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7 22:34:03

망코 잉카 유판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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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사파 잉카
망코 잉카 유판키
Manqu Inka Yupanki
파일:Manco_Capac_II.jpg
잉카 제국 제7대 황제
신잉카국 초대 황제
<colbgcolor=#DAA520><colcolor=#fff,#fff> 출생 1515년
페루 쿠스코
사망 1544년 (향년 28~29세)
페루 빌카밤바
재위 기간 제15대 사파 잉카
1533년 ~ 1544년 (11년)
전임자 투팍 우알파
후임자 사이리 투팍
부모 아버지 : 우아이나 카팍 황제
종교 잉카 종교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잉카 제국의 제7대 황제이자 제15대 사파 잉카.[1]

잉카 내전에서 승리해 황제가 되었던 아타우알파를 쫒아낸 스페인프란시스코 피사로에 의해 괴뢰 황제로 세워졌으나, 스페인 군인들의 탄압과 멸시를 견디다 못해 산중 요새인 빌카밤바로 도망쳐 망명정부인 신잉카국을 세우고 스페인에 대한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풀네임은 망코 잉카 유판키이지만, 줄여서 망코 잉카라고 부르기도 하고, 아니면 망코 카팍 2세로 부르기도 한다.

2. 생애

망코 잉카는 1515년 경, 제국의 수도 쿠스코에서 우아이나 카팍 황제의 50여 명에 달하는 아들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우아이나 카팍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제위는 쿠스코를 기반으로 한 우아스카르를 거쳐 북쪽의 키토를 기반으로 한 아타우알파에게 넘어갔고, 우아스카르를 축출한 후, 유일무이한 최고 권력자가 된 아타우알파는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 쿠스코를 점령한 후 우아이나 카팍의 황자와 그 후손들을 모두 제거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망코 잉카는 반강제적으로 쿠스코에서 도망쳐 나갈 수밖에 없었으며, 아타우알파 황제의 눈길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주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아타우알파를 피해 도망치던 와중인 1533년 11월 14일에 망코 잉카는 콩키스타도르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일행과 마주쳤다. 망코 잉카는 번쩍거리는 금속 갑옷을 입고 있었던 스페인 군인들을 '신이 보낸 구원자들'이라고 믿었고, 이후 피사로 일행에 합류하면서 스페인인들과 함께 동행했다. 피사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타우알파를 카하마르카 광장 전투에서 사로잡고 결국에는 죽여버렸으며, 후임으로 괴뢰 황제인 투팍 우알파를 세웠으나 투팍 우알파가 얼마 가지 않아 붕어하면서 망코 잉카를 새로운 잉카 황제로 세웠다. 망코 잉카는 쿠스코로 돌아가 스페인의 힘을 뒤에 업고 귀족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은 후 새로운 사파 잉카로 즉위했으며, 같은 콩키스타도르인 디에고 데 알마그로를 만나기도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 피사로는 알마그로와 함께 아타우알파의 장군이자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던 퀴즈퀴즈 장군을 처리하기 위해 쿠스코를 떠났고, 잉카인들을 형식적으로 다스릴 망코 잉카를 지키기 위해 90여 명의 병사들과 자신의 막내이자 젊은 동생인 곤살로 피사로와 후안 피사로를 남겨두었는데, 이 곤살로 피사로는 형이 떠난 후 황제에게 오줌 갈기기, 여자를 탐하며 망코 잉카의 아내인 쿠라 오크요를 억지로 데려가 범하는 NTR은 기본일 정도로 인간이 넘지 말아야 할 도를 넘는 패악질을 저지르기 시작했다.[2]

곤살로 피사로는 여색과 재물을 밝히는 속물적인 인간 말종이었고, 자신을 제어하던 형마저 사라지자 모든 것을 자신의 것인 것처럼 행동했다. 수도의 황금들을 자기 앞으로 끌어와 바치라고 명령했고, 심지어 신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황제에게 소변을 보면서 모욕했으며, 심지어는 망코 잉카의 아내이자 황후인 쿠라 오크요를 강제로 끌고가 강간하면서 그야말로 할 수 있는 모든 악질적인 짓거리는 다했다. 처음에는 곤살로 피사로가 자신을 황제에 올려준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동생이기에 최대한 그의 행동을 봐주려 노력했던 망코 잉카는 오줌 맞는것까지는 자신이 참으면 되었으나 부인을 건드리는 곤살로의 패악짓은 참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망코 잉카는 스페인을 어떻게든 쫓아내겠다는 목표를 각오하였으며 결국 부황 우아이나 카팍의 황금 동상을 찾아주겠다는 핑계를 둘러대고 감시가 허술해진 틈을 타 1535년에 쿠스코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망코 카팍은 이전부터 탈출과 동시에 격문을 통해 군대를 비밀리에 모아왔기에 탈출하자마자 무려 200,000명의 대군을 모았고, 프란시스코 피사로디에고 데 알마그로가 부재한 틈을 노려 수도 쿠스코와 주둔하고 있는 스페인 병사들을 공격했다. 그럼에도 잉카는 숫적으로는 압도적이었으나 스페인군과의 기술력 격차가 무려 4천년이나 차이났기에 치밀하게 작전을 짰다.[3] 그렇게 쿠스코 공방전에 필요한 삭사이와만 요새를 점령, 이후 잉카의 명장에 가까운 키소 유판키가 리마-쿠스코 길목에 위치한 산길 매복작전으로 지원군을 끓으면서 망코 잉카의 잉카군이 쿠스코에 있던 스페인 군을 말살할 수 있는 희망을 보게 된다.

그러나 잉카 제국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부족들과 피사로 가문과 엮여있던 잉카의 일부 가문들이 스페인의 편을 들어 수적열세를 어느정도 메워 잉카 군대를 공격했고, 약 10개월에 걸쳐 쿠스코를 공성했으나 망코 잉카가 유판키에게 리마를 점령하라는 황명이라는 실책, 삭사이와만 요새 함락, 알마그로 군의 지원 소식에 패전했다는 것을 감지하며 결국 후퇴하기 시작, 함락하는 데 실패하면서 망코 카팍은 1537년에 인근의 오얀타이탐보로 후퇴했다. 그러나 이후 알마그로가 칠레 원정에서 실패한 채 돌아오고, 피사로가 유판키의 리마 공세를 압도적 승리를 거두며 걸림돌이가 사라져 리마에서 지원병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게 하는 등 전세가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망코 카팍은 오얀타이탐보 전투에서 일부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리마 포위전에 실패하고, 스페인에서 지원병이 오는 등 전세가 불리해지자 결국 제국 대부분의 지방을 버리고 재위 4년만에 산악 지대인 빌카밤바로 후퇴했다. 망코 카팍은 빌카밤바에서 망명정부인 신잉카국을 세웠고, 스페인에 협력한 왕카족을 물리치기도 하면서 필사적인 저항운동을 계속했다. 이후 이 신잉카국은 1572년, 최후의 황제인 투팍 아마루가 처형당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망코 카팍은 1544년 경 비트코스 지역에서 자신이 거두어들여 보호하고 있었던 디에고 데 알마그로의 옛 패잔병들에게 시해당했다.[4] 이후 신잉카국의 제위는 그의 아들 사이리 투팍이 물려받았다. 참고로 이후 즉위한 신잉카국의 후대 황제인 사이리 투팍, 티투 쿠시, 투팍 아마루는 모두 망코 카팍의 아들들이었다.


[1] 타 민족들을 정벌하고 대제국을 세운 파차쿠티부터를 제국의 황제로 인정하며, 이전의 잉카 지도자들은 쿠스코 왕국의 군주였다.[2] 곤살로 피사로는 제 형이 겨우 이룩한 잉카 제국 정복의 업적을 거의 무너뜨릴 뻔한 작자였다. 이후에도 20세에 형따라 잉카를 정복해 억만장자가 된 곤살로는 기고만장해지는 바람에 후일 엘도라도 탐색에 실패한 이후 자기의 이복형이자 차남 에르난도가 자국 군인 살해로 본국에 잡히자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카를 5세)가 파견한 총독을 잡아 사형하는 등의 패악을 부리며 반란을 선언하였고 결국 진압되어 처형되었다.[3] 잉카제국군 중 일반병사 주무기는 돌도끼였고 초급장교들 이상 부터 청동검을 장착했다. 반면 스페인군은 철제갑옷이었기에 청동검과 돌도끼로는 도저히 죽일수 없었고 스페인군 사망원인이 아군과의 충돌이나 오사격으로 인해 죽은게 더 많았다.[4] 이 스페인 패잔병들은 암살 직후 분노한 잉카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