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1-17 22:57:50

에른스트 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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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nst Thälmann (1886년 4월 16일 ~ 1944년 8월 18일)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독일의 정치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활약했던 독일 공산당(KPD) 지도자였다.

2. 생애

함부르크의 항만노동자 출신으로 1902년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하여 활동하다가, 1915년 제1차 세계대전때 징집되어 1918년 독일제국 패망시까지 복무했다. 이후 1920년 독일 공산당(KPD)에 합류하였으며, 1921년에는 독일 공산당의 대표로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3년에는 함부르크의 무장봉기를 지도하였으나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고 이에 따라 한동안 도피생활을 하기도 한다.

이후 1924년에는 국회의원, 1925년에는 독일 공산당의 중앙위원장이 되어 당의 대중화를 도모하였다. 같은 해에 독일 공산당의 준군사단체였던 '적색전선전사동맹(Roter Frontkämpferbund)'의 수장에 오르면서 독일 공산당의 총재직도 겸임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공산당의 후보로 1925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지만 애초에 상대는 탄넨베르크 전투 이후 전 독일의 영웅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였기 때문에 광탈하고 만다. 텔만이 출마해서 중도층의 표를 상당부분 갉아먹은 덕분에, 힌덴부르크를 위협할 가장 큰 적수였던 가톨릭 중앙당빌헬름 마르크스가 피를 본다.

하지만 이후 텔만은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을 저지르는데,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하는) 중도 좌파 세력을 파괴하라' 라고 하는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지령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1928년, 6차 코민테른 대회를 기점으로, 스탈린주의에 충실한 방향으로 공격적, 극좌적 노선이 채택되면서 코민테른의 기능도 맛이가기 시작한 시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한창 세를 불리고 있던 나치를 견제하지 않고 독일 사회민주당(이하 '사민당'으로 표기) 세력과 전력을 다해 싸우다 보니, 이런 만평까지 나올 정도였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1919년, 스파르타쿠스단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리프크네히트룩셈부르크가 우익 준군사조직 자유군단에 의해 죽임을 당했는데, 그때 자유군단을 지휘한 구스타프 노스케(Gustav Noske), 그에게 지시를 내린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모두 사민당 소속이었다. 사민당과 공산당은 철전지 원수가 될 수 밖에 없는 관계이긴 했다.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출마한 텔만은 힌덴부르크, 히틀러에 이어 10.2%의 지지율로 3위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힌덴부르크의 당선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득표율이었다. 참고로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에 공산당이 내세운 슬로건이 "힌덴부르크를 뽑는 것은 히틀러를 뽑는 것이고, 히틀러를 뽑는 것은 전쟁으로 가는 길이다"(!)였는데 이후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흠좀무. 근데 그걸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나치는 내버려두고 사민당하고만 싸움?

이듬해인 1933년, 히틀러가 총리직에 오른 데 이어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계기로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면서 공산주의자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텔만을 비롯하여 4천여명의 공산당원들이 방화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당했으며, 텔만은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 투옥되었다. 수감생활 중이던 1939년 8월, 나치가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을 당시 소련측의 의중에 맞춰 그를 석방할려던 계획이 있었지만 무산되었다. #

이후 부헨발트 수용소에 줄곧 갇혀 지내다가,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패망이 짙어지자 히틀러의 명령으로 총살되었다고 전해진다. 나치는 그가 연합군 공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했었다.

3. 여담

  • 훗날 독일민주공화국(동독)에서는 그를 '영웅'으로 높이 평가했다. 1950년대에 동독에서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및 노래가 있었다.##
  •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국편에 서서 싸운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스칸디나비아 출신 의용군을 중심으로한 1,500명 규모의 대대가 만들어 졌으며, 그를 기리기 위해 '텔만 대대(Thälmann-Bataillon)'라고 이름 붙여졌다. 2차대전 당시 유고슬라비아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한 요시프 브로즈 티토 휘하에도 1943년에 조직된 텔만 대대가 존재했다. 독일군 탈영병과 현지 독일계 주민으로 구성된 부대로 약 200여 명 규모였다.
  • 스탈린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1928년, 측근이 벌인 공금횡령 추문을 덮으려다가 텔만은 당 중앙위원회에서 축출되었다. 이 때 스탈린이 개입하여 그를 위원장 자리에 복귀시켰고, 이후 당내 우파, 중도 좌파를 비롯하여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싸그리 쫓아내 버린다. 이는 독일 공산당의 '스탈린주의화'의 시작이었다.
  • 항목에서도 보듯이 사실 비판할 거리가 많은, 좌파들이 내분을 벌이다 파시스트 세력에게 하나 둘씩 집어 먹히게 한 전간기 스탈린주의자였지만 상술 된 반나치 전적과 장기간 수감 이후 전쟁 막바지 처형이란 극적인 최후 때문에 전후 독일 좌파, 특히 동독 정권에서 영웅시 되었다. 나치적 영향은 철저하게 배제하지만 여전히 국가적 정체성이나 새로운 형태의 민족주의를 주입시킬 필요가 있었던 동독 당국에선 스페인 내전 당시 독일계 국제여단원들과 더불어 사회주의 독일의 원류 정도로 추앙 받았다. 게다가 위에 수록 된 텔만찬양가는 동독에서도 종종 불려졌던 노래고, 선전 영화 텔만: 계급의 아들, 계급의 지도자 텔만 이부작은 전후 복구기간 동독 정권에서 큰 돈 투자하여 만든, 사회주의 리얼리즘 영화의 정수가 담겨 있는 영화로 크게 히트쳤기 때문에 실제 정치인으로서 행적 보다 나치에게 희생당한 순교자로서 대중에게 크게 각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