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1 18:19:11

파리의 성모

기적의 패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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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re-Dame de Paris / Médaille Miraculeuse

1. 개요2. 첫 발현: 예언3. 2번째 발현: 기적의 메달4. 그 외

1. 개요

1830년 7월 18일, 프랑스 왕국 파리 뤼뒤박에서 가톨릭 수녀회 중 하나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1] 소속의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에게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사건. 기적의 패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2. 첫 발현: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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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 7월 18일 밤,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는 저녁에 성모 마리아를 만났다는 신비한 확신에 가득찬 채 마루에 있었다.[2] 잠든 지 2시간 남짓 지난 11시 반 무렵, 카타리나 수녀는 어린 아이의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 목소리는 3번쯤 카타리나 수녀의 이름을 불렀다.

잠에서 깬 카타리나 수녀에게 어린 아이는 '성모님께서 계시니 성당으로 가 보라.'고 말했다. 카타리나 수녀는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도한 때가 다가왔다고 생각했으나 누군가에게 발견되지는 않을까 염려했다. 이에 어린 아이는 '이미 밤이 깊어 아무도 없으니 어서 성당으로 가서 성모님을 봬라.'고 재촉했고, 카타리나 수녀는 성당으로 향했다.

잠긴 성당 문은 그저 손을 대기만 했는데 알아서 열렸다.안은 밝게 빛나고 있었고 샹들리에와 제대에도 전부 불이 켜져 있었다. 어린 아이는 안으로 들어갔고 카타리나 수녀도 아이를 따라 들어갔다. 아이가 제단 계단 옆 의자에 앉자 수녀는 그곳에서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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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카타리나 수녀는 옷깃이 스치는 소리를 듣고, 제대의 계단을 내려오시는 성모 마리아를 발견했다.

성모 마리아는 의자에 앉았는데 손에선 반지 보석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카타리나 수녀는 하얀 옷을 입은 어린 아이가 자신의 수호천사임을 깨달았다. 수호천사는 수녀에게 이 분이 성모님이라고 한 번 더 확인시켜주었다.

성모 마리아는 카타리나 수녀에게 프랑스에 위험이 닥쳐올 터이고, 그로 인해 또 다시 십자가와 신앙이 모독을 당하고 파리대주교가 고통을 받으리라고 일러주었다. 40년이 지나 1870년에 프랑스에 일어날 보불전쟁과, 그로 말미암아 프랑스에 일어날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성모 마리아가 예언한 듯이 보였다. 이 말을 마치고 그리고 성모의 모습은 고요히 사라짐으로써 첫 번째 발현이 끝났다.

성모의 예언은 1주일 후 일부분이 실현되었다. 1830년 7월 27일, 흔히 말하는 7월 혁명(La Révolution de Juillet)[3]이 발발하여, 파리의 도로에는 바리케이트가 쳐지고 머스킷 소총대의 총성이 마구 울려댔다. 사망자들은 방치됐고, 죽음의 숨결이 한여름의 뜨거운 공기 속을 드나들었다. 부르봉 왕조의 샤를 10세는 왕위에서 추방되어 영국으로 도피했다. 많은 주교들이나 신부들, 수도자들이 투옥되고 살해당했다. 교회는 신성함을 모독당하고, 성상(聖像)들은 넘어뜨려졌으며, 십자가는 짓밟혀졌다.

카타리나 수녀는 자신의 고해사제 알라델(Jean-Marie Aladel 1800-65)에게 성모 발현과 성모의 메시지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믿기 힘들었으나 카타리나 수녀가 언급한 내용이 실제로 일어난 듯 보였으므로, 알라델 신부는 이 젊은 수련수녀가 정말로 성모의 사적 계시를 받은 것인지를 분별해야 했다.

3. 2번째 발현: 기적의 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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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발현이 있고 넉 달이 지나 1830년 11월 27일 토요일 저녁 5시 30분 무렵이었다. 나자렛의 성 요셉의 상본을 모신 곳 부근에 있던 주교좌(主敎座)에서 첫 발현 때 들었던 옷깃 스치는 소리가 난 뒤, 새하얀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

성모는 작은 금빛 십자가가 꼭대기에 달린 금빛 지구를 손에 들었고, 양쪽 손가락에는 반지 3개가 끼워져 있었는데 반지들에선 눈부신 빛들이 반짝였다. 또 하얀 지구의 위에 서 있었고, 발밑에는 금빛 반점(斑點)이 있는 초록빛 이 있었다.

성모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카타리나 수녀는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
네가 보고 있는 이 둥근 지구는 전 세계, 특히 프랑스를, 그리고 또 한 사람을 나타내고 있단다. 이 빛들은 구원을 요청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쏟아부어 주는 은총을 상징한단다. 빛을 발하고 있지 않은 보석은 영혼들이 간청하고 있는 것을 잊고 있는 은총이란다.
성모의 손에 있던 금빛 지구가 사라지고, 양손에서 어머니의 배려하는 마음 같은 모습이 넓게 펼쳐졌다. 성모가 손가락에 긴 반지의 보석에서 발 아래 있었던 지구 위로 빛줄기가 흘러나왔다. 알처럼 둥근 테두리가 성모의 주위를 둘러쌌는데, 그 안쪽으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님, 당신께 도움을 청하는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라는 금빛 글자가 있었다.
이 모형으로 메달을 만들거라. 그 메달을 몸에 거는 사람들 모두에게 은총이 내려지리라. 메달은 목에 걸면 된다. 신뢰하는 마음으로 메달을 거는 사람에게는 은총이 많으리라.
성모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나서, 그 그림이 뒤집혀져서 뒤쪽이 나타났다. 커다란 M 글자 위에 옆쪽 막대기가 있었고 그 위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M 글자 아래에는 예수 성심(聖心)과 성모 성심을 상징하는 심장 두 개가 있었다. 예수 성심은 가시관으로 둘러쌓였고 성모 성심은 칼로 꿰찔렸으며, 별 열두 개가 전체를 둘렀다. 환시는 이것으로 끝났다.

카타리나 수녀는 젊은 고해사제 알라델 신부에게 성모 발현과 메달 주조(鑄造)에 관해 전달했지만, 신부는 수녀의 상상이리라고 회의적으로 받아들였다. 카타리나 수녀는 신부의 반응을 성모에게 전하자, 성모는 기다리라고 답하였다.
때가 온다면, 그는 내가 희망하는 대로 따르게 되리라. 그는 나의 종이니 그를 슬퍼하게 해서는 안 된단다.
당시 가톨릭 교회에서 성모 마리아가 특별한 은총을 입어 원죄의 영향을 받지 않고 태어났다(무염시태無染始胎)는 신심은 있었지만, 아직 정식 교리는 아니었다. 1859년 교황 비오 9세가 무염시태의 교리를 정식으로 선포하기 전까지, 무염시태는 신자 개개인이 믿을 수는 있으되 믿지 않아도 무방한 영역이었다. 아직 정식 교리가 아닌 내용을 무명 수녀가 받았다는 사적 계시에 근거하여 메달에 표현하여 대중에게 퍼트리려니, 설령 해당 사적 계시가 진실되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알라델 신부가 메달 제작에 미적거림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카타리나 수녀의 인내심이 결실을 맺었다. 드디어 알라델 신부는 동료 에티엔 신부를 매개로, 당시 파리 대주교 드 켈렝(Hyacinthe-Louis de Quélen) 몬시뇰에게 메달을 주조하고 신자들에게 퍼트려도 된다는 허락을 얻기 위해 움직였다.

대주교는 발현 중에 메달 주조를 요청한 성모 마리아의 이야기에 관해, 교회의 신앙이나 신자들의 신심과 차이가 없다고 판단했다. 대주교는 주조를 인준했을 뿐만 아니라 최초로 메달을 걸어보고 싶다고 요청하였다. 대주교는 개인적으로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Immaculata Conceptio)' 신심이 매우 독실했다고 전한다. 원죄 없으신 잉태의 메달 주조를 곧바로 인준했음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요청할 만한 자격이 있었다.
1832년 6월 30일, '원죄 없으신 잉태의 메달' 2천 개가 최초로 만들어졌다.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는 알라델 신부로부터 이 메달을 받았을 때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이것을 퍼뜨려야 합니다.
카타리나 수녀는 처음으로 주조된 메달을 몇 개 갖고 있었다. 그 중 10개는 파리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본원의 보관창고에 지금도 남아있다고 한다. 메달 보급은 급속한 성과를 거두면서 메달 그 자체가 기적이 되어갔고, 4년 후인 1836년까지 200만 개가 주조되었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6세[4]는 메달을 책상 위 십자가 아래에 두기도 했다.

이 메달이 이룬 기적적인 움직임에 대해 알라델 신부가 언급한 내용에 의하면, 이 신성한 메달로 인해서 모든 환자들이 치유됐고, 다양한 사람들의 회개와 전쟁, 사고 등에서의 보호가 일어났다. 이 기적들에 의해 메달은 곧바로 초창기 무렵부터 정식 명칭 '원죄없으신 잉태의 메달'이 아니라 '기적의 메달'이라고 불리며 신자들에게 매우 인기를 얻었고, 전세계 가톨릭 교회에 빠르게 퍼졌다. 메달이 이처럼 빨리 확산됨도 신기하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메달이 일으킨 기적들이 더 신비했기 때문이다.

이 메달은 묵주기도의 위력에 필적하는 위력을 발휘하는 준성사써 가톨릭 신앙을 믿는 곳곳에 커다란 충격을 불러왔다.

4. 그 외

4.1.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

기적의 당사자인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는 의외로 오랜 시간 이 기적의 당사자로 알려지지 않고 조용한 수도생활에 전념할 수 있었다. 카타리나 수녀가 고해사제 알라델 신부에게 성모 발현에 대한 내용을 이야기했을 때, 절대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약속을 받아냈기 때문이다. 훗날 가톨릭 교회의 정식 조사 때에 발현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증언하도록 요청을 받았지만, 기억 상실을 이유로 증언하지 않았다. 한때 11년 연상 언니인 루이즈 드 마리약이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에서 환속해서 카타리나 수녀는 속을 태웠으나, 루이즈는 끊임없는 편지를 보내며 설득하여 10년 후 다시 수도회로 돌아왔다.

카타리나 수녀는 1835년 5월 1일에 첫 서원[5]을 했고, 다음 해 1836년에 카타리나 수녀가 30살이 되었을 때 파리 근교 앙쟝의 호스피스 소임을 맡았다. 농장이 딸려 있었고 이나 젖소를 돌볼 수 있는 노인들을 위한 시설이었다. 카타리나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위한 식사를 준비하고, 옷을 만들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간병하고, 노인들이 임종할 때까지 보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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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카타리나 라부레부패하지 않은 유해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의 사망 후 57년이 지나 1933년, 교황 비오 11세시복을 위해 시신 발굴을 하였다. 그때 의학 검사로 카타리나 수녀의 눈은 아직 푸른 빛깔을 보존하고 있었고 유해도 부패되지 않은 것이 확인되었다. 보통 눈은 죽은 후 급속히 검은 빛깔로 변하고 함몰하여 부패된다.

카타리나 수녀의 시신은 유리관에 보관되어 얼마 안 돼서 뤼뒤박의 기적의 성모 성당에 안치되었다. 성모 발현 장소에 만들어진 제단 아래에 안치되었는데, 매일 순례자 수천 명이 찾아온다. 카타리나 수녀는 1947년 교황 비오 12세에게 시성되었다.

4.2. 성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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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발현으로 만들어진 성물이 앞에 설명한 기적의 메달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이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소위 기적의 패라고 하여 목에 거는 사람들도 많고 묵주에는 거의 필히 다는 성물로 자리를 잡았다. 신자들의 묵주 첫 단에 뭔가 타원형의 메달이 달려 있다면 99%는 이 기적의 메달이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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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여러 모습의 성모상 중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상의 모습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성모상은 여러 모양으로 조각되는데 아무래도 가톨릭 교회의 공식 인정이 된 모습으로 가장 많이 제작한다. 그렇게 특별히 많이 제작되는 성모상 모습의 3대장이 파티마의 성모, 루르드의 성모 그리고 파리의 성모이다. 각 성모상은 특색이 있어서 구분하기 쉽다. 구름 위에 성모 마리아가 서 있고 머리에 왕관을 썼다면 파티마, 6단 묵주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모습이라면 루르드,[7] 그리고 양손을 아래로 내리고 무언가 빛이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에 을 밟은 모습이라면 바로 파리의 성모이다.

성모 신심의 끝판왕(...)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레지오 마리애의 주회합에 공식적으로 모시는 성모상은 바로 이 파리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상이다.


[1] 한국관구 본원은 경기도 군포시 산본로 431번길 36 에 있다.[2]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는 이전부터 이미 기도 중 여러 번 환시를 본 경험이 있었다.[3] 흔히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알려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마리안이라는 그림으로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가 묘사한 그 혁명이다. 세속주의(라이시테)적인 혁명이었기 때문에 가톨릭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재앙이 닥친 것. 물론 가톨릭 입장에서 그렇다는 얘기고 가톨릭이 마냥 무고한 피해자는 결코 아니었다.[4] 1839년 9월 9일, 북경교구에서 조선을 분리시켜 조선교구를 설정한 교황.[5] 수도자로 살겠다는 약속. 수도회마다 각 단계의 기간은 조금씩 다르지만, 입회하면 지원기(약 1년) → 청원기(약 1년) → 수련기(약 2년)를 거쳐 첫 서원을 한다. 몇 년 단위의 기한이 정해져 있는 유기서원(약 4~5년)을 거쳐, 평생 수도자로 살겠다는 종신서원을 한다. 종신서원까지는 대략 10년 가까이 걸린다.[6] 성모 마리아나 성요셉, 김대건 안드레아등 성인의 성화가 있는 경우도 있다.[7] 한국 가톨릭에서 제작한 성모상은 대부분 5단 묵주로 조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