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00:59:52

프란시스코 피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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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스페인의 방송국 안테나3가 스페인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스페인인 100명'을 선정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후안 카를로스 1세 미겔 데 세르반테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아돌포 수아레스
6위 7위 8위 9위 10위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 펠리페 6세 파블로 피카소 예수의 테레사 펠리페 곤살레스
11위~100위
11위12위13위14위15위
이사벨 1세 세베로 오초아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호세 사파테로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16위17위18위19위20위
살바도르 달리 안토니오 가우디 엘 시드 알폰소 10세 페르난도 알론소
21위22위23위24위25위
프란시스코 데 고야 프란시스코 프랑코 안토니오 마차도 미겔 인두리안 미카엘 세르베투스
26위27위28위29위30위
로라 플로레스 펠리페 2세 카를로스 1세 로시오 주라도 그레고리오 마라뇬
31위32위33위34위35위
디에고 벨라스케스 이사벨 판토하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미겔 데 우나무노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36위37위38위39위40위
비센테 페레르 카밀로 호세 셀라 페드로 두케 다니 페드로사 파우 가솔
41위42위43위44위45위
다비드 비스발 라파엘 나달 카마롱 데 라 이슬라 아스투리아스의 펠라기우스 후안 라몬 히메네스
46위47위48위49위50위
산티아고 카리요 안토니오 반데라스 이냐시오 데 로욜라 페드로 알모도바르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
51위52위53위54위55위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미겔 에르난데스 후안 마누엘 세라 로페 데 베가 엘 그레코
56위57위58위59위60위
아구스티나 데 아라곤 호아킨 사비나 로살리아 데 카스트로 앙헬 니에토 마누엘 아사냐
61위62위63위64위65위
조르디 푸졸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알레한드로 산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에르난 코르테스
66위67위68위69위70위
카를로스 사인츠 파퀴리 텔모 사라 몽세라 카바예 마누엘 데 파야
71위72위73위74위75위
이삭 페랄 플라시도 도밍고 미겔 길라 루이스 부뉴엘 엘 코르도베스
76위77위78위79위80위
프란시스코 피사로 마리아노 바울바시드 라울 곤살레스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스 오초아
81위82위83위84위85위
아만시오 오르테가 마놀레테 에두아르도 칠리다 페란 아드리아 아란차 산체스 비카리오
86위87위88위89위90위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호아킨 로드리고 에밀리오 보틴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프란시스코 헨토
91위92위93위94위95위
세바 바예스테레스 이삭 알베니스 페데리코 바하몬테스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카르멘 아마야
96위97위98위99위100위
빈센트 블라스코 이바네스 마누엘 산타나 알리시아 코플로비츠 안토니오 루이스 솔러 자코네로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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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50505> 프란시스코 피사로 이 곤살레스
Francisco Pizarro y González
파일:Francisco-Pizarro-portrait-Spanish-Conqueror-of-Inca-Empire-Painted-1850.jpg
출생 1478년 3월 16일
카스티야 연합 왕국 에스트레마두라 트루히요
사망 1541년 6월 26일 (향년 63세)
누에바에스파냐 리마
국적 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스페인 왕국
직업 콩키스타도르
신체 약 174cm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Signature_of_Francisco_Pizarro_(cropped).png
1. 개요2. 잉카 원정 이전까지의 생애3. 잉카 원정
3.1. 명예로운 13인3.2. 국왕의 허가3.3. 푸냐의 전투
4. 황제(사파 잉카) 생포와 시해
4.1. 황제 아타우알파와 마주치다4.2. 황제 아타우알파의 체포4.3. 아타우알파를 처형하다
5. 쿠스코 입성과 새 황제 옹립6. 곤살로 피사로의 만행과 망코 잉카의 탈출7. 잉카, 정복자들에 맞서 싸우다
7.1. 쿠스코 포위전(Sitio del Cuzco)7.2. 삭사이와만 공략전7.3. 키수 유판키(Quizu Yupanqui)의 활약7.4. 오얀타이탐보 전투(Batalla de Ollantaytambo)7.5. 리마 포위전(Cerco de Lima)7.6. 알마그로의 귀환7.7. 잉카 봉기군의 해산7.8. 라스 살리나스 전투(Batalla de las Salinas)
8. 최후9. 사후10. 여담11. 평가
11.1. 피사로 옹호 논리 및 반박
12. 대중문화 및 서브컬쳐에 대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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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친,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 초기의 콩키스타도르.

남미의 강국인 잉카 제국을 정복하고 현재 페루의 수도인 리마를 건설했다. 공교롭게도 또 다른 유명한 콩키스타도르였던 에르난 코르테스와는 7촌 친척 사이였다.[1][2][3]

신대륙 정복 활동에 참여해 잉카 제국을 멸망시키고 막대한 부와 명예를 얻었다. 하지만 동료였던 디에고 데 알마그로를 처형한 탓[4]에 알마그로의 아들과 그 일파들에 의해 암살당했다.[5]

2. 잉카 원정 이전까지의 생애

곤살로 피사로 로드리게스 데아길라르(Gonzalo Pizarro Rodríguez de Aguilar)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신사(Hidalgo) 계급이었고, 이탈리아 전쟁에 참여해서 약간의 명성을 남긴 용병이었지만 집안 살림은 영 좋지 못했다고 한다.[6]

피사로의 고향인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은 예나 지금이나 스페인에서 가장 못사는 동네로, 고향에서 땅이나 파서 먹고 살기 싫었던 피사로는 20세가 되자마자 고향을 떠나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1502년에는 한몫 잡을 생각으로 신대륙으로 향했다.

이후 1513년에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의 원정대에 합류해 최초의 유럽인 태평양 목격자 중 한 사람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1519년에 파나마에서 권력투쟁이 발생하자, 피사로는 총독 페드라리아스 다빌라의 지시로 직접 발보아를 체포했다. 붙잡힌 발보아는 처형당했다. 이 과정에서 공도 세우고 줄도 잘 선 피사로는 파나마의 행정장관이 되었다. 비록 문맹인데다가 가난뱅이였지만 어쨌든 신사 가문 출신이었고, 스스로가 충분한 야망, 능력, 인망을 갖췄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다만 파나마 시티는 피사로가 행정장관이 된 해인 1519년에 세워졌다. 따라서 당시로서는 아직 개발 중인 밀림에 가까운 상태였다.

1521년,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에르난 코르테스가 3,000명 남짓의 군사로 아즈텍 제국을 정복했다는 소식이었다. 여기에 더해 코르테스가 정복한 지역의 먼 남쪽 어딘가에 황금의 나라가 있다는 소문까지 돌자, 여기에 자극받은 피사로는 동료인 디에고 데 알마그로 등과 함께 개척회사를 설립하고 아메리카 남쪽 지역을 향한 원정에 뛰어들었다.

3. 잉카 원정

아래 내용이 작성되기 전에는,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항목이 아닌 남동생 곤살로 피사로 항목에 잉카 정복 과정이 기록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하의 내용은 곤살로 항목에 기재된 내용과 더불어서 읽기를 추천한다.

3.1. 명예로운 13인

당시 남아메리카는 그야말로 미지의 땅이었다. 스페인의 영향력은 파나마 정도까지가 한계였다. 1524년에 이뤄진 최초의 남아메리카 원정은 정보 부족, 식량 부족, 적대적인 아메리카 원주민 때문에 대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다빌라는 피사로의 원정을 반대했다. 애초에 파나마가 탄생한지 5년밖에 안 되어 단 1명의 일손도 모자라는 상황이었으니, 젊은이들을 데려가는 피사로의 원정이 환영받기는 영 어려웠다.1526년에 다빌라가 니카라과로 전근하고 신임 총독 페드로 데로스리오스가 부임한 뒤에야 피사로는 제2차 원정을 위한 허가를 얻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원정 역시 초반에는 개고생 개뻘짓의 연속이었다. 급기야 사망자까지 발생하자, 열이 뻗친 데로스리오스는 연락대를 보내 피사로의 귀환을 종용했다.

그러나 피사로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그는 땅에 선을 그은 뒤에,
"나와 함께 할 사람은 이 선 안에 남아라!"
고 선언했다. 선 안에 남은 사람은 13명이었다. 이들은 이후 Trece de la Fama(명예로운 13인)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 귀환을 거부한 13인은 근처의 섬에서 거지꼴로 7개월을 버텼다. 결국 파나마에서도 어쩔 수 없이 원정이 지속되도록 허락할 수밖에 없었고, 지원군이 도착했다.

마침내 1528년, 원정대는 오늘날의 페루 북서부 툼베스에서 우호적인 부족과 접촉했다. 이들은 피사로에게 재물을 제공했고 내륙의 거대 제국에 대한 정보까지 주었다. 이때 훗날 통역으로 맹활약(?)하게 되는 원주민 2~3명까지 얻었다.

하지만, 그 사이 파나마 총독은 안토니오 데라가마로 바뀌었다. 데라가마는 피사로의 남미 원정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고 결국 피사로는 파나마 총독보다 더 좋은 끗발을 찾아 근 2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3.2. 국왕의 허가

공교롭게도 이때 에르난 코르테스 역시 아즈텍 정복에 대한 보고와 사후 지원을 부탁하기 위해 고국 스페인로 돌아와 카를로스 1세의 궁전에 머무르고 있던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피사로가 남쪽에 아즈텍만큼이나 부유한 국가가 존재한다고 보고하고, 그 증거로 각종 재물과 원주민 통역사까지 선보이니 카를로스 1세로선 그야말로 입이 절로 찢어지는 상황이었다. 카를로스 1세는 바로 피사로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고, 정복군의 총사령관, 미래의 신 카스티야 총독 지위를 약속했다. 여기에 더하여 250명의 군인을 모집할 권한까지 부여했다.

국왕의 허가를 받은 피사로는 고향으로 돌아가 어차피 땅이나 파먹고 살 신세였던 동생들인 에르난도 피사로와 후안 피사로, 곤살로 피사로를 꼬셔 함께 신대륙으로 떠났다. 이 동생들 중 에르난도는 30대의 나이로 큰 형과 마찬가지로 고향을 떠나 카나리아 제도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어 어느 정도 세상 물정을 아는 상태였으나, 나머지 동생 2명은 후안이 20세, 곤살로가 19세로 아직 어린 나이였으며 고향을 벗어나본 경험이 없었던 풋사과였다.

그런데 무리수이는 영 좋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된다. 결과적으로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동생들은 잉카 원정이 막장으로 가는데 큰 책임을 졌다. 둘째인 에르난도는 큰 형을 제외하면 가족 중에 유일하게 군대 경험이 있었던 탓인지, 원정 도중 동료 스페인인들에게도 매우 오만하게 굴었다. 스페인인들이 남긴 거의 모든 기록에
"에르난도는 오만방자한 인간, 극도로 혐오한다."
이라고 적혀 있었을 정도였다. 이는 결국 동료들과의 불화를 낳게 되었고 결국 파국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막내인 곤살로는 너무 좋고 싫고가 분명한 성격인 데다가 어린 탓인지 참을성이 없고 분별력이 부족했다. 결국 곤살로는 훗날 잉카 반란에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버렸다.

한편, 디에고 데 알마그로의 처우도 훗날 문제의 불씨를 낳게 되었다. 사실 원정대에서 선봉은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거의 도맡다시피 했고, 알마그로는 대체로 후방 지원 및 후발대 지휘를 맡았기 때문에, 피사로 입장에선 "내가 사장이고, 알마그로는 부하"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이때 국왕 카를로스 1세에게 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알마그로에게 약속된 몫은 피사로에 비해서 현저하게 적었으며, 이로 인해 결국 두 원정대의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3.3. 푸냐의 전투

1530년 연말에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선발대가 파나마를 출발해 1531년 초 툼베스에 도착했다.

그런데 지난번과 달리 툼베스의 분위기는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알고보니 피사로가 스페인로 떠났던 사이, 잉카 제국 내에 내전이 발생했던 것이다. 툼베스 역시 내전에 엮였던 탓에 제 코가 석자라 이방인들을 환대할 분위기가 영 아니었다. 결국 피사로는 상황 판단을 하고 가까운 푸냐 섬으로 옮기기로 결정한 후, 이를 실행에 옮겼다.

처음에 피사로 선발대는 평화롭게 푸냐 섬을 접수하고 원주민들과 교류했다고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감이 높아져 갔다. 당시 푸냐 섬 원주민들은 잉카 제국에 대한 소속감이 적은 데다가 호전적이었고, 인근 툼베스 사람들과도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피사로 원정대의 통역은 툼베스인이었던 것이다.

결국 긴장감이 높아져 가는 상황에서 툼베스 출신 통역이 스페인인들에게,
"지금 푸냐족이 당신들을 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라고 전하자, 그렇잖아도 자기들 인원이 200명도 안 될 정도로 너무 적어 겁에 질려 있었던 피사로 선발대는 선빵을 날려 푸냐족 지도자 몇 명을 체포, 고문한 후 툼베스로 보내버렸다. 그러자 툼베스인들은 기다렸다는 듯 이들을 죽여버렸다고 전해진다.

이런 일이 발생하자 푸냐족이 분노한 것은 당연지사였고, 결국 1531년 4월경에 전투가 벌어졌다. 그런데 수천 명의 푸냐족을 180명의 스페인인들이 쳐부숴 버렸다.[7] 하지만 전투 결과와 상관없이, 선발대는 푸냐족으로 가득찬 섬 한복판에 갇혀버린 셈이 되었고, 이후로도 피사로 원정대는 게릴라에 의해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원정대의 지휘관 중 한 명인 에르난도 데 소토[8]가 이끄는 후발대가 도착하자 피사로는 다시 툼베스로 귀환했다.

다만, 이 사건이 실제로 어떤 식으로 일어났는지는 불분명하다. 스페인 측의 기록에 따르면, 처음에 푸냐 섬에 진입할 때 당한 공격으로 스페인 측에서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이에 푸냐족 족장과 원로들을 생포한 뒤, 이들을 죽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전투라고 할 만한 충돌이나, 그에 따른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는지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후세의 몇몇 역사가들은, 이 푸냐의 전투가 바로 다음에 일어날 아타우알파 체포 사건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자신의 영토에서 웬 야만족들이 거하게 깽판을 친 이 사건을 전해들은 아타우알파가 스페인인들에게 비호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4. 황제(사파 잉카) 생포와 시해

4.1. 황제 아타우알파와 마주치다

1532년 5월에 피사로는 툼베스로 돌아간 뒤 이 곳에서 몇 개월을 보내다가 잉카 제국의 중심부까지 들어가보기로 결정했다. 2개월 정도의 긴 여정을 통해 안데스산맥을 넘어 카하마르카 부근에 다다를 수 있었고, 바로 근처에 잉카 황제(사파 잉카)인 아타우알파가 대군을 이끌고 도달해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기록과 이후 행적으로 볼 때, 피사로의 원래 계획은 잉카 황제의 신변을 확보한 뒤 충돌을 최소화하면서 잉카 제국을 접수하는 것이었던 듯하다. 즉, 에르난 코르테스의 케이스에서 좋은 부분(황제 신병 인수 뒤 이용)만 취하고 나쁜 부분(슬픔의 밤)은 버릴 심산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황제 본인이 대군을 이끌고 접근 중이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아타우알파는 형제인 우아스카르와의 대규모 내전에서 승리한 직후로, 수도 쿠스코를 향해 승리의 행군을 하던 참이었다. 포로가 된 우아스카르는 라마 오줌을 받아 마시며 두 발로 직접 걸어서 안데스 산맥을 넘어가던 중이었기 때문에,[9] 우아스카르의 속도에 맞춘 아타우알파의 행렬의 속도는 매우 느렸다고 한다. 혹설에 의하면, 아타우알파가 카하마르카에 온 첫 번째 목적은 온천욕이었다고도 한다.

때마침 푸냐에서 발생한 불쾌한 사건[10]에 관한 소식을 들은 아타우알파는 이 사건의 주범인 기묘한 이방인들이 근방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보려고 했다.

이렇게 되어 1532년 11월 5일, 에르난도 데 소토가 사자로 파견되어 스페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잉카 황제를 접견했다. 이때 아타우알파는 쿨하고 시크한 태도를 보였지만, 속으로는 난생 처음 본 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소토가 황제 쪽으로 말을 돌진시킨 뒤 급정지하는 기마술을 선보였을 때, 아타우알파는 쿨하게도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으나, 아타우알파의 친위대원들이 순간 겁을 먹고 뒷걸음질쳤다고 한다.[11] 소토가 떠난 뒤 친위대 전원은 목이 잘렸다. 하지만 이런 인상 깊은 사건까지 겪고도, 스페인인들을 깔본 아타우알파는 특별한 호위 병력 없이 다음 날 직접 찾아가보기로 했다.

한편, 예상치도 못하게 황제의 대군과 마주친 데다가 그가 직접 찾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피사로 원정대는 잔뜩 겁에 질려 뜬눈으로 밤을 샜다. 잉카 군대는 수만 명은 되어 보이는데[12], 자기들은 겨우 168명[13]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4.2. 황제 아타우알파의 체포

기록에 따르면, 당시 스페인인들은 겁에 질린 나머지 손대면 톡 터지는 봉선화 같은 상태였다. 스페인군이 총과 철기로 무장했다 한들 쪽수가 심하게 후달리는데다 포위당해 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일부는 워낙 두려운 나머지 오줌까지 지렸다고 한다.(...)

아타우알파가 가마를 타고 찾아오자 가장 먼저 나선 것은 도미니코회의 발베르데 수사였다. 발베르데 수사는 <레케리미엔토>(Requerimiento)를 읽어주었다고 한다. <레케리미엔토>는 스페인 국왕의 조서로, 아메리카 원주민과 접촉할 시에 의무적으로 읽어주도록 1513년부터 규정되어 있었다. 조서는
"교황 성하께서 스페인의 국왕 폐하에게 이 땅의 지배권을 부여하셨다! 그러니까 너의들은 스페인의 왕[14]에게 복종하고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 안 그러면 네놈들을 전부 노예로 삼고, 반항하다 죽으면 네놈들의 책임이다!"
같은 식으로 쓰여 있었다. 제정신이라면 수행원들을 이끌고 찾아온 크고 아름다운 대제국 잉카 황제의 코앞에서 감히 읽어서는 안 될 내용이었지만, 당시의 개척자들은 의무적으로 이걸 읽어줘야만 했다.[15][16]

기록에 따르면, 아타우알파는 통역의 문제였는지 협박이 안 먹혔는지 모르겠지만 "스페인 의 권리"나 "싸우자" 같은 내용에 별 관심을 안 보였다고 한다. 오히려 수사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다"며 조서와 함께 읽어준 가톨릭의 《성경》에 흥미를 보였다. 왜냐하면 이나 문자를 태어나서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이후 벌어진 일은 여러 가지 버전이 있다.
  •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야기는 닫혀 있는 《성경》을 받아 귀를 대본 아타우알파가, "이 안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담겨 있다고 했는데, 아무 소리도 안 들리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것이냐!!"하며 땅바닥에 던져버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베르너 헤어초크가 영화 <아귀레, 신의 분노>에서 원주민의 선교 이야기로 써먹은 탓에 꽤 유명해졌다.
  • 다음으로, 발베르데가 유일신인 하나님을 강조하면서 황제의 신성성을 인정하지 않자 이에 화가 난 아타우알파가 책을 빼앗아 내동댕이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 혹은, 아타우알파는 아무런 의도도 없이 책을 던졌다고도 한다. 왜냐하면 잉카의 황제는 원래 신성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황제가 먹다 남긴 뼈다귀조차 아랫 사람들이 공손하게 집어 황금 단지에 고이 모아둘 정도였다[17]. 따라서 이 경우 역시 마찬가지로 황제는 고의로 자신의 신성함을 강조하고 이방인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책을 땅에 던졌으며,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곧 아랫 사람 중 누군가가 와서 책을 집어 공손하게 다뤘을 것이라는 것이다.
  • 다른 버전도 있다. 발베르데 수사는 《성경》이 아닌 기도서를 손에 들고 있었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아타우알파가 냉큼 책을 집어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는 법도 몰라 쩔쩔맸고 책을 엎었다가 뒤집었다가 쓰다듬다가 흔들었다. 그러자 발베르데가 도와주려고 했다. 문제는 잉카 제국에서 아타우알파는 지고지엄한 황제이자 태양신의 대리인이었다는 점이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황제는 낯선 이방인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상황이 되자 열폭했다. 아타우알파는 발베르데의 팔을 때리고 혼자 책장을 넘겼지만, 아무리 봐도 알 리가 없었다. 어쨌든 황제는 이내 표정 관리를 하더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책을 자기 발 앞에 던졌다. 이후 발베르데가 원래 하던 연설을 끝내자, 아타우알파는 거만한 태도로 선언했다. "난 너희들이 여기 오는 동안 저지른 짓들을 알고 있다. 잡아간 족장과 재물을 내놔라. 안 그러면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겠다!" 그런 뒤에 황제는 가마 위에 우똑 서서 휘하 전사들에게 전쟁을 시작한다고 소리쳤다.
정리하면, 기록상으로 책을 던진 일은 분명히 일어났다. 다만 아타우알파가 정말로 "전쟁 시작"을 외쳤는지는 불분명하다. 잉카 쪽 기록은 남아있지 않고, 스페인인들이 아타우알파한테 책임을 돌리는 식으로 기록을 남겼을 가능성이 있다.

기록을 사실로 간주한다면, 콩키스타도르들에게 제대로 된 친위 병력도 없이 찾아간 아타우알파는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책을 집어 던졌고, 이어서 협박과 선전포고로 보이는 행동을 보인 셈이다. 이 행동에 특히 크게 흥분하고 겁먹은 발베르데는 스페인 측 진영으로 도망치며
"저들이 감히 하느님을 모독했소. 저놈같은 불경한 자들은 단죄를 할 수 밖에 없소이다! 어서 총공격을 명하세요! 어서요!"
며 소리쳤다고 한다. 이에 피사로는 반대편에 숨어있었던 포병에게 신호를 보냈고, 잉카인들을 향해 대포가 쏟아졌다. 곧바로 몰려나온 기병들도 돌진해 잉카인들을 난자했다. 이런 사태를 꿈에도 예상하지 못한 잉카인들은 제대로 된 반항도 못한 채 겁에 질려 도망치다가 대규모로 학살당했다.

이 사건으로 아타우알파는 피사로 원정대에게 생포되었으며, 무려 10만명에 달하는 대군이 완전히 개발살났고, 4,000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잉카인들이 학살당했다. 스페인 측의 피해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0명에서 최대 부상자 5명 정도였다.[18]

이때 잉카 고위 귀족들도 다수 살해되었다고 한다. 황제의 가마를 메는 것은 매우 영광스럽고 고귀한 일[19]이었기 때문에, 고위 귀족인 가마꾼들은 팔이 잘려나갈지언정 가마를 놓지 않았다. 가마꾼들이 죽으면 다른 귀족들이 달려와 가마를 멨다. 물론 전부 다 끔살당했다. 또, 사망자 중 다수는 도망치다가 넘어져 깔려 죽었다고 한다.

책 좀 집어던졌다고 광란의 대학살이 벌어지고 잉카 제국멸망의 첫걸음을 떼게 된 유명한 사건으로, 아타우알파의 체포(Captura de Atahualpa), 혹은 카하마르카 전투(Batalla de Cajamarca)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는 구대륙과 신대륙의 충돌로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4.3. 아타우알파를 처형하다

상황이 정리되자 피사로는 황제를 안심시켰다.
  • 첫째, 우리는 기독교의 신 아래 신성 로마 황제와 교황의 이름으로 수많은 왕국들을 정복한 무적의 전사들이니 전쟁에 지고 포로로 잡혔다고 치욕스럽게 생각하지 말 것.
  • 둘째, 툼베스를 비롯 저 멀리 아즈텍이나 파나마에서 우리에게 복종하고 충성한 사람들은 다 자유롭게 풀려났다는 것.
  • 셋째, 우리는 평화적으로 만나달라고 간청했는데 당신이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책을 집어던지며 거부했다는 것이었다.
아타우알파도 이번에는 용케 속뜻을 전부 알아들었는지, 이런 사태가 일어난 것은 휘하 장군들이 잘못된 간언을 했기 때문인데, 공교롭게도 그들은 이미 일전의 전투에서 전부 죽었다는 식으로 스페인인들의 비위를 맞췄으며, 살아남은 잉카인들에게 명령을 내려 더이상 도망치거나 당황하지 말고 계속 황제를 따르라고 했다.

이로서 피사로는 한숨 돌리게 된 셈이었다. 피사로의 근본적인 목적은, 바로 식민지 건설 및 본인이 그곳의 총독이 되는 것이기에 그로선 마치 대영제국이 인도 아대륙에서 그랬던 것처럼 잉카의 최고 통수권자인 황제를 최대한 옆에 끼고 있어야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식민지 건설이 가능했기 때문에[20] 황제를 죽인다거나 잉카에 대해 정복전쟁을 벌인다거나 할 계획은 처음부터 없었다. 에르난 코르테스는 그나마 휘하 병력이 1,000명 단위인 데다 틀락스칼텍이라는 든든한 동맹 원주민 세력이 있었다.

어찌되었든 아타우알파를 잡은 시점에서 피사로의 목표는 1차적으로 달성되었다. 이제 남은 건 차근차근 공을 들여 잉카의 통치체제를 스페인에 흡수하는 일 뿐이었는데.... 그런데 하필 아타우알파는 이방인들의 약점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에 대한 끝없는 탐욕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이들에게 제안을 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잡혀 있었던 방의 부피만큼 황금과 은을 줄 테니 풀어달라는 것이었다.

처음에 아타우알파의 처우는 나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생포된 이후에도 잉카인들 앞에선 냉정하고 거만한 태도를 유지하며 계속해서 시종과 시녀들의 시중을 받았다고 하며, 매일같이 만찬을 열어 스페인인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고 한다.

아타우알파는 스페인인들의 앞에선 황제라는 신분을 벗어던지고 매우 활기차고 다정하게 굴었다고 하는데, 특히 에르난도 데소토와 피사로 가문의 둘째인 에르난도 피사로와 친해져, 체스를 두는 법을 배웠고 몇 시간씩 같이 두었다고 한다. 스페인인들의 기록 또한 호의적이어서 황제는 매우 현명하고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막대한 양의 재화를 수집하고 분배하다보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는 것이다. 거의 반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으니. 아타우알파 입장에선, 수도 쿠스코 입성을 앞두고 인질로 잡혀 오도가도 못하고 꼼짝 못하게 된 것이기 때문에 좀이 쑤실 수밖에 없었다. 또, 피사로 입장에선 운 좋게 황제를 생포하긴 했으나 선발대 인원이 너무 적어 쿠스코에 입성하기엔 불안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툼베스까지 황제를 끌고 갈 수도 없었던 것이, 그렇게 되면 황금을 수집해서 운반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키스키스를 비롯한 잉카의 장군들은 자신의 주군을 구하겠다고 위협 행동까지 벌였다.

이렇게 시간이 지체되는 사이에 피사로의 구원 요청과 그에 수반한 황제 생포라는 희소식을 들은 디에고 데 알마그로가 서둘러 후발대를 이끌고 도착했는데, 이는 아타우알파의 사망을 낳은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버렸다. 왜냐면 후발대는 아타우알파 체포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재산 분배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었다. 알마그로의 일행 250명의 입장에선 바로 코앞에 막대한 양의 금•은 보화가 존재하는데 늦게 왔다는 이유로 손가락 하나 갖다 대지 못하게 되었으니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곧 스페인인들 사이에 질투와 불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알마그로 일행은 피사로의 의견에 일단 이의 있음부터 외치게 되었고 아타우알파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고 한다.

어쨌든 이러는 사이 잉카의 재물이 다 모였다. 그리고 피사로의 원정대가 전부 용광로에 넣고 녹여버렸다. 단지 휘하의 장병들에게 재물을 정확하게 분배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녹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기병 1인당 은 82kg와 금 41kg, 보병들에겐 그 절반이 분배되었다. 이를 2014년 기준 시세로 계산하면, 기병 1인당 18억원, 보병 1인당 9억원 정도 받은 셈이었다. 물론 16세기 시세로는 피사로의 경우, 기병의 7배를 받았으며, 아타우알파로부터 보너스로 80kg짜리 황금 가마까지 선물받았다고 한다. 한편, 카를로스 1세는 도장 한번 잘 찍어준 덕분에 금 1톤과 은 2톤을 받았다.

그런데 아타우알파는 절망했다. 황금을 다 모았는데도 풀려날 낌새는커녕 새로운 스페인인들이 도착한 데다가, 이들은 자기들이 재물 분배에서 제외되었다며 흉흉한 표정으로 자신을 째려보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무렵 피사로는 어느 잉카 귀족에게 무심결에 "각 족장마다 스페인인을 한 명씩 붙여서 제국을 통치할 계획"이라고 털어놓았는데 이를 아타우알파가 들어버렸다.

또 하필이면 피사로 집안의 둘째인 에르난도 피사로가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국왕 카를로스 1세에게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보고하고 추가 지원을 요청하는 동시에 형 피사로와 알마그로 간의 분쟁도 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스페인인들 중에서 가장 친했던 에르난도 피사로가 떠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아타우알파는 울음을 터뜨렸으며 에르난도가 떠나게 되면 알마그로 무리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에르난도 피사로 본인도 몇 년 뒤 국왕에게,
"폐하, 아타우알파가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있다하여, 자기도 스페인으로 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
라고 보고했다.

결국 아타우알파는 이들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지게 되었으며, 이런 의심을 주변인들에게 숨기지 않고 전했다. 이로 인해서 급기야 아타우알파가 비밀리에 휘하 장군들에게 전갈을 보냈으며, 이들이 카하마르카를 향해 행군 중이라는 소문까지 나돌게 되었다.

당연히 스페인인들은 심한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으며 에르난도 데소토가 기병 몇 명을 이끌고 정찰을 위해 떠났는데, 소토가 떠난 지 며칠 되지 않아 니카라과에서 데려온 원주민이 달려와,
"도시 주변에서 잉카군을 목격하였소!"
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스페인인들은 긴급 회의를 열었으며, 격론 끝에 아타우알파를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때,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황제를 살려두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으며 그의 처형에 반대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특히 알마그로가 강력하게 처형을 주장한 탓에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자신이 처형된다는 것을 알게 된 아타우알파는 다른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엉엉 울면서 이들의 뒤통수를 친다는 소문은 잘못된 것이라 주장했으며 황금과 은을 2배로 주겠다고 제의했지만, 이미 스페인인들은 의심암귀에 들린 상태였다.

결국 1533년 7월 25일, 아타우알파는 억지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21] 교살된 뒤 시신은 불태워졌다. 죄목은 근친상간[22], 일부다처제[23], 우상숭배였다. 기록에 따르면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매우 안타까운 나머지 흐느꼈다고 한다.

그런데 아타우알파가 죽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온다는 잉카 대군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에르난도 데 소토가 정찰을 마친 뒤 귀환하여 '아무리 찾아봐도 잉카군은 없습니다.'라고 보고하며 확인사살을 했다. 피사로는 또 한 차례 흐느꼈으며, 황제가 처형됐다는 소식을 들은 소토는 그야말로 격분했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된 대로 소토는 에르난도 피사로와 더불어 황제와 가장 친하게 지냈었기 때문이다. 이때 소토 역시 에르난도 피사로가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차리리 황제를 스페인으로 보내버리면 되는 것이지, 왜 굳이 죽이는 거냐고, 왜!"
고 말했다고 한다. 만약 소토나 에르난도 피사로 둘 중 한 사람만 현장에 있었어도 아타우알파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24]

5. 쿠스코 입성과 새 황제 옹립

스페인인들은 아타우알파의 형제인 투팍 우알파를 새로운 황제로 세웠다. 하지만 투팍 우알파는 스트레스 탓인지 유럽인들에게 얻은 질병 탓인지 제위에 오른 지 겨우 3개월 만에 붕어하고 말았다.

안데스 산맥을 넘는 도중에 아타우알파 지지자였던 찰쿠치마 장군을 사로잡아 처형하기도 했고, 아타우알파에 반대하거나 혹은 잉카 제국에 반항심이 컸던 원주민 세력의 환대를 받기도 했다. 3개월의 긴 여정 끝에 수도 쿠스코에 다다른 피사로 원정대는, 쿠스코 인근에서 아타우알파의 동생인 17살짜리 망코 잉카 유판키를 만나게 되었다.

한편 망코 잉카 입장에서는 스페인의 정복자들이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원래 형 아타우알파는 잉카의 북부 키토를 기반으로 황제 자리를 찬탈하고 쿠스코 일파를 대숙청한 까닭에 쿠스코 쪽 귀족들에게는 원수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망코 잉카 역시 아타우알파의 마수를 피해 숨어다니던 도망자 신세였으며, 아타우알파에게 체포되었다면 끔살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던 상태였다.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했던 피사로와 망코 잉카는 손을 잡았다. 피사로가 구 아타우알파 세력을 쿠스코에서 몰아내어 점령하고, 망코 잉카는 새로운 잉카 제국의 황제가 되기로 한 것이었다.

쿠스코에는 아타우알파의 장군이었던 키스키스(Quizquiz 혹은 Quisquis)가 남아있었고, 쿠스코 외곽에서 전투가 발생하여 하루 정도 침략자들의 입성을 저지하긴 했으나, 평지에서 스페인군을 상대하는 것은 바보짓이라는 것을 깨달은 키스키스가 키토로 후퇴했다.

1533년 11월 중순, 마침내 피사로의 원정대는 쿠스코에 입성했으며, 망코 잉카가 새 황제로 등극했다.

목숨이 달랑달랑했던 상황에서 순식간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망코 잉카로서는 그야말로 인생역전이었다. 스페인인들을 케찰코아틀의 잉카 버전인 창조신 비라코차로 대우했으며, 카하마르카에서 아타우알파가 뿌린 것보다 더 많은 재물을 자진해서 원정대에게 뿌렸다고 한다. 그동안 손가락만 빨던 알마그로 일행도 이번에는 제대로 챙길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1535년 중반까지 1년 반 동안 모두에게 바쁜 시간이 흘러갔다. 망코 잉카 유판키와 피사로는 제국의 통치체계를 정돈하고 아타우알파 세력을 진압했다. 몇 차례 원정 끝에 키스키스는 부하들의 배신으로 1535년에 사망했고 키토는 1536년 경에 완전히 정복되었다. 망코 잉카는 제국의 행정체계를 복구했으며 알마그로의 힘을 빌려 반대세력이었던 이복형제 아톡 소파를 암살했다. 피사로 원정대 중 잉카에 남기로 한 사람들에겐 엥코미엔다(encomienda)[25]가 수여되었다. 그리고 피사로는 쿠스코를 떠나 툼베스 해변에 신도시 리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26]

단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피사로의 세력과 알마그로의 세력 간의 불화가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알마그로는 어느 샌가 망코 잉카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는 본국에서 온 연락 때문이었다. 에르난도 피사로를 통해 원정대의 불화를 전해들은 카를로스 1세가 잉카를 둘로 나눠서 피사로에게 북쪽, 알마그로에게 남쪽을 맡기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결정으로 알마그로는 국왕에 의해 피사로와 동급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피사로의 동생들은 이에 크게 반발하게 되었다. 급기야는 쿠스코에서 정복자들 사이에 가벼운 내전까지 발생했다.

결국 리마에서 이런 한심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피사로가 직접 중재에 나섰다. 일단 쿠스코의 통치권은 제쳐두기로 하고 알마그로에게 아직 정복하지 않은 잉카 남쪽의 권리를 인정하는 동시에 대규모의 남방 원정대를 조직, 지원해주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혹한 알마그로는 원정대를 이끌고 미지의 남쪽으로 떠났다. 그리고 이 무렵에 알마그로의 지지자로 돌아섰던 에르난도 데소토는 아예 파나마로 돌아가 잉카에서 얻은 재물을 바탕으로 새로운 원정대를 조직하여 북아메리카로 떠나버렸다.[27]

이렇게 해서 상황은 대충 정리되었다. 아타우알파의 세력 및 내전을 틈타 불순한 태도를 보인 부족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망코 잉카는 황제로서의 지위를 확실히 굳혔다. 또한 스페인인들 사이의 갈등은 알마그로가 남쪽으로 떠나자 대충 봉합되었다. 피사로는 이제 더 이상 신경 쓸 일 없이 리마 건설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되었으며, 쿠스코의 망코 잉카 곁에는 피사로의 동생들인 후안 피사로와 곤살로 피사로가 남게 되었다.

6. 곤살로 피사로의 만행과 망코 잉카의 탈출

피사로 가문의 막내였던 곤살로 피사로는 쿠스코에 남은 1535년 당시 만 25세였다. 형제 중에선 가장 나이가 어리고 경험도 적었다. 그와 함께 쿠스코에 남은 후안 역시 곤살로보다 1살 많을 뿐이었기에 경험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애송이들에게 잉카 황제를 맡긴 것은 그야말로 최악의 대실수였다. 사실 원정대의 고참급 지휘관들은 북아메리카며, 칠레며 리마며 뿔뿔이 흩어진 까닭에 피사로로선 자기 동생들 외엔 딱히 믿을 만한 사람도 없긴 했지만 어차피 둘째 동생인 에르난도[28]가 본국에서 돌아오는 즉시 쿠스코로 보낼 계획이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만 이들을 믿고 맡기기로 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안과 곤살로는 그새를 못 참고 일을 저질러버렸다.

알마그로, 소토 같은 고참급 인물들이 떠나고, 큰 형은 머나먼 리마에 머물러 있는 탓에 이들을 통제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밤낮으로 망코 잉카 유판키를 쥐어짜 재물을 뜯어낸 것은 그렇다치고, 여자여자는 다 건드리고 다니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사실 큰 형이나 알마그로나 모두 잉카 귀족 여자를 으로 삼긴 했다. 하지만 피사로나 알마그로는 이미 5~60대인 탓에 부인 한두 명을 얻는 것쯤으로 만족했지만, 후안과 곤살로는 20대 초반의 한창 때였다.[29]

이 와중에도 망코 잉카는 여전히 이들을 창조신 비라코챠로 대우했고 모든 요구를 들어주었으나, 결국 더 이상 참기 어려운 사태가 발생했다. 곤살로가 황제의 여동생이자 황후쿠라 오크요(Cura Ocllo)를 탐내기 시작한 것이었다.[30]

황후를 강탈당할 상황에 직면한 망코 잉카는, 곤살로에게 미녀를 있는 대로 다 갖다 바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급기야는 다른 여동생인 잉힐(Inghil)을 황후로 속여 바치기까지 했다고 한다. 처음에 속아넘어간 곤살로는 잉카인들이 보거나 말거나 잉힐을 주물럭거리며 끌고 가 신방을 차렸지만, 애초에 서로 다른 사람을 갖고 끝까지 속이는 것은 무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곤살로에게 들켰으며, 열이 받은 곤살로는 강제로 황후 쿠라 오크요를 납치했다.

이런 참담하기 그지없는 사건을 계기로 망코 잉카는 이 무례하고 탐욕스러운 침략자들에게 맞서 저항을 하기로 결심하고, 영토 각지에 전갈을 보내어 궐기를 준비하게 한 후 쿠스코를 탈출하려고 했지만, 결국 후안과 곤살로에게 발각되어 체포된 뒤에 감금되었다. 이때 곤살로는 또 한 차례 초대형 사고를 저지르는데, 자그마치 황제인 망코 잉카를 족쇄와 사슬로 묶고 그의 몸 위로 오줌을 갈겼다. 당연하지만, 쿠라 오크요를 비롯한 망코 잉카의 모든 부인들은 이 시점에서 후안과 곤살로에게 끌려가 능욕을 당했고 또 한 차례 막대한 재물을 뜯어냈다.

결국 망코 잉카는 그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반란을 일으키기로 굳게 결심했으며, 이 소문을 들은 잉카 제국 전역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쿠스코 외곽에서는 일부 원주민들이 몇 명의 스페인인들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고 한다.

이런 와중인 1536년 2월, 마침내 본국에서 돌아온 피사로 가문의 둘째 에르난도가 쿠스코에 도착했다. 에르난도는 도착 즉시 동생들이 저지른 초대형 사고의 수습에 나섰는데, 망코 잉카는 즉시 풀려났고, 에르난도는 그에게 일전의 유감스러운 일들에 대해 사과했으며, 다시 황제로서의 대우를 했다. 물론 NTR당했던 황제의 부인들도 모두 풀려났다.

아타우알파를 대한 태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에르난도는 잉카 황제의 중요성을 제대로 깨닫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실 에르난도 개인의 판단뿐 아니라 본국의 카를로스 1세 또한 비슷한 판단을 내린 상태였다. 카를로스 1세는 제대로 된 개척과 안정을 위해 망코 잉카가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망코 잉카를 주권국의 황제로 대우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망코 잉카는 이미 결단을 내린 상태였다. 결국 그는 에르난도 피사로의 호의를 이용하여, 신전에서 기도를 올리며 황금 신상을 바치겠다는 핑계를 대고 쿠스코를 탈출했다.

7. 잉카, 정복자들에 맞서 싸우다

잉카 제국은 스페인 정복자들에 맞서 최초이자 최후의 전면전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 전쟁은 스페인의 잉카 정복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이 된다. 이 전쟁의 결과로 잉카는 사실상 멸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7.1. 쿠스코 포위전(Sitio del Cuz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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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537년 6월, 쿠스코 포위전 혹은 '쿠스코 공성전'(Sitio del Cuzco, Cerco del Cuzco)으로 알려진 전투가 일어나게 되었다.

쿠스코를 빠져나온 망코 잉카는 잉카인들에게
"저 스페인인들을 비라코챠로 생각했던 내가 불찰이었다."
고 선언하며, 황후를 빼앗겼던 것과 오줌 세례를 받은 흑역사까지 낱낱이 고했다. 당연히 잉카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기세가 되었으며, 추정치 약 10~200,000명의 대군이 조직되어, 10개월간 쿠스코를 포위했다.

이때 쿠스코에 남아있던 스페인인들의 숫자는 기록에 따르면 정확하게 196명이었다. 다만 흑인 노예중앙아메리카에서 데려온 하인들이 존재했으며, 3~500명으로 추정되는 스페인 정복자 세력을 지지하는 잉카 원주민들[31] 이 있었다. 다만, 하인이나 원주민 지지자들은 직접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며, 스페인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병참, 보급, 도로 건설, 구호 활동 같은 보조 임무를 맡았다. 이들에겐 갑옷과 무기가 허접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32]

군사적으로 따져봤을 때 이 포위전은 명백한 실수였다.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당시로서는 거의 최신식 병기라고 할 수 있는 철제 무기와 투구 및 갑옷으로 무장했으며 대포, 총기까지 갖춘 상태였던 반면에, 잉카인들은 전통적인 직물 소재의 갑옷에 청동제 둔기와 나무곤봉으로 무장한 알보병이 주력이었다. 궁병이 있기는 했으나 저 멀리 아마존 강 유역에서 불러모은 부족민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잉카인들도 머리가 안 좋은 게 아니어서 투석[33]투창, 화공으로 대항했으나, 병기의 차이가 너무나도 컸다. 잉카의 주력 무기인 나무곤봉으로는 스페인인들의 튼튼한 철제 갑옷과 투구를 뚫을 수 없었다. 손이나 목처럼 일부 노출된 부위에 맞히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부러 맞히기엔 드러난 면적이 너무 작았고 맞히더라도 붓거나 멍들지언정 죽이기는 힘들었다는 게 문제였다.

정황상 이 시점에서 잉카인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전략전술은 게릴라이었다. 잉카 제국은 험한 산지로 가득 찬 광대한 곳이었기 때문에 영토 곳곳을 요새화하고, 정복을 위해서 파견된 스페인군이 진형을 갖추지 않고 이동할 때 험악한 지형을 이용하여 하나씩 각개격파해야 했다. 그러나 이 전술이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 망코 잉카는 카하마르카 전투에서 일어난 일을 전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알마그로와 함께 키토의 반란군을 잡기 위해 나섰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인들의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전략적 선택, 즉 어택땅 공격을 시전한 것은 대실수였다.

결국 대전투가 벌어졌으나 스페인군은 끝내 잉카 대군을 막아냈다. 그렇다고는 하나 콩키스타도르들에게도 이 전투는 매우 어려운 전투였던 듯하다. 별의별 기록을 다 남긴 스페인인들답지 않게 사상자 수는 기록하지 않아 불분명하긴 하나, 스페인 측의 피해도 컸다는 것은 분명하다.

7.2. 삭사이와만 공략전

포위가 시작되자 쿠스코의 스페인 정복자들은 잉카군이 점령한 쿠스코의 방위 요새인 삭사이와만(Sacsayhuamán)[34]을 점령하기로 했다. 삭사이와만 요새는 쿠스코 공략 및 방어에 있어 전략적 가치가 높은 곳이었다.

공략 첫 날 피사로 가문의 셋째인 후안 피사로가 잉카군 수비대의 투석에 턱을 맞았다. 다음 날에는 턱이 너무 부은 탓에 투구를 쓸 수가 없어서 결국 맨 머리로 전장에 나섰다가 머리에 돌을 맞아 두개골이 골절되었고, 결국 그 부상으로 후안은 3일 후에 사망했다.[35]

이 공략전은 처절하기 그지없었기에, 후안 피사로 외에도 숱한 전사자가 발생했다. 어떤 스페인인 병사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전쟁"
이라는 기록까지 남기기도 했는데 이 전투에서는 인질이나 몸값 같은 제약이 전혀 없는 상황인데다가, 요새의 중요성을 양측 모두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정사정없는 살육전이 벌어졌다.

스페인측의 기록에 따르면, 잉카인 3,000명이 전사했으며 요새 주위는 시체로 가득했다고 한다. 잉카 쪽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남은 잉카인들 대다수가 투신자살을 택했으며,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잉카의 어느 지휘관은 화살을 2대나 맞은 상태에서도 끝까지 싸우다가 투신자살을 택했다고 한다.[36] 한편, 스페인 측의 피해는 후안 피사로를 포함하여 전사자 4명에 불과했다. 다만, 이 요새를 점령하기 이전에 정찰 등에 나섰다가 사망한 이들이 30명 정도였다고 한다.
어쨌든 정복자들은 삭사이와만 요새를 점령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방어에 필요한 전초기지를 얻게 되었고, 이는 쿠스코 포위전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7.3. 키수 유판키(Quizu Yupanqui)의 활약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리마에서 발이 묶여 애만 태우고 있었다.

피사로는 처음에 쿠스코의 막장 상황을 까맣게 모르고, 리마를 건설하며 행복한 노후를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쿠스코 포위전이 시작되기 이틀 전에 망코 잉카의 탈출과 대규모 반란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쿠스코와의 연락은 두절되었다.

망코 잉카의 봉기를 듣기 이전까지 피사로는 잉카 원정은 이미 끝났다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구원 요청을 하는 편지에 본인이 직접 이렇게 적었기 때문이다.
"노년에 이런 시련이 닥칠 줄은 몰랐다" "평생에 걸친 업적이 물거품이 될 위기다"

어쨌거나 피사로는 즉각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스페인의 식민지인 파나마에 SOS를 날렸지만 당시 교통수단을 감안하면 구원병이 도착하는 것은 수개월 뒤의 일이었다. 때문에 피사로는 일단 리마 주둔병 중에서 구원부대를 편성하여 쿠스코와 인근의 스페인군 주둔지역으로 파견했다. 하지만 이 구원부대는 도착도 못 하고 소멸했다.

잉카의 명장 키수 유판키(Quizu Yupanqui) 장군이 망코 잉카에게 북부에서 오는 피사로의 원군을 차단하라는 명령을 받고 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잉카 북부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특히 유판키는 잉카군의 무장으로는 평지에서의 기병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대신, 기병의 약점을 철저히 파고들어 리마-쿠스코를 향할 때 무조건 건너야 하는 산에서 스페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계곡 위에 매복했다가 이동 중인 스페인 기병대에게 바위를 굴려 공격한 것이다. 그간 전통적으로 기병을 경험하지 못했던 잉카인들의 이 단순호쾌한 방식으로 리마에서 출발했던 구원부대는 거의 전멸했다. 이렇게 몰살된 스페인군은 무려 200명. 당시 쿠스코와 리마, 그 인근에 주둔한 스페인의 총 병력은 500명 수준이었으므로 이 전투의 참패로 날아간 병력은 무려 40%. 이 정도만으로도 스페인 측에 얼마나 큰 피해였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유판키는 동쪽에 있는 하우하(Jauja)를 야습해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던 스페인인 엔코미엔다르[37] 수십 명을 살해했다. 그동안 쌓인 원한이 깊었던 탓에 붙잡힌 이들은 하루 종일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오체분시당했다고 하며, 흑인 노예들과 말들도 몽땅 끔살당했다. 하지만 이 중에 한 사람이 간신히 리마로의 탈출에 성공하고 파견했던 구원병력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부대가 자초지종이 담긴 전갈을 보냄으로써, 피사로는 유판키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며 더 이상 쿠스코에 구원대를 보내어 몰살당하게 하는 뻘짓을 피할 수가 있게 되었다.

7.4. 오얀타이탐보 전투(Batalla de Ollantaytambo)

쿠스코 역시 구원지원이 없이 고립된 것은 둘째치고, 리마로부터 어떤 소식도 받을 수 없었다. 이와 반대로 망코 잉카는 유판키의 승전 소식과 전리품을 받고 큰 기쁨에 싸이게 되었다. 그래서 이 전리품들을 쿠스코의 스페인인들에게 자랑삼아 던졌는데 문제는 이 전리품들이 바로 스페인인들의 머리와 조각조각 찢어진 편지였던 것이다.

스페인인들의 머리통은 일단 그렇다치고[38] 편지는 엄청난 실수였다. 이 편지는 사실 리마에서 고립되어 있는 쿠스코의 병력에게 보내는 전갈이었고, 쿠스코의 수비병들은 이 조각난 편지들을 한데 모아서 복원했다. 이렇게 해서 리마에서 보낸 전갈을 통해
"우리는 너희 상황을 알고 있으며, 구원병력도 계속 보낼 것이다. 참고로 요즘 본국에서는 이런저런 일들이 있다."
등의 내용을 읽고 쿠스코의 스페인인들은 용기를 얻게 되었다. 잉카인들은 문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찢어진 조각을 모아서 읽을 수 있다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 저지른 실수였던 것이다.

어쨌든 여건이 불리함을 알게 된 피사로 가문의 둘째이자 쿠스코 수비대의 총 지휘관이었던 에르난도 피사로는 단 한 번의 도박으로 전황을 뒤집기로 했다. 쿠스코에서 50km 떨어진 망코 잉카의 본영, 즉 오얀타이탐보를 습격해 망코 잉카를 생포하기로 한 것이었다. 때는 1537년 1월이었다.

하지만 잉카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본진 방어를 게을리할 리가 없었으며 오얀타이탐보의 한 계곡에서 3만 명의 수비대가 에르난도의 공세를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 수비대에는 아마조니아에서 불러온 정예 궁병까지 존재했던 데다가, 싸움이 벌어진 곳은 물이 흐르는 곳으로 기병들에게 영 불리한 지형이었다. 심지어 잉카인들은 둑을 터뜨려 기마대의 기동력을 방해하는 작전까지 구사했다. 결국 에르난도 부대는 숱한 사상자를 내고 쿠스코로 철수했다. 이것이 오얀타이탐보 전투(Batalla de Ollantaytambo)이다.

다만 이 전투의 결과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나 대부분의 견해는 "스페인 측의 확실한 패배"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 전투 이후 스페인인들은 다시 요새에 처박혀 있어야 했으며, 잉카인들과 망코 잉카의 사기는 하늘을 찔러 쿠스코에 대한 공세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스페인인들이 "비록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전쟁에는 이겼다"라는 견해도 있다. 일단 이번 전투에서도 잉카인들의 피해 규모가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승리에 고무된 탓인지 망코 잉카가 바로 아래에서 언급될 대실수를 저지르게 되었다.

7.5. 리마 포위전(Cerco de Lima)

오얀타이탐보 전투의 승리 이후, 망코 잉카는 유판키에게 전갈을 보냈다.
"리마를 공격하고 침략자들을 없애버리라."
라는 것이었다. 단,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가급적이면 생포하라는 명령도 덧붙였다고 한다.

망코 잉카가 대체 왜 이러한 시점에서 리마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대부분은 당시 잉카의 우세와 유판키의 활약과 오얀타이탐보 전투의 승리 덕분에 승리에 도취된 상태여서 그랬다고 보고 있다.

사실 전략적으로 따져봤을 때 리마 공격은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스페인인들의 진출기지이자 본거지인 리마만 없다면 잉카 제국 내의 모든 스페인인들은 고립되는 신세가 되며, 쿠스코 역시 끝장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현실적으로 성공 가능성이 있냐는 것과 잉카군과 스페인군의 무장차이는 무려 4천년이라는 세월의 차이[39]가 있었다.

그동안 직접적인 전투를 피하고 단순히 보급선과 지원군을 끊어먹기에 치중한 것으로 볼 때, 유판키는 리마 점령 가능성에 회의적이었을 것이라고 몇몇 역사가들은 추정한다. 어쨌거나 황제의 명령을 받은 이상, 거부할 권한 따위 없었고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유판키는 울며 겨자먹기로 리마를 포위하기 위해 나섰다. 기록에 따르면, 리마를 포위한 지 6일째가 되었을 때 유판키는,
"오늘 리마를 점령하거나, 아니면 싸우다 죽기로 했다. 오늘 밤엔 리마로 들어가 스페인인들을 다 죽일 것이며, 스페인 여인들은 다 나눠가져서 힘세고 튼튼한 전사들을 낳는 데 쓸 것이다. 내가 죽으면 너네도 죽고, 내가 도망치면 너네도 도망친다는 것을 잊으면 아니 될 것이야!!!"
라고 부하들에게 연설한 뒤 총공세에 나섰다고 한다.

당시 리마에 주둔중이던 스페인 병력은 약 100명이었고, 잉카군은 황제의 친위군 중에서 최정예였던 40,000명이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그런데 문제가 2가지 있었다. 첫째, 스페인인들에게는 잉카인 동맹군이 있었다. 아타우알파가 인질이었던 시절,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 자기 여동생인 키스페 시사(Quispe Sisa)를 시집보냈는데,[40] 이 여자의 어머니[41]가 꽤나 든든했던 것이다. 장모님의 사위 사랑은 지극하기 그지없어서 피사로에게 2만 명의 원군을 보내주었다.[42][43]
둘째, 잉카인들은 전투 시에 총지휘관이 최전방에 나서는 관습이 있었다. 지휘관은 가마를 탔기 때문에, 잉카인들끼리의 싸움이라면 이들을 죽이는 게 영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차피 잉카인들의 무기가 다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상대는 스페인인들이었고 때문에 가마건 뭐건 일점사로 장렬하게 전사했다. 기록에 따르면, 스페인인들은 그냥 맨 앞에 나서는 놈을 죽였더니 그게 바로 총사령관이었다고 한다.

셋째, 총과 대포, 기마대 활용이 힘든 산악전이 아닌 평지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평지라면 기마대의 압도적인 기동력과 돌파력으로 살릴수 있는데다가 돌팔매나 돌 몽둥이가 주무기인 잉카군이 총, 대포를 소지한 스페인군에게 그저 거대한 과녘에 불구했고 근접전에서도 철제무기와 방어구를 장착한 스페인군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입히지도 못 했다. 당연히 3면을 동시에 공격한다 한들 지리적 이점은 스페인에게 있는 이상 소수의 스페인군이 잉카군을 압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유판키가 이끄는 잉카군은 대패했고 지휘관인 유판키도 전사했다. 이는 단순히 한 전투에서의 패배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리마와 쿠스코 사이에서 호랑이처럼 굳건히 버티던 유판키군이 사라지면서 다시 리마–쿠스코가 연결되어 버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나마 잉카인들에게 다행인 것은 리마와 쿠스코 간의 거리가 워낙 먼데다가 리마에 주둔중인 스페인 병력의 숫자가 너무 적어, 단기간 내에 리마에서 쿠스코를 지원하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한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 전투 이후 4개월이 더 지날 시점까지 쿠스코 포위전은 계속되었다. 결국 포위가 풀리기 전에 리마에서 구원병력이 출발하지만 워낙에 거리가 멀었던 탓에 포위가 풀리기 전까지 도착하지는 못했다.

7.6. 알마그로의 귀환

잉카와 스페인 정복자들간의 전쟁이 일어난 지 10개월이 지난 1537년 1월 혹은 2월.

장장 10개월이 지났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잉카 측의 사망자 수는 스페인의 100배 수준에 이르렀다. 사실 동서고금 어느 경우에나 공성전공격하는 쪽이 더 어려웠다. 게다가 잉카군은 본진의 이점을 갖지 못했었는데 애초에 잉카군은 제국 여러 곳의 부족들이 모인 연합군으로서 사실상 원정군이나 다름없었던 처지였다. 게다가 이 곳은 남아메리카 안데스산맥 중턱이었다. 지속적으로 인력을 투입하는 것도, 식량을 조달하는 것도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즉, 공세종말점에 다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하필 이 시점에서 갑작스럽게도, 약 2년 전에 남쪽으로 떠났던 디에고 데 알마그로가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쿠스코로 향하는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현재 잉카군은 200명도 채 안 되는 병력이 지키는 쿠스코도 함락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리마 쪽에서도 구원부대가 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실 알마그로는 지난 2년 동안 아무 소득도 없이 개고생만 실컷하고 실의에 빠져 귀환하던 차였다. 당시 알마그로가 향했던 "잉카의 남쪽"이란 곧 오늘날의 칠레로서, 당시 이 지역은 잉카의 지배지라기보단 마푸체족의 반독립 지역이었다. 마푸체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들은 19세기 후반까지도 스페인에게 저항한 근성갑의 전투민족이었다.[44] 게다가 지형은 페루보다도 더 험했다. 당연히 500명 정도의 병력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노릇이었다.[45]

‘잉카 남부 총독’이란 야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귀환중이던 알마그로 일행에게 '망코 잉카의 봉기'는 희소식이었다. 알마그로 일행은, 망코 잉카와 손을 잡고, 피사로의 몫을 뺏는다는 참으로 기막힌 계획을 생각해냈다. 게다가 알마그로는 예전에 망코 잉카와 나름대로 친분을 쌓아두었었기 때문에 자신감이 더해졌다. 이에 재빨리 쿠스코로 진군하여 인근에 다다르자 망코 잉카에게 사절을 보내 동맹을 제의했다. 여기에 더해 편지에서는 자신의 병력을 700명으로 부풀리고 2,000명이 더 올거라며 뻥을 쳐 자신들의 몸값을 부풀리는 얄팍한 수작까지 부렸다.

한편 도착은 했는데 구원은 안 해 주는 알마그로의 꼴을 보고 그의 속셈을 알아차린 쿠스코의 에르난도 피사로 역시 질세라 망코 잉카에게 사절을 보냈다. '알마그로를 믿지 말고, 지난 일은 다 잊으며 우리와 화해하자'는 것이었다. 망코 잉카로선 꽃놀이 패 2장을 손에 쥐게 된 셈이었지만, 아무래도 황후를 뺏기고 오줌세례를 받아야 했으며(...) 10개월 동안 피 튀기게 싸운 상대였던 피사로 형제들보단 알마그로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결국 피사로 형제 쪽은 무시하고 알마그로와 연락을 취했다.

마지막 순간, 망코 잉카는 과연 알마그로가 얼마나 믿을만한지 의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알마그로의 사절을 테스트해 보는데, 바로 알마그로의 사절에게, 쿠스코 측에서 사로잡은 스페인인 포로를 죽여 보라고 한 것이었다. 이 사절은 고민 끝에 동족인 스페인인을 죽이는 것을 거부했고, 이에 망코 잉카는 '스페인인들은 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사절을 가두어 버렸다.[46] 이로써 망코 잉카와 스페인인들 간의 동맹 혹은 화해는 무산되었다.

7.7. 잉카 봉기군의 해산

쿠스코 포위전이 시작된 지 10개월, 아타우알파가 죽고 망코 잉카가 등극한 지 4년째인 1537년 3월경.

망코 잉카는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알마그로와 동맹을 거부한 이상 이들은 적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으며, 이로써 적대하는 스페인의 병력은 3배로 증가한 셈이었다. 더 이상 싸워봤자 남은 것은 패배뿐이라고 판단한 망코 잉카는 군대를 해산한 뒤 스페인인들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으로 도주하기로 결심했다. 이때 선택한 지역이 잉카 동부, 즉 안티수유였다. 안티수유는 안데스 산맥과 아마존 강 사이의 매우 험한 지역으로, 이 곳이라면 스페인인들이 접근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망코 잉카는 잉카인들에게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으나, 이 말을 믿는 잉카인들은 별로 없었다. 망코 잉카의 아들이자 차차기 황제인 티투 쿠시(Titu Cusi)는 이때 한 족장이 이렇게 말했다고 전했다.
폐하, 어찌 우리를 버릴 수가 있사옵니까? 저희는 다른 군주를 알지도 못합니다. 제발 우리를 이렇게 무력히 버리지 마십시오. 아님 적어도, 폐하와 함께 가서 행복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하지만 망코 잉카는 결국 안티수유로 떠났다. 선대 황제의 미라를 비롯, 사제, 귀족, 농민, 목동 등 사실상 쿠스코의 황실이 통째로 안티수유로 탈출한 것이었다. 결국 잉카군은 순식간에 해산되었고, 잉카의 대봉기는 이렇게 해서 끝나버렸다.

이후 구심점을 잃은 제국은 차근차근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넘어가게 되었으며, 망코 잉카는 안티수유에서 스페인인들에게 추적당해 사로잡힐 뻔하지만 또 한 차례 탈주에 성공했다. 더욱 깊고 으슥한 곳으로 향한 망코 잉카는 1539년, 오늘날 에콰도르에 위치한 빌카밤바(Vilcabamba)에 마지막 잉카 망명 정부를 세웠으며, 잉카제국은 이 곳에서 1572년, 마지막 황제 투팍 아마루가 체포, 처형될 때까지 30년 넘게 명맥을 유지했다. 이 잉카 정부를 기존의 잉카 제국과 구분하여 빌카밤바 잉카, 혹은 신잉카국이라고 칭한다. 어쨌거나 이로써 잉카 '제국'은 사실상 멸망 혹은 해산하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곤살로 피사로가 NTR했던 황후인 쿠라 오크요는 과거 포위전 이전에 망코 잉카와 함께 쿠스코를 탈출했었지만 안티수유에서 스페인인들에게 체포당했다. 잉카의 반란에 빡쳐 있었던 곤살로 피사로는 이 불행한 여인을 잔인하게 처형했는데, 철촉이나 돌촉에 비해서 무딘 대나무 촉으로 된 화살을 죽을 때까지 쐈다. 즉, 한 번에 죽이지 않고 고통을 주며 서서히 죽였다.

7.8. 라스 살리나스 전투(Batalla de las Salinas)

망코 잉카가 퇴각하자 이제 남은 건 스페인인들간의 다툼 뿐이었다. 사실 망코 잉카가 물러나기 직전, 알마그로는 야간에 몰래 쿠스코에 들어가 프란시스코의 두 동생 에르난도와 곤살로, 그들을 따르는 20명의 스페인인들을 체포하는 데 성공한 상태였다.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리마에서 보낸 구원병력 500명이 쿠스코에 도착한 것이었다. 결국 알마그로의 군대와 리마의 피사로측 구원부대가 전투를 벌이게 되었으며 리마의 군대가 패배했다.{아반카이 전투(Batalla de Abancay)}

알마그로의 수하들은 피사로의 동생들을 참수해버리라고 권했지만, 어디까지나 알마그로의 목적은 "나도 피사로만큼 땅을 갖고 총독이 되고 싶다"였고, 피사로 역시 두 동생의 안전을 원했기 때문에 양측은 협상에 나섰다. 협상 중재자인 변호사의 설득에 따라 알마그로는 피사로의 동생들을 일단 석방했지만, 이후 2개월 남짓 계속된 협상은 최종 결렬이었다. 결국 후세에 라스 살리나스 전투(Batalla de las Salinas)로 알려진 내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전투로 피사로 원정대 지휘관들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 본인은 여전히 리마에 머물렀지만, 그가 보낸 구원병력은 쿠스코에 속속 도착하여 알마그로 쪽보다 병력이 약간 앞선 상태가 되었다. 양쪽 모두 원주민 전투부대의 지원을 받았는데, 알마그로의 경우 허수아비 황제로 파우유(Paullu)[47]라는 인물을 내세워 그가 보낸 원주민 부대의 지원을 받았고, 피사로는 툼베스+키토의 장모님이 지원한 원주민 부대의 지원을 받았다. 최종 병력비는 알마그로: 스페인인 500명 & 원주민 6,000명 vs 피사로: 스페인인 700명 & 원주민 7,000명이었다.

격렬한 전투 끝에[48] 알마그로 쪽이 패배했다. 쿠스코 포위전 이후로 생고생을 거듭한 에르난도 피사로는 잔뜩 독기가 오른 상태였기에 알마그로와 그의 지휘관들 몇몇의 목을 매달아버렸다. 디에고 데 알마그로 향년 63세(추정)였다.

이로써 반대파 세력이 거의 소멸된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페루의 지배자가 되었다. 알마그로를 처형한 뒤 피사로 가문의 둘째, 에르난도 피사로는 고국으로 돌아갔다. 어찌되었든 알마그로는 카를로스 1세가 임명한 총독이었기 때문에 그를 죽인 일에 대해 해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설명하면 아무 탈이 없을 줄 알았던 에르난도였지만, 망코의 봉기에 대한 책임소재 및 알마그로 살해 건 때문에 스페인에서 옥살이를 하게 된다.

8. 최후

피사로는 그동안 꿈꿔왔던 모든 것을 이루었다. 후작이라는 높은 지위, 막대한 재산, 그리고 페루의 지배자라는 신분. 나름대로 소박한 생활을 하며 리마 건설에 몰두했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 태클은 없을 줄 알았지만, 살아남은 알마그로 일파가 복수를 노리고 있었다.

알마그로 일파는 칠레 개척도 무산되었을 뿐 아니라 지도자까지 잃었으며 잉카 원정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재산도 챙기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이게 다 피사로 때문이라며 대놓고 그에게 불만을 드러냈다.

피사로 역시, 나름대로 챙겨줬는데도 제몫을 못하면서 문제만 일으켜댔던 알마그로 일파를 곱게 보지 않았다. 결국 알마그로 일파는 피사로 일파에게 철저히 따돌림을 당해 왕따 신세가 되었고, 피사로가 살아있는 이상 꿈도 희망도 없어 보였기에 피사로를 죽여야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라스 살리나스 전투가 끝난 지 3년이 지난 1541년 6월 26일 일요일, 피사로는 알마그로 일파가 영 수상쩍다는 정보를 몇 차례 전해들었긴 했으나, 그래도 설마설마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므로 일요일 미사에 불참하고 집에 머물며 손님들과 점심 만찬을 벌였는데 식사 중이라 방심한 상태를 노리고, 알마그로 일파의 암살자들 20명이 습격했다. 이 20명 중에는 알마그로의 아들[49]도 포함되어 있었다.

피사로와 그의 손님 중 일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쪽수도 딸리는데다 무장도 제대로 못 갖춘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 모두 살해당했다.

피사로는 격투 끝에 숱한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피로 십자가를 그린 뒤 힘겹게
"고백..."
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50] 이후 암살자 중 한 사람이 꽃병으로 머리를 갈겨 피사로의 목숨을 끊어버렸다. 향년 65세(혹은 70세)였다.

9. 사후

피사로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에 놀란 카를로스 1세는 국왕의 대리인을 보내 이들을 제압하고{추파스 전투(Batalla de Chupas)}, 주모자들 대부분을 체포한 뒤 처형했다. 알마그로의 혼혈 아들도 이때 처형당했다.

그 와중에 피사로를 죽인 암살자들 중 예닐곱 명 가량이 스페인군을 따돌리고 탈출에 성공했다. 이들은 빌카밤바의 망코 잉카에게 달아났고, 피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에 기분이 고소해진 망코 잉카는 이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들은 또 한 번 배은망덕한 잔꾀를 생각해 냈으니 망코 잉카를 죽여 그 댓가로 스페인 측으로부터 용서를 받아 반역죄를 무마하려는 계획을 생각해낸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피사로 암살 3년 뒤인 1544년, 망코 잉카마저 암살되었다. 하지만 암살자들은 자신들의 계획과는 달리 도주에 실패하고, 쫓아온 잉카인들에게 모두 살해당했다.

피사로의 유해는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 리마 성당 안뜰에 묻혔다. 이후 1892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기념하기 위해 시신을 다시 발굴하여 전시해왔는데, 1977년 성당 공사 중에 피사로의 머리를 포함한 나머지 유해가 발굴되었다. 머리와 유골 일부가 담겨있는 관에,
"여기 돈 프란시스코 피사로 후작의 머리가 묻혀있다. 페루를 발견한 돈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 카스티야의 왕관[51]을 바친다"
라고 적혀 있었다.[52] 조사 결과, 암살 당시 정황에 맞는 수많은 자상이 발견되었고, 두개골 복원 결과 역시 피사로의 초상화에 그려진 모습과 일치했기 때문에 피사로의 유골이 사실인 것으로 판정되었다. 20군데에 걸쳐 칼에 찔리거나 베였으며, 생전에 심한 허리 디스크와 탈장이 있었다고 한다.

피사로는 잉카 황족인 이네스 유판키에게서 2명의 자식을, 다른 잉카 황족 여인에게서 2명의 자식을 낳아 도합 4명의 자손을 남겼다.[53] 이 중 셋은 어린 나이에 죽었으며, 딸 1명만이 살아남아 천수를 누렸다. 그녀의 이름은 프란시스카 피사로 유판키(Francisca Pizarro Yupanqui)였다.

프란시스카 피사로는 카를로스 1세에 의해 법적인 지위, 즉 잉카 황실의 혈통이자 피사로 후작 작위를 인정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1550년에 깜방에 갇혀있던 삼촌 에르난도 피사로와 결혼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에르난도는 당시 아무리 적게 잡아도 42세, 높게 잡으면 64세(!)였다. 사실 프란시스카 피사로와 에르난도 피사로가 결혼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잉카 제국에서 획득한 피사로 가문의 막대한 재산이 분산되는 것을 막고 후작이 된 가문의 정통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정략결혼이라는 것인데 근대 이전 유럽의 정략결혼에서 이 정도 나이 차는 그리 드문 것도 아니었다. 정략결혼은 신랑과 신부의 정치적 입장만 따질 뿐 나이나 개인적인 특성은 크게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프란시스카는 존경받는 후작부인으로 살았으며, 에르난도가 죽은 이후에는 어떤 스페인 귀족과 재혼도 했다고 한다. 프란시스카 피사로는 63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5명의 자녀를 남겼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피사로 후작 가문의 혈통이 전해졌다. 덧붙여 프란시스카에게는 "첫 번째 메스티소"라는 별명이 있는데, 프란시스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스페인인들 사이의 혼혈이 태어났기 때문에 최초의 메스티소라는 의미가 아니라 가장 고귀한 메스티소라는 뜻으로 붙은 별명이었다.

피사로 가문의 둘째인 에르난도 피사로는 라스 살리나스 전투 이후 스페인에 귀국한 뒤 체포되었다. 에르난도 본인의 큰소리와는 달리, 카를로스 1세는 본인이 직접 임명한 총독을 살해한 사실에 크게 불쾌해했다. 게다가 알마그로의 지지자들이 속속 도착해 에르난도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 결국 에르난도는 총독 살해+망코 잉카 봉기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어 무려 23년간 깜방살이를 해야 했다. 망코 잉카의 봉기 문제와 관련해선 에르난도가 억울하다며 열심히 자기 변호를 했지만, 결국 인정되지는 못했다. 그런데 1561년에 풀려난 뒤에도 17년을 더 살았다. 에르난도의 출생연도(1478년에서 1508년 사이)와 사망연도(1578년에서 1608년 사이)는 불분명하기 때문에, 사망 당시 나이를 100살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막내동생인 곤살로는 맏형이 죽은 뒤 7년 후인 1548년에 페루 총독 자리를 놓고 본국에 반항하다가 처형되었다.

피사로 형제가 몰락한 뒤 페루는 스페인에서 보낸 부왕이 통치하게 되며, 빌카밤바에서 웅거하던 망명 잉카도 1572년에 망코의 아들 중 한 명이자 마지막 황제인 투팍 아마루가 스페인군에 붙잡혀 처형되면서 멸망했다.

10. 여담

  • 아타우알파의 여동생이자 피사로의 부인이었던 키스페 시사(혹은 이네스 유판키)는 피사로가 암살당한 이후 다른 콩키스타도르와 재혼했다.
  • 피사로 형제의 말로 때문에[54]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피사로 가문은 단절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위에 적힌 듯이 피사로의 혈통과 작위는 딸과 동생을 통해 후손들에게 이어졌다. 이후 피사로 가문은 대대로 이어진 '피사로 후작'들을 비롯하여 스페인와 페루에서 꽤 많은 수의 역사적 인물들을 배출했다. 심지어 남아메리카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대통령[55]까지 지낸 프란시스코 자비에르 데루나 피사로(Francisco Xavier de Luna Pizarro 주교. 1780~1855)라는 양반도 있다. 오늘날에도 페루에는 피사로 가문의 후예로 추정되는 '피사로' 성씨의 인물들이 제법 존재하는데, 축구선수 클라우디오 피사로도 그중 한 사람이다. 이베리아 연합 시절의 영향으로 포르투갈어권에도 피사로가 어원인 '피사(Piçarro)'라는 성씨가 존재한다.

11. 평가

신대륙 식민지에서 엄청난 양의 황금과 은이 채굴됨 → 유럽 경제와 역사에 중대한 영향 미침 → 전 지구적인 변화 발생
역사를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피사로의 행적은 훗날 유럽 문화권의 급성장의 원동력이 되는 산업혁명제국주의의 근본적인 원인이자 발단을 마련했다. 신대륙 식민지에서 은이 대량으로 나온 지역이 피사로의 원정으로 획득된 오늘날의 페루 일대였기 때문이다.[56] 이 거대한 영향 덕분에 피사로의 원정은 대체역사소설의 소재로 삼아도 될 정도이다.[57]

피사로의 원정은 제대로 지원받지 못했다. 오히려 심한 반대를 겪었다. 파나마멕시코 건설이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어서, 머나먼 미지의 남아메리카 원정에 투입될 인력과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국왕 카를로스 1세의 허가는 받았지만 허가라고 해봤자 국왕의 서명이 적힌 종이 한 장이 주어졌을 뿐 실질적인 지원은 전무했다. 또한, 실익 없이 손해만 남길 듯이 보였던 원정 초기에 피사로가 원정을 계속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이후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언젠가는 유럽인들의 남아메리카 진출이 이루어졌겠지만, 그것은 실제 역사보다 제법 늦춰진 시점이었을 것이다. 만약 피사로가 수행한 것과 같은 원정이 몇 개월이라도 늦었다면, 아타우알파는 쿠스코에 입성해 정부를 수립했을 것이고 스페인은 아즈텍을 능가하는 잉카 제국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을 것이다. 즉, 스페인인들과 잉카인들의 초기 접촉 형태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이렇게 됐을 경우 전 세계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58]

제국주의 시대가 끝난 20세기 이후로는 피사로의 평가가 영 좋지 않다. 식민지 역사를 겪은 원주민들의 눈에는 피사로가 곱게 보일 수가 없고, 유럽의 식민주의도 따지고 보면 피사로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페루인들의 경우, 자신들을 잉카인의 후손으로 여기므로 피사로라면 이를 간다.[59]

또한, 피사로 원정대는 코르테스 원정대조차 비교가 안 될 만큼 약탈을 했다. 참고로, 피사로 원정대의 인원은 코르테스 원정대의 5분의 1, 10분의 1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획득한 재물은 코르테스 쪽보다 더 많았다.[60] 사실 역사상 극소수 침략자들이 대군을 단 한 번의 전투(아타우알파 체포 사건)에서 압도적으로 격파하여 크고 아름다운 제국을 멸망시키고 승리자 전원이 이처럼 많은 재물을 획득한 경우는 없었다.

이후 엘도라도와 관련해서도 큰 영향을 미쳤다.[61]

11.1. 피사로 옹호 논리 및 반박

  • 아타우알파 체포 사건
    피사로 옹호론자들은 책을 집어던진 게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잉카 황제가 대규모의 인원을 이끌고 왔고 겁에 질린 스페인인들의 오해로 인해서 사건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피사로가 황제의 신병을 확보할 의도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며, 에르난 코르테스의 경우처럼 수도에 손님으로써 입성한 뒤 은근슬쩍 황제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 황제 살해
    피사로는 반대했지만 다른 이들의 주장이 거세어 막을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피사로가 반대했음은 기록상 빼도 박도 못하게 남아있는 분명한 사실이며, 에르난도 피사로나 에르난도 데소토 둘 중 한 사람만 남아있었어도 아타우알파는 살아남았을 수도 있다. 뭐 그렇더라도 최종 결정권자로서의 책임 정도만 지는 것이 맞다며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다.
  • 잉카 멸망
    피사로는 잉카를 멸망시킬 의도도 없었고, 멸망시킨 원흉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망코 잉카를 황제로 세운 시점에서 피사로의 목적이 달성되었다며, 피사로의 계획은 해변가인 툼베스 지역을 직접 통치지역으로 삼고, 나머지 잉카 제국의 지역들은 잉카 황실 정부와 공동 통치하겠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는 기록상으로도 분명하게 남아있는 사항이며 피사로의 실제 행적으로도 확인된다. 그 증거로 피사로는 망코 잉카가 제위에 오른 이후 2년 동안 그와 협력했으며, 정국이 안정됐다고 판단한 이후에는 쿠스코를 떠나 죽는 날까지 리마 건설에 몰두했을 뿐 쿠스코에는 신경쓰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아마 피사로는, 잉카 전역이 봉기하고, 이것이 잉카의 몰락으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바라지도 않았고 예상도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잉카 멸망"이라는 부문에 한정하면, 피사로로선 억울하다며 개소리를 하고 있다.
피사로가 남긴 기록과 행적을 보았을 때 피사로도 처음에는 굳이 아타우알파를 죽이고 잉카를 멸망시킬 생각까지는 없었던 건 명백하다.

하지만 피사로의 계획과 상황이 다르게 흘러갔어도 그가 착실히 닦아놓은 식민지배의 틀을 스페인이 곱게 접수하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직접 잉카를 지배하려 하지 않은 것은 단지 인원이 적었기 때문이었지, 뒤에서 열심히 빨아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고 피사로의 계획대로 진행되었어도 시간의 문제일 뿐 잉카는 착취당하다가 멸망하거나 명목상의 제국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폭력적으로 납치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은근슬쩍 신병을 확보'하려고 했으나 실패한 것뿐이라거나, '납치만 했을 뿐 몸값은 상대가 선제시한 것이다'라는 것 등이 옹호측 주장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이런 무리수를 쓰지 않는 이상 옹호가 불가능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피사로 때문에 수천 명의 잉카인들이 영문도 모르고 학살당했으며, 잉카의 유물들은 공중분해되어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황제가 먼저 제의하지 않았더라도 결국 몸값을 받던 나라를 박살내서 털어갔던 것은 마찬가지이다. 동생 곤살로를 잉카로 데려가기로 한 것은 결국 피사로의 판단이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피사로에게 책임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12. 대중문화 및 서브컬쳐에 대한 영향

  • <아마데우스>를 쓴 피터 쉐퍼가 쓴 희곡 <태양 제국의 멸망>의 주인공으로 나온다. 이 작품은 영화화되기도 했다.
  • 폴 앤더슨의 《타임패트롤》 시리즈 중 한 편인 《몸값의 해》는 피사로 원정대에 잠입한 한 타임패트롤 요원[62]과 피사로 원정대원인 한 콩키스타도르가 타임트러블에 얽히게 된다는 내용이다. 국내에 출간된 《상아와 원숭이와 공작새》에 수록되어 있다.
  • <태양소년 에스테반>은 피사로의 원정이 이루어진 1530년대 잉카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연히 실제 역사와는 지구와 안드로메다의 거리만큼 차이가 난다. 어쨌든 "프란시스코 피사로"라는 인물도 등장한다. 재물에 눈이 뒤집힌 전형적인 악당 캐릭터이다.
  • 테메레르 시리즈》에서는 아타우알파 황제를 죽인 것까지는 현실의 역사와 동일했으나, 황제를 호위하던 용[63]들이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일당 전부가 죽임을 당한 것으로 나온다.

발음하기에 편한 어감의 이름에다가 악당 이미지 때문인지, 몇몇 서브컬처 작품에서 피사로의 이름을 악당으로 차용하여 쓰고 있다.
  • <드래곤 퀘스트4>의 보스인 데스피사로의 이름. "데스(death) + 피사로"이다.
  • <원피스>에 등장하는 인물인 아발로 피사로
  • <바다의 전설 장보고>에도 “피사로”라는 이름의 악당이 등장한다.
  • <Warhammer(구판)>에선 독스 오브 워(=용병) 중에 '피라조'의 길잃은 군단이라는 용병단이 있다.
    리자드맨들이 사는 러스트리아에서 보물을 찾으러 왔는데, 폐허가 된 도시에서 막대한 보물을 찾았지만, 이를 되찾기 위해 리자드맨(Warhammer)들이 쳐들어온다. 피라조의 부대는 리자드맨을 상대로 테르시오전법을 사용해서 한동안 막아내다가 리자드맨들이 먼저 신대륙에 와있던 언데드 군세를 막아내기 위해서 그쪽으로 황금과 식량을 두고 길을 터주었다. 피라조는 그 길로 가서 언데드 군세를 분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의 일행들은 피라조의 길잃은 군단이라는 용병단이 된다.
  •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잉카 서브연퀘에서 전투 계열 퀘스트를 진행할 경우 적으로 등장하며, 플레이어를 도우는 NPC로 라이자 미들튼이 온다. 여기서는 플레이어와 라이자의 개입 때문에 잉카 침략에 실패하고 쫓겨나는 악역이다.

[1] 에르난 코르테스의 외할머니가 피사로 가문 출신이었고,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증조부인 페르난도(혹은 에르난도) 알론소 데이노호사가 에르난 코르테스의 외고조부였다.[2] 그런데 딱히 신기하다고까지 할 일은 아닌게, 당시 유럽에서는 귀천상혼의 전통이 워낙 강해서 왕족은 왕족끼리, 대귀족은 대귀족끼리, 신사 계급은 신사 계급끼리 결혼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다보니 유럽 각국의 왕족들이 서로 따져보면 이리저리 친족 관계로 얽히고 섥힌 것처럼 같은 나라의 신사 계급끼리도 인척 관계로 연결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증조부모 집단(8명) 중에 겹치는 사람이 있으면 6촌, 고조부모 집단(16명) 중에 겹치는 사람이 있으면 8촌인 것이나, 당시 사람들은 다산을 훌륭하게 여겼다는 것까지 생각해 보면, 이 정도의 친족 집단 범위는 생각보다 훨씬 넓다.[3] 다만 에르난 코르테스는 비록 무작위 평귀족인 이달고(Hidalgo)였지만 일단 귀족이었고,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코르테스의 외가인 피사로 가문의 얼자였기 때문에 귀족도 아니었다. 성씨만 물려받았을 뿐 피사로 가문으로부터 덕본 것은 없었다고 봐야 한다.[4] 칠레 원정에 실패하고 돌아와 피사로에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한 후, 피사로의 형제를 감금한 죄였다.[5] 이 암살자들은 동생인 에르난도 피사로에게 패배하고 처형당했다.[6] 사실 스페인에서 이달고라는 계급 자체가 가난한 하급 귀족이어서 대부분 생계가 쪼들렸다. 극소수만 귀족이므로 평범한 귀족도 평민보다 훨씬 잘 살았던 영국과 러시아와 달리 스페인은 인구의 8%가 귀족인 나라기 때문에 극소수의 대귀족을 빼면 평민처럼 사는 귀족이 절대다수였다. 길거리에 채이는게 귀족이라니 유명한 스페인 소설 《돈키호테》에서 주인공 돈키호테가 바로 이달고였는데, 말만 귀족이지 사실상 평민이나 다름없는 가난한 살림 수준으로 묘사되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7] 문헌에 따르면 피사로 선발대는 보병 160명, 기병 27명이었으며 전사자는 단 3명뿐이었다고 한다.[8]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훗날 플로리다를 탐험하고 미시시피 강을 처음으로 목격한 인물이다.[9] 잉카 제국은 험한 산지가 많았기 때문에, 황제가 자기 발로 걷지 않고 가마를 타고 다닌다는 것이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특정 부족에서만 가마꾼을 뽑을 정도였으니. 때문에 황족이자 전대 황제였던 우아스카르가 자기 발로 직접 걷는다는 것은, 엄청나게 치욕적인 일이었다.[10] 사실 푸냐는 잉카 제국의 변방으로 제국에 대한 소속감이 낮았다. 이후 아타우알파의 대처를 볼 때, 그는 푸냐인들이 수천 명가량 전사한 사실은 까맣게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족장 몇 명이 끌려가서 죽고, 부족민이 끌려가서 괴롭힘을 당했다더라라는 정도로 알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11] 이건 말을 본 적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구대륙에서도 매우 무례한 행동이다.[12] 실제 아타우알파를 직접 수행한 인원은 약 3,000~8,000명 가량으로, 대부분 비무장이거나 경무장이었다고 한다. 다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만 단위의 전투부대가 존재했다고 한다.[13] 보병 106, 기병 62. 단, 핸드 캐논도 10문 있었다.[14] <레케리미엔토>(Requerimiento) 원문이 카스티야의 여왕과 아라곤의 왕 및 후계자, 즉 통일 스페인의 왕에게 복종하라는 이야기였으므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15] 이 조서는, 의외로 자비심과 동정심의 산물이었다. 이게 만들어지기 전에는 학살부터 했기 때문이다.[16] 그리고 현대의 몇몇 역사가들은, 당시에 통역이 워낙 허접해서 아타우알파가 이걸 제대로 못 알아들었을 거라고 보고 있다.[17] 황제가 사용하던 물건은 다른 사람이 사용하면 안 되기 때문에 단지에 모아뒀다가 날을 잡아서 불에 태웠다고 한다.[18] 《잉카 제국의 최후》를 쓴 저널리스트 킴 매쿼리에 따르면 다친 사람은 1명, 그것도 바로 프란시스코 피사로였다고 한다. 그런데 피사로가 다친 것도 잉카인의 공격이 아닌 자신의 부하 때문이였다고 한다.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던 스페인 보병이 중요한 인질인 황제 아타우알파를 죽이려고 칼을 휘두르는 것을 피사로가 제지하려다가 손에 큰 상처를 입었다.[19] 사실 이건 잉카만 이런 것도 아니다. 루이 14세의 옷을 갈아입히거나 용변을 보고 난 뒤 엉덩이를 닦아준 것도 신분 낮은 시종이 아니라 고위 귀족들이었다.[20] 훗날 영국에서도 세포이 항쟁 이전까지는 델리 주변만 유지하는 지방 정권으로 전락한 무굴 제국을 당장 멸망시키진 않고 최대한 이용해 먹었다.[21] 개종해도 사형이지만, 개종을 거부할 시 이교도로 간주되어 산 채로 화형에 처해진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개종할 수밖에 없다(...).[22] 잉카 황제는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누나여동생결혼했다.[23] 당연히 수많은 후궁을 거느리고 있었다.[24] 당시 상황은 원정대에 참여했던 여러 스페인인들의 기록에 확실하게 남아있는 내용이다. 피사로가 황제의 처형을 반대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1969년작 영화 <태양 제국의 멸망>에서는, 한 가지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피사로는 하류층 출신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했으며, 신앙을 강요하는 성직자들에 대항해 아타우알파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타우알파의 처형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들은 성직자가 아닌 디에고 데 알마그로와 왕실 회계사인 알론소 리켈메였으니 이는 약간 무리한 해석이다. 알마그로와 리켈메가 어찌나 아타우알파를 싫어하는 티를 냈는지 처형되기 전부터 아타우알파는 이 두 사람이 결국 자기를 죽일 것이라 말해왔다.[25] 위임, 위탁이라는 뜻으로 아주 단순하게 보면 '원주민 인력에 대한 징발권, 보호권' 정도가 된다. 이런 종류의 제도가 대부분 그렇듯이 식민지의 '봉토'에 대한 권리로 변형된다. 어쨌거나 원주민들을 다스리고 세금을 받는 '귀족'이 되는 것이었다.[26] 본국으로부터 물자와 인력을 공급받기 위해선 항구도시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런데 잉카 제국의 도시들은 하나같이 산중턱에 있었으니, 적당한 자리에 새로운 거점을 지어야 했던 것. 이렇게 지어진 리마는 오늘날까지 페루의 수도로 남게 된다.[27] 파나마에서 출발한 그는 플로리다 반도에 상륙하여 미시시피 강 유역을 탐사하다가 열병이 도져 루이지애나 지역에서 사망하고 말았다.[28] 저 위에서 언급됐듯이 에르난도는 30대 중반의 나이로 타지에서 군사 경험을 쌓아서 믿고 맡길 만한 인물이었다.[29] 곤살로가 애송이이긴 했지만 망코 잉카는 더 어렸다. 게다가 이들이 건드리기 시작한 망코 잉카의 황후그의 여동생이었다.[30] 잉카의 고위 귀족은 혈통의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해 여동생이나 누나와 결혼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들이 단 1명뿐인 정실 부인이 되었으며 나머지는 이 되었다.[31] 잉카 역시 아즈텍처럼 당대 주변 부족들에게는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고, 피사로한테 수많은 페루, 에콰도르 지역의 피지배 원주민들이 협력했다.(아즈텍에 '인육목장'이 있었다면 잉카에는 인간 북이 있었다.)[32] 참고로 영어판, 스페인어판 위키피디아의 쿠스코 포위전 항목에는 원주민 지지자의 인원이 30,000 명으로 기재되어 있다. 어떤 숫자이든 간에 모두 추정치이므로 실제 숫자는 불명이다. 사실 망코 잉카군이 40,000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기 때문에, 숫자가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쿠스코 지역"에 국한할 경우, 스페인 측 원주민들은 기록상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33] 그냥 짱돌을 던진 게 아니라 그 유명한 볼라를 이용한 투석이었다.[34] 훗날 스페인인들이 건축 자재를 마련하기 위해 돌을 가져다 쓴 탓에 훼손되었지만, 요새의 성벽은 아직도 남아있다. 나름 알려진 관광지로 남미 3대 축제 중 하나인 인티 라이미(Inti Raymi)가 이 근처에서 열린다. 2008년에는 이곳에서 잉카 문명 이전의 것으로 보이는 AD 900~1200년경의 유적이 발굴되기도 했다.[35] 죽기 직전 유언장을 작성했다. 원주민 여성에게 얻은 갓난 에게 재산 일부를 남겼지만, 친딸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즉, 서녀를 남긴 것이었다. 또한 아이 어머니에게 한 푼도 주지 않았고 남은 전 재산은 동생 곤살로에게 남겼다. 하지만 곤살로도 유언장없이 반란죄로 처형되어서 이 돈은 결국 공중분해되었다.[36] 그의 용기에 감탄한 에르난도 피사로가 죽이지 말고 사로잡으라고 명령한 상태였다. 그러나 결국 그가 자살을 택하자 안타까워했다.[37] 대충 농장주나 영주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38] 사실 스페인인들에게 '너희 구원군은 전멸했다'는 공포심을 심어주고 사기를 낮추는 목적이라면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구대륙에서도 적군의 시체나 머리통을 공성전 중 수비군에게 투석기로 던져주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다.[39] 잉카군은 가죽과 나무를 활용한 갑옷에 철제 무기가 없었고 돌팔매를 비롯한 돌 몽둥이가 기본이고 가장 높은 지휘관이 가지고 있는 구리를 이용한 몽둥이가 다 였던 반면 스페인군은 철제 갑옷과 병기는 기본에 총과 대포도 있었다. 당연히 근접전에서는 돌 몽둥이와 돌 팔매가 철제갑옷을 낀 스페인군에게 유의미한 살상을 냈을리가 없었다. 유판키가 이길수 있었던 것도 총과 대포, 기마대들이 전혀 활약을 할 수 없는 산악전이라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지 평지에서는 스페인의 압살이었다.[40] 시집간 뒤 이네스 우아일라스(Inés Huaylas)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여기에 잉카 황족의 성(姓)으로 알려진 '유판키'(Yupanqui)를 붙여 "이네스 우아일라스 유판키"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기도 하다.[41] 우아이나 카팍 황제의 부인들 중 한 명인데 비정되는 인물이 2명 있다. 첫 번째 후보는 아타우알파의 모후인 팍차 두치셀라(Paccha Duchicela)로 전대 황제의 부인이자, 잉카 통일 이전 존재했던 키토 왕국의 여왕이었다. 두 번째 후보의 이름은 콘타르구아초(Contarguacho)로, 어딘가의 지도자('쿠라카'라고 하는데, 대충 잉카 제국의 지방 행정관 정도였다.)였다.[42] 이로 인해 몇몇 후세 역사가들은 당시 잉카 제국은 사실상 키토파(아타우알파와 그의 어머니)와 쿠스코(우아스카르와 망코 잉카)파 간의 반 내전 상태였으며, 피사로와 알마그로는 각각에 연줄을 댔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43] 더군다나 피사로 만큼은 아타우알파 처형에 가장 반대했던 인물이고, 또 그의 죽음에 안타까워했던 모습을 장모가 모를리는 없었다. 결국 아타우알파에 대한 동정과 연줄이 큰 힘으로 작용한 것이다.[44] 이들은 잉카족과 다르게 신개념(?) 전투 방식 흡수가 빨랐다. 처음 보던 말도 보이는 즉시 죽이던 잉카군과 다르게 말을 생포하여 기르고 독자적인 기병대까지 조직하던 것이 마푸체족이었다. 그만큼 스페인인들의 기술과 군수물자를 무서울 정도로 따라하게 되는것이 바로 이 마푸체인들이었다.[45] 알마그로의 남방 원정대에는 원주민 동맹군 10,000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원정 도중에 대부분이 사망하거나 도주했다고 한다. 단 잉카 귀족들은 끝까지 동행했고, 이 중에서 황족이었던 파울루 잉카(Paullu Inca)가 훗날 스페인인들에 의해서 꼭두각시 황제가 되었다.[46] 이 사절의 이름은 루이 디아스(Rui Dias)였는데, 망코 잉카가 도주한 이후, 피사로 일파에 의해서 구출되었다. 그리고 알마그로가 처형될 때 함께 처형되었다.[47] 황족으로서 알마그로를 따라 칠레 원정을 따라갔다가 망코 잉카의 봉기를 듣고, 기회는 이때다며 스페인에 붙어먹어 황제가 되었다. 이후 스페인 측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1549년에 병사했다.[48] 알마그로 측의 스페인인 전사자가 150명 가량이었다고 한다. 그 외의 숫자는 불명이다.[49] 파나마 원주민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혼혈 아들로 당시 22세였다.[50] 목숨이 끊기기 전 하느님께 죄를 사해달라는 의미였다는 견해도 있고, 암살자들에게 간단한 고해성사를 볼 시간을 달라는 의미였다는 견해도 있다.[51] 스페인은 그 지배영역이 광대한 탓에 국왕을 대리하는 부왕(副王) 제도가 있었다. 피사로가 정식으로 부왕에 임명된 적은 없었지만, 어차피 몇 년 지나지 않아 페루에도 부왕제가 도입되었다.[52] 함께 발견된 다른 관에는, 어린 나이에 죽은 피사로의 아이들, 피사로의 암살 때 그와 함께 죽은 이복동생, 이복동생의 부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들어있었다.[53] 자식 1명은 파나마 여자에게서 낳았지만 일찍 죽었다.[54] 특히 프란시스코와 곤살로의 최후 때문에.[55] 단 오늘날의 대통령과는 다른 것으로, 제헌의회 의장 정도의 수준.[56] 피사로의 원정 이전에는 황금과 은의 수량이 몹시 부족해서 시뇨리지를 통한 화폐 제조가 잦았다. 그러나 신대륙의 은광 발견으로 광물 부족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57] 과장을 보태 만약에 피사로의 원정이 실패했다면 대체역사소설중 하나이자 스팀펑크의 시초인 파반느가 현실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만큼 문명 발전 속도가 심각하게 많이 늦춰질지도 모른다.[58] 다만 스페인과 잉카의 역량 차이를 비교해본다면 잉카 쪽이 굉장히 불리하고 결국 중남미는 어떻게든 스페인(혹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59] 페루 사람들이 그에게 갖는 악감정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쿠스코 대성당에 있는 최후의 만찬 그림으로 예수와 12사도가 모두 모인 자리에 이스카리옷 유다의 모습이 있는데, 다른 인물들은 예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고, 유다만 유일하게 시선이 다른 곳에 가 있어서 알아보기 쉽다. 그런데 화가가 유다의 얼굴을 그릴 때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모습을 본떠 그대로 그린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에서 유다가 어떤 존재로 취급받는지 생각해보면 절대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그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60] 아즈텍에서 황금의 가치는 그렇게 높지 않았다. 잉카만큼 많은 황금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얻어낸 황금은 슬픔의 밤 때 대거 유실되었다. 남은 황금에서 카를 5세에게 공인을 받기 위해 20% 가량을 떼다 바치고, 코르테스가 일반적인 관행보다 2배 정도(카를 5세 몫과 동일한 20%) 더 떼가는 바람에 말단 보병들에겐 검 한자루 돈만 배분되었다. 결국 아즈텍을 멸망시키고도 보잘것 없는 황금과 은만 받은 콩키스타도르는 더 많은 양의 재물을 확보하고자 멕시코 북부와 남부로 진격하여 멕시코 북부 지역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집단들과 남부 지역의 마야 문명을 정복했으며 잉카까지 침략하여 에스파냐령 중남미 전 지역을 식민화하기에 이르렀다.[61] 단, 엘도라도 전설은 곤살로 피사로의 아마존 원정 때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어차피 동생 곤살로의 원정부터가 막대한 재물을 획득한 잉카 원정에 필받아 계획된 것이었으니 그게 그거였다. 게다가 후세 사람들은 '엘도라도'하면 '잉카의 보물'을 떠올렸으니 말이다.[62] 이름은 '스티븐 탬벌리'. '에스테반 타나킬'이란 이름의 수도자로 위장해 잠입, 피사로 원정대원인 진주인공 '돈 카스텔라르 이 모레노'와 함께 잉카의 보물을 용광로에 녹이던 작업 도중 <고양주의자>란 미래에서 온 테러 조직에 둘 다 납치당하고, 패트롤의 기밀사항을 알아내려는 테러범들에게 고문까지 받는다. 다행히 카스텔라르의 난동 덕에 간신히 탈출해 타임머신을 잡아타고 둘 다 고대의 남미로 도망칠 수 있었지만, 이번엔 더 이상 그를 믿지 않게 된 카스텔라르에게 또 고문을 당하고, 본인의 대략적인 정체와 배경을 털어놓고 만다. 이후 카스텔라르에게 타임머신을 뺏기고 고대 남미에 홀로 버려졌지만, 나중에 어느 원주민 부족에 받아들여져 애까지 낳고 잘 살다가, 주인공의 여조카의 활약으로 사건이 종결된 후 주인공인 패트롤 요원 반스 에버라드에 의해 귀환한다.[63] 7권에서 테메레르 일행이 당시 사건현장에 있던 용의 자식이 행정관으로 관리하는 지역에 잠깐 방문했다. 해당 용은 뒤늦게 피사로 일당을 전부 죽였지만 그 죄책감으로 스스로 투신자살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