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8 16:53:22

곤살로 피사로


곤살로 피사로 이 알론소
Gonzalo Pizarro y Alonso
파일:external/a3.files.biography.com/MTE4MDAzNDEwNjU4NDkzOTY2.jpg

1. 개요2. 일생
2.1. 출생2.2. 잉카 정복2.3. 알마그로의 등장, 아타우알파 황제의 처형2.4. 쿠스코 함락과 알마그로와의 대립2.5. 후안과 곤살로의 패악질과 망코 잉카 황제의 반발2.6. 망코 잉카의 탈출2.7. 잉카 대반란 그리고, 후안 피사로의 전사. 알마그로의 재등장2.8. 알마그로와의 내전2.9. 망코 잉카를 추격하다2.10. 엘도라도 원정2.11. 귀환과 국왕 카를로스 1세에 대한 반역, 그리고 처형
3. 평가4. 여러 대중매체에서

1. 개요

70여 년이란 긴 세월 동안 스페인 왕국은 그 어떤 세계보다도 큰 세계를 정복하고, 개척하며 미지의 땅을 향해 탐험해 나갔다. 그런데 곤살로 피사로의 엘도라도 원정은 그 어떠한 신대륙 원정 역사상 최대의 실책이라 아니 할 수 없다.
1545년 역사가 페드로 시에사 데레온[1] 저, 《추파스의 전쟁》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 초기의 악명높은 콩키스타도르. 남아메리카 대륙의 강국이었던 잉카 제국을 정복한 콩키스타도르로 유명한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의 이복동생이었다. 말이 정복자지 십자가 앞세운 갱단이나 다름없던 초기 콩키스타도르 중에서도 개차반의 인성으로 악명이 높은 인물이다.
주제도 모르고 반란을 일으킨 저능아이기도 하다

2. 일생

2.1. 출생

곤살로 피사로는 1510년 스페인의 남부 지역인 에스트레마두라에 위치한 트루히요에서 태어났다. 곤살로의 아버지는 동명인 곤살로 피사로 이로드리게스 데아길라르(Gonzalo Pizarro Y Rodriguez de Aguilar)였으며 가난한 이달고 출신이었지만, 곤살로 데 코르도바이탈리아 전쟁에 참여한 적 있는 경험 많은 용병이었다. 아버지 곤살로 피사로는 3명 이상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 번째 부인에게서 흔히 잉카의 정복자로 알려진 프란시스코와 에르난도(Hernando Pizarro)를, 다른 부인에게서 후안(Juan Pizarro)과 곤살로(Gonzalo Pizarro)를, 그리고 또 다른 부인에게서 프란시스코 마로킨(Francisco Maroquin)을 낳았다.

넷째 곤살로 피사로를 기준으로 맏형 프란시스코와는 무려 30~34살이나 차이가 나며, 차남 에르난도와는 10살, 같은 어머니를 둔 셋째 후안과는 1살, 막내인 마로킨보다는 1살 많았다. 이 무지막지한 나이차 때문에 큰 형 프란시스코가 신대륙의 꿈에 부풀려 일개 졸병으로 고난을 겪고 있을 때쯤에 곤살로는 이제 막 갓난아기 수준이었다. 이후 프란시스코는 어느 정도 성공하여 파나마 지역의 엥코미엔다로 자리매김했고, 일련의 원정 도중 파나마 남쪽의 황금 제국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프란시스코는 황금 제국이 존재함을 확신하고, 그에 대한 물자와 병사들을 지원받기 위해 본국 스페인로 건너가, 당시 국왕이었던 카를로스1세로부터 정복 권한을 수여받았다.

본국에서 병사들을 긁어모으던 프란시스코는 인원을 충당하기 위해 고향에 거주하던 이복동생들을 불러들였는데, 당시 곤살로 피사로는 18살로 아주 혈기왕성한 일개 청소년에 불과했다.

이때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자신의 칠촌이자 일찍이 아즈텍 제국 정복에 성공해 권세가가 된 에르난 코르테스를 만나 조언을 구했다. 코르테스는
"원주민 국왕을 생포하라"
고 말했으며,[2] 프란시스코는 이를 착실히 시행했다.

2.2. 잉카 정복

1532년이 되어서야 프란시스코와 그의 원정대 168명(보병 106명, 기병 62기)은 험준한 안데스 산맥을 넘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최고로 번성하며, 거대한 제국을 이루고 있었던 잉카인들과 마주쳤다.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는 자신의 형이자 본래 황제였던 우아스카르에 대항해 내전을 일으켜, 승리하고 황제가 된 인물이었다. 피사로가 안데스를 넘을 때쯤 아타우알파는 현재의 에콰도르 지방에서 자신이 황제가 된 것을 기념하는 자축행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 아타우알파에게 피사로가 지휘하는 168명의 군대는 일개 도적떼 무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타우알파는 자만하여 피사로 일파가 군대를 매복해두었던 카하마르카에 아무런 무장없이 방문했다. 피사로는 이때를 노려, 카하마르카에 매복한 군대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고, 1,000만 명의 신민을 다스렸던 잉카 제국의 황제는 어안이 벙벙한채, 한낱 도적떼로 여겼던 자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때 곤살로 피사로는 갓 성인이 된 20살이었다.(카하마르카 전투)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포로가 된 아타우알파를 잘 대접해주는 척하면서, 그의 처지를 각인시키고 잉카 제국 각지에 파발을 띄워 황금을 바치도록 했다. 아타우알파는 피사로의 군대가 어느 정도 머물려 있다가 그들의 본국으로 갈 것이라는 망상을 했기 때문에, 피사로의 비위를 잘 맞춰주면서 황금을 바치는 데만 몰두했다. 제국 각지에서 온 보물 때문에 피사로 형제는 하루도 안 되어 스페인 최고의 벼락부자로 자리매김했다.

2.3. 알마그로의 등장, 아타우알파 황제의 처형

피사로 형제들은 아타우알파가 바치는 황금 때문에 페루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지만, 이것은 프란시스코의 옛 친구가 병력을 이끌고 페루에 도달하면서 산산조각났다. 디에고 데알마그로파나마 때부터 프란시스코와 같이 동고동락한 친구중의 친구였다. 잉카 정복 이전 프란시스코는 알마그로와 함께 페루 정복에 대한 모종의 계약을 했다. 하지만 알마그로는 페루 원정 직전 불참했고, 프란시스코는 알마그로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아타우알파를 붙잡고 잉카 제국을 손아귀에 넣었다. 하지만 프란시스코가 잉카 황제를 붙잡고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에 알마그로는 페루 원정에 뒤늦은 동참을 선언하고, 150여 명의 기•보병을 이끌고 피사로 형제들이 머무는 카하마르카까지 진격했다.

알마그로와 프란시스코는 예전에 둘도 없는 절친이자 사업동반자였지만, 그 우정은 잉카 제국의 황금을 두고 금이 가기 시작했다. 프란시스코는 알마그로의 뒤늦은 동참을 썩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잉카 제국 지배하의 1,000만 명에 가까운 신민들을 대상으로 효율적인 통치를 하기 위해서는 알마그로가 데리고 있는 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프란시스코는 알마그로와 그의 병사들에게 잉카의 황금을 나눠주기로 결심했고, 이는 고생한 피사로 형제들과 원정대에게 커다란 반감을 증식시켰다.

알마그로는 피사로 형제들의 황금 공급원이 잉카 황제이자 포로인 아타우알파라는 것을 깨닫고, 아타우알파를 죽이면 잉카 내에서의 피사로 형제들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동시에 자신이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알마그로는 종군신부였던 비센테 데발데르데(Vincente de Valderde)와 함께 아타우알파를 처형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으며, 피사로는 자신의 황금 공급원을 가능한 살리고 싶었지만, 부하들의 권고가 크게 작용하여 아타우알파를 교수형에 처했다. 결국 아타우알파는 1533년 7월 26일 비정한 정복자들에 의해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3][4]

2.4. 쿠스코 함락과 알마그로와의 대립

아타우알파가 죽은 뒤, 피사로 형제들은 잉카 제국에 대한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황제로 옹립할 꼭두각시가 절실했다. 또한 잉카 제국의 중심부인 쿠스코에 엄청난 황금이 저장되어 있다는 소문이 그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프란시스코는 그의 동생들이었던 에르난도, 후안, 곤살로 그리고 기병대장 에르난도 데소토(Hernando de Soto)와 함께 40여 명의 기병 및 10,000명의 원주민 동맹군을 이끌고 쿠스코로 진격했다.

쿠스코에는 아타우알파의 심복이자 잉카의 장수였던 끼스끼스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끼스끼스는 스페인인들을 침탈자로 간주하며 그들에게 저항하고자 했다. 하지만, 쿠스코 외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에르난도, 후안, 곤살로가 이끄는 기병대에게 패퇴당했고, 쿠스코는 해방이라는 명목하에 함락당했다. 프란시스코는 쿠스코에서 아타우알파의 부하들에 의해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던 잉카 황족 망코 카팍을 새로운 잉카 제국의 황제로 추대했으며, 망코 잉카는 프란시스코와의 영원한 동맹을 약속하고 대관식을 치렀다.

피사로 형제들은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옛 잉카 황제인 아타우알파의 잔당들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었고, 잉카의 장수들인 끼스끼스와 루미냐비가 각각 토벌대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한편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점령한 쿠스코의 엄청난 부를 동생들과 부하들에게 배분하고자 했는데, 여기서 알마그로와 신경전을 벌이게 되었다. 당시 프란시스코는 페루 해안가에 새로운 도시 리마를 건설하기에 바쁜 상태였고, 이에 그는 후안 피사로와 곤살로 피사로를 쿠스코의 최고 총독으로 임명하여 망코 잉카와 함께 제국을 다스리게 했다. 이에 알마그로는 자신의 몫이 없음을 한탄하여, 본국의 군주인 카를로스 1세에게 서신을 보냈고, 카를로스 1세는 피사로와 알마그로로 하여금 페루의 땅을 각각 남북으로 정확히 나누어 통치하라는 왕명을 내렸다. 이는 개고생한 피사로 형제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알마그로는 신이 나서 쿠스코의 영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이에 후안과 곤살로는 알마그로의 군대를 맞이하여 전쟁에 돌입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공관이었던 안토니오 텔레스 데구스만(Antonio Telez de Guzman)이 싸움을 만류해서 겨우 무마시킬 수 있었다.

한편,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쿠스코에 내전이 일어났다는 소문에,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알마그로와 자신의 동생들을 중재시키고자 했다. 프란시스코는 알마그로에게 페루 남쪽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면서, 중간에 위치한 쿠스코의 지배권은 나중에 의논하자고 중재안을 내놓았다. 알마그로는 이에 동의하는 대신 페루 남부 원정을 위한 병력과 물자 지원을 프란시스코로부터 약속받았다. 스페인인들 간의 내전은 이렇게 끝나는가 싶었다.

2.5. 후안과 곤살로의 패악질과 망코 잉카 황제의 반발

1535년, 중재안을 받은 알마그로의 군대가 쿠스코에서 물러나자, 쿠스코는 이제 후안과 곤살로의 세상이 되었다. 그들은 페루의 중심지에서 프란시스코의 동생이라는 명목하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으며, 꼭두각시 황제인 망코 잉카 유판키를 자주 협박하여 곤란하게 만들었다.

이제 막 20세 초반이 된 곤살로 피사로는 어린 나이에 스페인 최고의 부자가 되었고, 한 나라의 황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성격이 완전히 뒤틀려지게 되었다. 16세기의 역사가였던 아우구틴 데사라테(Augutin de Zarate)는
‘곤살로는 문맹이었고 말이 거칠었으며, 여자를 매우 탐했다’
라고 기록했다. 사레테의 증언은 사실이었으며,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후안과 곤살로는 옛 황제 아타우알파 때처럼 망코 잉카가 황금에 대한 정보를 더욱 많이 알고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하루도 쉬지 않으며 망코 잉카를 협박했다. 망코 잉카의 장남이자 역사가였던 티투 쿠시의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았다.
나는 황금 주괴 1,300 덩어리, 황금 팔찌 2,000개를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후안 피사로에게 이것밖에 바치지 못했냐는 둥의 망신소리를 들었다. 그는 나에게 '개자식'이라는 욕설과 함께 황금을 더 내놓으라는 협박을 하면서, 안 그랬다가는 화형에 처할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이때의 모습은 당시의 스페인측 목격자들에 의해서도 생생히 전해지고 있다. 목격자들에 의하면, 후안과 곤살로가 망코 잉카를 구석진 곳에 몰아세우며, 잉카의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황제의 위로 오줌을 누었다고 말한다.

망코 잉카의 대신들은 당장 패악질을 일삼는 후안과 곤살로를 처형해야 된다고 주장했으나, 망코 잉카는 그 둘이 자신을 황제로 옹립시켜준 프란시스코의 동생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망코 잉카는 대신들의 강력한 주장을 겨우 만류하면서 곤살로의 행패를 참아 냈다.

하지만, 망코 잉카의 노력도 곧 허사가 되는데, 바로 곤살로 피사로가 망코 잉카의 황후였던 쿠라 오크요(Cura Ocllo)에게 반해 결혼하고 싶다는 통보를 보냈던 것이었다.[5] 대신들은 자신들이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인 전체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적극 나섰지만, 망코 잉카는 그것을 거부하면서 다른 묘책을 찾기로 결심했다.

망코 잉카는 곤살로를 부른 후, 20여 명의 잉카 최고 미녀들을 내세우며, 원하고 싶은 여성을 고르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를 본 곤살로가 짜증을 내며 망코 잉카의 제안을 바로 거절했다. 결국 망코 잉카는 자신의 누이인 잉힐(Ingil)을 황후 쿠라 오크요로 위장시켜 곤살로에게 보냈다. 곤살로는 잉힐을 보고, 쿠라 오크요로 착각한 나머지 망코 잉카와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잉힐의 몸을 더듬으면서 키스를 하는 추태를 보였다. 역사가 티투쿠시에 의하면 잉힐이 곤살로의 행위에 너무 역겨워한 나머지 차라리 도망가고 싶다고 오빠인 망코 잉카에게 청했지만, 망코 잉카는 화를 내며 곤살로를 따르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잉카의 한 장수는 곤살로의 추태를 저지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얼마든지 덤벼봐라! 니네 황제와 함께 갈기갈기 찢어 죽여주마!"
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다. 망코 잉카는 잉힐을 넘긴 뒤 사태를 무마시킨 듯 했지만, 곤살로는 이윽고 잉힐이 망코 잉카의 황후 쿠라 오크요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분개했다. 곤살로는 망코 잉카의 어전으로 칼을 차고 들어와 닥치는 대로 분탕질을 하며 자신이 화가 났음을 알렸다. 그리고 망코 잉카가 보는 앞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던 황후 쿠라 오크요를 강제로 끌고 가버렸다.

이를 똑똑히 보고도 망코 잉카는 곤살로를 저지할 수 없었기에 그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태양신 인티의 후예이자 잉카 제국의 황제로써 망코 잉카는 명목상 페루를 포함한 광범위한 4개 지방의 통치자였지만, 사실은 자신이 피사로 형제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확히 깨달았다. 이에 망코 잉카는 피사로 형제는 물론, 더 나아가 스페인인 전체를 성스러운 잉카 땅에서 완전히 박멸시킬 거대한 반란을 계획하게 되었다.

2.6. 망코 잉카의 탈출

1536년 2월, 후안과 곤살로의 이복형이었던 에르난도 피사로가 2년 만에 쿠스코로 돌아왔다. 한편, 망코 잉카는 제국 곳곳에 밀정들을 보내어 각지에 있는 잉카 장수들에게 군대를 이끌고 게릴라 전을 펼치라고 명령했다. 이 때문에 피사로 형제들과 스페인인들은 잉카 제국 전체에 대한 영향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그들의 주둔지인 중요도시만이 영향권하에 남게 되었다. 망코 잉카는 에르난도 피사로가 쿠스코로 오자, 성대한 환영을 준비하며 그와 친분을 쌓고자 노력했다. 이것은 망코 잉카의 계획적인 의도였는데, 자신에게 패악질을 일삼은 후안과 곤살로를 견제하면서 스페인인들의 감시망을 피해 대반란의 준비를 마친 잉카 장수들이 주둔한 유카이 계곡으로 도망치려는 계획이었다.

후안과 곤살로는 망코 잉카의 이상행동에 의구심을 품고, 이복형 에르난도에게 망코 잉카와 친분을 쌓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에르난도는 그들의 말을 일축하면서 망코 잉카와 계속 친분을 쌓았다. 1536년 4월 18일,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망코 잉카는 에르난도에게 친분의 표시로 인간 크기의 황금 동상을 선물해준다고 말하며, 이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장소에 보관했다고 했다. 에르난도는 설마하는 마음에 망코 잉카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고, 이에 망코 잉카는 자신의 가신들과 함께 직접 쿠스코를 빠져나갔다.

한편, 제국 각지에서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던 후안과 곤살로는 이복형 에르난도가 망코 잉카를 풀어주었다는 말에 놀라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달려갔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망코 잉카는 유카이 계곡에 소집된 100,000명의 전사들과 함께 피사로 형제 휘하 스페인인 전체를 몰아낼 각오를 마친채 쿠스코를 포위했다.

2.7. 잉카 대반란 그리고, 후안 피사로의 전사. 알마그로의 재등장

망코 잉카는 쿠스코에 대한 신도시 리마 주둔 스페인군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다른 장수들을 각지에 매복시켰다. 이는 상당히 성공적인 전략이었는데, 쿠스코의 반란 소식을 접한 리마의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기병이 주력이 된 지원부대를 급파했지만 잉카의 매복군에 걸려 전부 다 궤멸당했다. 쿠스코 포위군은 자신들의 돌팔매 무기인 ‘볼라’에 불을 붙여 던지는 화공 전술을 사용했는데, 이는 쿠스코에서 꼼짝없이 포위당한 스페인인들에게 엄청난 파급 효과를 가져왔다. 그들은 화염을 주체할 수가 없어 어느덧 성당에 모였는데, 위기의 순간 성 야고보의 힘이 불을 끄게 했다고 후세에 전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스페인인들과 그 동맹 원주민인 카냐리족의 맹렬한 반격으로 잉카인들은 쿠스코로 넘어오지 못했고, 전투는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쿠스코 포위전). 이에 에르난도, 후안, 곤살로는 잉카 전사들이 주둔한 쿠스코 외곽에 위치한 삭사이와만 요새를 공격하는 것이 심각한 사태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피사로 형제들은 망코 잉카의 사촌이면서, 그와 적대적인 황족 파스칵의 지원 아래, 후안 자신이 직접 선봉장이 되어, 쿠스코를 나와 기병을 이끌고 맹렬히 돌격했다.

후안과 스페인 기병대는 잉카인들의 공격을 받았지만, 맹렬히 저항했고 이내 선봉대가 주위를 끌고 있을 사이 스페인 보병대가 삭사이와만 요새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후안은 자만심에 도취하여 방패로 원주민들이 투척하는 돌세례를 막는 것을 게을리하다가 그만 정통으로 돌덩이를 맞아 두개골이 박살나고 말았다. 후안이 부상을 입자 스페인인들은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부상당한 후안의 뒤를 이어 곤살로가 삭사이와만 요새 공격의 선봉장이 되었다. 곤살로는 이복형 에르난도와 함께 초승달이 뜬 밤을 틈타 공격하는 야습을 계획했고, 일련의 격렬한 전투와 함께 삭사이와만 요새는 결국 스페인군에 함락당했다(삭사이와만 요새 공략전).

두개골이 깨지는 중상을 당하고 2주일 후 후안 피사로는 결국 죽었다. 후안은 일종의 유언을 남겼는데, 쿠스코에 위치한 잉카의 성소를 허물고 거기에 성당을 지어달라고 청원한 것이었다. 이 성당은 오늘날 쿠스코에 남아있으며, 페루의 문화재 중 하나이다. 후안은 동생 곤살로와 1살 차이밖에 안났다. 곤살로는 맏형 프란시스코와는 30살 차이, 차남 에르난도와는 10살 차이였으므로 후안과의 우애가 가장 각별했다. 하지만, 후안이 죽음으로써 이제 곤살로 피사로는 더욱 막장으로 치닫게 되었으며, 곤살로의 행동에 제동을 걸어줄 자는 이제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 전투를 통해 잉카인들의 사기는 완전히 꺾였으며, 도리어 1537년 1월, 페루 남부 원정에서 돌아온 알마그로가 지휘하는 스페인인 500여 명, 원주민 보병 10,000명의 군대가 쿠스코 외곽까지 오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알마그로는 페루 남부 원정에서 아무런 소득없이 돌아왔는데, 망코 잉카가 피사로 형제들과 치열한 내전 중이라는 소식을 전해듣자, 자신이 제국의 중심인 쿠스코를 점령할 수 있는 기회로 봤다.

망코 잉카는 알마그로의 스페인인들이 가까이 오자 어쩔 수 없이 쿠스코 포위를 풀고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이윽고 망코 잉카는 오얀타이탐보로 돌아가 군대를 추스르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알마그로는 군대를 이끌고 쿠스코로 무단 칩입한 뒤, 자신이 쿠스코의 새 총독이 되었음을 선포했다. 이는 피사로 형제들과 알마그로 일파간의 피비린내나는 내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2.8. 알마그로와의 내전

쿠스코로 진격한 알마그로의 군대는 잉카인들이 물러나 안심하고 있었던 에르난도와 곤살로의 스페인인들을 공격했다. 에르난도와 곤살로는 이미 알마그로의 야심을 꿰차고 있었기 때문에 알마그로의 공격에 저항했지만, 중과부적으로 쿠스코는 알마그로에게 함락되었고, 에르난도와 곤살로는 포로 신세가 되었다. 한편 자신의 도시 리마를 건설하고 있었던 피사로 가문의 맏형 프란시스코는 이복동생들이 포로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놀라, 변호사였던 가스파르 데에스피노사(Gaspar de Espinoza)를 파견했다. 에스피노사는 현란한 말솜씨로 알마그로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같은 스페인인들 간의 분란은 없어야 된다고 강조했다. 알마그로도 결국 그 의견을 받아들이고 에르난도와 곤살로, 두 피사로 형제들을 풀어주기로 마음 먹었다.

결국 알마그로는 에르난도와 곤살로에게 평화조약에 약조하면 풀어주겠노라 선언했고, 에르난도는 마지못해 그에 조인했다. 하지만, 에르난도와 곤살로는 풀려나자마자 알마그로에게 전쟁을 선포했고, 둘은 맏형 프란시스코의 지원하에 800명의 스페인인과 7,000명의 원주민 동맹군을 이끌고 1538년 4월 26일 라스 살리나스(Las Salinas)에서 알마그로 세력과 격돌했다. 이 라스 살리나스 전투에서 에르난도는 알마그로에게 승리했고, 그 결과 포로가 된 알마그로는 일전에 자신이 에르난도를 풀어주었던 사례를 들며 선처를 사정했다. 하지만 에르난도는 냉혹하게도 알마그로를 처형해버렸고, 이러한 처사는 살아남은 알마그로 잔당들에게 피사로 형제들에 대한 복수심만 돋구게 되었다.

2.9. 망코 잉카를 추격하다

피사로 형제들에 의해 알마그로의 군대가 궤멸하자, 이제 남은 것은 잉카 부흥을 명목으로 한 망코 잉카의 군대를 토벌하는 것이었다. 에르난도는 곤살로에게 원정대를 꾸리게 한 다음, 1539년 4월 쿠스코를 떠나 망코 잉카의 잔당을 토벌하러 갔다. 곤살로 피사로는 험난한 정글인 페루 동부의 안티수유에 위치한 망코 잉카의 군대와 격돌했다. 망코 잉카는 거짓 패퇴를 거듭한 뒤 깊숙한 정글로 곤살로와 그의 군대를 유인하여 격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에 곤살로는 정글에 꼼짝없이 갇힌 채 에르난도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쿠스코에서 온 지원군이 도착하자마자 망코 잉카가 위치한 팜프코나스를 급습했으며, 이내 망코 잉카는 자신의 누이이자 황후로, 예전 곤살로에게 능욕당했던 쿠라 오크요를 내버린채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곤살로는 도망간 망코 잉카 대신 황후 쿠라 오크요가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옛날 자신이 애정을 품었던 그녀에게 가차없이 고문을 가한 다음, 잉카의 반란에 빡쳐 있던 나머지 이 불행한 여인을 잔인하게 처형했다. 그 처형 방식이라는 것이 촉이 무딘 화살로 죽을 때까지 쏘는 것이었다. 심지어 시신을 토막내어 강가로 흘려보내게 했다. 망코 잉카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기에, 스페인인들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는 데 중요한 원동력이 된 황후를 잃은 것을 슬퍼했다. 망코 잉카는 얀티수유에 위치한 정글 도시 빌카밤바로 후퇴했으며(신잉카국), 그의 게릴라 전을 감당할수 없었던 곤살로 피사로는 퇴각 명령을 내렸다.

2.10. 엘도라도 원정

피사로 가문의 형제로써 곤살로는 맏형 프란시스코 다음 위치의 최고 권력자 중 한 명이었으며,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탐욕스런 곤살로에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아직도 부족했으며, 더 많은 것을 갈구했다. 마침 곤살로에게 찾아온 소식이 있었으니, 바로 페루 동쪽의 안티수유 정글에 있다는 ‘엘도라도’로 불리는 도시의 전설이었다. 곤살로는 몇 번의 답사를 통해 황금 도시 엘도라도에 대한 전설을 확신하고 대규모의 원정대를 꾸렸다. 곤살로는 막대한 재력으로 350명의 스페인인(200명은 기병), 2,000마리의 사나운 개, 식량으로 쓰일 2,000마리의 돼지, 4,000명의 원주민 짐꾼, 2,000마리의 야마('라마')를 동원, 1541년 2월 21일 원정을 강행했다. 이는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 역사상 최대의 물자를 동원한 대규모 원정이었으며, 오로지 페루의 재력을 지닌 곤살로 피사로만이 행할 수 있었던 막대한 사치와도 같았다.

하지만, 곤살로의 엘도라도 원정은 아마존 강의 시작 지점인 나포 강에 들어서자마자 난관에 부닥쳤다. 낯선 침입자들을 적대시하는 원주민들은 그들에게 잘못된 길을 알려주어 곤살로 일행을 더욱더 깊숙한 정글로 이끌고 갔다. 이윽고 곤살로는 자신이 원주민들에게 속아 정글속에 꼼짝없이 갇혔다는 신세를 알고 한탄했다. 그는 자신이 가져온 돼지와 야마, 사냥견을 식량으로 충당했으며, 더 나아가 군마까지 잡아먹었다. 이래도 안되자 이제는 정글의 동물들을 사냥하여 굶주린 배를 충당했다. 이내 곤살로의 부관이었던 애꾸눈 프란시스코 데오레야나(Francisco de Orellana)가 자신에게 일부 병력을 주면, 정글을 빠져나갈 방도와 식량을 구해오겠다고 청했다. 이에 곤살로는 오레야나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그를 별동대 대장으로 임명하여 식량을 구해오도록 했다.

하지만 오레야나는 아마존 강 깊숙한 곳으로 더욱 들어갔고, 이내 부하들의 동의를 얻어 곤살로를 배신하고, 스스로 사령관임을 선포했다. 오레야나와 그의 원정대는 아마존 강의 시작 지점으로부터 이어진 고된 원정을 통해 1542년 8월 26일 아마존 강 끝을 빠져나가는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오레야나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아마존 강'을 최초로 횡단한 인물이 되었으며, 이는 444년 후, 미국인 탐험가에 의해 깨질 때까지 기록으로 남았다. 한때는 오레야나를 기려 아마존 강을 '오레야나 강'이라 불렀지만, 훗날 아마존 여전사의 설화가 오레야나의 일화를 덮으면서 아마존 강은 오늘날에도 '아마존 강'이라 불리고 있다.

2.11. 귀환과 국왕 카를로스 1세에 대한 반역, 그리고 처형

그렇게 정글에서 갖은 고생을 한 뒤에, 곤살로의 대규모 원정대는 인원이 엄청나게 감소했다. 잉카 제국 제2의 도시였던 에과도르의 키토로 무사히 도착한 생존자는 350명 중 곤살로를 포함하여 고작 21명뿐이었다.

하지만 곤살로가 힘겹게 키토로 돌아오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는데, 바로 맏형인 프란시스코가 알마그로의 잔당들에게 암살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이로써 후안을 시작으로 맏형 프란시스코까지, 피사로 형제들에게 차례차례 불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한편, 차남 에르난도는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국왕 카를로스 1세가 잉카 총독으로 정식 임명했던 알마그로를 내전이란 이유로 무분별하게 살해한 사건을 빌미로 법적 공방이 벌어지는 바람에 본국 스페인에 꼼짝없이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제 피사로 가문을 책임질 자는 곤살로 단 한 명뿐이었으며, 곤살로는 맏형 프란시스코를 대신해서 자신이 페루의 최고 통치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를로스 1세는 신대륙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콩키스타도르들에 대한 권한을 박탈하고자 자신이 직접 임명한 부왕을 본국에서 보내어 식민지를 통치하게 했다. 이는 곤살로로써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왕명이었다. 페루의 부왕으로 임명된 블라스코 누녜스 벨라(Blasco Núñez Vela)가 왕명을 선포하고, 선정착민이던 콩키스타도르들의 권한을 박탈하기 시작하자, 엔코미엔다(대농장)를 이루던 엔코미엔다로(농장주)들은 곤살로 피사로 휘하에 한데 모여 부왕의 명령을 거부하는 반란을 일으켜 달라고 요청했다. 국왕 카를로스 1세가 페루 총독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는 소식에 화가 난 곤살로는 엔코미엔다로들의 요청을 승낙하고 군대를 지휘하여 페루 부왕에 대항하는 무모한 반란을 일으켰다. 약 700여 명의 스페인인 군대를 이끌고 반란에 나선 곤살로는, 부왕 누녜스 벨라가 툼베스로 도망치는 것을 보고 아나퀴토까지 쫒아가 1547년 10월, 누녜스 벨라를 살해했다.

이를 통해 약 2년 동안 곤살로는 스스로 페루 최고 총독으로 위임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페루에서 일어난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카를로스 1세는 본국에서 곤살로와 그의 추종 세력을 토벌할 부왕으로 페드로 데 라가스카(Pedro de la Gasca)를 임명했다. 라가스카는 페루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 곤살로에게 서신을 보내 직접 국왕 폐하의 이름으로 항복할 것을 권유했지만, 곤살로는 즉시 거절했다. 곤살로가 항복을 거절하자 라가스카는 엔코미엔다로들을 곤혹스럽게 했던 권한 박탈을 일부 철회해줄 것을 본국에 권고했고, 곤살로파 내의 부하들을 국왕군의 무리로 끌어모았다. 이리하여 페루 대부분의 스페인인들이 국왕군의 무리로 합류했고, 이에 난처해진 곤살로는 쿠스코 인근의 하키하우아나에서 국왕군과 대적했다. 결국 이 하키하우하나 전투에서 곤살로는 대패했고, 국왕 카를로스 1세에게 반기를 든 죄목으로 참수함으로서 1548년 4월 11일, 3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3. 평가

그냥 한 마디로 인간 말종 쓰레기로 죽어도 싼 놈이었다. 곤살로가 반역죄로 처형당할 때까지 잉카인들에게 저지른 악행은 참으로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패악스러운 것이었다. 곤살로는 이복형 프란시스코의 잉카 원정을 따라 공을 세우면서 20세 초반 나이대에 최고의 부자로 자리매김했지만, 이런 급성장은 곤살로에게 자만과 탐욕이라는 안 좋은 인격을 형성시켰다. 이복형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자신이 추대한 꼭두각시 황제 망코 잉카를 황제로써 최대한 우대했고, 예법에 따랐지만, 정작 쿠스코에서 공동 통치자로써 망코 잉카와 함께 있었던 곤살로는 망코 잉카를 학대했고, 황제가 아닌 인간 이하의 동물로 취급했다. 한마디로 형인 프란시스코도 잔인했지만 곤살로는 이복형보다 더 잔인했다는 소리이다.

곤살로의 계속되는 황금 요구와, 잉카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황제에게 오줌을 갈기고 심지어는 황후를 황제가 보는 앞에서 끌고가 몸을 더듬었던 추악한 행위는 망코 잉카의 대대적인 반란을 불러일으켰다. 비록 망코 잉카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를 통해 피사로파와 알마그로파가 나뉘어져 스페인인들끼리 내전을 펼치게 되었고, 곤살로가 끔찍이 따랐던 1살 터울의 형 후안은 전투에서 죽은 데다가, 둘째형 에르난도는 평생을 본국의 감옥에서 살아야 했고, 맏형 프란시스코는 암살로 생의 끝을 맺는 비극적인 결말을 맺게 되었는데 이는 모두 곤살로 스스로가 펼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곤살로는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국왕 카를로스 1세에게 반역 행위를 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였다.

지금의 멕시코와 과테말라 지역에 있었던 아즈텍과 마야를 정복한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와 그의 친구 겸 부하였던 페드로 데알바라도, 또는 후대에 뉴멕시코, 애리조나, 텍사스 등 미국 남서부 일대를 정복했던 프란시스코 바스케스 데코로나도마저 고개를 숙이고 굴복했던, 당대 세계 최강 스페인 제국의 군주에게까지 반역을 저지른 것 자체도 곤살로 피사로가 얼마나 생각없는 자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6]

20대 초반에 잉카 제국을 정복하고, 최고의 벼락부자가 되어, 존재 여부조차 확실하지 않은 엘도라도 전설에 빠져 정글에서 헛고생을 하고, 국왕 카를로스 1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켜 반역자로 참수된 곤살로 피사로의 최후는 어찌보면 죽어도 싼 놈이란 말밖에 안 나올 정도로 자업자득, 인과응보라고 할 수 있는 인생이었다.

4. 여러 대중매체에서

  •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의 1972년 영화 <아귀레, 신의 분노>에서 부관 페드로 데우루수아에게 군대를 이끌고 가 엘도라도를 찾아오라는 명령을 내리는 총독으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실제 역사속 배경상 곤살로 피사로는 실존 인물인 페드로 데우루수아의 원정 당시 ‘반역행위로 처형된’ 상태였다. 영화의 배경은 비록 실제 역사적 고증과 약간 틀린 점이 있으나 영화 자체와 내용은 명작이니 한 번쯤은 보는 것을 추천한다.
  • 앙투안 B 다니엘의 3권짜리 소설《잉카》에서도 단연코 곤살로가 등장한다. 이 작품은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잉카 정복과 그 이후 망코 잉카 황제의 대스페인 항쟁을 다루고 있으며, 가상의 인물인 콩키스타도르 가브리엘과 수수께끼의 푸른 눈을 가진 잉카 소녀 아나마야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잉카인들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고증이 놀랄 만큼 완벽하며, 실제 역사적인 사건을 주인공 가브리엘과 잘 매치시켜 독자들에게도 잘 전하고 있는 명작 중의 명작이다. 이 소설에서 곤살로 피사로는 가브리엘과 처음 대면했을 당시 ‘천사같은 얼굴’을 지닌 연악한 모습을 지닌 미소년으로 나타나지만, 잉카 정복 도중에 가브리엘과 자주 사적인 일로 다툼을 시작하며, 결국엔 얼굴에 감춰진 영악하고 잔혹한 모습을 서슴없이 보여준다. 이때까지는 그래도, 매우 착하게 나오는 1살 차이 형 후안 피사로와의 우애속에 어느 정도 성격을 누그러뜨리고 무엇보다도, 후안에게 의지하는 브라더 콤플렉스적인 면모도 보인다. 하지만 삭사이와만 공성전에서 후안이 전사하자 곤살로의 성격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형을 죽인 잉카인들을 끝까지 저주하고, 잉카인들을 감싸고자 하는 가브리엘과 가브리엘을 돕는 아나마야를 박대하며 둘에게 가장 커다란 위협이 된다.
에스파냐의 콩키스타도르. 잉카를 정복한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이복동생으로, 황금을 탐하여 잉카의 황제를 모독하고, 황후를 욕보이는 등 비도덕적인 행보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러나 프란시스코가 암살당한 후 나락의 길을 걷게 되며, 종국에는 국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대적하여 참수당한다.
<대항해시대 오리진>, 항해사 정보 中

[1] 16세기때의 역사가로서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잉카 정복에 대한 저서를 기술했다. 페루를 직접 탐험해 나스카 지상화에 대한 존재를 알린 사람이기도 했다[2] 코르테스는 과거 아즈텍 제국을 정복했던 시기의 경험으로 식민국가로 삼을 지역의 지도자를 가능한 한 적당한 권위를 유지시킨 상태에서 인질로 삼아야 장기간의 정복 활동에서 유리하다는 걸 실감했었다. 당장 자신이 몬테수마 2세를 기껏 잡아놨으나 제대로 못 써먹어 위험에 처했을 때 별 소용을 못 보게 된 것도 있었고.[3] 죽기 직전에 그에겐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는데, 산 채로 불에 탈 것인지 아니면 기독교로 개종하고 목이 매달릴지에 대한 선택이었다(...).[4] 비록 비극적으로 죽었지만, 아타우알파의 행위도 그다지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일단 아타우알파는 형이자 본래 잉카 황제였던 우아스카르에게 반역을 꾀하여, 우아스카르를 포로로 붙잡고 자신이 황제에 올랐다. 이윽고 피사로의 군대가 쳐들어와 자신을 감금하자, 아타우알파는 우아스카르가 제위에 오를 것을 두려워해, 자객을 보내서 암살했다.[5] 잉카의 사회에서 황제의 아내가 된 여성은 오로지 황제만을 섬겨야 했으며, 황제가 붕어하더라도 그의 부인으로서 평생을 살아야 했다. 곤살로 피사로의 통보는 잉카 사회에서는 결단코 내릴 수 없는 엄청나게 파격적이고 무서운 것이었다.[6] 오히려 코르테스는 일단 순순히 말을 따라 귀환한 후 카를로스 1세에게 직접 찾아가서 아첨, 설득, 변호 등으로 다시 신임을 얻어 재기했다. 이후에 북아프리카 원정 실패로 다시 몰락하게 되지만 이것도 반역 같은 것이 아니라 카를로스 1세와 함께 알제리 원정에 나갔다가 폭풍을 만나는 불운으로 카를로스 1세가 죽을 뻔하는 바람에 미움을 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다시 재기하지 못하는 선에서 그쳤고, 몇년 뒤 질환으로 사망하게 되지만 30대 후반에 죽은 곤살로 피사로와는 달리 60대 초반까지 살다가 죽었기에 당대 기준으로 오래 산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