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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는 1941년 4월 대한인국민회[1] 등 9개 단체가 연합하여 성립된 재미한인사회 최대의 독립운동 단체이다.2. 성립
1941년 4월 20일부터 27일까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가 열렸고, 29일 독립전선의 통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봉대 등 7개 안이 결의되어 여기에 따라 각 단체가 연합하여 결성되었다. 대한인동지회, 북미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한국독립당 하와이총지부, 중한민중동맹단,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연합회, 대조선독립단,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 대한여자애국단 등 9개 단체가 연합하여 출범하였고, 이후 북미유학생총회 등이 추가 합류하였다(그러나 9개 단체 중 일부는 나중에 탈퇴하게 된다.).3. 구성
크게 의사부(호놀룰루에 위치)와 집행부(로스앤젤레스에 위치)로 나뉜 위원제로 운영되었다.4. 활동
모금으로 비축된 재정 중 3분의 2는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후원금으로 보내고 3분의 1은 워싱턴의 주미외교위원부에 후원하였다. 태평양 전쟁 발발 후에는 재미한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위해 '한인증명서'를 발급, 일본인과 조선은 다르며 조선이 자유 독립 의지를 강하게 가지고 있음을 어필하였다.[2]1942년 2월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국방경위대(맹호군)를 조직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였고, 이후 미국의 OSS와 함께 냅코 프로젝트를 계획하여 유일한을 비롯한 한인 19명을 훈련시키고 한반도에 침투시키려 하였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무산되었다.
광복 후에는 1945년 11월과 1946년 2월 2차에 걸쳐 해방된 대한민국에 대표단을 보내 신생 국가 건설에 참여하였다.
[1] 안창호가 세웠던 그 단체가 맞다.[2]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 발동 당시 일본인들과 함께 조선인들도 끌려갈 상황이었는데,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미국 정부와 협상한 끝에 조선인 출신들에게 '한인증명서'가 발급되어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