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03:27:33

강경옥(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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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3·5대 국회의원
강경옥
康慶玉
파일:external/rokps.or.kr/314.jpg
<colbgcolor=#808080><colcolor=#fff> 출생 1907년 11월 11일
전라남도 제주군 좌면 법환리
(現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법환동)
사망 1999년 3월 10일 (향년 91세)
미국 메릴랜드 주 베데스다 요양원
본관 신천 강씨[1]
희인(希仁)
부모 아버지 강형은, 어머니 고신생
형제자매 6형제 중 차남
학력 리츠메이칸대학 법학부 (법학 / 학사)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2, 3, 5(참)
약력 제2대 국회의원 (남제주군)
제3대 국회의원 (남제주군)
초대 참의원의원 (제주도)
1. 개요2. 생애3. 의정 활동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본관은 신천 강씨[2], 호는 희인(希仁)이다.

2. 생애

1907년 11월 11일 전라남도 제주군 좌면 법환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법환동)[3]#에서 아버지 강형은(康亨殷)과 어머니 제주 고씨 고신생(高辛生)[4] 사이의 6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동생이 법제실장을 지낸 강명옥이다. 일본 리츠메이칸대학을 졸업하고, 귀국 후 일제강점기 후기 삼익고무공업회사 취체역(이사), 사장을 역임하였다.

8.15 광복 후 조선타이어(현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를 인수하여 초대 사장으로 재임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제주도 남제주군(현 서귀포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민주국민당 오용국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자유당 중앙당 산업부 차장으로 임명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친여 무소속 현오봉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제주도 대한민국 참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러나 조선타이어를 헐값에 불하받았다는 이유로 부정축재에 대해 조사받고 1961년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해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5.16 군사정변으로 들어선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서도 정치정화법의 적용을 받아 정치활동이 규제되었다가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 후에야 규제에서 풀렸다.

1999년 3월 10일 미국 메릴랜드 주 베데스다 요양원에서 사망하였다.#

3. 의정 활동

3.1. 제2대 국회 활동

  • 1950년 12월 12일 '일선장병 성탄 축하 위문에 관한 결의안'을 발의하였다.
  • 1951년 1월 23일 45세까지 징집을 하는것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하였다.
  • 1951년 4월 30일 남로당 잔당이 거의 소탕되었으나 약탈과 방화로 인해 완벽한 소탕을 못하였다고 말하였으며 제주도의 예산을 더 늘려달라고 요청하였다.
  • 1951년 6월 5일 아무런 조건도 없이 매일 8억 원 정도의 화폐를 국제연합군에게 주는 것을 비판하였다.
  • 1951년 8월 25일 관재위원회의 제도와 운영에 관한 것을 총리에게 질문하였다.
  • 1951년 10월 20일 동경 한일 예비회담에 대해 일본에게 양보하는 태세로 임하는게 아닌지 우려를 표명하였다.
  • 1951년 12월 1일 제주도에서 실시되고 있는 임시토지수득세법을 비판하였다.
  • 1951년 12월 26일 제주도의 임시토지수득세법 실시상황을 보고하였다.
  • 1952년 3월 10일 '부흥위원회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냈다.
  • 1952년 6월 28일 대통령 저격사건에 관한 긴급동의 를 찬성하였다.
  • 1952년 11월 14일 '재일 대한민국거류민단대표 국회 참석 요청'을 받아드려 달라고 청하였다.
  • 1953년 3월 30일 '전란수습 특별회계 법안'이 통과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2. 제3대 국회 활동

  • 1956년 7월 4일 '서귀읍 승격에 관한법률안'을 발의하였고 발의하게 된 경위를 말하였다.
  • 1957년 6월 24일 신무기의 한국도입 결정을 찬성하며 가결시켜 달라 청하였다.
  • 1957년 7월 9일 군징발 보상대책위원회 부활에 대한 경위와 구성, 동기를 설명하였다.
  • 1957년 9월 10일 김상돈 의원이 제주도의 경찰관과 자유당을 폄훼한다 주장하였다.
  • 1957년 9월 17일 「대한해운공사법과 대한조선공사법 폐지에 관한 법률안」의 수정안[5]을 반대하며 위원회까지는 신설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다.

3.3. 제5대 국회 활동

  • 1960년 8월 16일 대통령 취임식 절차에 불발된 점이 있어 그 경위를 해명해 달라 말하였다.
  • 1960년 8월 29일 자신이 제안한「태풍피해 현지조사반 파견 및 대책 촉구에 관한 결의안」을 설명하였다.
  • 1960년 9월 22일 국방부장관에게 군징발재산에 대한 보상대책을 질문하였다.
  • 1960년 12월 17일 「특별재판소및특별검찰부조직법안」의 3조 2항의 수정안을 냈다.
  • 1960년 12월 23일 자신이 제안한「경주호 납북사건에 의하여 희생된 2용사의 표창 및 위로금 증여와 동 선장 표창에 관한 결의안」을 설명하였다.
  • 1961년 4월 25일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반성하며 동료 의원들에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1] 제주파 38세.[2] 제주파 38세.[3] 인근의 서귀동, 보목동과 함께 신천 강씨 집성촌이다.[4] 고진수(高辰洙)의 딸이다.[5] 위원회를 신설한다는 내용이 * 들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