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평가
칼리굴라는 존 허트가 TV 작품 클라우디우스에서 훌륭하게 연기한 것처럼 광기어린 눈의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일을 안하는 원로원에 대한 잔인한 조롱으로 자신의 말을 집정관으로 만들겠다고 위협하는 빈정대고 궤변을 부리는 사람으로 밝혀진다.[1]
톰 홀랜드
톰 홀랜드
가이우스(칼리굴라)가 끔찍하게 왜곡되거나 시종일관 잘못 재현된 무고하고 관대한 통치자라고 상상한다면 순진한 생각이다. 그러나 가이우스에 관해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진실의 핵심이 무엇이든 그 이야기들은 사실 과장과 고의적인 왜곡과 노골적인 창작이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뒤섞인 혼합물이라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2]
메리 비어드[3]
메리 비어드[3]
구제불능 정도의 폭군으로 평가받았던 칼리굴라는 과거와 달리, 오늘날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과 배신에 심리적 충격을 받고 원로원을 비꼬고 모욕을 주는 엇나간 성격의 황제로 평가받는다.[4] 즉, 선천적으로 정신에 문제가 있는 사이코패스성 '미친 폭군'이 아니라, 최측근의 죽음과 배신, 냉혹한 권력 다툼에 신물이 난 상태에서 일을 안 한다고 생각하는 원로원에 대해 각종 비꼼과 조롱을 해대는, 그리고 그런 비꼼과 조롱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는 '비뚤어진 폭군'이라는 재평가다. 예컨대 칼리굴라는 자신의 말을 집정관으로 만드는 게 좋겠다며 농담식으로 원로원을 비꼬고 조롱하는데, 그 농담(물론 권력자가 해서는 안 되는 무서운 농담이긴 하다)이 마치 진지하게 계획된 일인양 역사가들이 서술함으로써 칼리굴라를 마치 '미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그는 로마 대화재 이후 화재 원인을 크리스트교도들에게 돌려 죄를 뒤집어 씌우고 자신의 사치를 위해 죄없는 황족들과 제국 내 부자, 장군 등을 죽인 네로, 내란 당시 로마군의 피냄새가 향기롭다며 병사들 앞에서 대놓고 말한 비텔리우스, 본격적으로 암흑기에 들게 만든 장본인 콤모두스, 겨우 안정기에 접어든 제국을 피바람으로 몰고 가고 세금징수를 위해 꼼수로 안토니누스법을 만들어 로마 제국 시스템 전체를 망가뜨린 황제로 비난받은 카라칼라, 그리고 동로마 제국의 폭군 포카스와 달리 폭군 대열에 포함되어 있지만, 했다고 주장되는 일들이 사실이 아니거나 실제 한 일로 치부되는 것도 비방성 풍문인 이유가 많아서[5], 카라칼라와 함께 실제로는 이미지와 달리 그렇게 매우 미친 황제로 평가되지는 않는다.[6] 물론, 그가 취한 냉혹하고 무자비한 정적 제거, 권력 강화는 후대의 디오 카시우스, 조시무스가 말하듯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그가 어이없게 암살된 이유가 됐다.[7]
칼리굴라의 악행이나 이상한 외모, 부정적 평가는 대부분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서 나온다. 수에토니우스는 세상의 온갖 뜬 소문을 기록할 정도로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평가받는 사람으로, 2021년 뉴욕 타임즈로 대표된 서구권 정론지에게 근거 없는 이야기를 사실로 왜곡시키는 거짓말쟁이로 평가받는 로마인이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해 "공화정을 없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혐오"를 이어받은 탓에 근대 이후부터는 황색언론 취급을 받을 정도로 신뢰도가 떨어지고 있어, 이 사람의 저서 역시 과거처럼 진실이라고 믿는 이는 고전사가 중에서도 매우 올드한 부류들 외엔 없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최근 로마사 고전연구 분야에서 칼리굴라는 과거처럼 '미친' 황제로 평가받지 않는다. 즉, 우리가 고대 기록이라고 말하는 가이우스 칼리굴라에 관한 이상할 만큼 터무니없는 일화들은 비상식적으로 과장되고 문학적으로 부풀려진 서술이 많다는 것이다.
칼리굴라의 악행을 들려주는 비상식적인 일화들은 많다. 그와 누이들의 근친상간과 자신의 말을 집정관으로 삼으려던 정신 나간 계획은 악명이 높았다. 그의 허영에 찬 기획들은 자연의 법을 거스르는 위반과 우스꽝스러운 과시를 양끝으로 하는 스펙트럼의 어느 지점쯤에 위치한다. 그의 용감한 병사들은 프랑스 해변에서 조개를 주우라는 명예롭지 못한 명령을 받아 조롱당했다. 그리고 그가 원로원 귀족들을 오랫동안 위협한 사실은 전설이 되었다. 유명한 한 사건에서 궁정의 만찬 중에 두 집정관의 옆자리에 기대어 앉아 있던 칼리굴라가 웃음을 터뜨렸다는 일화도 그렇다. "왜 웃으셨죠?" 누군가 정중히 물었다. "내가 고개만 까딱이면 그 자리에서 자네 목이 날아갈 것이란 생각을 했을 뿐이야"라는 답이 돌아왔다는 것이다.[8]
하지만 칼리굴라는 정말 시종일관 그에게 덧입혀지는 이미지대로 괴물 같았을까? 요제푸스가 주장하듯이, 군중들을 향해 터무니없이 관대한 몸짓을 취했다는 황제에게 평민들은 현혹되었는가? 한번은 포럼의 어느 건물 꼭대기에 서서 지켜보는 이들에게 말 그대로 돈을 뿌렸다고 한다. 그랬을 수도 있으나, 칼리굴라의 약점에 관해 우리에게 전해진 표준적인 이야기들의 많은 부분을 의심해야 할 확실한 이유가 있다. 이런 이야기들 가운데 일부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 나폴리 만에서 벌였다는 연극적인 행동은 차치해두고라도, 칼리굴라는 정말 로마에 팔라티누스 언덕에서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이어지는, 지금은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은 거대한 교각을 건설했을까? 우리에게 남은 거의 모든 이야기는 황제의 사후에 쓰인 것이고 터무니없어 보일수록 더 많이 검토되어야 한다. 조개껍질에 관한 이야기는 라틴어 무스쿨리 musculi를 둘러싼 혼란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 단어는 '조개 껍질'과 '군용 막사'를 모두 의미할 수 있다. 군인들은 실제로 조개껍질을 주운 것이 아니라 임시 막사를 해체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칼리굴라의 근친상간에 관한 언급이 1세기 처음 등장하는 반면 그 점을 뒷받침하는 가장 뚜렷한 증거는 그가 누이 드루실라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겼다는 사실이다. 그런 사실이 성관계에 대한 확고한 증거일 수는 없다. 저녁 만찬에서 그의 모습은 '아래에는' 누이가 '위에는' 아내가 있는 난교 파티에 가까웠다는 근대의 일부 작가들의 생각은 단지 수에토니우스의 말을 잘못 해석한 데에 따른 것이다. 그는 로마의 식사 자리에서 '위'와 '아래' 자리의 배정을 언급한 것이다.[9]
칼리굴라가 끔찍하게 왜곡되거나 시종일관 잘못 재연된 무고하고 관대한 통치자라고 상상한다면 그것도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칼리굴라에 관해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진실의 핵심이 무엇이든 그 이야기들은 사실 과장과 고의적인 왜곡과 노골적인 창작이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뒤섞인 혼합물이라는 결론이라는 것도 피할 수 없다. 그 이야기들은 대체로 칼리굴라 사후에 새로운 황제 클라우디우스에게 유리하게 구성되었다. 황제의 즉위가 갖는 적법성은 부분적으로 그의 선임자가 제거된 것은 올바른 일이었다는 생각에 기대고 있었다.[10]
따라서 연구자들은 수에토니우스 기록과 다른 기록들을 일일이 대차대조를 통해 분석하면서 고대부터 실제로 했다고 하는 비상식적으로 터무니없는 일화들이 거짓이거나, 비방성으로 만든 경우가 많다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즉, 물론 칼리굴라가 폭군이 아닌 것은 아니었으나, 그가 했다던 충격적인 악행과 비상식적인 기행 중 일부분은 거짓이라는 것이다.[11] 이런 이유들 때문에 칼리굴라를 평가할때, 무작정 "얼마나 함량미달이고 잔인한 미치광이였으면, 멍청하게 4년만에 암살당하냐"는 식의 평가를 내리는 것은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
1.1. 원로원과 후대 사가들에게 부정적 평가를 받게 된 이유
칼리굴라 시대는 내정적인 진보는 거의 없다고 부정적으로 보더라도, 생각 이상으로 나쁘지 않았다. 고대 기록상 그를 나쁘게 묘사한 주장이 모두 맞다고 해도, 결정적으로 로마 제정의 중요한 정책들은 정작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그가 취한 속주 정책은 기존의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시대와 그 스타일만 다를 뿐, 변덕스럽고 독단적이었다고 해도 전반적으로 이전 로마 공화정 시대의 폼페이우스, 안토니우스와 비슷했다. 칼리굴라는 네로처럼 돈이 궁해졌다고 속주세를 인상하지는 않는 등,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가 결정한 중요 사항을 제멋대로 교체한 경우가 없었다. 그가 매춘세를 고려했다는 소문도 말 그대로 소문일 뿐이고, 실제로 이런 세금을 만들지 않았다.
이미지와 달리 실정이라고 불린 내정상 실수도 크게 없고, 그가 방향성을 그린 정책과 조치는 클라우디우스, 베스파시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로 대표된 로마 황제에게 교과서가 됐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세베루스 왕조를 세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장남 카라칼라에게 정적을 제어하고 숙청하는 방법에서 술라,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와 함께 칼리굴라가 한 방법을 조언하면서 익히게 했다.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도 평화롭게 유지하기 힘겨워했던 파르티아와의 관계에서도 실적이 나쁘지 않았다. 물론 본인이 먼친척인 왕을 불러들여 죽이면서 마우레타니아 반란의 원인을 제공하긴 했다. 그러나 이 부분 역시 과격했어도 마우레타리아 병합문제는 근본적으로 본인 혼자 과대망상 속에서 내린 멍청이 같은 결정이 아니었다. 당시 원로원과 로마군부는 분명 북아프리카 일대는 미래적인 입장에서 군사적인 움직임이 없다면 마우레타니아 왕국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다고 판단했고, 상대적으로 안전해보여도 언제까지 로마 입장에서는 클라이언트 왕국이라는 이유로 잠재적인 곡물 문제, 정치경제적 문제 예방을 위해 필요했다고 봤다. 또 칼리굴라의 방식이 두 전임자처럼 세련되지 않고 과격하긴 했어도, 원로원과 황제 모두의 판단처럼 마우레타리아 문제는 로마의 국력으로는 동방에서 벌어지는 문제보다 빨리 해소할 수 있었다.[12] 이 외에도 그는 필로 등 당대 기록처럼 시한폭탄과 같았던 알렉산드리아 내 그리스인들과 유대인 갈등 문제도 직접 양쪽 이야기를 들은 뒤 신속하고 정확하게 해결했다. 그래서 그는 이미지와 다르게,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툴리쿠스 같이 원로원 의원 중 정적이었던 유력 장군, 원로원 의원에게 호평을 듣기도 했다. 로마 제정 중기에 사라지긴 했지만 칼리굴라를 암살하려고 했다가 사전에 발각되면서 처형된 가이툴리쿠스가 칼리굴라를 암살하려고 했음에도 칼리굴라를 크게 칭찬한 글을 많이 남겼다는 점을 알면 놀라운 점이다.
그럼에도 가이우스가 당대 자신과 대립을 해온 세네카를 제외하고, 100여년 뒤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150여년 뒤의 디오 카시우스로 대표되는 원로원에게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티베리우스 시대 후반으로 보는 서기 26년부터 로마 원로원은 "임페라토르와 프린켑스가 없어도 우리가 통치할 수 있다"고 생각 중이었기 때문에, 갓 즉위한 젊은 황제를 환호하면서도 황제 중심의 프린키파투스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는 원로원 중심 입장을 대변한 타키투스의 <연대기>에 실린 고대기록이기 때문에, 원로원에서 왜 그를 그토록 미워하고 암살했는지 알 수 있는 단서다. 원로원 귀족들이 좋아하지 않은, 전차 팀인 녹색팀[13]을 좋아한 점 역시 칼리굴라 사후 등장한 루키우스 베루스, 콤모두스와 엮여, 디오 카시우스로 대표된 후대 로마인 사가들에게 저평가받은 이유가 되었을 정도다.
따라서 칼리굴라를 평가할 때, 근대 이후 연구자들은 칼리굴라가 고대 기록상 악인 내지 미치광이로 평가하지 않는다. 정국 속에서 칼리굴라가 고대 기록 서술자들인 원로원에게 어떤 존재였고, 그가 왜 부정적 평가를 받게 되었는지 여부가 평가 항목에서 주목을 받는다.
먼저, 칼리굴라는 설령 그를 최악의 인물로 묘사한 수에토니우스, 세네카의 주장이 100% 맞다고 양보하더라도, 태생부터 이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다. 물론, 이런 현대의 평가에 관해, 혹자들은 종종 그의 할아버지 대 드루수스, 선친 게르마니쿠스는 원로원에게 악평을 받지 않았고, 고결한 인물로 찬사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들에 관한 평가 역시 기본적으로 이 두 사람의 대척점에 있던 인물이 티베리우스 황제였다는 점에서 볼 때, 인품과 별개로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평가는 정치적 인간이라는 점에서는 원로원 입장에선 좋을 리 없었다. 더해, 칼리굴라는 그가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일찌감치 황제 vs 원로원 대립 구도가 확정된 상황에서, 선택의 폭이 극히 제한적이었다.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의 원로원 의원, 변호사, 역사가인 타키투스가 본인의 대표 저서 <연대기>에서 간접적으로 밝혔듯이,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 시대의 연장선 이전에 등장 전부터 원로원에게는 본인의 증조부 아우구스투스, 법적 할아버지인 종조부 티베리우스에 대한 불만을 안고 등장했다. 따라서 칼리굴라가 제 아무리 원로원 입맛에 맞게 행동해도 부정적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칼리굴라의 숙부 클라우디우스가 재위 내내 원로원 입맛대로 그들을 존중해줬음에도, 욕을 계속 먹은 것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원로원은 사라진 타키투스의 <연대기>를 간접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티베리우스 편', '클라우디우스 편', '네로 편' 항목에서처럼 티베리우스가 죽고 어리고 경험이 일천한 다음 황제가 등장하면 달라질 것이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이들은 티베리우스 통치 후반기를 경험하면서,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그들이 느낀 불만조차 왜곡했고, 이 모든 것을 온전히 새롭게 등장한, 젊고 신선한 이미지의 가이우스(칼리굴라)에게 투영했다. 즉, 원로원은 젊은 칼리굴라를 자신들이 입맛 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고 지나치게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네로 즉위 연설 당시, 세네카가 네로의 입으로 원로원에게 공개해 환호를 받은 것처럼 칼리굴라 역시 이전의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그리고 칼리굴라 후임인 클라우디우스처럼 밀실 정치를 당연시한 황제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밀실 정치란 것 역시 최종결정권을 칼리굴라가 황제 입장에서 결정짓고 책임을 진 부분이 그 증거로 원로원에게 인식됐다. 따라서 칼리굴라는 당연히 고대기록 제공자인 원로원에게 존재 자체부터 부정적이고, 악평이 쏟아졌다.
따라서 오늘날 칼리굴라로 많이 불린 가이우스가 제위에 등극한 이후, 그가 유화책으로 재위 1년 가까이를 보여줬음에도, 종국적으로 그는 원로원과 맞붙을 수 밖에 없었다. 황제 입장에서 보면 재위 3개월도 못 되어, 전현직 법무관 이상의 발언권을 행사한 원로원 중진들이 사소한 것을 핑계로 꼬투리 잡아 인신모독을 하고, 2번의 암살 미수 음모를 겪는다? 동시대 요세푸스나 다음 세대의 타키투스, 그 다음 세대의 디오 카시우스가 평하듯, 칼리굴라 입장이 아닌 정상적인 사람 입장에서 볼 때, 황제가 제 아무리 관용을 베풀겠다고 결심하고 유화책으로 나서더라도 결국 원로원과 관계가 파탄나는 것은 당연했다.
칼리굴라 시대는 4년이 약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지난 70년여 동안 잠재된 원로원 불만이 폭발하고, 그들의 반격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시작이었다. 따라서 칼리굴라는 등장부터 선황 티베리우스와 판박이 수준으로 비슷한 모습을 보여줬다고 원로원에게 인식됐다. 더해 원로원은 과거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시대처럼 황제 암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고, 겉으론 황제에게 유화적으로 대하면서도 칼을 갈았다. 허나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내전 승리 이래,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였고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의 70년 가까운 세월을 거치면서 예전처럼 자신들의 반대파를 잡아 족칠 수 없는 허수아비였다. 설상가상 원로원의 가이우스 제거 사전계획이 들통나거나 어긋나면서 황제는 황제대로, 원로원은 원로원대로 서로를 증오하고 냉담케 만들었다. 가이우스는 원로원을 직접 경험한 이후, 그들의 행동에 제대로 실망하면서 티베리우스에게 배운대로 행동해야 됨을 깨닫고 행동을 벌인다. 그래서 원로원은 이런 그를 더 실망했고, 아예 절대군주로 매도해 사사건건 대립의 불씨를 키운다. 이는 가이우스가 즉위 후 중병에서 쾌유된 직후부터 아주 노골적이고 급진적으로 임페라토르의 권한 강화에 힘을 쏟으면서 정점을 찍게 되는데, 이때부터 원로원은 가이우스를 티베리우스처럼 변덕스럽고 냉혹하게 보면서 끊임없이 황제 제거를 시도한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볼 때, 표면상 본인 아버지 가신이던 근위대장 손에 피살된 칼리굴라의 죽음은 원로원 입장에서는 당연히 칼리굴라가 악인이었고, 존재하면 안 될 인물이었기 때문에 제거됐다고 논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즉, 요세푸스, 대 플리니우스, 디오가 날카롭게 평한 것 그대로 칼리굴라 암살은 명확한 국가 원수 시해이자 반역이지만 동시에, 고대 기록 작성자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이자 증거물이 되기 충분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칼리굴라는 일천한 경험에도 분명히 영리했고, 과감했지만, 개인적 결함 역시 뚜렷했다. 그는 카프리 섬 생활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달랐다는 평처럼 자신의 권리, 가문원의 안위를 위협하는 모든 것을 지키고자 할 때, 누구보다 냉혹하고 과감했다. 또 그는 티베리우스가 남긴 유증금을 아우구스투스 생전 결정을 재집행하는 등을 이유로 일시에 많은 소비를 함에도 이를 정치적으로 포장해 설명하는데 미숙했다. 또 그는 원수정 초창기인데도 어쩌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절부터 통용될 상식처럼 황제로 행동하는 등, 당대 분위기상 불만을 낳게 할 오해를 많이 낳고, 본인 역시 훗날 등장할 도미티아누스처럼 자기과시적인 황제였다. 그럼에도 칼리굴라는 본인과 비슷하게 즉위 전까지 정치 경력이 많지 않은 도미티아누스처럼 티베리우스 황제 방식에 의존해 약점을 보완하는데 집중했다.
암살직전까지도 원로원과 끊임없이 기싸움을 벌였고, 행정 조치 결정이나 국가 프로젝트 발표 등의 과정은 본인과 친족이 중심이 된 측근세력 중심으로 운영되어 독단적이고 냉혹하다는 평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원로원의 암살 미수 음모나 정치적 공격을 대처한 요령 역시 같았다.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에게 배운 그대로 젊은 임페라토르가 노련한 원로원에게 힘겨루기를 하면서 골탕먹이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에게 골탕먹이는 수준이 당하는 원로원 입장에선 "우리가 이렇게까지 무기력하다니..."라는 자조섞인 불만이 나올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과감했고, 본인 스스로 후일의 아우렐리아누스까지 가야 할 정도로 아주 먼 권력 강화 조치 후 상징적 퍼포먼스와 프로파간다에 집중한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원로원 입장에서 그를 평가한 100여년 뒤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등에게, 칼리굴라는 진짜 미친 황제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즉, 원로원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칼리굴라는 자신들의 생각과 달리 그냥 티베리우스 시즌2였기 때문에 욕을 더 먹을 수밖에 없었고, 즉위 초반 그가 베푼 시혜책을 계속 기대한 민중들 입장에서는 칼리굴라는 3년차 이후부터는 화끈한 소비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안 좋은 소리가 나온 것은 당연했다.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간 로마 제국 초창기를 생각하면, 스스로 신과 동일시하면서 취한 권력 강화 행보 역시 부정적 평가에 큰 몫을 차지했다. 원로원 입장에서 칼리굴라의 자기과시적인 모습을 보면, 그가 보인 일련의 행동들[14]은 지나치게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시대에 비해 노골적으로 점증된 프린켑스의 지위 향상으로 비춰졌다. 특히, 그 방법 역시 상징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을 위한 홍보를 목적으로, 그리스-로마 신화 속 분장을 하고 지나치게 화려한 복장을 입고 등장했다. 이런 모습은 당시 기준으로 로마인들에게도 익숙지 않았는데,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보다 빠른 원수정 초창기의 보수적인 로마인들 관점으론 "병에 걸리더니 젊은 황제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치부됐다. 또 칼리굴라는 중병 이전까지는 말쑥하고 단정한 차림의 황제인 터라, 이런 퍼포먼스들은 보는 입장에서 그 충격이 상당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원로원과 상류층들은 8개여월 만에 젊은 황제가 갑자기 그런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해, ‘미치광이이자 괴물’로 느껴졌고, 정국은 이어지는 암살 음모와 황제 측이 숙청으로 대응하면서 상당한 긴장관계로 몰아갔다.
그럼에도 칼리굴라는 유연하게 속도 조절을 하지 않았다. 되레 제2의 세야누스 등장을 의식해, 반란 모의가 증거 아래 명확히 드러나면 법적 절차 그대로 임했다. 자신의 장인을 비롯해, 마크로 등 근위대장들을 숙청하면서, 티베리우스에게 배운 방법대로 견제를 했고 이런 부분은 실망과 비난으로 연결되었다. 그런데 결과론적으로 근위대장과 일부 근위대 병사들에게 자신이 암살되는 결과를 맞았으니(....) 반대파 입장에선 제 스스로 무덤을 팠다고 욕을 더 먹었다.[15]
- 암살을 주도한 카이레아가 개인적으로 모욕을 당한 이후 동료 공모자들을 모을 당시 "지나치게 원로원과 기사계급 부자들을 압박하고 있다"고 통보를 했다는 것과 암살 사건 당시 친황실파와 게르만 호위대의 대응, 클라우디우스 시대때 일어난 아시아티쿠스 사건, 요세푸스의 주장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16]
-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등극 당시 원로원에 대한 반역죄를 없애고 기록도 불태우는 등의 행동으로 원로원의 지지를 얻었지만 이후 원로원 의원을 정면에서 모욕하는 일이 흔했으며, 원로원의 각종 특권을 박탈하고, 반역죄로 원로원 의원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 몇몇 원로원 의원을 고문하고 자살시키는 등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또 자신의 저서에서 수에토니우스는 칼리굴라를 기록하길 ‘원로원 의원과 대화 중 폭소하기에 의원이 이유를 묻자, 당신의 목숨을 언제든지 빼앗을 수 있다는 게 떠올라서 웃었다며 섬뜻한 농담을 하거나, 제 기능을 못하는 원로원을 비꼬아서 자신의 애마를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해야겠다고 농담을 하기도 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농담으로 말한 애마 이야기는 훗날 나중에 칼리굴라의 폭군 이미지와 결합해서 칼리굴라가 정말로 말을 원로원 의원에 임명시켰다는 루머로 변질되기도 했고, 이후 창작물들을 통해서 근친상간, 익명의 원로원 의원 살해 등 카더라식 서술들이 진짜 그가 해버린 일들로 변질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칼리굴라는 자기과시적인 인물임에도, 정작 개인 취향을 담당하는 전용관리나 사치품 조달 담당관 등을 두지 않았고 초창기를 제외하곤 끊임없이 국고를 탕진한 황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칼리굴라가 같이 묶이는 네로, 콤모두스처럼 개인적인 사치로 돈을 흥청망청 다 쓴 황제라고 평가받았던 이유는, 그가 벌인 일들이 상술했듯 선제인 티베리우스가 남긴 막대한 자금을 써먹었기 때문이다. 이 비난은 오늘날에도 “할 일을 했어도 지나치게 쓰긴 했다”고 이야기가 나오고 있고, 그가 암군 소리를 피할 수 없게 했다. 왜냐하면 즉위 초반부터 무리할 정도로 모든 결정을 한번에 진행시켜 그 많은 유산 대부분을 소비한 것은 분명히 문제있는 결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이후 그의 주도 아래 시작된 원로원의 재정 운영권과 여러 권한들을 뺏은 결정이었다. 상술한 것처럼 칼리굴라가 즉위 후 무절제하게 국고를 낭비하긴 했다고 까이는 부분의 경우, 그가 이렇게 비난받은 진짜 이유는 여러 연구들을 통해 잘 알려진 것처럼 원로원이 가지고 있는 화폐발행에 관한 권한들을 황제가 완전히 장악하고 루그두눔으로 그 시설을 옮긴 탓이 컸다. 그래서 원로원은 칼리굴라가 암살당한 이후, 이 조치를 원상복귀시키길 원했는데, 클라우디우스를 비롯한 어떤 후임황제도 이 조치를 되돌려주지 않았다.
- 칼리굴라의 사치와 악정이라고 불리는 부분들을 살펴보면, 그의 치세기때 결정이나 행보들은 네로처럼 그것이 심각한 부채와 제국 전체를 흔드는 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수에토니우스와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처럼 엄청난 유증금을 다 쓰고 국고까지 바닥낸 까닭에 국가 재정기능이 망가지거나, 이를 이유로 속주민들에게 강탈을 하거나 군대 월급을 밀리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즉, 이미지와 달리 칼리굴라의 악정이라고 주장되는 부분은 이후 네로, 콤모두스처럼 로마 역사에 큰 해가 된 것도 아니다.
- 중병에서 회복한 직후, 칼리굴라는 원로원이 가지고 있던 화폐 발행권을 빼앗아 그 권한을 갈리아 지방의 리옹으로 옮겼고, 원로원에게서 속주 총독 임명권을 빼앗는 등의 행동으로 평가가 상당히 나빠졌다. 이런 까닭에 즉위 후 기반을 만들고 있던 시점부터 원로원과 꾸준히 대립했다. 아울러 제국 전역에 자신과 왕조에 대한 대대적인 홍보를 강화해 암살 전 원로원에게 노골적으로 프린켑스 지위를 전제화킨다고 불만이 나오기도 했다. 따라서 그의 짦은 4여년간의 통치 기간동안 프린켑스와 원로원 간의 관계는 티베리우스 시절만큼은 아니어도 대립구도를 형성했다. 이런 연유로 클라우디우스는 칼리굴라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일부 근위대에게 암살된 뒤, 원로원에게 기록말살형을 하지 말라고
정중함이 포장된 협박부탁했다.
- 실제로 칼리굴라가 한 일들은 순전히 전임황제가 아우구스투스 시대때 결정난 무언가를 중지시킨 것을 되돌려 계획대로 짓거나, 황실어른들의 중지된 유언장을 집행 또는 큰 행사를 여는 등 돈을 쓰는 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그는 개인적으로는 사치가 전임자보다 심했다고 해도 다른 폭군들과 달리, 순전히 개인적인 쾌락만을 위해 국고를 낭비하지 않았다. 또 그의 시대동안 로마 재무부에서 발행하는 화폐주조, 발행 등의 일과 국가 업무 재정 정책들은 제대로 굴러가고 있었다는 연구 역시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 세네카의 주장이 쉽게 반박된 이유이다.
이런 점 외에도 그가 저평가, 부정적 평가를 피할 수 없던 이유에는 황제에게 가장 필요한 정치 경험 부족과 맞물린 악의적 소문 대처 능력도 한몫했다. 이는 그가 사후 폭군이나 암군 범주에 들어갈 수 없다고 20세기 후반부터 재평가받고 있음에도, 아직까지도 그 이미지가 대중적으로 최악인 배경이 됐다. 원로원이 가이우스와 대립하면서, 그가 벌인 행보를 적절히 여론을 통해 까고 또 깠던 것이 고대 기록에 남고, 그 기록이 중세 이래 대중들에게 사실로 인식된 점도 그가 괴물로 묘사된 이유가 된 셈이다. 이런 인식은 중세 이래 로마사 연구자들에게 칼리굴라가 악평을 벗어나지 못한 이유가 됐는데, 이런 부정적 평가에 기름을 부운 것은 그가 외설적이고, 난잡하고, 돈을 펑펑 쓴다는 주장 그리고 근친상간을 했을 수도 있다는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이었다. 더해 칼리굴라는 재위 기간이 짧은 것 이상으로, 즉위 전까지 실질적인 제왕교육이나 정치 경험이 부족해, 본인 생전 원로원 측에서 길거리 뜬소문으로 퍼뜨린 비방성 악소문을 제대로 제어하지도 못했다 여기에는 칼리굴라 잘못도 큰데, 그는 속된 말로 경험이 없어 쌈박하지 못했다. 그래서 로마 민중들은 가이우스가 초반에는 선심성으로 유증금을 막 쓰다가, 어느 순간부터 전임자처럼 호주머니를 닫아 버렸고 이는 사후 그가 흥청망청 돈을 써 댄 플레이보이로 폄하된 이유가 됐다. 더욱이 가이우스는 이후 돈을 쓰는 것도 자신과 관련있는 프라이토리아니, 수도 경비대, 소방대, 각 군대에 하사금을 내리는 조치 등이 대부분이라서 원로원에겐 좋은 먹잇감이 됐다. 또 칼리굴라는 당시 기준으로 중병에서 깨어난 이후 늘 자신과 가문을 위한 홍보와 퍼포먼스를 통한 자기 신격화를 했다. 따라서 이런 행보의 결과는 당연히 부정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점을 종합적으로 놓고 본다면 칼리굴라는 불안정하고 미숙한 황제가 맞았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평균 이상의 능력을 짧은 시간에도 보여준 황제였다. 그리고 이런 입체적인 모습처럼 칼리굴라는 '그가 한 모든 것이 문제가 있고, 모든 것이 막장이었다'는 고대의 평가는 분명 문제가 있는 흥미로운 황제였다. 특히 이전 티베리우스 시대에 비해 사치를 부린 것도 사실이지만 네로처럼 제국 내 재정을 흔들릴 정도로까지 몰고 가지 않았고, 로마 제정 특성상 재위 초기에 황제들이 민중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베푸는 경우가 많았던 것을 보면[17] 워낙 짧은 재위기간인지라 황제권을 다지기 위한 준비 도중에 죽었다고 볼 수도 있다. 아울러 짧은 재위기간이지만 기록들을 보면 초기에 호의적이었던 기록이 급속히 하락하는데 본인의 성격 탓일 수도 있지만 황제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주된 기록자였던 원로원 등 지배층들에게 나쁜 여론을 만들었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는 평을 받고 았다. 실제로 젊은 칼리굴라는 너무 짦은 시간 만에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고 이런 행동들은 그를 충분히 원로원 내 공화정 회귀론자들에게 광기로 비춰지고 왜곡되게 됐다. 중병에서 깨어난 이후 별 조짐도 안 보이던 프린켑스가 느닷없이 양자로 삼은 제위계승경쟁자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제거하는 모습 등은 주변에서 볼 때, 어떤 말이 나오고 뜬소문이 만들어졌을까는 충분히 상상해볼 것이 많았다. 더해 그가 취한 권력 강화 조치는 아우구스투스가 수십년에 걸쳐 서서히 취한 방법이 아니라, 모두 과감했다. 원로원에게서 속주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 군 통수권을 박탈했고, 민회 안에서 내린 결정을 통해 원로원을 물 먹이고, 원로원에 만든 상설 법정에서 원로원 의원과 일반 시민이 기소될 때 황제가 법대로 판결을 내리도록 한다? 또 황제가 계속 벌어지는 귀금속 횡령을 제어하고자, 세스테르티우스, 듀폰티우스, 아스는 원로원이 여전히 관할해 발행케 하고, 비리 핵심이 된 금, 은으로 만든 아우레우스와 데나리우스의 경우 따로 조폐국을 로마에서 갈리아 속주의 리옹으로 이전시키면서 원로원의 조폐권을 박탈한다? 원로원 입장에서 보면, 일방적으로 당하면서 칼리굴라를 더욱 증오하고, 그가 사라진 뒤엔 "열병에 걸리더니 머리가 완전히 돌아버렸다", "최악 중 최악", "버릇없고 젊은 애송이 녀석이 앞뒤 안 가린다"는 식으로 생각해, 온갖 저주를 쏟아낼 수 밖에 없었다.
아울러 젊은 프린켑스가 원로원 의원들에게 노골적으로 충성 서약을 하도록 하고 자신과 여동생들을 신격화하고, 대놓고 본인의 숙부, 할머니, 처남에게 추천권을 주거나 이들에게 명예를 하사하면서 원로원에게 승인해달라고 하고, 귀족 자제들의 교육을 황궁 안에 열어 황제와 친분을 쌓도록 한 행동은 이전까지 전례가 없어, 당연히 뒷말이 나쁘게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면 칼리굴라를 지금까지 악명 높은 황제로 만든 악의적 소문들은 어떻게 보면 칼리굴라에게도 책임이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원로원 입장에선 칼리굴라의 원로원 길들이기와 황제권 강화를 좋게 볼 수 없었고, 이는 치세 후반 티베리우스와 너무 흡사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불과 4년만에 벌어진 암살이라서 후대 사가들과 민중들에게 이 황제는 전체적으로 굉장한 폭군으로 그려지게 됐다.
이런 이유 등으로 당대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성격,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것은 교차 검증되는 사실이지만 악정에 대한 기록은 중구난방이고 대부분 카더라식 서술들이라서 실제로 악정인지도 의문일 정도로 신빙성이 높지는 않다고 평가받고 있다. 과장 살짝 보태면 로마판 마리 앙투아네트라 봐도 과언이 아닌 셈. 이런 이유로 오늘날에는 이런 조치들을 과거처럼 ‘미치광이 폭군’이라고 치부하지 않고, 짧은 재위기간을 가진 탓에 남아있는 기록조차 극소수인, 뭘 보여주기도 전에 죽은 황제 내지 처음으로 가면을 벗고 노골적으로 원로원에게 프린켑스의 점증화된 권력을 보여준 황제라고 재평가하고 있다.
1.2. 수에토니우스 기록에 따른 기행들
북아프리카의 히포 레기우스(오늘날의 알제리 안나바) 태생인 수에토니우스는 사실 칼리굴라 시대를 직접 살아본 인물도 아니고 100년이 지난 이후 살았던 인물이었다.[18] 그러나 대중적으로 알려진 칼리굴라의 이미지(섹스와 폭력, 근친상간, 미치광이, 폭군)는 모두 수에토니우스의 기록물인 "《황제들의 삶(De vita Caesarum)》"이라는 저서에서 나왔다.수에토니우스는 심정적 공화주의자로 평가받을 정도로, 진심으로 프린키파투스라는 학술상 용어로 설명된 로마 제정에 관해 부정적으로 여긴 변호사이자 지식인이었다. 그는 지독하게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싫어했던 집안에서 태어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이 시대 이야기를 들었고, 고향인 북아프리카와 성인 이후 살게 된 로마 거리에서 100년이 지난 이후에도 떠도는 온갖 뜬 소문을 모으고 모아 책을 출간하였다.[19] 그리고 그는 후일 황실 비서관으로 근무하다가,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반역 혐의와 불경죄로 몰락하면서, 이 책 내용 등이 증거가 되어, 로마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됐다.
그는 어떤 고대 사가보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들을 혐오했고, 증오했다. 따라서 그는 이들의 외모와 잔인함, 폭력성 등과 카이사르 간질설, 카이사르 동성애자설 등을 주장했고, 다른 고대 기록과 교차 검증하면 단독으로 주장한 내용이 많은 저서를 남겼다. 또 다른 인물들의 동시대 저서에서는 나오지 않은 내용이 검증되지 않은 채 상당수 나와있다. 때문에 수에토니우스의 저서를 읽을 때 유념할 필요가 있다는 평을 듣고 있으며, 21세기 이르러서는 서구권 지식인과 포브스, 뉴욕 타임스 등 일부 언론들에게 경우에 따라 수에토니우스는 로마의 황색언론, 가짜뉴스 유포자라는 악평을 노골적으로 듣고 있다.
수에토니우스의 저서인 《황제들의 삶(De vita Caesarum)》에는 카이사르를 포함하여 총 12명의 삶이 수록되어있다. |
칼리굴라는 수에토니우스의 저서 《황제열전》아래에서 카이사르, 티베리우스와 함께 가장 많은 비방을 받고 있는 인물로, 다른 황제와 달리 그 기록상 내용이 모두 진실처럼 알려져, 현재까지도 대중들에게는 대체로 그 이미지와 평가가 최악이다. 물론, 수에토니우스의 주장들은 19세기부터 역사가 외에도 의사, 라틴어 연구자, 변호사, 공학자 등까지 가세한 로마사 연구 흐름 속에서 대차, 대조 속에서 많은 부분 반박됐다. 특히, 칼리굴라의 경우에는 카이사르와 함께 여러 분야의 의사들이 관심을 기울인 간질, 정신질환, 근친상간 등의 악의적 주장이 유적, 유물 발굴 및 전문분야 연구 흐름 속에서 반박되면서 20세기 말부터는 수에토니우스가 거짓말을 했다는 증거로 설명되고, 그가 남긴 저서의 사료적 가치가 크게 떨어지는 사례로 많이 언급된다. 그리고 21세기 이르러 칼리굴라가 암살 미수 음모 속에서 거처를 옮겨 암살 직전까지 살았던 기쁨의 정원이 발굴 조사 끝에 칼리굴라 시대의 모습이 수에토니우스 주장과 상충된 것이 확인되면서, 수에토니우스 주장은 이제 로마 문화 참고용이라는 조롱을 받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내용은 얼마 남지 않은 칼리굴라에 관한 것이며, 모두 그 언급 수준이 강렬해, 아직까지 문화, 예술계에서는 여러 창작물 주제로 삼는 과정에서 주목 중이다.
- 자신을 신이라 생각해 베누스 등의 신들을 자신의 형제 자매라고 거론했다고 해서 미친 황제로도 유명하다. 콤모두스의 헤라클레스 코스프레가 로마 황제들 중에서는 유명한 편이지만, 시기상으로는 칼리굴라가 한 짓이 훨씬 앞선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유피테르를 본떠 머리와 수염을 금색으로 염색하고 상반신을 벗은 차림에 번개를 들고 나타나거나, 넵투누스를 본떠 삼지창을 들고 나타나 원로원 의원들과 시민들을 아연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칼리굴라가 정말로 그렇게 믿은 건 당연히 아니고 이는 정치적 효과를 노린 쇼맨십 내지 상징적인 컨셉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 소문에 따르면 첫 아내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근위대장 마크로의 아내 에니아 나이비아를 유혹해 자신이 황제가 되면 에니아와 결혼하겠다고 맹세했고 그 내용을 문서로 써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으로 시작된 루머인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를 죽였다는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근친상간 등과 함께 영화 소재로도 많이 활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괴담.
- 위에서 언급된 주장의 연장선인데 가이우스(칼리굴라)가 에니아를 통해 마크로에게 환심을 산 뒤, 티베리우스를 독살했고, 늙은 황제가 아직 숨이 붙어 있을 때 티베리우스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베개로 숨을 막아 죽였다고 한다. 이 내용 때문에 오늘날 연구자들은 수에토니우스의 주장들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데, 티베리우스는 동시대 기록들에는 죄다 노환으로 자연사했다고 나오고 있다.
- 근친상간을 했다는 의심을 사고 있으며, 그 증거는 당시 칼리굴라가 자신과 3명의 여동생에 대한 충성서약을 원로원에게 요구한 일이라고 기록했다. 이 주장은 각색되면서 각종 영화, 연극 등으로 널리 활용돼 칼리굴라의 이미지를 근친상간하는 폭군으로 굳히게 만들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작가의 추측과 100여년 후 돌아다니는 야담이 섞여 완성된 거짓말이라고 불리는 대표적인 기록의 대표격 중 하나로 분류되고 있다. 칼리굴라에게는 여동생이 세 명 있었는데, 아그리피나(小), 율리아 드루실라, 율리아 리빌라였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여동생 중 드루실라를 가장 사랑하였으며, 나머지 누이들도 연회 때 자신의 아내가 앉는 자리에 앉히는 둥 수상쩍은 점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을 참고하는 역사학자들은 ‘수에토니우스의 주장과 그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이 셋 중 셋 모두, 혹은 아그리피나를 제외한 둘과 근친상간을 하지 않았나 의심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렇지만 로마 귀족들의 예법 연구와 관련 유적, 유물 등이 발굴된 이래, 이런 추정을 하는 학자들은 많지 않고, 최근에는 수에토니우스의 대표적인 괴담으로 소개되고 있다.
- 가장 사랑했던 여동생 드루실라가 죽자 이후 사람들 앞에서 맹세할 때는 드루실라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누이를 신격화했다'는 에피소드의 원본인데,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맹세를 할 때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기 때문에, 이 주장 역시 근친상간과 마찬가지로 신뢰성이 없는 기록, 괴담으로 치부되고 있다.
- 어느날 사자와 죄수들의 싸움을 하려고 했는데 죄수가 다 죽어버려 죄수가 없자, 강제로 경기장 맨 앞의 5줄에서 구경하던 관중들을 끌어내어 사자밥으로 던져 주었다. 나머지 관중들은 열광했는데, 이는 맨 앞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귀족층이나 돈 많은 부유층이었기 때문이다고 수에토니우스는 주장한다. 하지만 칼리굴라에 대한 기록의 상당 부분이 2세기 즈음에 여기 저기서 돌아다니던 루머를 기술한 게 허다한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에서 나왔음을 고려하면 헛소문이라고 일축되고 있다. 이는 디오의 기록에서도 확인되는데, 디오에 따르면 이는 수에토니우스의 주장과는 완전 다르게 서술되어 있다. 디오는 이 일에 대해, 이렇게 된 이들이 이렇게 처벌됨은 오히려 당연했다는 식으로 적었다. 어느날 관람석에 있던 사람 중 맨 앞줄에 있는 이들, 곧 처형될 흉악범들을 끌어내, 모조리 검투사와 싸우게 하고, 일부는 맹수와 싸우라고 명령했다고 한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자초했고, 오히려 그렇게 안 했으면 로마에서 늘 벌어지는 대규모 폭동이 될 사건이었다는 식으로 적혀 있다. 그러면서 디오는 이때 맹수들과 싸우게 된 경기장 안 관객 일부, 사형수들과 함께 한 조가 되어 검투사와 싸우게 된 사람들은 원로원 의원, 기사계급, 부자는 전혀 없었음도 확인된다. 디오에 따르면, 이때 이렇게 된 사람들은 살인, 강도 등 흉악범들을 석방시키라고 항의하면서, 경기장에서 관객들을 폭행하고 폭동을 일으킨 깡패, 양아치들로, 현행범으로 황제, 원로원이 참석한 경기장에서 폭동을 일으킨 무리였다고 한다. 이들은 칼리굴라와 원로원이 경범죄, 좀도둑질로 감옥에 갇힌 이들은 풀어주면서, 자기 세력의 조직원들을 풀어주라고 했다가 폭동을 일으키면서, 난리를 쳤다고 한다. 그렇지만 칼리굴라와 원로원은 이를 들으면서 무시했고, 관객들 역시 이 주장을 펼친 이들을 경멸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황제 앞에서 대놓고 난동을 부리고 관람객들을 공격했고, 이는 황제와 원로원에서 이런 극단적인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면, 되레 큰 일로 확산될 문제가 됐다고 당대부터 평가받았다고 한다. 허니 칼리굴라와 원로원로서는 이 사건을 일으킨 이들을 이렇게 처벌한 것은 당연했던 것으로 충분히 해석된다고, 오늘날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이 사건은 칼리굴라가 로마와 이탈리아 치안을 안정시키고 민중들에게 호평을 받게 된 일이면서도, 칼리굴라가 이런 쪽에서는 냉혹했고 일부 비난을 사게 된 일로 디오는 기록 중이고, 칼리굴라가 재평가된 이후부터는 수에토니우스가 한 대표적인 조작 기록으로 평가되고 있다.
-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사람들이 자신한테 대머리라고 하면 무조건 죽이고 봤으며 염소와 관련된 말만 해도 처형시켰다고 한다. 또 죄수들을 죽일 때, "저 대머리부터 이쪽 대머리까지 모두 처형시켜라"라고 하면서 맹수밥으로 던져 버리게 했다고 한다. 허나 디오 카시우스는 가이우스(칼리굴라)가 대머리와 관련된 말은 하긴 했지만, 그가 대머리라고 하지 않고 황제가 내린 명령 중 후대까지 구전처럼 전해진 일화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그는, 가이우스는 죄수, 살인자, 강간범, 사기꾼 등 범죄자들을 처형한 어느 날, "저 대머리부터 이 대머리까지"라고 명령하며 단순히 처형하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일화는 그가 살았던 도미티아누스 때의 도시괴담 수준의 뒷소문과, 도미티아누스가 자신을 대머리로 놀린 이들을 숙청한 것을 교묘하게 결합해 적은 주장임이 밝혀진 지 오래다. 따라서 로마사 학자들은 수에토니우스가 로마인들 사이에서 구전처럼 떠도는 이야기를 통해 칼리굴라와 선대인 카아사르, 티베리우스가 대머리였으며, 대머리를 혐오했다는 식으로 서술해, 그들이 살았고 경험한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원한이 큰 친구들과 자신의 저서를 읽을 독자들의 흥미를 끌었다고 해석한다.
- 여러모로 전선 군단병들의 마스코트와 같은 존재였던 모양이다.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서는 게르마니아 변경의 로마군이 반란이 일어났는데 게르마니쿠스는 자신의 아내와 칼리굴라를 로마로 돌려보냈고, 이 사실을 안 병사들이 제발 칼리굴라를 다시 보게 해달라고 하면서 반란을 그만 두고 게르마니쿠스의 휘하에서 반란군을 토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수도를 자신의 고향인 안티움(안치오)로 옮기려고 계획까지 세웠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칼리굴라가 자신의 고향이 안티움이고, 자신의 고향을 어떤 도시보다 좋아했다고 한 말이 와전돼서 나온 도시괴담으로 치부되고 있다.
- 수에토니우스는 자신의 기록을 통해 칼리굴라가 재위 기간 동안 로마에 지진, 화재, 홍수 등의 자연재해가 나기를 신들에게 빌었다고 한다. 이유는 그런 게 터지면 멋지게 수습해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오늘날 이런 주장 역시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의 정치적 생명과 실제 목숨까지 한번에 날려 먹을 행동이기에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있다. 단적으로 저 유명한 네로는 도무스 아우레아를 짓기 위해 로마 대화제를 일으켰다는 소문에 시민들의 맹비난을 받았고[20] 티투스가 베수비오 화산 폭발, 로마 대화재, 페스트 등의 각종 재해를 수습하느라 모질게 고생하다가 즉위 2년 만에 세상을 뜬 것만 봐도...
- 근위대 대장인 카시우스 카이레아에게 살해당한 이유가 매우 웃긴데, 카이레아는 생김새가 여자같아서 칼리굴라에게 매우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안 그래도 평판이 안 좋은 마당에 자기 근위대 대장을 지속적으로 모욕하는 행동은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했다. 물론 그것 하나 때문에 암살을 결행하지는 않았겠지만.[21]
- 칼리굴라가 궁 안에 매음굴을 지었다는 루머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귀족들의 가족을 궁 안에서 살게 했다는 부분은 사실일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이 방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흔히 군주들이 사용하는 ‘유사시 인질로 삼기 위한 조치’이기 때문이다. 특히 칼리굴라가 한 말 중에 "나를 두려워하기만 한다면 날 증오해도 상관없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가 프린켑스의 권력 강화를 위해 공포 정치로 귀족들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견해가 있다.
- 로마 시내에 있던 대전차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를 본떠 테베레 강 서안에 개인용 전차경기장을 만들면서 트랙을 구분하는 띠 모양의 가운데 부분을 장식하기 위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오벨리스크를 운반해왔다. 자르지 않고 통째로 가져오기 위해 길이 105m, 너비 20m에 달하는 대형선을 건조했는데, 임무를 마친 후 항구에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클라우디우스가 로마의 외항을 재개발할 때 방파제로 재활용되었다. 그리고 오벨리스크는 1586년 성 베드로 대성당 앞으로 옮겨져 성 베드로 광장을 장식하게 된다.
- 매일 아침마다 카스토르·폴룩스 신전 가운데 계단에 자리잡고, 악기를 연주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강제로 삥을 뜯었다고 한다. 당연한 말인데, 이 주장은 로마에서 옛부터 인격에 흠집을 내려고 하는 경우 흔히 조롱조로 했던 농담이 와전된 터라 신빙성이 없다고 평가받는다. 다만, 칼리굴라가 자신의 아버지, 고모부가 살아생전 로마민중들에게 카스토르, 폴룩스로 각각 찬사받은 것을 자랑스러워 한 것, 이를 널리 홍보하면서 지지세를 끌어 모으는데 집중한 것은 사실이다.[22] 따라서 학자들은 칼리굴라의 대대적인 율리우스 가문 홍보, 선전을 꼬투리 삼아, 수에토니우스 혹은 당대 정적들이 당시 로마 카스토르, 폴룩스 신전 앞에서 벌어진 불량배들의 삥 뜯기와 연결지어 칼리굴라에 대한 증오심을 표현했다고 평가 중이다.
- 노골적이고 발정난 개처럼 여러 여자들을 희롱했다고 한다.
- 애마인 인키타투스를 집정관으로 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현대 학자들은 원로원 의원들이 무능한 것을 자신의 애마를 차라리 집정관으로 삼겠다고 비꼰 것이라고 보고 있다.
- 외할아버지 아그리파의 혈통이 원래 미천했기 때문에 그의 손자로 언급되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연설이나 노래에서 아그리파를 황제의 조상이라고 이야기하면 금세 격노했고, 본인이 자신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사실 아우구스투스가 그의 딸 율리아 사이에서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존재라는 상상을 키워 갔다고 적었다. 하지만 이 주장과 언급은 칼리굴라 이미지를 최악으로 만든 여동생들과의 근친상간 주장을 수에토니우스 주장으로 반박할 만큼, 이 시대를 연구한 학자들에게 조롱을 받는다. 학자들이 이렇게 조롱한 이유는 칼리굴라는 그가 발행해 남긴 여러 로마 주화 중 아스의 경우, 자신의 외할아버지 아그리파 얼굴과 업적을 새긴 도안과 문구를 만들어 암살될 때까지 많은 양을 발행하고, 이를 제국 전역에 유통시켜 홍보할 정도로, 아그리파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칼리굴라의 친구 중 한명이 헤로데 아그리파 1세였다는 점 등 역시 이 주장을 반박하는 대표 근거로 많이 언급된다. 또 그는 동시대 요세푸스, 필로, 대 플리니우스는 물론 정적이었던 세네카조차 평했듯이, 누구보다 본인 일가에 대한 자부심이 넘쳤고, 수에토니우스 주장처럼 자신의 어머니가 근친상간으로 태어났다고 상상하면서 떠드는 등의 정신나간 짓을 하지 않았다.
- 병사들 앞에서 자신의 아내 밀로니아 카이소니아에게 투구, 망토, 방패를 갖추게 한 다음 군대에게 보여주거나, 자신의 친구들 앞에서 옷을 벗겨 알몸 상태로 만든 뒤 앞을 걷도록 했다고 한다. 또 수에토니우스는 "가이우스가 카이소니아를 발가벗긴채 걷게 했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 율리아 드루실라를 인지한 이유가 자신처럼 폭력적이고 잔인한 기질을 확인한 이후"라고 말했다. 그러나 수에토니우스의 기록들 대부분이 길거리 소문과 저자의 머릿속 상상력 등을 동원해 기술한 이야기가 많아, 카이소니아에 대한 묘사 역시 상당수가 거짓으로 보인다고 평가받는다. 먼저 카이소니아는 6살 많은 연상인데다 3명의 딸을 낳고 혼전 임신 상태로 칼리굴라와 재혼한 일로 당대부터 인기가 없어, 그녀가 죽고 15여년 뒤 태어나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에 활동한 풍자작가 데키무스 유니우스 유베날리스는 칼리굴라가 광기에 휩싸였어도, 카이소니아에게 헌신한 이유는 사랑의 묘약 때문일거라고 풍자 대상이 됐다. 이런 것 외에도 당대의 요세푸스가 기록했듯이, 카이소니아는 매우 정숙했고, 오빠 코르불로처럼 당찬 까닭에, 밀로니아 카이소니아는 황제의 아내답게 용감하게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카이소니아는 코르불로의 여동생답게 남편을 죽인 그들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자신의 목을 내밀면서 용감하게 칼을 맞고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그의 기록처럼 디오 역시 카이소니아가 혼전임신 문제로 매우 보수적인 로마 사회에서 인기만 없을 뿐, 문제를 낳지 않았다고 평했다.
- 티베리우스가 남긴 유증금을 모두 쓴 나머지 돈이 부족해 부하들에게 줄 현금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라진 타키투스 기록 중 일부와, 타키투스가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다룬 부분에서 지적했듯이, 클라우디우스가 칼리굴라 암살 사건 직후 프라이토리아니에게 그 자리에서 일시금으로 충성 상여금을 줄 때, 사용한 자금원은 칼리굴라가 꽁꽁 싸매고 있던 황제 국고 안의 유증금들이었다.
- 사치가 심해 로마에 금융 위기를 초래했다고 말한다. 디오 카시우스 역시 이 주장을 차용해 그대로 적어 오늘날 칼리굴라가 비난받는 증거로 많이 소개된다. 하지만 21세기 초반에 이르러 로마 제국의 주화 발행량 연구, 귀금속 관리, 로마군 임금 지불 등이 연구되는 과정에서 칼리굴라 시대 내내 금융 위기는 없었고, 안정적인 귀금속 관리와 주화 발행량 조절 속에서 경제가 잘 돌아갔다는 것이 드러나, 수에토니우스가 무슨 배짱으로 이런 거짓말을 했냐는 조롱을 받고 있다.
2. 왜곡과 논란
2.1. 외모에 대한 왜곡
▲ 그의 흉상과 채색한 복제품 흉상출처 |
가이우스의 건강과 외모 부분은 그가 4년만에 암살된 결말과 함께 폭군 이미지를 굳히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 구축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바로 수에토니우스였다. 그는 당대 칼리굴라의 과격하고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행동을 목격한 세네카, 필로, 요세푸스조차도 말하지 않은 것과 대조적으로, 칼리굴라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왜곡해 묘사했다고 평가받는데, 수에토니우스는 거의 동시대 사람 타키투스와 달리 길거리 소문을 사실로 기록하고, 자신의 추측까지 사실인냥 써놓을 정도로 신빙성이 떨어지는 인물이다.[23]
수에토니우스는 칼리굴라 암살을 기록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를 혐오하는지 그 증오심을 언급했다. 이런 그의 저서 내 표현에 따르면, "가이우스는 키가 크고 안색이 창백했다"고 한다. "머리카락은 드문드문 나 있었고 정수리는 완전히 대머리에다 이마는 넓고 주름이 많았으며, 몸에는 털이 아주 많고 체형은 좋지 못했다"고 한다. 더불어 "눈동자는 공허하고 목과 다리는 굉장히 가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칼리굴라가 몸에 털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대머리였기에 누군가 걸어갈 때 자신을 내려다보거나 어떤 이유에서든 염소를 언급하면 그 자리에서 사형에 처했다고 말하고 있다.
칼리굴라는 전통적인 로마 의상이나 유행하는 옷차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옷차림에 있어서 남녀 구별이나 인간적인 품위를 추구하지 않았고, 자수로 뒤덮이고 보석이 주렁주렁 매달린 오리엔트 군주식 망토를 걸치거나 소매가 긴 튜닉에 팔찌를 차기도 했다. 또한 법에 의해 남성은 입을 수 없는 비단 옷을 입기도 했고, 슬리퍼나 반(半)장화, 군화, 여성용 신발을 신기도 했다. 더불어서 아주 가끔은 개선장군 복장을 하고 돌아다니거나, 금빛 수염을 붙이고 손에 제우스의 번개, 포세이돈의 삼지창 등을 들고 코스프레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은 위에서 언급된 외모 묘사나 행적들을 상당 부분 믿지 않고, 그냥 참조하고 있다. 카츠, 모건 교수 등이 대표적인 사람들인데, 이들은 칼리굴라가 갑상선 항기능성 장애을 앓았을 확률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질환을 앓을 경우라고 해도 수에토니우스의 말처럼 외모가 되긴 힘들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2010년 바르바라 교수 등이 발표한 '가이우스의 건강과 관련된 연구'에 따르면, 그의 행동이나 묘사들은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을 그대로 믿고 따른다고 해도 상당히 의문이 든다고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백번천번 양보해서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을 그대로 믿어준다고 해도, 외모 묘사처럼 그대로 닮기 위해선 상당히 무리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칼리굴라의 흉상을 비교해 분석한 연구들, 당대 기록이나 이야기를 보면, 칼리굴라의 외모는 수에토니우스 기록대로 ‘공허한 눈두덩이+대머리+털보+괴물’이 아니었다고 공통적으로 말한다. 오히려 그의 머리색은 갈색이며, 지극히 건강한 또래 이탈리아인의 피부색과 갈색눈이 그의 현실적 외모였고 두상이나 키 역시 혈통적 가계 등을 종합해볼때 더 적합할 것이라고 하며, 그가 진짜 간질을 앓았거나 광기에 휩싸여 제 정신이 아니었는지도 매우 의문이라고.
하지만 그의 외모를 기록한 수에토니우스의 책이 오늘날까지 분실되지 않고 남아 있고, 그 내용이 사실이 아님에도 워낙 강렬하고 문학이나 희곡 등에서 악역 소재로 훌륭했기에, 대중매체들은 칼리굴라에 대한 비방성 기록들을 사실로 만들어 재창작했다. 따라서 대중들에게 칼리굴라는 ‘루머에 루머가 더해져 결국 ‘간질환자+폭군+근친상간+미치광이+사이코패스+복수귀+변태+대머리+털보’로 알려지게 됐다.[25][26]
2.2. 사생아 논란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끈 여러 명의 근위대장 중 제5대 황제 네로의 마지막 근위대장 님피디우스 사비누스가 네 황제의 해 당시 반란을 일으키면서, 자신이 가이우스 칼리굴라의 사생아라고 애매모호한 말을 하면서 이를 주장한 일이 있다. 그런데 님피디우스 사비누스는 '나쁜 쪽으로는 악마같았던 천재'라고 불린 티겔리누스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워낙 교활하고, 기회주의적인 사람인데다 여러 정황상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평가받고 있다.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는 35년생으로 검투사 아버지 마르티아누스와 해방노예 가이우스 율리우스 칼리스투스의 딸 님피디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로마시민권자였다고 해도 그는 로마 최하위층 출신이었는데, 이후 여러 악행에 가담하다가 네로의 최측근, 친구인 티겔리누스가 자신의 동료 루푸스를 쳐내고 피소 사건을 반역사건으로 확산시킬 때 네로의 두 근위대장 중 한명이 됐다. 그는 네로의 세번째 아내로 거세된 미소년 스포루스와 결혼식을 올렸다고 하며, 이후 네로와 티겔리누스를 도우면서 조금씩 자신의 권력을 키우고 부하들에게 두둑한 보상을 약속한 뒤, 네로를 불신임한 갈바, 오토 편을 들었다. 이후 프라이토리아니를 완벽히 장악해 네로 몰락의 결정타를 날렸다. 따라서 네로는 그토록 믿던 님피디우스가 티겔리누스의 사임을 조장하고 프라이토리아니와 같이 원로원 편에 섰다는 소식을 듣고 난 다음 자살을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이 사람은 네로 몰락 이후에도 프라이토리아니 지휘권을 보장받고 권세를 유지했는데, 그 방법은 티겔리누스의 사임을 조장해 그가 잠시 도망간 사이 갈바 측과 접근해 권세를 유지받았다. 하지만 그는 갈바가 무능함을 드러내다가 결국 무너지자 "다른 사람을 제위에 올리지 않고, 내가 오르겠다"며 황제를 선언하기 전 부하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평소 자신의 콤플렉스였던 최하층 출신이라는 점을 감추기 위해, 외조부의 옛주인 칼리굴라와 자신을 연결지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나는 칼리굴라의 사생아다"고 주장했는데, 이 일은 처음부터 사실도 아닌 터라 호응도 받지 못했고 그 역시 자신있게 주장하기 보다는 모호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이 주장에도 호응도 못 받고 그는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에게 오히려 거짓말을 한다며 68년 로마에서 끔살당했다.
학자들은 님피디우스 사비누스가 이렇게 주장한 것은 지극히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무너진 이후에도 존재한 혈통적 정당성을 노리고 벌인 자작극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님피디우스 사비누스는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칼리굴라에게 자유를 얻은 그리스인 해방노예 가이우스 율리우스 칼리스투스였다는 점과 길거리에서 떠돌던 칼리굴라의 막장 소문을 결합해 이렇게 주장했던 것이다. 이는 로마인들 역시 비슷하게 생각했고, 그의 부하들도 그가 네로 몰락 전까지는 티겔리누스의 친구이자 네로의 동료로 온갖 악행은 다했던 위인이었고, 티겔리누스처럼 자신이 로마 최하위계층 출신이라는 것에 콤플렉스가 대단했다고 알고 있었다. 따라서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과 당대 로마인들이 이 주장을 거짓으로 치부한 것에 대해 현대 학자들도 그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게 자유를 얻은 해방노예의 외손자라는 것을 이용해 제위를 노리고 나온 주장이었고, 지극히 제위를 노리고 내건 명분이라고 말한다.
2.3. 의도적으로 조작된 근친상간 소문의 진실
가이우스 황제(통칭: 칼리굴라)가 여동생들과 근친상간했다는 주장은 수천 년 간 대중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이 이야기는 수에토니우스가 강력하게 주장한 내용인데, 워낙 강렬하고 후대 사람들의 성적 판타지를 자극한 까닭에 이 사람의 기록을 영화 주제로 활용한 영화 <칼리굴라>에도 언급될 정도였다. 칼리굴라는 사후 대중들에게 "근친상간을 한 황제"로 이미지가 각인되었고, 이는 이후에도 여러 대중매체를 통해 다뤄지는 그의 특성 중 가장 부각되는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상술했듯이 수에토니우스의 주장들은 과거와 달리, 악의에 찬 뜬소문과 본인의 창작 등에 의한 내용이 많고 지극히 작가 개인의 창작과 반대파 정적들이 주장한 "가이우스가 황제로서 함량미달인 증거"로 주장하기 위한 리더십 훼손 목적의 풍자시 등을 진짜 사실처럼 기록한 특징이 있다. 이는 비슷한 세대의 타키투스, 후세대의 디오 카시우스와 가장 크게 대비되는 모습인데, 세네카의 주장을 신뢰해 그대로 옮겨 적은 디오와 달리 수에토니우스는 칼리굴라를 다룬 <가이우스> 편 말미에 아예 자신이 진심을 담아 그 증오심을 드러냈다[27].
따라서 전통적 입장을 견지한 역사서와 학자들은 생전의 칼리굴라가 황제권 강화와 개인우상화를 취한 조치를 토대로,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처럼 모든 여동생과 근친상간을 안 했더라도, 최소 한명과는 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정신질환을 앓았다고 주장한 기록이 있고 일반인의 범주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 대표되는 헬레니즘 군주들처럼 근친상간을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순수하게 잇기 위해 그랬을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 이탈리아와 옛 로마 영내의 유적, 유물, 비문 해석 등의 발견과 연구 내의 다른 학문들의 도입 등으로 이런 분석은 몇 가지 부분에서 쉽게 반박을 받고 있다. 따라서 여러 로마 황제들을 고대 비문과 동시대 기록 등을 통해 연구한 사가들은 과거 사가들이나 대중매체를 다루는 예술계와 달리, 수에토니우스의 주장들을 비롯한 전통적 입장의 여러 주장들을 그대로 믿지 않는 것이 오늘날 내려진 일반적인 평가다. 즉, 결론부터 말하면 칼리굴라의 리더십 훼손과 프린키파투스 체제에 대한 부도덕성 강조로 시도된 악의적 편집과 조장의 판타지였던 셈.
고대 문헌과 원로원 관보, 비문 등을 통해 가이우스 황제는 종조부 티베리우스처럼 원로원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실제 가이우스는 어린 시절의 끔찍한 경험 등으로 인해 세야누스 몰락 이후 자신처럼 살아남은 여동생과 숙부에 대한 유대감이 여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훨씬 깊었다고 한다. 일례로 그는 말년의 티베리우스처럼 확실히 친혈육들에 대해서는 보호적이었고, 그들의 죽음이나 배신에 따른 분노와 슬픔은 타인에 비해 더 깊었다. 따라서 가장 최근 이 부분을 연구해 발표한 스타크 등의 발표처럼, 그는 로마를 휩쓴 열병으로 아끼던 여동생 율리아 드루실라가 병석에 누웠을 때 두 여동생과 이를 문제로 크게 다투는 등의 행동을 보였고[28] 숙부 클라우디우스와 마지막 아내 밀로니아 카이소니아와 외동딸 율리아 드루실라, 손윗처남 코르불로 등에 대해서도 유독 호의적이었던 것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특히 개인적 유대감이 훨씬 깊었고 다른 여동생들보다 친한 율리아 드루실라를 의지한 모습이 여기저기에서 보이는데, 이 외에도 그는 현직 황제임에도 첫 아이(네로)를 출산한 여동생 소 아그리피나를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국가를 위한 축사로 헌사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런 가이우스의 행동들은 반대파에게 좋은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에게 사형판결을 받았던 세네카나 그의 기록을 토대로 작성한 디오, 길거리 내 뜬소문과 작가 개인의 창작으로 책을 출간한 수에토니우스는 칼리굴라가 일반 상식에서 벗어난 인물이라고 말했는데, 수에토니우스는 여타 다른 로마작가들과 달리 근친상간한 증거로 이런 행동들을 비꼬며 거론했다. 이때 수에토니우스는 여타 다른 귀족들과 달리, 칼리굴라가 자신의 세 여동생에게 특권을 공개적으로 부여하면서 그들에게 명예를 수여하고 최측근 레피두스의 아내였던 율리아 드루실라에게만은 특별한 명예를 부여한 것과 황제가 공개적으로 충성을 받아낸 것 등을 근거 삼아 근친상간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이런 모습은 여타 다른 로마남성들과 비교해 이례적이면서도 유독 호의적이고 전통과 비교됐기 때문에, 칼리굴라의 리더십 훼손과 공화정을 무너뜨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부도덕함을 주장한 근거로 활용하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러 연구에서 드러나듯 이는 매우 악의적인 것이 보이는 만큼 쉽게 반박되고 있다. 맨 먼저 가장 최근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여동생들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그녀들을 살아있는 신처럼 대우한 것은 자신이 부재할 경우 세 여동생이 제1 상속인임을 분명히 밝힌 결정이었다고 한다. 이 부분을 연구한 우드의 발표도 비슷한데, 이 학자에 따르면 가이우스 황제가 암살되고, 그와 그 일가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멸문한 이후, 반대파가 그의 리더십을 훼손하기 위한 논리적 이유로 이용되기 위해 악의적인 부분만 재편집돼 이용되기에 이른 것이 확인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로마인들의 풍속과 관습 중 로마식 식사 문화에서 생전의 칼리굴라가 취한 특별한 행동이 사후 칼리굴라 암살의 정당성을 위해 악의적으로 재편집된 결과라고 말한다. 보통 이 시대의 고대 로마 귀족들은 만찬을 열거나 일반적인 식사 자리에서 주최자가 미혼이거나 돌싱 또는 가문 내 당주일 경우, 여동생이나 누나 또는 어머니, 딸의 지위를 손님들에게 강조하고 올려주기 위해 자신이 주최한 만찬의 옆 자리를 교대로 앉도록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런 행동은 당시 로마 상류층들이 자신이 얼마나 권위가 있고, 여자 형제들 역시 그 못지 않다는 조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칼리굴라는 즉위 후 세 여동생이 자신의 옆 자리에 교대로 앉게 하면서도,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측근 레피두스의 아내인 여동생 율리아 드루실라에게만은 특석을 따로 내어줬다고 한다. 이는 그가 정치적 목적으로 원로원 내 귀족들을 황궁에 불러 만찬을 열면서 벌인, 대대적인 율리우스 가문의 우월성과 측근 세력을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이 행동은 상대를 삐딱하게 볼 경우에는 경우에 따라, 전통을 빗겨나가는 방법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된 탓에 그를 안 좋게 생각한 이들에게는 당연히 좋은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공화정 후기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클로디우스 풀케르 등이 정적들에게 난봉꾼, 마마보이, 아마도 근친상간을 했을 인간말종 등으로 폄하될 때와 비슷했다. 이는 칼리굴라도 같았는데, 그의 행동에 수에토니우스는 "여동생들을 번갈아 앉게 하면서, 그들에게 특석을 부여한 것은 그가 자신의 여동생들과 다른 남성들의 매춘을 조장한 증거" 또는 "그가 여동생들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이 외에도 보통 로마에서 반대파가 상대를 깎아내릴 때 많이 사용한 악의적 주장, 소문 유포 소재는, 상대와 그 일가 전체를 전부 부도덕한 이들로 규정하기 용이한 근친상간이었다. 공화정 말, 키케로가 화해의 자리에 참석해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를 앞에 두고 "자리가 없다면 그대 누이들과 한 침대에서 뒹구는게 어떻소"라고 조롱하면서, 근친상간이나 하라고 조롱한 일화도 있고,[29] 제정시대에도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절의 소 파우스티나 황후를 상대로 억하심정이었던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시동생 루키우스 베루스와 바람을 피우다가, 남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걸리자, 시동생을 독살했다"고 헛소문을 퍼뜨린 사례, 세베루스 왕조의 카라칼라가 정적들에게 어머니 율리아 돔나, 이모 율리아 마이사와 근친상간한다고 모함받은 사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모후 율리아 마마이아와 근친상간하고 실제 부부관계였다고 암살 직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측에게 어거지로 조롱받은 사례가 있을 정도로 로마 제국에서 흔한, 상대 내려치기가 바로 이 주장이었다. 더해 칼리굴라의 경우, 수에토니우스, 세네카, 디오 등의 기록에서 중구난방으로 확인되면서도, 서로 같은 상황을 수에토니우스만 이렇게 주장하고, 이마저도 근친상간 주장을 펼친 수에토니우스가 주장한 이야기를 적으면서도 계속 명확하게 일치되지 않은 것을 종합해 볼 때, 칼리굴라가 행한 근친상간 주장은 오늘날 확실한 거짓말로 평가받는다. 즉, 이런 젊은 황제의 행동은 칼리굴라가 즉위하기 전인 티베리우스 시대부터 황실과 프린켑스를 좋게 보지 않던 원로원에게 당연히 나쁘게 보였고 자신들을 무시한 것으로 해석됐기 때문에 악의적 재편집이 벌어진 것이다. 특히, 레피두스와 소 아그리피나, 율리아 리빌라가 연관된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이 터지고, 이에 따른 재판이 유죄로 결론나면서 안 좋게 끝나고 만 사건 등은 이런 악의적 평가에 기름을 붓게 된다. 그래서 수에토니우스 같은 후대 호사가, 당대부터 칼리굴라와 사이가 나빴던 세네카 등이 칼리굴라를 악의적으로 재편집하는 심정적 증거가 됐고, 그 결과물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칼리굴라의 광기어린 사이코패스 이미지가 되었다.
[1] Caligula is revealed not as a wild-eyed psychopath, as he was so brilliantly portrayed by John Hurt in the TV adaptation of I, Claudius, but as a cynic and sophisticate, who threatens to make his horse consul as a kind of cruel mockery of the recumbent senate.) #[2] 메리 비어드 『로마는 왜 위대해졌는가』 김지혜 옮김, 서울, 도서출판 다른, 2017, p.487~488[3]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로마사 연구자. 서구권 고대 로마사 분야에서 손에 꼽히는 고전학자로, 현 영국 내에서도 가장 권위있는 고전학자로 평가받는다.[4] Caligula was not the best emperor that ever lived; there must be some truth to the immoralities and eccentric behaviors that the authors assert. One aspect that seems to cut across much of Caligula’s life, though, is his insanity. Even today, for instance, psychology textbooks make references to the deranged Caligula to show how mental illnesses are not something new to the twenty-first century. As one example, renowned forensic psychiatrist Anil Aggrawal mentions Caligula in one of his lengthy medical textbooks; the emperor seems to mesh well with the doctor’s data in the sections pertaining to incest, transvestism, and sexual deviation. It is worth recalling that Caligula was dealt many “blows” from birth to death. In today’s society, it would require much resilience for a person to “bounce back” after many of the hardships he or she endured during his life; unless he were somehow immune to psychological problems, Caligula would have likely agonized over something. If a person suffers from psychological problems, his thoughts, personality, and behaviors may be affected; (JS Bissler, 2013, Caligula Unmasked: an Investigation of the Historiography of Rome's Most Notorious Emperor.)[5] 공화정, 원수정 초중반 당시 반대편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식 중 하나가 길거리 등을 통해 비방성 소문을 퍼트리고 이를 사실로 선전하는 방식이었다. 그 예로 안토니우스는 정적 옥타비아누스의 가계를 해방노예와 로마인들이 혐오한 고리대금업, 세금징수원 등과 연관지어 비난했고, 그의 집안이 빵장수였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티베리우스에 대한 불만에 대해 기사계급과 원로원 인사들은 풍자시로 “종손 가이우스, 오랜친구들과 별궁 안에 은밀한 공간을 만들어 온갖 변태행위를 한다”고 한 뒤 이를 길거리에 뿌렸다. 당연한 말인데, 사실을 안 티베리우스 황제는 “거짓말이어도 절대 용서못한다”고 일갈한 뒤 이런 풍자시를 지은 이들을 잡아 반역죄로 고발하거나, 그들을 공개적으로 모욕을 준 뒤 사회적으로 비참하게 몰락시켜 자살케했다.[6]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세 황제들(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플라비우스 왕조의 도미티아누스의 재평가처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외의 세베루스 왕조의 황제들 역시 유적, 유물, 금석문 등의 발굴, 연구로 평가가 많이 좋아졌다. 20세기 이후, 군인황제시대라고 불린 3세기의 위기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재평가받기 시작한 세베루스 왕조 시대 중 카라칼라 시대는 과거 분노조절 장애와 동생 살해 등으로 당대부터 폭군으로 욕먹거나 안토니누스 칙령의 후유증만 부각됐다. 하지만 로마군제 연구, 법체제 등의 연구 결과, 의외의 업적들이 발견되면서 후기 로마제정에게 긍정적인 측면도 많았다고 재평가받고 있다.[7] 조시무스는 <새 역사>를 통해, "가이우스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처럼 냉혹하고 무자비했다"며 티베리우스에게서 배운 대로 통치를 했다가 이에 반발한 이들에게 암살됐다고 기술했다.[8] 메리 비어드 『로마는 왜 위대해졌는가』 김지혜 옮김, 서울, 도서출판 다른, 2017, p.482[9] 메리 비어드 『로마는 왜 위대해졌는가』 김지혜 옮김, 서울, 도서출판 다른, 2017, p.487[10] 메리 비어드 『로마는 왜 위대해졌는가』 김지혜 옮김, 서울, 도서출판 다른, 2017, p.488[11] 물론 일부 주장은 사실도 있긴 하다. 오펠리스크를 옮기고 퍼포먼스를 위해 칼리굴라가 만들었다던 큰 선박에 과실수 등을 심어 놓았다는 대형 유람선 이야기는 칼리굴라 시대 즈음에 건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견됐다. 칼리굴라가 만들었다던 개인용 전차경기장이라던지 조개껍데기를 줍게 한 뒤 설치한 등대 역시 마찬가지.[12] 그래도 이 반란을 잠재우기 위해 후임인 클라우디우스는 무려 3년간 마우레타니아에서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13] 이 팀을 좋아한 로마 황제로는 칼리굴라 외에도 꽤 여럿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콤모두스가 있는데, 이 경우에는 콤모두스가 간판스타가 없는 이 팀에 스스로 전차기수로 들어가서 슈퍼스타급 활약을 보여주면서 알려지게 된 케이스였다.[14] 이집트 파라오들처럼 로마 시민들의 재산 소유권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한 것, 이집트에서 발행한 화폐에 ‘Neus Helius(새로운 태양)’라고 자신을 묘사한 것,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제우스로 분장한 퍼포먼스 등[15] 칼리굴라 암살범들은 죽는 순간까지도 누가 배후인지, 왜 죽였는지 등을 말하지 않았다. 더해서 클라우디우스의 부탁에 따라 충성을 맹세한 근위대, 기록말살형 등을 내리지 않은 원로원은 너무 신속하고 급하게 칼리굴라 암살 이후 상황을 넘어가고 클라우디우스와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16] 칼리굴라 암살 시도가 여러 번 있던 탓에 친황실파 인사들과 게르만 호위대는 말 그대로 슬픔과 분노에 찬 나머지 맹렬할 정도로 강하게 대응했다고 한다. 또 원로원의 공화정 복귀 움직임과 암살 행동이 엇박자가 난 상황에서 암살을 주도한 이들이 속주 주둔 군대와 접촉하려고 한 정황이 있었는데, 이를 주도한 인사가 바로 아시아티쿠스였다고 한다.[17] 선대 황제였던 티베리우스가 워낙 구두쇠로 소문이 난 터라 그가 죽고 난 이후로는 어느 정도 돈을 쓰지 않으면 곤란했을 것이다.[18] 단적으로 말해, 수에토니우스는 남자 시오노 나나미, 동인남 수준이었다. 특히 율리우스 카이사르부터 시작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들에 대해 왜곡해 놓은 것을 볼 때면 거의 시오노 나나미의 기독교 혐오와 비슷하다.[19] 물론 수에토니우스가 관보를 분석해서 황제들의 업적을 조사했던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자면 칼리굴라의 고향이 안티움이었던 것.[20] 기독교 대탄압도 로마 대화제의 책임이 자신에게 몰리자 시민들의 분노를 돌리기 위해 벌였으나 타키투스가 적었듯 로마 시민들은 저 미친 프린켑스가 지 욕망 채우겠다고 죄없는 사람들 죽인다였고 오히려 네로 주범론을 믿게 만들었다.[21] 클라우디우스와 원로원 모두 워낙 신속하게 암살범들을 근위대에게 인도받아 처형했기에 그 내막은 잘 알수가 없다. 카이레아를 비롯한 암살범들은 죽는 순간까지도 입을 다물었고, 암살의 동기와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모른다.[22] 칼리굴라의 숙부, 게르마니쿠스의 친동생, 소 드루수스의 처남이며 사촌동생 클라우디우스 황제 역시 재위 초반부터 자신의 형 게르마니쿠스, 사촌형이자 매형 소 드루수스에 대한 로마인들의 향수를 끌어모으고자 전차경주를 지지수단으로 널리 활용했다.[23] 이들은 칼리굴라의 과격한 행동을 까긴 했지만, 어린 시절 경험한 광기 같았던 체험의 탓이 크지 않냐는 식으로 말하거나 자신을 신처럼 묘사한 행동이 너무 자신감이 넘쳐서 이상해보였다고 말했다.[24] 수에토니우스는 당당하게 카이사르의 아버지가 칼을 맞아 죽었고, 가이우스라는 이름을 사용한 율리우스 성씨를 쓰는 카이사르 남성들은 모두 칼을 맞아 죽을 운명을 타고 났다고 주장했다. 그는 최초로 카이사르 동성애자설, 카이사르 간질설을 올리기도 했고, 아우구스투스의 치아 상태가 이상하고 키가 난쟁이 수준으로 작았다고 사실처럼 주장했다. 또 티베리우스가 밤에 자다가 눈을 뜨면 얼마동안 초능력을 구사했고 말년에는 대머리가 되었다는 식으로 주장하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고 이를 기록하기도 했다.[25] 수에토니우스는 칼리굴라가 죽고도 한참 뒤의 사람이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자체를 미워하다 못해 혐오했다. 수에토니우스 집안이 수에토니우스가 출세를 위해 이탈리아로 넘어가기 전까지 북아프리카 속주에서 살던 이들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그가 어린 시절 동네 사람들과 집안 어른들에게 들은 말들은 신빙성이 상당히 떨어진다.[26] 칼리굴라의 아버지인 게르마니쿠스는 잘생겼다는 기록이 있고, 칼리굴라 역시 이탈리아 내 당대 사람들에게 외모에 대해 못생겼다거나 기괴한 외모라는 말이 없다. 실제로 즉위를 위해 티베리우스 유해와 로마로 가는 동안 칼리굴라는 잘생긴 외모로 더 찬사를 받았다. 아울러 당대에 직접 칼리굴라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그때 있었던 일을 기록한 필로 역시 가이우스(칼리굴라)의 외모에 대해 잘생겼고 세심할 정도로 꼼꼼한데다 본질을 파악해 이를 유머감각과 재치로 바꾸는 재주가 뛰어났다고 말하고 있다.[27] 대놓고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그리고 가이우스(칼리굴라)를 증오하고 이들이 모두 부도덕한 인물임을 합리화하는 문구를 적으면서, 카이사르 부친부터 칼에 맞아 암살됐다고 주장했다.[28] 여동생 율리아 드루실라를 신격화하면서 1년간 애도기간을 갖게 할 당시, 이를 엄격히 집행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29] 이 사건으로 키케로는 클로디우스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고, 이후 이 사건이 명분이 되어 2차 삼두정치때 살해되고 머리와 손이 시내에 효수될 때, 포풀라레스 지지자들 일부는 상대를 깎아내리고 저주를 퍼부은 죗값이라고 저주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