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01:02:01

이우줄

파일:옛 경상북도 도기.svg 경상북도 제3대 민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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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국회의원
이우줄
李雨茁[1]
파일:external/rokps.or.kr/503.jpg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경주 이씨[2]
출생 1915년[3] 9월 27일
경상북도 영일군 동해면 석동
(現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동해면 석리)
사망 1976년 1월 4일 (향년 60세)
경상북도 대구시 남구 대명동 자택
학력 니혼대학 전문부 (법과 / 졸업)
가족 증조부 이억형(李億馨)
증조모 김왕이(金王伊)
조부 이규준(李圭晙)
진외조부 김성범(金成範)
진외조모 문덕영(文德英)
조모 김칠전(金七田)
부친 이돈종(李敦鍾)
외증조부 임씨(林氏)
외증조모 불명
외조부 임치윤(林致允)
외외조부 박씨(朴氏)
외외조모 불명
외조모 박도동(朴島洞)
모친 임차순(林且順)
배우자 오귀란(吳貴蘭)[4]
여동생 이소란, 이순란, 이복란, 이희자
남동생 이광민
슬하 5남 2녀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3, 4[5]

1. 개요2. 생애3. 선거 이력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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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2. 생애

1915년 9월 27일 경상북도 영일군 동해면 석동(現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동해면 석리)에서 아버지 이돈종(李敦鐘)과 어머니 임차순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돈종은 조부 이규준(李圭晙, 1855 ~ 1923)의 유지를 이어받아 1957년 제7회 한의사국가시험에 합격하여 대구시 장관동[6]에서 송은당한의원(松隱堂漢醫院)을 운영하였다.#

일본 니혼대학 전문부 법과를 졸업했다. 8.15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23일 추달수(秋達洙), 이종우 등과 함께 영남보안대(嶺南保安隊)를 결성하고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이재민의 치안 원조를 명목으로 우익 정치깡패 노릇을 했다. 그 밖에 경상북도 민족자결투쟁본부 총사령, 이재민동포 경상북도 자치회장을 지내고 덕화공민학원을 설립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재민동포자치회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부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국민주당 백남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시 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이갑성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2년 지방선거에서 경상북도 대구시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대구시의회 문교분과위원회 위원장, 대한상이군인회 경상북도지부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자유당 이갑성 후보에 설욕하고 당선되었다.[7] 임기 중이던 1954년 12월 황봉갑(黃鳳甲) 전 대구시의원[8]과 함께 재단법인 덕화학원을 설립하고 덕화중학교를 설립했다. 1956년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시 병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첫 개표 당시에는 14,355표(40.34%)를 얻어 13,677표(38.44%)를 얻은 민주당 임문석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고 결과가 나왔으나, 개표 완료 직후 이는 부정 개표에 의한 것이라며[9] 상대 후보인 민주당 임문석 후보로부터 선거소송을 당했다. 이에 1958년 7월 19일 재검표를 통해 실제로는 임문석 후보가 이우줄 후보에 2,800여 표차로 이긴 것이 드러나 결국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1959년 4월 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선거 부정 혐의로 징역 4개월형을 선고받아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60년 9월 17일에는 대구시 태평로에서 목재상을 경영하는 박수룡(朴洙龍)으로부터 피소당해 사기죄로 기소되었고,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5.16 군사정변 이후 제헌절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유민주당에 잠시 몸담았다가 탈당하였다.

1976년 1월 4일 경상북도 대구시 남구 대명7동 1917-15번지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선거구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경북 대구부 병[10]
이재민동포자치회
7,493표 (35.21%) 낙선 (2위)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대구시 병[11]

[[무소속(정치)|
무소속
]]
5,141표 (14.39%)
1952 1952년 지방선거 (경북 대구시의회 의원) 경북 대구시 제4 - 당선 초선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대구시 병[12] 26,650표 (51.60%) 당선 (1위) 초선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자유당(1951년)|
파일:자유당_투명.png
]]
14,355 (40.34%) 낙선 (2위)

4. 관련 문서


[1] 창씨명은 岩本光平(이와모토 코헤이)[2] 38세 우(雨) 항렬.[3] 1913년생이라는 기록도 있다.[4] 창씨명은 岩本典子(이와모토 노리코) 또는 혼전씨명 井上典子(이노우에 노리코)[5] 당선무효[6] 당시 한의원이 있었던 장관동 53번지에는 공교롭게도 현재도 '수민당인삼사'라는 한약재 상점이 운영되고 있다.[7] 이때 육군 특무부대에서 1등상사로 갓 전역해 조직폭력배가 되었던 신상사가 이우줄의 선거운동원으로 일했는데, 선거유세장에서 마이크를 밀어 쓰러뜨리고 소동을 일으킬려고 하다가 경찰에 구속된 바 있다. 1954년 5월 20일 조선일보 기사에 의하면, 이는 자유당 이갑성 후보측에서 꾸민 소동인 것처럼 사람들이 인식하게끔 꾸며낸 수작이었다고 한다.[8] 이후 대구시 동산동 127번지에서 정신제재소(正信製材所)를 경영했다.[9] 1958년 5월 7일 경향신문 기사에 자세한 정황이 나온다. 1958년 5월 5일 경상북도 대구시 병 선거구의 선거위원 9명이 경질되고 새로 선거위원이 보임되었는데, 당일 새벽 민주당 임문석 후보측 참관인 조헌수(趙憲秀)를 개표장에서 끌어내어 폭행을 가했던 김학진(金學珍)이라는 조직폭력배가 선거위원에 끼어 있는가 하면, 경상북도 선거위원 두 명이 참석하자 보임된 선거위원 중 김모씨는 책상을 두드리며 격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또한 자유당 이우줄 후보측 참관인은 민주당 임문석 후보에 돌연 시비를 걸고 임문석 후보측 참관인의 팔을 잡고 강제로 밖으로 끌고 나가려했으며, 괴한들이 전등을 멋대로 끈 뒤 의자를 뒤집고 노골적으로 욕설을 해대 떠들썩하게 하는 등 수 차례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에 당시 선거위원장으로 있던 최상택(崔祥澤, 1923 ~ ?) 판사는 졸도해 위독한 상태에 빠져 의사가 급하게 출동하기도 했다.[10] 제3선거구[11] 제3선거구[12] 제3선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