이 아니냐는 우려를 제기했지만 김일성은 박금철을 적극 변호했고 소련은 박금철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였다. 8월 그룹은 박정애, 박금철, 정일룡, 김창만, 정준택의 해임을 요구하면서 배수진을 쳤지만 김일성은 이를 묵살하였고 박금철도 박정애와 함께 박의완에게 '더러운 짓'에 가담하지 말라고 위협하는 등 군기잡기에 들어갔다. 결국 8월 종파사건은 김일성 반대파의 참혹한 패배로 끝났다. 1957년 8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에 출석하여 서휘, 최창익, 박창옥 등을 맹비난하였고 김두봉, 박의완, 오기섭, 박훈일 등을 숙청하였다.

1958년 9월 7일, 김일, 박정애, 김달현, 정준택, 김익선, 홍명희, 림해, 리주연, 하앙천, 정일룡, 김창만, 리효순, 한상두, 남일, 홍기황, 김광협, 리종옥과 함께 북한 건국 10주년 기념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1960년 4월, 박달이 사망하자 당연히 장의위원을 지냈다.

2.4. 권력의 정점

김일성이 천리마 운동을 시작하여 청산리 방법, 대안의 사업체계를 내놓자 이를 두둔하며 아부하였고 1960년 10월, 조선로동당 창건 15주년 경축행사에서 미국을 비난하는 한편 북한의 정통성은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유격대 활동에 있다고 계속하여 수령제 확립에 기여하였다. 물론 이는 김일성을 도운 자신을 추켜올리는 말이기도 했다. 1961년 2월,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알바니아 로동당 4차 당대회에 다녀왔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상무위원회가 다시 정치위원회로 돌아감에 따라 정치위원회 위원 및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다시 선출되었다. 이때도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찬양하였다. 1962년 6월에는 베이징 시장 펑전의 북한 방문에 대한 답방 목적으로, 주더의 초청을 받고 최고인민회의 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하였으며 귀국 후 "공동의 원쑤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피로써 맺어진 조중 량국 인민의 친선 단결은 영원 불멸할것이다"라고 7월 14일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확대회의에서 발표했다. 1962년 12월 전원회의에서는 박정희가 남한에서 파시즘 독재를 수립하느라 정신 없을 것이기 때문에 한동안 남한이 공격하진 않을 것이라는 평가를 제출하기도 했다. 이후 국방력 강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소련과의 관계경색으로 선진무기를 얻을 수 없게 되자 동독에 접촉해서 알랑방구를 뀌었으나 당연하지만 동독은 이를 묵살하였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3기 1차 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63년 5월 김일성의 방중도 수행하였다. 1964년 10월, 최용건과 함께 다시 방중, 마오쩌둥과 회담하였으며 1965년 5월, 인도네시아 공산당 창건 45주년을 기념하여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인도네시아를 방문, 수카르노도 만나고 왔다. 1965년 12월 16일에는 박금철의 부인 서채순이 죽었는데, 정권의 고위인물도 아닌 그녀를 위한 장의위원회가 구성되는 등 박금철의 권위는 하늘 높은 줄을 몰랐다. 1965년 9월, 김은순 장의위원장을 지냈다.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상무위원회가 설치되자 정치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는 한편, 부위원장이 비서로 개편되면서 비서국 비서로도 선출되었다.

2.5.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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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박금철은 김일성을 우상화는 과정에서 갑산파 우상화도 은근슬쩍 시도하였다. 빨치산 회상기가 연재되기 시작할때 갑산파들도 여기에 꼽사리를 끼었으며 박금철이 서대문수용소 수감 시절에 그를 뒷바라지한 부인 서채순의 충절을 찬양하기 위한 영화 <일편단심>이 제작되었다. 하지만 김정일이 대체 누구를 위한 일편단심이냐고 문제를 제기하였고 당력사연구소가 박금철을 검열하였다. 그 결과 박금철이 개인 우상화, 지방주의를 조장하였다고 비판받았다.

1966년부터 박금철에 대한 보도는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2차 당대표자회에서 박금철은 정치위원회 상무위원 겸 비서국 비서가 되었으나 비서국의 설치는 당부위원장의 권한이 비서국으로 분산된 것으로 박금철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임이 명백했다. 비서국 내부에는 김광협, 허봉학, 김영주, 석산, 최용건, 김일 등 김일성 측근들이 대거 진출하여 박금철을 견제하였다. 1967년에 들어서 박금철에 대한 보도는 극단적으로 감소하였다. 박금철은 특히 김영주가 정치위원회 위원 겸 비서가 된 것에 대해서 헌병 똘마니나 하던 김영주가 왜 나대느냐고 격렬히 반발했다고 한다. 1967년 2월에는 박금철과 리효순이 허석선의 인사 문제로 인해 김일성과 심한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1967년 3월, 리봉수 장의위원을 지내기도 했는데 사실상 그의 마지막이었다.

나이는 김일성과 동년배이기는 하지만 숙청될 당시 50대 중후반 정도의 나이로 비교적 젊은 편이었고, 60년대부터 김일성이 신장결석 등 각종 질환에 시달리면서 앓아눕고 뒤통수에 달린 혹도 자꾸 커지자, 김일성이 병으로 죽으면 자신이 후대 수령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박금철은 목민심서를 추천하여 봉건적 실학을 신봉했다는 김일성의 비판을 받게 된다. 여기에 박금철은 어느 순간부터 김일성의 중공업 일변도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적 발언을 슬금슬금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가화폐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김일성은 이를 수정주의로 맹비난했고 거기에 부르주아, 유교 번안풍종자, 지방주의자로 박금철을 비판했다. 1967년 5월 4일, 조선로동당 4기 15중전회에서 갑산파는 김일과 김영주의 협공에 전멸당했고, 이때 박금철은 고향인 갑산에 양옥집을 크게 세운 혐의, 서채순을 혁명가로 과장한 혐의, 24세된 맏딸을 경락연구소에 배치하여 김봉환의 경락연구소 연구원들에게 논문을 대필하게 하여 의학박사로 만든 혐의로 공격을 당했고, 자신이 자기도 모르게 자유주의자가 되었다면서 고향에 가서 여생을 보내게 해달라고 간청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김일성에게 싹싹 빌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 박금철은 노동교화형을 선고받고 갑산농장으로 하방되어 구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루마니아 외교문서에 따르면 당의 노선을 잘 이해하지 못한 죄로 공장 지배인으로 하방되었으며 반당, 반김일성분자 처분까지 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김영순의 회고록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에서는 숙청이 결정된 후 주석궁에서 뛰어내려 투신자살을 기도했으나 죽지 못하고 농촌으로 끌려갔다고 쓰여 있다.

나중에 1975년 12월 4일, 김일성은 정치위원회 회의에서 "사대주의, 수정주의사상에 물젖어있은자들인 박금철과 박용국이 우리의 대외사업을 다 망쳐놓았다"라고 다시금 박금철을 부관참시해버렸다.

그리고 그 노동자 생활도 얼마 가지 않아서 1968년 초에 출당 조치되어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졌고 1970년대 초반에 사망했다고 한다. 다만 고향 갑산에서는 어느 정도 명망이 남아있었는지 정치위원 강수봉은 중국으로 망명을 시도하는 중 자신을 붙잡은 노농적위대 지휘관에게 ‘역시 갑산 사람들은 박금철 동무를 닮아서 당성이 충만하다’고 하는 도박을 했는데, 조금 전까지 마구 다그치던 지휘관이 씩 웃으면서 태도가 누그러져서 겨우 살았다고 한다.

3. 참고문헌

  • 김규범 (2019). 1956년 “8월전원회의 사건” 재론 : 김일성의 인사정책과 ‘이이제이’식 용인술. 현대북한연구, 22(3).
  • 김보미, 김일성과 중소분쟁 -북한 자주외교의 기원과 형성(1953~1966)(서울: 서강대학교출판부, 2019).
  • 김진계, 조국: 어느 북조선 인민의 수기 하권(서울: 현장문학사, 1990).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
  • 정창현, 곁에서 본 김정일(서울: 김영사, 개정증보판 2쇄, 2000)
  • 조우찬, 북한 갑산파 연구: 기원, 형성, 소멸, 북한대학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