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발렌티노스 아르샤쿠니 (영어:Valentinus Arshakuni, 그리스어: Βαλεντῖνος Արշակունի) |
출생 | 미상 |
사망 | 644년 |
직위 | 동로마군 총사령관 |
반란 대상 | 콘스탄스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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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이라클리오스 왕조의 반란자. 이라클로나스와 마르티나 등을 축출하고 콘스탄스 2세가 단독 황제가 되는데 크게 기여했으나, 지나친 야심을 품고 공동 황제가 되려다 반역자로 낙인찍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2. 행적
아르메니아 아르샤쿠니 왕조의 후손으로, 사켈라리오스(회계관) 직책을 맡은 필라그리우스의 수행원이었다. 641년 2월에서 5월 사이, 그는 콘스탄티노스 3세에 의해 동부군 사령관을 맡아, 마르티나 황후의 핍박으로부터 콘스탄티노스의 아들 콘스탄스 2세를 지킬 임무를 맡았다. 그는 군대에 돈을 골고루 분배하여 병사들이 마르티나가 아닌 콘스탄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641년 5월 콘스탄티노스 3세가 사망했다. 오래도록 앓았던 폐병이 악화되었거나 결핵에 걸린 게 사망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민중은 마르티나가 그를 독살했다고 의심했다. 여기에 마르티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피루스가 공범으로 지목되었다. 아무튼 콘스탄티노스 3세가 사망하면서, 15세의 이라클로나스가 단독 황제가 되었고, 마르티나는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마르티나는 콘스탄티노스 3세의 지지자들을 포섭하기 위해 막대한 기부금을 지불하였고, 회계관 필라그리우스를 포함해 대중에게 미움받던 관원들이 징벌되었다.
그러나 마르티나는 콘스탄티노스의 측근들을 모조리 유배보냈고, 인기 없는 단의론을 교회의 정식 교회로 지정했다. 성직자, 청색당, 녹색당, 원로원, 군대 등 모든 계층은 이에 분노하였고, 발렌티노스는 이를 명분삼아 마르티나 타도를 외치며 군대를 일으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마르티나는 수도 수비를 강화하였지만, 발렌티노스는 칼케돈까지 진격하여 압박하였다. 여기에 콘스탄티노스의 아들들을 황제로 세우라는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결국 마르티나는 민중을 달래기 위해 콘스탄티노스 3세의 아들 콘스탄스 2세를 공동 황제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시위는 계속 이어졌고, 641년 9월 28일 성난 시민들이 아야 소피아에 침입하여 피루스 총대주교를 공격했다. 니키포로스는 다음날인 9월 29일 총대주교를 사임하고 카르타고로 달아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키던 군대마저 봉기하여 황궁을 삽시간에 장악했고, 원로원의 명령에 의해 마르티나와 이라클로나스가 체포되었다. 마르티나는 혀가 잘렸고, 이라클로나스는 코가 베어졌다. 또한 막내아들 마르티누스는 거세되었다. 그 후 마르티나와 이라클로나스는 로도스 섬으로 유배되었고, 다시는 섬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리하여 콘스탄스 2세는 단독 황제가 되었고, 발렌티노스는 실권자가 되었다. 그는 642년 딸 파우스타와 콘스탄스 2세를 결혼시켰고, 자신은 동로마군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643년 또는 644년, 발렌티노스는 아르메니아계 장군 다비드와 연합하여 아랍에 대항한 원정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들은 참패를 면치 못했고, 발렌티노스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으나 많은 재산을 상실했다. 644년, 발렌티노스는 공동 황제가 되기로 마음먹고,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나타나 대관식을 요구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바오로 2세는 단호히 거부했고, 민중은 봉기하여 발렌티노스를 살해했다. 이리하여 발렌티노스는 반역자로 낙인찍혔지만, 파우스타는 황후 직위를 보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