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3 00:58:06

한상두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2. 생애

일제감시카드에 따르면 1910년 3월 27일, 함경남도 북청군 덕성면 서장내리에서 태어났다. 조성모 등과 함께 적색북청농민조합 덕성지부재건협의회사건을 일으켰다. 해방 직후 1945년 9월 30일에 소집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준비위원회에서 북한 지역을 대표하여 김학걸과 함께 상임위원에 선출되었다.

1952년, 전임 함경북도 당위원장 고봉기가 루마니아 대사로 부임함에 따라 후임 함경북도 당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1954년 11월 전원회의에서 박금철의 뒤를 이어 간부부장에 임명되었다. 김일성이 말렌코프의 간섭 및 이중국적을 유지하는 소련계를 때려잡기 위해 박창옥, 박영빈, 기석복 등 소련계에 대한 대대적인 비판을 가하자 1955년 12월 전원회의에서 박금철이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승진함에 따라 새로 조직지도부장에 임명, 박금철과 함께 평양시 당위원장 고봉기에게 소련계 비판운동을 전개할 것을 지시하였다. 1956년 2월 16일, 로동신문에 <당 건설에서 몇가지 문제>라는 사설을 게재하여 김일성 이외의 세력을 모조리 종파주의자로 까내렸고 이 때문에 연안계, 소련계의 미움을 사서 김일성을 현혹하는 간신으로 지목되었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는 한편, 조직위원회 위원으로도 선출되었고 조직지도부장에 유임되었다.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의 충격파에 대비하여 김일성 우상숭배를 열렬히 옹호하는 등 김일성의 수령 지위를 굳히는데 크게 활약한 1등 공신 중 한명이었다.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8월 그룹의 반격은 처참하게 진압되었고 그는 계속해서 실세로 자리매김하였다. 직총 중앙위원장 서휘가 중국에 망명하면서 후임 직총 중앙위원장이 되었다. 1956년 12월 전원회의 이후 조직된 중앙당 집중지도그룹에서 석탄공업부문을 맡았다.

1957년 3월 17일부터 18일 사이에 열린 평양시당 열성자회의에 참석, 최창익, 박창옥, 윤공흠, 서휘, 리필규, 김승화를 반당종파주의자로 맹비난하였으며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직총 중앙위원장 자격으로 상임위원회 위원에도 선출되었다. 1957년 10월 전원회의에서 조직부장 및 조직위원에서 해임, 상무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조직부장직은 한동안 공석으로 남았다가 1958년 9월 전원회의에서 김영주가 임명되었다. 1958년 9월 7일, 김일, 박정애, 김달현, 정준택, 김익선, 홍명희, 박금철, 림해, 리주연, 하앙천, 정일룡, 김창만, 리효순, 남일, 홍기황, 김광협, 리종옥과 함께 북한 건국 10주년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1958년 9월 17일, 전임 금속공업상 강영창이 당중앙위원회 중공업부장으로 이동함에 따라 후임 금속공업상에 임명되면서 직총 위원장 자리는 리효순에게 물려주게 된다. 그리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에서도 자동적으로 소환되어 이 자리도 리효순에게 물려주었다.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0년 4월 4일, 동력화학공업성, 금속공업성, 기계공업성이 중공업위원회로 통합되면서 중공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이동한다. 1960년 8월 10일, 송봉욱의 뒤를 이어 재정상에 임명되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62년 8월 18일, 중공업위원회가 금속화학공업성, 전기석탄공업성, 기계공업성으로 분리됨에 따라 재정상에서 해임되어 기계공업상에 임명되었으나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는 한편 다시 3차 내각에서 재정상에 선출되었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갑산파 사건 이후에도 계속 재정상으로 지냈다.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서 해임되었다는 견해도 있으나 1967년 3월, 리봉수 장의위원을 지냈을 때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인 오진우보다 서열이 높은 것을 봐서는 정치위원회에 남은 것으로 보인다. 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자재공급위원장으로 이동했고 1969년 8월, 리주연 장의위원을 지내는 등 1969년까지는 활동을 하였으나 이후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이에 대해서 1970년 6월, 김일성의 국방-경제 병진노선에 대해 반대했다가 숙청당했다는 견해가 있다.

3. 참고문헌

  • 김규범 (2019). 1956년 “8월전원회의 사건” 재론 : 김일성의 인사정책과 ‘이이제이’식 용인술. 현대북한연구, 22(3).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