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5-06 04:09:11

마크로(근위대장)

<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이름 퀸투스 나이비우스 코르두스 수토리우스 마크로
(Quintus Naevius Cordus Sutorius Macro)
출생 기원전 21년, 로마 제국 이탈리아 알바 푸덴스
사망 서기 38년,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직위 로마 수도 경비대, 로마 수도 소방대,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

1. 개요2. 생애
2.1. 젊은 시절2.2. 근위대장 마크로
2.2.1. 티베리우스에게 낙점을 받다2.2.2. 칼리굴라와 손을 잡다2.2.3. 칼리굴라의 오른팔
2.3. 몰락과 최후
3. 대중매체에서의 마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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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의 악명 높은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 2대 황제 티베리우스 ~ 3대 황제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 시대 동안 악명 높은 공안통치를 주도한 인물이다.

2. 생애

2.1. 젊은 시절

고향은 본국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 알바 푸덴스. 고향에서 발굴된 마크로 비문에 따르면 기원전 21년생으로 기사계급 출신이며,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오늘날 경찰관에 해당되는 프라이펙투스 비길리움을 시작으로 수도 경비대, 로마 수도 소방대 및 야간 경호대 지휘관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젊을 적부터 고향 알바 푸덴스에 꾸준히 기부하여, 공공건축물 중 하나인 알바 푸덴스 원형 극장 보수에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Q(uintus) Naevius Q(uinti) f(ilius) Fab(ia) Cordus Sutorius Macro praefectus vigilum praefectus praetorii Ti(beri) Caesaris Augusti testam[e]nto dedit.
퀸투스의 아들이며 파비아 선거구의 소방대 장관이고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근위대장인 퀸투스 나이비우스 코르두스 수토리우스 마크로가 (원형 경기장을) 바친다.
알바 푸덴스 유적지에서 발견된 비문.

다만, 프라이토리아니로 보직 이동하기 전까지는 언제까지 수도 경비대, 소방대, 야간 순찰대 지휘관에 재임했는지는 모른다.

2.2. 근위대장 마크로

2.2.1. 티베리우스에게 낙점을 받다

전형적인 정치군인, 공안통치 실무자 정도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모습은 전형적인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와 2대 황제 티베리우스를 따른 프라이토리아니 엘리트 장교였다. 따라서 마크로가 로마사에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시점은 로마 제국 최악의 간신, 권신인 근위대장 세야누스의 위세가 절정에 다른 서기 30년을 전후로 한 시기였다. 이때가 되면 세야누스는 리빌라와 공모해,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 황족들인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대 아그리피나, 네로 카이사르가 독살, 추방형에 처해지고 티베리우스 황제의 정식 후계자 드루수스 카이사르까지 누명을 뒤집어 쓴 뒤 황궁 지하실에 유폐됐다. 이 당시, 세야누스는 소 안토니아의 보호를 받던, 게르마니쿠스의 막내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1]마저 제거하려고 혈안이 된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마크로는 소 안토니아와 그녀의 충직한 노예 팔라스로부터 음모를 고변받고 대응책에 골몰한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직접 낙점돼, 서기 31년 세야누스 제거 작전에 돌입한 황제에게 단독 근위대장에 임명됐다.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의 원로원 의원, 변호사, 역사가 타키투스에 따르면, 마크로는 티베리우스의 새 근위대장에 임명된 직후 황제에게 신변보호를 약속받았고, 세야누스 제거를 직접 담당했다고 한다. 마크로는 카프레아이 별궁에서 근위대장에 임명되기 전,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직접 임명된 직후 황제의 서한을 받고 로마로 건너가, 비밀리에 원로원 내의 친황제파 의원들,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로 칼리굴라의 할머니인 소 안토니아를 접견한 뒤 세야누스를 만나 황제께서 곧 호민관 특권을 내릴 것이라고 알려주고 소방대, 수도 경비대, 야간 순찰대, 로마 해군 지휘관과 부대원들에게 막대한 보너스를 비밀리에 지급했다고 한다. 이런 마크로의 활약 아래, 프라이토리아니를 완전히 장악한 세야누스는 극적으로 몰락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그는 세야누스 일당 제거가 시작된 서기 31년부터 티베리우스 황제의 복수극을 진두지휘하는 총책임자로 활약하며 악명을 떨치게 된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세야누스처럼 영악한 마크로를 무척 신뢰했다. 그 이유는 그가 세야누스와 달리 황제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충성을 다하면서 딴 마음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티베리우스 황제는 세야누스 일당 중 1급 반역자 명단에 오른 인사들을 연좌제까지 동원해 씨를 말린 직후, 원로원에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내며 그를 자신의 대리인이자, 아우구스투스 직계인사들의 보호자 지위까지 내렸다.
저는 국가를 위해 몸을 (암살) 위험에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원로원에 등원할 때에는 언제나 친위대장 나이비우스 코르두스 수토리우스 마크로와 소수의 프라이토리아니 부관, 백인대장을 동반할 수 있도록 해주길 요청합니다."
타키투스, <연대기>

젊은 시절부터 아우구스투스에게 헌신적이었고, 아우구스투스의 두 양자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형제와 대 드루수스의 아내 소 안토니아, 장남 게르마니쿠스 및 그 자녀들에게 호의적이었기에 근위대장이 된 직후부터 티베리우스 황제와 대 드루수스의 손자인 티베리우스의 종손 가이우스(칼리굴라)의 '친구' 반열에 올랐다. 이때 그는 티베리우스, 칼리굴라가 자기 손으로 하기 어려워 했던 정적 견제, 정보수집 업무 등을 맡아 이들에게 있는 그대로 보고하면서 더 큰 신임을 얻었다. 이는 세야누스와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어, 과거와 달리 무척 예민해진 티베리우스까지도 마크로를 '내 사람'으로 여길 정도였다.

2.2.2. 칼리굴라와 손을 잡다

이런 상황에서 마크로는 카프레아이 별궁에서 티베리우스에게 직접 원로원 견제 요령, 행정 실무, 정치 판단, 로마군 통제 요령 등을 배우고 있던 가이우스(칼리굴라),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중 가이우스(칼리굴라) 쪽과 손을 잡는다.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확실히 친손자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에게 애정을 품고 있었고 18살이 된 혈육에게 제위를 넘기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생각과 달리 소 드루수스의 아들은 전형적인 10대 소년에 불과했고 제위를 물려받기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들인 동생 대(大) 드루수스의 아들과 손자가 건재한 상태인 탓에 유리하진 않았다고 한다. 이중 게르마니쿠스의 아들, 동생의 손자 가이우스는 로마인들에게 외모와 혈통, 혈기 왕성한 청년인 탓에 인기가 많고 기대도 높았다. 그런데 가이우스 칼리굴라는 두 형을 비롯한 연이은 혈육들의 죽음 이후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숨기면서 티베리우스의 밑에서 속마음을 숨기는 법을 배웠고, 카프레아이로 건너간 이후에는 격한 감정과 분노를 통제하면서 종조부의 여러 정치술들을 연마하고 있었다. 이는 티베리우스 역시 잘 알고 있었는데, 고령의 황제가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젊은 가이우스가 티베리우스 밑에서 '제2의 세야누스'를 연상시킬 정도로 힘을 키우던 마크로 세력에 대해 지극히 자신의 방식대로 접근해 견제하고 있는 부분이었다고 한다.

이 당시 가이우스 칼리굴라는 아내 유니아 클라우디아가 출산 중 사망해 홀몸이 된 상태였는데, 근위대장 마크로는 젊은 왕자가 자신에게 보인 여러 호의를 이용해 의도적으로 아내 엔니아로 하여금 가이우스를 유혹하고 결혼약속을 받아 내게 했다. 그러면서 그는 기사계급 출신 관료가 오를 수 있는 자리 중 부와 권력을 모두 쥘 수 있고 프라이토리아니 영향력도 키울 수 있는 아이깁투스 장관 자리를 약속받았다. 그런데 가이우스 칼리쿨라는 여기에서 마크로가 벌인 정치 공작과 비열한 술수[2]를 역이용해 티베리우스 후계자로 자신을 확정짓는데 활용했다. 이런 가이우스의 행동은 훗날 그가 마크로의 아내 엔니아를 꼬셔 결혼약속을 하고 난 뒤, 티베리우스를 배게로 질식사시킨 다음 제위에 올랐다는 막장 소문의 배경이 된다. 그리고 타키투스에 따르면 이런 가이우스의 고단수 행동[3]은 후계자 문제로 고민하던 그의 종조부 티베리우스에게 반감을 사는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티베리우스는 타키투스 생전 소문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떠보는 투로 수수께끼 같으면서도 그 뜻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타키투스는 이 이야기에 대해 "예를 들면"이라는 문구를 먼저 거론하면서 그 소문을 기술했는데 이때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처럼 권력욕을 키우던 마크로에게 "자네는 솟아오르는 태양에 마음을 빼앗겨 지는 태양을 버리고 있어"라고 말했고, 같이 있던 25살의 후계자 칼리굴라 역시 자리에 있자 종신독재관 술라를 거론해 그의 속마음을 은근히 떠보았다고 한다. 또 타키투스는 소문에서 전해진 카프레아이 이야기에 대해 말하면서 어느날에는 티베리우스가 술라 이야기를 꺼냈고, 이를 경청하고 있던 가이우스가 루키우스 술라 이야기가 나오자 비웃듯 미소를 띠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티베리우스는 이런 종손자에게 "가이우스는 술라의 악덕은 다 갖추어도 미덕은 하나도 지니지 못할 것이야."라고 말한 뒤 눈에 눈물을 머금으면서 같이 있던 친손자 게멜루스를 꼭 껴안고 가이우스의 음험해보이는 얼굴을 보면서 "네(칼리굴라)가 이 애(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죽일 거야. 그리고 누군가가 너도 죽이겠지."라고 예언했다고 한다.[4]

이렇게 칼리굴라와 손을 잡은 마크로는 티베리우스가 죽기 전,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와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1세의 신변을 위해 원로원 내 불만세력을 완전히 끝장내려는 티베리우스의 지시에 따라 원로원 의원들의 내분을 유도해 큰 성공을 거둔다. 그 시작은 데키무스 라일리우스 발부스가 푸블리우스 비텔리우스의 전 아내 아쿠티아를 반역죄로 고발한 뒤 유죄를 받아낸 일이었는데, 이때 호민관 유니우스 오토는 원로원에서 "고발자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수를 주자"는 동의안을 거부해 발부스와 오토 간의 대결이 벌어지고 그 과정에서 오토가 파멸하는 일이 벌어졌다. 아울러 로마내에서 난잡하고 음란한 행동으로 이름을 떨친, 귀부인 알부킬라가 자신과 불륜관계를 맺고 있던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네로의 아버지), 루키우스 아룬티우스를 비롯한 다른 2명의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불경죄로 고발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런 일들에는 임페라토르 티베리우스의 서한도 없는, 지극히 근위대장 마크로 주도로 모든 심문과 노예들에 대한 고문이 이뤄진 모양새였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마크로가 노쇠한 티베리우스가 곧 죽을 것을 알고, 자신이 아룬티우스에 대해 품고 있던 원한을 풀기 위해 일련의 죄를 황제 몰래 날조했다고 판단했다. 또 원로원과 로마 사람들은 그동안 티베리우스 밑에서 온갖 해로운 행동을 배운 칼리굴라가 세야누스 이상의 끔찍한 근위대장 마크로의 지도를 받는 것을 걱정했는데, 이는 피고로 고소된 아룬티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아헤노바르부스, 마르수스 등이 자기 변호를 구상하는 것과 달리 자살을 결심하고, 자신의 결정을 말리려는 친구에게 세야누스와 마크로를 비교하는 말을 진지하게 한 뒤 "티베리우스가 숨을 거둔다면 어린애에서 갓 벗어나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티베리우스, 마크로에게 온갖 해독을 다 배우고 있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에게 더 비참하게 예속될 것이네. 나는 이런 상황을 걱정한다네"이라고 말하고 자신의 혈관을 자르고 죽었다.

따라서 서기 37년 티베리우스가 죽기 직전이 되면, 마크로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세야누스보다 더 나쁜 놈"이라고 욕을 먹게 된다.

2.2.3. 칼리굴라의 오른팔

서기 37년 초, 카프레아이 별궁을 떠나 네아폴리스에 도착한 티베리우스 황제가 연회를 개최한다. 노황제는 자신의 건재함을 보이기 위해 일부러 이런 대범함을 보였는데, 황제 주치의는 황제의 건강상태를 체크한 뒤 황제의 친구들과 근위대장에게 사실대로 고한다. 따라서 티베리우스 친구와 최측근들의 주도 아래 로마군 통제, 총독 지휘체계 등이 점검되는데, 마크로는 유언장을 점검하며 차기 황제 후보를 파악한다. 이때 마크로는 대 드루수스의 손자인 칼리굴라에게 단독 후계자 지위를 넘기기 위해 움직인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마크로가 티베리우스가 죽었다는 보고를 들었다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듣자 "늙은 황제를 많은 옷 무더기로 질식시켜라"라고 명령했다는 뜬소문이 돌았다고 하니 로마인들에게 그가 어느 정도로 이미지가 최악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서기 37년 3월 16일, 카프레아이 별궁에서 나폴리 만의 별장으로 거처를 옮긴 티베리우스는 가이우스(칼리굴라),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등이 보는 가운데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런데 이 당시 명의 카리클레스가 연회를 주최하고 있던 티베리우스의 맥박을 집고 그의 건강을 면밀히 진찰한 후, 황제 곁에 있던 마크로에게 “카이사르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고 말했다. 이후 마크로를 포함한 황실 관료 및 티베리우스 측근들은 서둘러 회의를 연 뒤 일찌감치 제국 각 속주총독과 군대에 급사를 파견해 뒤를 대비한 상태였기 때문에 티베리우스 이후 상황은 대비가 된 상태였다. 이런 가운데 티베리우스 일행이 머문 나폴리에서는 어떤 관직도 갖고 있지 않은 가이우스가 자신의 이름으로 근위대장 마크로를 로마로 파견해 본인이 단독 프린켑스가 될 수 있도록 손을 썼다. 그래서 티베리우스 사망 이틀 뒤인 18일, 원로원에서는 너무 손쉽게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의 단독 임페라토르 결정이 통과됐고 아우구스투스-티베리우스에 이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의 세습을 완료지었다.

이렇게 가이우스는 근위대장 마크로의 도움과 그동안 카프레아이에서 티베리우스, 마크로에게 배운 정치술을 기반으로 아무런 반대 없이 제위에 오르게 됐다.

2.3. 몰락과 최후

세야누스의 몰락이 극적이었던 것처럼 마크로의 몰락도 극적이었다.

마크로는 새 황제가 자신의 친구이고 자기 아내가 젊은 가이우스(칼리굴라)와 연인이라고 생각하며 자신만만해 했다. 그래서 그는 빠른 승진을 자신하고 곧 아이깁투스 장관으로 갈 것이라고 믿었다. 헌데 며칠 뒤인, 서기 38년 칼리굴라는 마크로를 해임했다. 이때 칼리굴라는 마크로에게 아이깁투스 장관 자리에 곧 임명하겠다고 약속한 뒤, 마크로와 엔니아가 오스티아에 도착하자마자 부부를 체포한 다음 직위를 박탈하고 연금조치했다고 한다. 이는 어릴 적 세야누스에게 고모부, 어머니, 두 형을 잃고 목숨을 잃을 뻔한 칼리굴라가 세야누스 같은 야심을 보이기 시작한 마크로를 제거하기 위해 고도의 정치술을 이용해 벌인 토사구팽이었다.

이렇게 몰락하자, 마크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야누스와 달리 평생동안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에게 충성을 다했고 세야누스처럼 황제 자리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키지 않아 막대한 재산을 모두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후 마크로의 재산 중 일부는 고향 알바 푸덴스에 건설될 원형극장 건설비로 환원됐다고.

3. 대중매체에서의 마크로

세야누스, 티겔리누스, 클레안데르,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와 함께 악명 높은 로마의 근위대장으로 거론되는 만큼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물에 단골손님으로 나온다.

1954년 영화《데미트리우스와 검투사》에서는 칼 데이비스가 마크로 역을 맡았고, 1968년 ITV Granada-TV가 제작한《더 시저스》에는 제롬 윌리스가 마크로 역을 맡았다.

1976년 BBC가 만든《나는 클라우디우스다》에서는 존 라이스 데이비스가 마크로 역할을 맡았다.

가이우스 황제를 섹스와 폭력의 아이콘으로 만들고 별명인 칼리굴라가 통칭이 되는데 기여한 영화 《칼리굴라》에는 이탈리아 배우 귀도 마나니가 마크로 역을 맡았다.

2017년 미국 넷플릭스에서 만든 다큐멘터리 시리즈로마 제국》에서는 마이클 모리스가 마크로 역을 담당했다.

[1] 훗날의 칼리굴라[2] 로마에서 원로원 계급 내 결혼은 지극히 이해중심적이었고 형식적인 경우가 많았다. 또 출산이 가능한 여성들이 20살부터 감소한 이유 때문에 기원전 1세기 카토가 자신의 친구 호르텐티우스에게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를 친구의 아내로 준 일도 있기도 했고, 남편이 먼저 아내를 상대방에게 신붓감으로 제안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3] 마크로가 자신의 아내 엔니아와 함께 공모 후 칼리굴라에게 접근해 그에게 결혼약속을 하게끔 한 일을 마크로 측과의 동맹 형태로 바꾼 일.[4] 영화에서는 티베리우스가 게멜루스와 칼리굴라가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대놓고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면 게멜루스를 죽일 테니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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