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영웅전설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은 응웬 반 티우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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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오딘지엠 | 응우옌반티에우 | 쩐반흐엉 | 즈엉반민 | }}}}}}}}} |
무궁화대훈장 수훈자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한국인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상훈 연도 | 결정일 | 수여일 | 이름 | 직책 | 국적 | 비고 |
1949년 | 8월 15일 | 이승만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60년 | 8월 13일 | 윤보선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63년 | 12월 5일 | 12월 17일 | 박정희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67년 | 6월 23일 | 육영수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79년 | 12월 7일 | 최규하 | 대통령 | 대한민국 | 12.12 군사반란으로 하야 | ||
1979년 | 12월 7일 | 홍기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80년 | 8월 29일 | 8월 29일 | 전두환 | 대통령 | 대한민국 |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 |
1980년 | 8월 29일 | 8월 29일 | 이순자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88년 | 2월 24일 | 2월 25일 | 노태우 | 대통령 | 대한민국 |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 |
1988년 | 2월 24일 | 2월 25일 | 김옥숙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93년 | 2월 11일 | 2월 23일 | 김영삼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93년 | 2월 11일 | 2월 23일 | 손명순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98년 | 2월 17일 | 2월 25일 | 김대중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98년 | 2월 17일 | 2월 25일 | 이희호 | 영부인 | 대한민국 | ||
2008년 | 1월 28일 | 노무현 | 대통령 | 대한민국 | |||
2008년 | 1월 28일 | 권양숙 | 영부인 | 대한민국 | |||
2013년 | 2월 12일 | 이명박 | 대통령 | 대한민국 | |||
2013년 | 2월 12일 | 김윤옥 | 영부인 | 대한민국 | |||
2013년 | 2월 19일 | 박근혜 | 대통령 | 대한민국 | |||
2022년 | 5월 3일 | 문재인 | 대통령 | 대한민국 | |||
2022년 | 5월 3일 | 김정숙 | 영부인 | 대한민국 |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외국인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상훈 연도 | 결정일 | 수여일 | 이름 | 직책 | 국적 | 비고 |
1964년 | 12월 3일 | 12월 8일 | 하인리히 뤼프케 | 대통령 | 서독 | 외국인 최초 상훈자 | |
1964년 | 12월 3일 | 12월 8일 | 빌헬미네 뤼브케 | 영부인 | 서독 | 외국인 최초 상훈자 | |
1966년 | 2월 1일 | 2월 7일 | 이스마일 나시루딘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66년 | 2월 1일 | 2월 7일 | 틍쿠 인탄 자하라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66년 | 2월 1일 | 2월 10일 | 푸미폰 아둔야뎃 | 국왕 | 태국 | ||
1966년 | 2월 1일 | 2월 10일 | 시리낏 끼띠야콘 | 왕비 | 태국 | ||
1966년 | 2월 1일 | 2월 15일 | 장제스 | 총통 | 중화민국 | ||
1968년 | 5월 10일 | 5월 18일 | 하일레 셀라시에 | 황제 | 에티오피아 | ||
1969년 | 5월 23일 | 5월 27일 | 응우옌반티에우 | 총통 | 남베트남 | ||
1969년 | 5월 23일 | 5월 27일 | 응우옌티마이아인 | 제1부인 | 남베트남 | ||
1969년 | 10월 28일 | 10월 28일 | 하마니 디오리 | 대통령 | 니제르 | ||
1969년 | 10월 28일 | 10월 28일 | 아이샤 디오리 | 영부인 | 니제르 | ||
1970년 | 9월 25일 | 9월 28일 |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 대통령 | 엘살바도르 | ||
1970년 | 9월 25일 | 9월 28일 | 마리나데 산체스 에르난데스 | 영부인 | 엘살바도르 | ||
1975년 | 6월 27일 | 7월 5일 | 오마르 봉고 | 대통령 | 가봉 | ||
1975년 | 6월 27일 | 7월 5일 | 조세핀 봉고 | 영부인 | 가봉 | ||
1979년 | 4월 17일 | 4월 23일 |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 대통령 | 세네갈 | ||
1979년 | 4월 17일 | 4월 23일 | 콜레테 위베르트 상고르 | 영부인 | 세네갈 | ||
1980년 | 5월 11일 | 할리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드 | 국왕 | 사우디아라비아 | |||
1980년 | 5월 14일 | 자베르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 국왕 | 쿠웨이트 | |||
1981년 | 6월 25일 | 수하르토 | 대통령 | 인도네시아 | |||
1981년 | 6월 25일 | 시티 하티나 | 영부인 | 인도네시아 | |||
1981년 | 6월 29일 | 아마드 샤 이브니 아부 바카르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81년 | 6월 29일 | 틍쿠 아프잔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81년 | 7월 6일 |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 대통령 | 필리핀 | |||
1981년 | 7월 6일 | 이멜다 마르코스 | 영부인 | 필리핀 | |||
1981년 | 10월 13일 | 로드리고 카라소 | 대통령 | 코스타리카 | |||
1981년 | 10월 13일 | 에스트레야 셀레돈 리사노 | 영부인 | 코스타리카 | |||
1982년 | 5월 10일 | 사무엘 도 | 대통령 | 라이베리아 | |||
1982년 | 6월 7일 | 모부투 세세 세코 | 대통령 | 자이르 | |||
1982년 | 6월 7일 | 보비 라다와 | 영부인 | 자이르 | |||
1982년 | 8월 25일 | 압두 디우프 | 대통령 | 세네갈 | |||
1982년 | 12월 21일 | 케난 에브렌 | 대통령 | 튀르키예 | |||
1983년 | 3월 10일 | 3월 15일 | 자파르 모하메드 니메이리 | 대통령 | 수단 | ||
1983년 | 3월 10일 | 3월 15일 | 부띠나 칼릴 압불핫산 | 영부인 | 수단 | ||
1983년 | 9월 10일 | 후세인 1세 | 국왕 | 요르단 | |||
1983년 | 9월 10일 | 누르 | 왕비 | 요르단 | |||
1984년 | 4월 9일 | 하사날 볼키아 | 국왕 | 브루나이 | |||
1984년 | 4월 21일 | 할리파 빈 하마드 알타니 | 국왕 | 카타르 | |||
1984년 | 8월 30일 | 9월 13일 | 다우다 자와라 | 대통령 | 감비아 | ||
1984년 | 8월 30일 | 9월 13일 | 치렐 자와라 | 영부인 | 감비아 | ||
1985년 | 5월 17일 |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 대통령 | 파키스탄 | |||
1985년 | 5월 20일 | 루이스 알베르토 몽헤 | 대통령 | 코스타리카 | |||
1986년 | 9월 4일 | 4월 10일 | 엘리자베스 2세 | 국왕 | 영국 | ||
1986년 | 9월 4일 | 4월 16일 | 보두앵 | 국왕 | 벨기에 | ||
1987년 | 4월 7일 | 아메드 압달라 | 대통령 | 코모로 | |||
1988년 | 11월 3일 | 이스칸다르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88년 | 11월 3일 | 자나리아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89년 | 11월 3일 | 11월 20일 |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 대통령 | 서독 | ||
1989년 | 11월 3일 | 11월 30일 | 프랑수아 미테랑 | 대통령 | 프랑스 | ||
1989년 | 11월 3일 | 11월 30일 | 다니엘 미테랑 | 영부인 | 프랑스 | ||
1990년 | 6월 21일 |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 대통령 | 파라과이 | |||
1990년 | 11월 5일 | 괸츠 아르파드 | 대통령 | 헝가리 | |||
1991년 | 9월 13일 | 아즐란 샤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91년 | 9월 13일 | 투안쿠 바이눈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91년 | 9월 25일 |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 대통령 | 멕시코 | |||
1992년 | 8월 13일 | 호르헤 안토니오 세라노 엘리아스 | 대통령 | 과테말라 | |||
1993년 | 5월 20일 | 5월 25일 | 피델 라모스 | 대통령 | 필리핀 | ||
1993년 | 5월 20일 | 5월 25일 | 이멜리타 마르티네스 라모스 | 영부인 | 필리핀 | ||
1994년 | 11월 7일 | 11월 21일 |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 | 대통령 | 칠레 | ||
1994년 | 12월 5일 | 12월 9일 | 레흐 바웬사 | 대통령 | 폴란드 | ||
1995년 | 2월 7일 | 2월 16일 | 이슬람 카리모프 | 대통령 | 우즈베키스탄 | ||
1995년 | 2월 21일 | 3월 6일 | 로만 헤어초크 | 대통령 | 독일 | ||
1995년 | 3월 28일 | 4월 3일 | 젤류 젤레프 | 대통령 | 불가리아 | ||
1995년 | 6월 26일 | 7월 7일 | 넬슨 만델라 | 대통령 | 남아프리카 공화국 | ||
1995년 | 9월 26일 | 9월 29일 | 카를로스 메넴 | 대통령 | 아르헨티나 | ||
1996년 | 7월 23일 | 9월 4일 | 알바로 아르수 | 대통령 | 과테말라 | ||
1996년 | 7월 23일 | 페르난두 카르도주 | 대통령 | 브라질 | |||
1996년 | 10월 8일 | 10월 20일 | 후안 카를로스 1세 | 국왕 | 스페인 | ||
1996년 | 10월 8일 | 10월 20일 | 소피아 마르가리타 빅토리아 프리데리키 | 왕비 | 스페인 | ||
1996년 | 11월 26일 | 자파 이브니 압둘 라만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96년 | 12월 10일 | 12월 15일 | 레오니드 쿠치마 | 대통령 | 우크라이나 | ||
2000년 | 2월 22일 | 3월 3일 |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 | 대통령 | 이탈리아 | ||
2000년 | 2월 22일 | 3월 6일 | 자크 시라크 | 대통령 | 프랑스 | ||
2006년 | 3월 12일 |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 대통령 | 알제리 | |||
2007년 | 3월 26일 | 사마 알아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 국왕 | 쿠웨이트 | |||
2007년 | 3월 28일 | 하마드 빈 할리파 알사니 | 국왕 | 카타르 | |||
2009년 | 5월 13일 |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 대통령 | 카자흐스탄 | |||
2009년 | 11월 12일 | 알란 가르시아 | 대통령 | 페루 | |||
2012년 | 5월 30일 | 칼 16세 구스타프 | 국왕 | 스웨덴 | |||
2012년 | 11월 21일 | 할리파 빈 자이드 나하얀 | 대통령 | 아랍에미리트 | |||
2018년 | 10월 8일 | 에마뉘엘 마크롱 | 대통령 | 프랑스 | |||
2019년 | 하랄 5세 | 국왕 | 노르웨이 | ||||
2021년 | 6월 14일 | 알렉산더 판데어벨렌 | 대통령 | 오스트리아 | |||
2021년 | 6월 16일 | 펠리페 6세 | 국왕 | 스페인 | |||
2021년 | 6월 16일 |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 왕비 | 스페인 | |||
2021년 | 8월 25일 | 이반 두케 | 대통령 | 콜롬비아 | |||
2021년 | 9월 21일 | 보루트 파호르 | 대통령 | 슬로베니아 | |||
2023년 | 7월 13일 | 안제이 두다 | 대통령 | 폴란드 | |||
2023년 | 11월 21일 | 찰스 3세 | 국왕 | 영국 | }}}}}}}}} |
<colbgcolor=#ffff00><colcolor=#DA251D,#e72d24> 베트남 공화국 제2대 총통 응우옌 반 티에우 (구엔 반 티유)[1] 阮文紹(완문소) | Nguyễn Văn Thiệu | |||
출생 | 1923년 4월 5일 |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안남 보호령 닌투언 성 탄하이 구역 탄하이 면 트리투이마을 (現 베트남 닌투언성 닌하이현 탄하이면) | |||
사망 | 2001년 9월 29일 (향년 78세) | ||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 |||
재임기간 | 국가영도위원회 주석(총통 권한대행) | ||
1965년 6월 19일 ~ 1967년 10월 31일 | |||
제2대 총통 | |||
1967년 10월 31일 ~ 1975년 4월 2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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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불교 → 가톨릭 | ||
서명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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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0년의 응우옌반티에우
베트남 공화국의 제2대 총통,[3] 정치인, 군인.
영어와 프랑스어를 매우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어 리처드 닉슨과 통역없이 프리토킹이 가능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 정권 시절에 구엔 반 티유라고 불렀다.
2. 생애
베트남 남부의 판랑탑짬[4][5] 이라는 곳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1945년 잠깐 베트민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나 1946년 활동을 중지한다. 이후 사이공으로 가서 베트남 국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였고, 베트남국 육군에 입대했다. 이는 베트남 공화국 육군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그의 최종계급은 중장이었다. 본래 불교 신도였으나 이 즈음인 응오딘지엠 정권 시기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카톨릭교도를 편애하던 응오딘지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개종한 것이라는 소문은 늘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6] 아내 마담 티우 역시 카톨릭교도였다.[7]
1963년 11월 2일, 응오딘지엠 총살 이후의 쿠데타 광풍[8]을 견뎌내고 1965년 6월 19일에 그 역시 쿠데타로 국가원수직에 올랐다.
이후 제2차 월남 전쟁 기간의 대부분에 걸쳐 베트남 공화국의 총통직에 있었다. 민정이양을 위해서 1967년 9월 3일에 열린 대통령 선거와 1967년 10월 21일에 열린 총선거에서는 승리[9]하고 1971년 10월 2일에 열 재선에도 성공하여 쿠데타의 반복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나마 1967년 선거는 득표율이 34%였으나, 1971년 선거는 유일한 후보자로써 100%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구정 공세 실패 직후의 짧은 평온기를 잘 수습하기도 했다. 70년에는 미국 민간사회의 조언에 따라 미국 정부의 재정적 지원 아래 중남미를 모델로 자신만의 토지개혁을 시작했다. 북부 출신 월남민들에게만 조금 혜택이 가지 사실상 실패했다고 간주되는 응오딘지엠의 토지개혁에 비해 그럭저럭 성과는 낸 편이었다고 평가된다.[10] 외신들도 이 사업만큼은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남베트남이 멸망한 지금은 너무 늦었다라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독재자 응우옌반티에우는 야당과 언론을 탄압한 것은 기본에 엄벌주의를 내세워 마약 밀매, 거리 강도, 무장 강도, 강간, 매춘 혐의로 체포된 사람은 누구나 사형에 처하게 했으며, 1972년 가을에는 공산주의 조직에 가담, 살인, 항복, 반란 또는 강간과 같은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을 재판 없이 체포할 수 있는 법령을 발표했다. 1973년 초 파리협정이 체결될 당시 티에우는 정치범 32,000명을 수감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지만 CIA는 실제 정치범 수가 40,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11] 물론 응우옌반티에우는 대외적으로는 "민주주의는 서구의 발명일 뿐"이며 동양 사회에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며 자신의 독재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남베트남 정부의 고질적 병폐인 부정 부패와 무능에 있어서는 결코 나을게 없었는데, 심지어 본인이 재임 기간중 마약 거래를 배후 조종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는 의혹이 있다.[12] 부총통 응우옌까오끼[13]와의 반목도 극심했다. 응우옌까오끼는 사이공 함락 며칠 전까지 총통이 되기 위한 공작을 펼치고 있었다.
결국 미국에서 리처드 닉슨 행정부가 들어선 뒤 파리 평화협정에 따라 미군 철수가 이루어지고 군사 원조 삭감[14]이 이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자구책[15]을 세우지 않아 패망의 단초를 제공한다. 사실 리처드 닉슨은 남베트남에 대한 확실한 안전 보장은 제공하고 있었고 그 증거로 북베트남군의 부활절 공세 당시 폭격제한구역을 철폐하고 과감하게 라인배커 작전을 가동해 북베트남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닉슨이 워터게이트로 사임하고 뒤 이은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당장 국내 문제부터 해결하느라 남베트남 문제를 신경쓸 겨를이 없었고 미 의회는 정통성이 없는 포드 대통령의 남베트남 지원 제안을 줄곧 거부했다.
하지만 응우옌반티에우 탓만 할 수 없는 것이, 당시 남베트남은 소위 군벌들의 집합체,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중국 대륙을 지배할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각 군벌들이 자기 지역의 성장(주지사)이자 지역사령관 같은 존재라 응우옌반티에우의 말빨이 제대로 서지 않을 뿐더러, 강제할 방법도 없는 실정이었다.[16] 그냥 미군이 그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기 때문에 나머지 군벌들이 마지못해 승복하는 수준, 실제로 중부 다낭 일대의 불교도 군벌은 응우옌반티에우 정권 수립 이후에도 서구식 기독교 기반 정책에 반발해서 정부군과 군벌 휘하군이 다낭 시에서 정면 충돌한 사례도 있었다. 당시 미군은 개입도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당시 포병은 하루에 4발만 발사할 수 있었으며, 각 군인이 한 달에 쓸 수 있는 총알은 85발에 불과했고, 연료 및 예비 부품 부족으로 인해 공군 수송 작전은 최대 70%까지 축소되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영토도 항복하지 않겠다는 티에우의 고집 때문에 군대는 잘게 분산되어 국경을 따라 쓸모없는 지형을 방어했고, 전략 예비군은 정적 탄압에 소모되었다.
거기다가 군기도 완전히 개판이었던게 남베트남군 부대들은 서류 조작으로 인해 후대의 아프가니스탄군마냥 서류상에서는 이름이 있지만 실제로 해당 병사는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남베트남 병사들은 탈영했다가 신원을 조작해 재입대하는 경우도 발생했으며, 심지어 남베트남군 장성들이 전대의 국민혁명군마냥 무기들을 베트콩과 거래하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대규모 난민의 도시 유입과 오일 쇼크, 쌀 수확량 감소가 겹치며 남베트남은 그야말로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티에우 총통의 사임 연설
- [ 연설 내용 전문 ]
- || Người Mỹ đánh giặc ở đây, không đánh được đi về
đặt ra một cái chương trình việt nam hóa, chúng ta chấp nhận dù không muốn việt nam hóa
Việt nam hóa rồi, hứa cộng sản hành động thì sẽ phản ứng mà không phản ứng
Thì chỉ còn 1 thứ tối thiếu là đưa đội đến đánh bại mà không đưa được
Thì thử hỏi cái đó là cái gì
Thất hứa, thiếu công bằng, thiếu chính nghĩa, vô nhân đạo đối với 1 đồng minh đang chịu đau khổ
trốn tránh trách nhiệm của một đại cường quốc
Sở dĩ tôi từ chức hôm nay là bởi vì hôm nay ở bên Hoa Kỳ quốc hội đưa vẫn đề viện trợ ra mổ xẻ
Tôi nghĩ rằng cái hành động tôi từ chức hôm nay biết đâu ngày mai từ cái chỗ 322 lên đến 722 hay nó lên 1 tỷ mốt (USD)
Rồi thì tới tấp cầu hàng không chở xe tang, đạn pháo qua đầy viện trợ....
Tôi hy vọng như vậy
Để coi cái quốc hội Hoa Kỳ có đọc ....
Tôi cũng hy vọng rằng cái lúc mà tình thế quân sự căng thẳng tại quân khu 3 quân khu 4
Ông Thiệu đi rồi, còn ông tổng thống Hương thì biết đâu còn 3-4 ngày, còn 1 tuần thì chuyện nó có thể lật được
Nếu như tôi để ngày mai, ngày mốt mà tôi mới từ chức mà cộng sản thực sự nó tấn công thì e nó quá trể
Lúc đó nó quá dở, trễ quá rồi làm không được
Quốc hội Hoa Kỳ viện trợ 3 trăm rưỡi...để trễ quá 3 trăm rưỡi cũng không lên 722 được
Không sớm hơn mà không trễ hơn, bởi vì tôi nghĩ rằng
Cái thời gian đến ngày hôm nay còn thay đổi cục diện được quân sự của cả chiến trường ||미국인들은 여기서 적과 싸울 수 없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베트남화 계획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베트남화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공격할 때 반응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전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의 것이라도 우리가 그들을 위해 싸울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는 것이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그것조차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입니까? 약속을 어기는 것입니다.
큰 고통을 겪고 있는 한 동맹국에게 인간으로서 위대한 강대국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사임하는 이유는 오늘 미국 의회가 원조 문제를 분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오늘 사임한다면, 아마도 곧 원조가 3억 달러에서 7억 2200만 달러 또는 10억 달러가 증가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공수작전이 탱크, 탄약, 폭탄이 운반하는데 내가 여기에 없다면 우리는 아마도 더 많은 원조를 받을 것입니다.
그 일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미국 의회가 동의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군사 지역 3과 4의 긴장된 군사 상황에서도 티우 씨는 떠났습니다.
그렇지만 쩐반흐엉 부총통은 3~4일 정도 남았을 것입니다.
만약 일주일의 시간이 있다고 하면 그 일은 아마도 완료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내일이나 모레 사임한다면, 그때는 공산군이 공격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무 늦은 것이고, 매우 나쁠 것입니다. 너무 늦어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미국인들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3억 5000만 달러를 지원해 주기를 바랍니다.
만약, 그것이 더 일찍 일어났다면 좋았겠지만, 지금은 이미 너무 늦었고 3억 5000만 달러는 7억 2200만 달러로 늘어날 수 없습니다.
더 일찍도 아니고, 더 늦게도 아닙니다.
제 생각에는, 오늘부터의 시간이 남부의 군사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975년 봄, 공산군의 대공세로 베트남 공화국이 붕괴 위기에 처하자[17] '배신자 미국'을 비난한 후 재보를 실은 비행기를 타고 대만으로 탈출하였다. 이 때, 금괴와 미술품을 잔뜩 실은 남베트남 공군 수송기가 응우옌반티에우가 탄 비행기의 뒤를 따랐다. 당연히 이 수송기와 승무원들 또한 고국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가 가져간 금괴[18]들은 남베트남 정부의 국고에 있던 것은 아니고, 마약 판매 등 부정축재를 통해 개인적으로 모은 재산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남베트남 중앙은행에 보관되어있는 금 16톤도 함께 옮기려했으나 실패했다고 하며, 이 금은 통일된 베트남 공산정권이 고스란히 손에 넣게 된다.
이후 북베트남군의 공세로 후퇴하던 남베트남군 병사들은 티우 아버지의 무덤을 불도저로 밀어버렸다고 한다.
그 후 한동안 영국에서 살다가 1990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92년 인터뷰에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종말을 예고하면서 미국 정부에게 베트남과 수교하지말라고 요청하기도 했으며[19], 공산당이 물러나고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당연히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자신의 폭스버러 자택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져 호흡용 보호구에 놓여온 후, 2001년 9월 29일 보스턴에 있는 베스 이즈레일 디코네스 의료소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화장되어 보스턴의 한 묘지에 안치되었다.
3. 평가
긍정적인 면모라면 구정 공세 당시 과감한 결단력으로 발 빠르게 계엄령과 총동원령을 내려 그 이상의 파국을 막았으며 또 응오딘지엠 시기 실패한 농지개혁을 재추진해 지주들을 혁파했다. 그 덕에 남베트남의 쌀 생산성이 향상되었고 남베트남 국민들의 삶의 질도 늘어나게 되었다.그러나 그 역시 남베트남의 전형적인 부패하고 권위주의적인 독재자였다. 그는 정치적 기반을 위해 측근들의 부패를 용인했고 자기도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러버렸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아편 밀매를 통한 재산 축적인데, 이건 이전의 응오딘뉴가 하던 짓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짓이었다.[20]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보니 미국은 명분 없는 무제한 소모전에 질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원치 않게 되었고 결국 리처드 닉슨은 베트남화 정책을 추진하며 남베트남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원조를 삭감해버리는 일이 발생해버렸다.
또 그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기는 커녕 수 만명의 반대 세력들을 정치범으로 몰아 억압했으며, 수십 만명이 수용소에 수감됐다. 남베트남 초대 총통인 응오딘지엠이 자행했던 백색테러와 학살은 티우 정권에서도 일어났다. 전기고문, 물고문을 포함한 잔인한 고문들이 티우 정부 하에서도 자행되었으며, 미군이 철수하던 시점인 1972년에만 하더라도 그 지역에 있던 미국 퀘이커 교회 인사들이 고문에 대해 미국에 보고했을 정도다. 남베트남 국가경찰의 숫자는 1963년 당시 16,000명이었지만 티우 정부때인 1969년에는 88,000명 1972년에는 12만 2,000명으로 증가했다. 경찰을 이용한 감시와 정보망이 티우 정부 하에서 남베트남 전역으로 확대됐다.
심지어, 그 악명높은 학살 작전인 피닉스 프로그램 또한 CIA와 티우 정부가 주도한 일이었다. 이 작전에서 살해된 수만 명의 베트콩 용의자들이 베트콩 혹은 동조자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이 작전 때문에 티우 정부는 남베트남의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남베트남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한 티에우는 결국 1975년 북베트남군의 공세에서 최악의 전략적 실수를 범하게 되면서 문자 그대로 패망하게 되었다. 더 넓게 보면 1975년의 남베트남 붕괴에 가장 책임이 큰 사람이기도 하다. 응우옌 반 티에우는 1973년 정권을 강력하게 지지해주던 미군이 철수하자 1963년 응오딘지엠 정부를 붕괴시키고도 여러 차례 계속되어 막대한 혼란을 초래한 쿠데타들이 재현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된다. 그래서 대응이랍시고 고의적으로 남베트남군의 지휘 체계를 무리하게 바꿨다.
남베트남군은 통신장비의 부족, 운송수단 결여 등의 이유로 이전까지는 하위 제대의 자율권을 어느정도 보장해주는 지휘 체제를 가지고 있었고 이런 체제 하에서 생각보다 선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의도로 정부가 무리하게 경직된 중앙집권적 체계로 갈아치우면서 대혼란과 심각한 비효율이 초래된다. 또한 정치군인 숙청 명목으로 일선 지휘관들을 하루아침에 제거하는 등 강력하게 견제했다. 이러한 정권의 안녕만을 생각하는 불합리한 조치들 때문에 남베트남군은 급속도로 약체화되어 월맹군의 최종 공세에 무력하게 패전하게 된다. 응오딘지엠의 독재와 실정이 베트남 공화국의 패망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고 널리 알려졌지만 권력욕에 찌든 정치군인에 불과했던 티에우의 실책 역시 만만치 않았던 셈이다. 출처
남베트남 국민들이 목숨을 걸고 자국을 탈출하는 와중에 자신은 부패로 축적한 금은보화와 가족들을 싣고 편하게 도주한 점도 비판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그리고 이 일은 46년 뒤 또 다른 실패 국가에서 재현된다. [21]
쫓겨나기 직전이던 1975년 3월에는 미국 전문가들이 꼽은 세계 최악의 지도자 2위에 올랐다고 한다. 같은 조사에서는 당대에 상상을 초월하는 가혹한 인권 탄압으로 악명이 높았던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3위였고, 1위는 바로 그 이디 아민이었단 걸 감안하면, 이 사람의 실정이 어느 정도었는지 알 수 있다[22]. [23] 참고자료
4. 어록
공산주의자들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판단해야 한다.[24]
살아있지만 자유가 없다면 죽은 것이다.
강토가 있다면 모든 것이 남아있지만, 강토를 잃는다면 모든 것을 잃는다.
미국이 계속 원조한다면, 우리도 계속 반공이다!
만약 미국이 우리에게 계속 원조를 하지 않는다면 일 년이 아니라 한달, 하루도 아니고 단 세 시간 만에 우리는 독립궁을 떠나야 할 것이다.
만약 미국이 우리에게 계속 원조를 하지 않는다면 일 년이 아니라 한달, 하루도 아니고 단 세 시간 만에 우리는 독립궁을 떠나야 할 것이다.
만약 그들(미국)이 나를 암살하려한다면 그건 매우 쉽다. 암살하고서 베트콩의 짓이나 쿠데타 음모라고 일을 돌려버리면 되니까.
그들(미국)은 나의 등 뒤를 찔렀다.
5. 기타
응우옌반티에우가 1975년 4월 21일에 사임하고 탈출한 후에도 사이공에서는 누가 권력을 잡느냐를 두고 정쟁이 잇따랐으며, 쩐반흐엉이 잠시 총통직을 맡았다가 얼마 안 가 사임하였고 지엠을 실각시키고 사형을 집행했던 즈엉반민이 4월 29일자로 총통직에 취임하여 공산군과의 협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북베트남, 즉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무조건 항복 이외에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며, 결국 즈엉반민 정부는 다음날인 4월 30일자로 항복 선언을 발표하였다. 즈엉반민이 북베트남 대표에게 "정권을 이양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하자 "당신의 정권은 우리가 방금 붕괴시켰소. 존재하지 않는 것을 포기할 순 없소."라 일갈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25]대한뉴스 보도 |
한국 방문 (1969년 5월 27일, 서울시청)
1969년에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그의 집무실에는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과 박정희 한국 대통령, 후안 페론 아르헨티나 대통령 등의 초상화들이 배치되었다.
캐나다 종군기자 마이클 매클리어의 책을 바탕으로 제작된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이라는 다큐에서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지만, 제사를 포함한 유교식 전통 풍습 또한 충실히 지켰었다.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인터뷰도 유명했는데, 영어가 별로 신통치 않아서 인터뷰 반 이상에 프랑스어를 섞어서 대답하긴 했으나,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 좀 장황하고 허세가 섞이긴 해도 팔라치의 날이 선 질문에 분명한 포인트를 잡아서 나름 잘 대처했다. 팔라치는 그의 태도에 분명한 긍지가 있던 것은 사실이고 인터뷰하던 순간엔 그가 알려진 것처럼 단순한 미국 괴뢰로 볼 순 없었으나, 결과적으로 봤을때 존중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자기가 떠벌린 것은 하나도 안 지켰고 망할만 했다고 혹평하긴 했다.
은하영웅전설의 등장인물 응웬 반 티우는 이 인물에서 이름을 따 온 것이다.
고향인 베트남 닌투언 성의 판랑탑짬에는 여전히 그의 집이 남아있다.
6.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67 | 1967년 총통선거 | 베트남 공화국 | [[국가사회민주전선| 국가사회민주전선 ]] | 1,649,561 (34.83%) [26] | 당선 (1위) | 초선 |
1971 | 1971년 총통선거 | 5,971,114 (100.0%) [27][28] | 재선 |
역대 선거 벽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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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총통선거 | }}}}}}}}} |
7. 역대 프로필
1965 |
1967 |
1969 |
1971 |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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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오딘지엠 | 쩐티엔키엠 | 쩐반돈 | 쩐티엔키엠 | |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응우옌카인 | 쩐반흐엉 | 쩐반민 | 응우옌반티에우 | |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응우옌후코 | 까오반비엔 | 응우옌반비 | 쩐티엔키엠 | |
제13대 | ||||
쩐반돈 | ||||
}}}}}}}}}}}}}}}}}} |
[1] 티우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린다.[2] Mặt trận Quốc gia Dân chủ Xã hội. 베트남 민주당의 후신으로 1969년 창당되었으며 1973년 사회민주동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당명에 '사회민주'가 들어가서 사회민주주의 정당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이념을 포괄하는 빅 텐트 정당이었다.[3] 응오딘지엠 실각 이후 여러번의 쿠데타가 일어났고 1965년에는 국가영도위원회라는 군정이 실시되었으며, 1967년 응우옌반티에우가 민정으로 복귀시킨다.[4] 닌투언성의 성도로 과거 참파의 마지막 수도였던 곳인데 당시 이름은 판두랑가였으며 이것을 베트남어로 음차하여 판랑이 되었다가 도시에 사람들이 몰리면서 힌두교 사원 즉, 탑들이 모여있던 곳까지 인구가 늘어나자 참파탑이라는 뜻의 탑짬[29]이라는 도시가 생겼으며 이 둘을 합쳐서 판랑탑짬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5] 여담으로 호치민이 독립운동을 하게 된 계기를 겪은 곳이기도 한데 태풍으로 배가 부둣가에서 줄이 끊겨서 파도에 휩쓸려 가려 하자 프랑스인 선주가 베트남인 노동자들에게 바닷물에 뛰어들어 배의 줄을 부둣가에 묶으라는 대도 않은 명령을 내렸고 협박에 못이긴 노동자들이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는데 당연히 이들은 파도에 휩쓸렸고 프랑스인들이 이걸 보면서 온갖 인종차별 모욕을 가한것을 보고 충격을 먹었다고 하며 호치민은 죽는 날까지 이 모습을 애통하게 생각했다고 한다.[6] 사실 이야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당장 비 가톨릭교도이면 지엠한테 눈도장 받기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출세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했지만 독실하진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실 무종교이거나 불교였던 개종자들 중 대다수는 지엠 눈에 띄기 위해 개종하고 나이롱 신도로 지낸 사람들이 많다.[7] 본명은 응우옌 티 마이 안. 메콩 델타 지역의 부유한 한약사의 딸로 태어나 1951년 군 장교였던 티우와 결혼했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아들 두 명과 딸 하나였다. 마이클 메클리어의 베트남,10,000일의 전쟁에서는 북베트남의 사이공 함락이 머지않았는데 홍콩으로 고미술품 쇼핑이나 가는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반공주의가 지배하던 제3공화국 시절 한국 언론들은 우아한 귀부인 정도로 묘사했다. 어느 쪽이 더 사실에 가까운지는 각자의 판단일 것이다. 어느 쪽이던 디엠의 제수로서 디엠 정권 시절 퍼스트레이디 노릇을 하던 마담 누보다는 나았다. 마담 누는 아예 경솔하다 못 해 기초 상식도 없는 수준의 망언들로 정권 몰락에 기여할 정도로 어리석었으니.[8] 응우옌반티에우가 총통이 될 때까지 5차례의 쿠데타가 있었다.(...) 그 또한 응오딘지엠 사살을 목적으로 했던 즈엉반민이 주도한 쿠데타에 참가했었다. 니랑이란 인물은 나중에 이걸 두고 '어이구, 지엠을 배신할 때는 언제고 나중엔 마누라를 명예 회복식에 참석시키네?' 같은 어투로 냉소하기도 했다.[9] 베트콩의 방해와 부정 선거 논란이 있었으나 베트콩은 미군이 막아냈고 부정 선거도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10] 응오딘지엠 정권 당시 시행된 토지개혁으로 분배된 토지는 전체 토지의 10%에 불과했다. 티에우 정부의 시도는 40%의 경자유전 비율을 만드는데는 성공해 실질적으로 남베트남의 소작과 지주 문제를 해결했다고 평가된다. 티에우의 남베트남 정부의 토지개혁 사업에 들어간 4억 달러 이상의 재원 중에 3억 달러 이상은 미국이 대리 지불했다.[11] 당시 남베트남 인구가 1937만 명 정도였다.[12] 웃기게도 상술한 것처럼 응우옌반티에우는 마약을 밀매한 민간인들은 사형에 처하라고 했다.[13] 프랑스 식민군 공군 조종사 출신으로, 군부 실세로 있으면서 수상과 공군사령을 겸하며 숙군 작업을 단행하고 중부 불교도들의 봉기를 유혈진압했다. 수송기 조종사 출신이나 공식 석상에도 비행복 차림으로 나타나는 등 전투기 조종사 흉내를 내서 말이 좀 많아 부총통에 그쳤지만, 군사 정권 말부터 티에우 정권 때까지 실시된 개혁 정책의 큰그림을 그린 장본인이다. 패망 뒤에는 처형 대상 2순위로 찍혀 미국으로 망명해 사업을 하다가 재미월교들과 공산당과의 화해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공산화된 조국을 방문하는 것을 허락받기도 했다.[14] 문자 그대로 반토막이 나버렸다. 덕분에 남베트남군의 탄약과 연료 사정이 악화일로를 치닫게 된다.[15] 대륙붕에서 석유가 발견된 것에 희망을 걸고 열심히 개발을 추진했었는데 문제는 월맹에서 이 소식을 듣고 본격적으로 석유가 개발되면 미국이 다시 개입하게 될까봐 무리를 하면서까지 공세를 대폭 앞당겼다. 거기다가 1974년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이 이때다 하고 남베트남 해군에 선빵을 때려 승리해 파라셀 군도를 장악하는 바람에 남베트남의 희망은 다시 없어져버렸다. 1973년 12월, 사이공 인근의 대형 석유 저장고에 대한 북베트남의 테러가 성공해 그나마 남아있던 석유도 날라가버렸다.[16]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이 군벌들은 어디까지나 군벌화된 정규군이지, 베트남국 시절의 진짜배기 군벌들 같은 조직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때 같은 진짜 군벌이었다면 지역 주민들과의 밀착도가 매우 강해서 베트콩이 그렇게 설쳐대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17] 사실 이건 응우옌반티에우 본인 탓도 있다. 중부고원의 육군 2군단을 재배치(사실상 철수)시켜야 했는데 너무 늦게 결정을 내려서 재배치가 아닌 사실상의 패주가 되어버렸고 2군단은 붕괴, 여기서부터 남베트남의 붕괴가 시작되었다.[18] 이 금괴는 무려 2톤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2015년에 캐나다 출신 미국 CBS 기자 셰이퍼가 밝힌 자료에 따르면, 16톤이나 됐다고 한다. 남베트남이 패망하던 시점에 미국 CIA는 무거운 금속이 들어있는 티우의 여행 가방을 C-118 수송기와 항공화물로 운반하는데 관여했는데, 그 금속은 16톤 무게의 순금이었다고 한다.[19] 1995년 미국과 베트남은 결국 수교하였다.[20] 우습게도, 남베트남의 마약 밀매 권력자는 나중으로 갈수록 지위가 높다. 첫번째 바이비엔은 사이공을 지배하긴 했어도 공식적인 정부 인사는 아니었고, 응오딘뉴는 정부의 실세였으며, 응우옌반티에우에 이르면 아예 총통이 직접 마약 밀매를 하기에 이른다.[21] 사실 중간에 26년 뒤에는 역으로 공산진영의 실패 국가에서 재현된 바 있다, 결론은 신뢰가 없이는 일어설 수 없다는 것.[22] 아이러니하게도 이 조사에서 5위로 선정된 크메르 공화국의 론 놀도 1975년 4월에 쫓겨났다. 그 뒤를 이은 사람이 바로 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인 폴 포트.[23] 여담으로 당시 한국의 박정희는 이 통계에서 10위를 차지했다.[24] 일부 반공 서적에서 이렇게 소개된 바 있다.[25] 어떤 책자에는 이 대목을 "당신들은 전쟁포로일 뿐이고, 포로와는 논의가 필요없다"고 말했다고 묘사하기도 한다.[26] 부총통후보 응우옌까오끼와 동반당선[27] 부총통후보 쩐반흐엉과 동반당선[28] 유일한 후보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