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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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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文碩
1903년[1] 12월 3일 ~ 1971년 6월 24일 (향년 67세)

1. 개요2. 생애3. 선거 이력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공무원, 법조인,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창씨명은 하야시 후미시게(林文茂).[2]

2. 생애

1903년 12월 3일 경상북도 영천군 예곡면 동괴동(現 영천시 괴연동)에서 태어났다. 1920년 3월 영천공립보통학교(現 경북영천초등학교), 1925년 3월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4월 1일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A 입학지원자 선발시험에 합격한 뒤 입학했다. 1927년 3월 법문학부 법학과 예과를 제2회로 수료하고 같은 해 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에 입학 허가를 받아 진학했으며, 1930년 3월 제2회로 졸업했다.

졸업 후 1930년 4월 평안북도 내무부 지방과 속(屬)에 임명되어 관료생활을 시작했으며, 1930년 12월 평안북도 내무부 산업과 속으로 자리를 옮겼다. 1932년 10월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1933년 11월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1933년 11월 평안북도지사 관방 속으로 발령되었고, 1934년 8월 고등관 7등으로 승진해 평안북도 운산군수, 1935년 11월에는 선천군수를 지냈다.

1936년 9월 고등관 6등으로 승진했고, 같은 해 10월 평안북도 선천군미곡통제조합 조합장을 겸직했다. 1937년 7월 14일 이사관으로 승진하여 황해도 내무부 산업과장 겸 물산진열관 관장에 부임했고, 1938년 6월 전라북도 내무부 지방과장으로 발령되었다.

1938년 12월 고등관 5등으로 승진했고, 1939년 1월부터 1941년 2월까지 재단법인 전북운영회 이사를 지냈다. 또한 1939년 2월부터 1939년 4월까지 전라북도도회 의원 5명을 인솔해 일본 제국괴뢰국으로서 수립한 중화민국 유신정부 치하의 상하이시·항저우시·난징시, 중화민국 임시정부 치하의 지난시·칭다오시 등지를 돌며 주둔 중이던 일본 제국 육군 장병들을 위문했다. 귀국 후에는 전라북도 각지를 돌며 중국 대륙 현지의 실정과 위문상황 등을 보고하는 한편, 영화회 등을 개최했다. 1939년 3월 조선총독부 육군병지원자훈련소 생도 전형시험 위원 및 생도추천자 전형위원, 1939년 5월 전라북도 임시국세조사위원회 위원, 1939년 6월 전라북도 지방리원양성소 강사를 지냈다.

1940년 4월 5일 하야시 후미시게(林文茂)로 개명했다.[3] 1940년 11월부터 전라북도 내무부 지방과장 겸 전라북도지사 관방 국민총력과장을 지냈다.

1941년 1월 고등관 5등 사무관으로 승진했고, 광주세무감독국 간세부장에 임명되었다. 1941년 2월 광주세무감독국 관할 소득심사위원회 위원을 거쳐 1941년 3월 고등관 4등으로 승진했다. 1942년 7월 《조선재무》 7월호에 「國語生活(국어생활)의 鍊成(연성)」을 발표해 일본 제국의 징병제 실시를 찬양하고 태평양 전쟁 등 일제의 침략 전쟁을 옹호하는 한편, 내선일체를 강조하면서 일본의 황도(皇道) 정신을 체득하고 완전한 황국신민이 되기 위해서는 일본어의 상용화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43년 9월 충청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을 지냈다.

1943년 10월 고등관 3등으로 승진했고, 1943년 12월부터 충청남도 참여관 겸 광공부장을 지냈다. 1944년 11월부터 1945년 8.15 광복 직전까지 전라남도 재무부장 등을 역임했다. 이처럼 관료로 출세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일본군을 위문하고 일제의 침략 전쟁을 찬양하는 글을 작성하면서 일제에 적극 협력하였다.

8.15 광복 후 1945년 11월 미군정청에 의해 전라남도 재무부장직에서 해임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다시 전라남도 재무부장 대리에 임명되었고, 1946년 1월 전라남도 재무부장직으로 복귀했다. 1946년 10월 공직에서 퇴임하고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변호사로 개업하는 한편, 한국민주당에 입당해 경상북도당 최고위원에 취임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1949년 및 1951년에 각각 제2·4대 조선변호사회 대구지회[4] 회장을 역임하였다. 1951년 3월에는 국제연합 한국협회 경북지부 이사를 지냈고, 대구신보사 취체역 사장를 지내기도 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경상북도 영천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김상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때 전국 곳곳에서 야당측 후보의 선거운동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여러 죄목을 뒤집어쓰고 경찰에 구속되는 사례가 많이 나오자, 선거 유세 때 "제발 박수치지 마십시오. 저를 지지했다해서 봉변당한 분이 많습니다."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1955년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고 신파에 속하였으며, 민주당 경상북도당 위원장을 지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시 병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첫 개표 당시에는 13,677표(38.44%)를 얻어 14,355표(40.34%)를 얻은 자유당 이우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으나, 개표 직후 개표 부정이 있었음을 제기하며 법원에 증거보전신청을 넣어 투표함을 가차압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1958년 7월 19일 재검표를 통해 실제로는 임문석 후보가 이우줄 후보에 2,800여 표차로 이긴 것이 드러나 이우줄 후보는 대법원에서 당선 무효 판결을 받았고, 임문석은 당선자가 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시 동구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이원만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6년 민중당을 탈당하여 신한당 창당에 참여하여 신한당 정무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67년 다시 신민당에 속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역시 민주공화당 이원만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정계를 은퇴하고 경북대학교 연합후원회 회장을 지냈다.

1971년 6월 24일 오후 4시 5분에 경상북도 대구시 삼덕동1가(現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1가) 1번지 자택에서 숙환간경변으로 사망했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도 참여관 부문과 조선총독부 사무관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 관료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선거구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영천군 갑[5]

13,036표 (44.15%) 낙선 (2위)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대구시 병[6]

파일:민주당 1955년 글자.png
- 당선 (1위) 초선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20,750표 (53.61%) 재선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대구시 동구[7] 11,388표 (23.58%) 낙선 (2위)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흰색 로고타입.svg
]]
24,534표 (41.65%)

[1] 1967년 간행된 대한민국인물연감에는 1906년생으로 등재돼 있다.[2] 民族正氣의 審判[3] 본래의 성씨인 임씨(林氏)를 그대로 써서 하야시(林)로 신고했기 때문에 1940년 5월 7일 조선총독부 관보 제3985호창씨개명이 아닌 "개명"이라고만 기재되어 있다.[4] 이후 대구변호사회로 개칭되었다가 1982년 12월 31일 대구지방변호사회로 개칭되었다.[5] 제19선거구[6] 제3선거구[7] 제2지역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