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0:48

귀족공화제


국체 및 정체의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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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분석과 예시4. 현대적 의의5. 창작물에서 귀족공화제인 나라들6. 관련항목

1. 개요

추첨에 의한 선발은 민주정의 특성이요, 선거에 의한 선발은 귀족정의 특성이다.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중에서-[1][2]
/ Aristocracy[3]
귀족 계급이 명문화된 합법적 통치 지휘를 갖고 이를 과두제로 구현하는 공화제.

2. 상세

가장 대표적인 귀족공화제 국가로는 고대 로마 공화국이 있다. 그 외 노브고로드 공화국, 네덜란드 공화국 등 사례가 있고, 베네치아 공화국제노바 공화국을 위시한 중세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도 대부분 귀족공화제 국가였던 걸 보면 의외로 제법 성행했던 정치 체제로, 전제군주정에 비해 수는 적지만 로마 공화정부터 대략 2천년간 이어진 정치제체이다. 허나 19세기 중엽부터 프랑스에서 퍼진 계몽주의로 인해 귀족층 자체가 무너짊에 따라 사라지기 시작했다.

오해를 막자면 '공화제'라는 표현이 단지 '군주가 없는 체제'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공화정 항목에서 볼 수 있듯 공화정은 원칙적으로 권력이 사유화되거나 세습되지 않는 정부 형태이고 심지어 고대 로마 때도 그러했다. 따라서 단지 왕이 없고 귀족이 권력을 독점한다고 귀족공화제가 되지 않는다.

이들은 이념적 차원에서 국가가 시민 공동체의 소유물이라 여겼다. 따라서 동시대의 다른 국가들과 비교하면 분명히 시민층의 권한이 막대했다. 오늘날의 국가들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고대 로마와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체제는 긍정적 어조로 공화제, 부정적 어조로 과두제, 중립적 어조로 귀족공화제이다.

참정권을 가진 인민의 범위가 귀족층과 유산계급 평민층에 한정되었다는 점이 귀족공화제라고 명명되는 이유이다.

3. 분석과 예시

흔히들 공화제라고 하면 단순히 모든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정치체제로 오해하지만 그렇지 않다. 공화제를 의미하는 Re publica라는 표현부터가 '공공'이라는 의미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공화국의 정의에서 계급의 부재가 충분조건이라기 보다는, 대표 선출부터 국정운영, 정교한 조직을 통한 권력분립, 정치행정과 경제, 사법권의 분리, 고대 로마부터 이어지는 '시민'으로서의 덕목과 공익의 추구가 공화제의 뿌리를 이뤘다. 마키아벨리몽테스키외같은 학자들이 공화주의에 주목한 것도 바로 이 점이다.

가령 로마 공화국의 경우, 귀족과 평민 계층이 존재했지만 역사가 폴리비오스의 말처럼 로마 공화정의 미덕은 “집정관이 대변하는 군주주의, 원로원이 대변하는 귀족주의, 그리고 호민관이 대변하는 민주주의가 서로 조화를 이루었다는 점”에 있다. 세 권력의 추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서로 균형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법이 뒷받침되어야 했으며, 이렇게 해서 제정된 법은 시민의 권리를 확실히 보장해 법치주의의 근간을 이뤘다. 예를 들어 시민의 권익을 수호하는 호민관직을 따로 두고, 호민관에게 신체 불가침권을 부여해 어느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했다. 그 결과 호민관들은 여느 행정관 못지않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다수의 행정관은 시민들로 구성된 민회에서 해마다 선거로 뽑았으며, 집정관, 법무관, 조영관, 호민관 등 주요 행정관들은 각각 두 명씩 선출하도록 해 한 사람의 독단적인 결정을 미연에 방지했다. 이러한 공화주의의 대원칙은 아우구스투스 이후 원수정(Principatus)으로 넘어간 이후에도 근본방침은 계속 유지되었다.

이탈리아의 도시 공화국들도 비슷하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공화국들은 소수의 가문이 통치하는 과두정적 요소가 많지만 어디까지나 오늘날 기준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언급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공화국들이 궁극적으로는 많은 시민들의(최소한 당시의 기준으로는 '많은') 정부 및 주권에 대한 참여를 지향하는 체제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구체적 예시를 보면, 중세 이탈리아 도시 공화국들은 공회(consiglio)에 기반을 둔 대의제 정부였고, 공회는 국민 또는 도시를 대표했다. 이러한 성격의 대표성은 특히 대공회 혹은 대 평의회(consiglio grande 혹은 consiglio maggior), 즉 대규모 회의체일수록 더욱 강했다. 정부를 이끌 인원을 뽑는 임무는 공직선출위원회들에 맡겨졌는데, 이 공직선출위원회들은 모든 후보들이 공직에 선출될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 여부를 점검했다. 13세기 말 시에나 공화국에서는 전체 시민 4만 내지 5만 명 내에서 2천 내지 3천 명의 시민들이 공직을 담당했다. 그리고 이러한 참여가 이탈리아의 공화국들에서는 성문법에 의해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있었다.

게다가 시에나에서는 최고위직인 9인위원회에 선출되는 정치인은 임기 2개월이 끝나면 20개월의 쿨타임을 기다려야 다시 선출될 수 있었다. 이건 추첨으로 선출되는 거라서 한 명이 수십 년간 계속 해먹는 게 불가능했고, 혈족이나 사업 관계자가 다른 공직을 맡고 있다면 9인 위원회 선출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게다가 임기가 끝나면 감사위원회(마조르 신다코, Maggior Sindaco)에게 심사를 받아야 했고, 제노바 공화국의 경우에도 감사 조직(신다코)이 있었다.

또한, 이런 귀족공화제에서 의미하는 '귀족'도 여타 다른 전제정, 군주정, 독재정 국가에서 신분과 재력에 따라 권리의무부터 사회적 지위까지 모든 것이 달라지는 의미가 아닌, 시민의 일원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권리와 미덕(virtue)이 우선시 되었으며, 베네치아 공화국과 로마의 경우 정치참여자 사이의 권력분립 원칙을 원활히 유지하여 1천년 가깝게 그들의 정체를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베네치아의 경우 후술하겠지만, 권력의 중추를 이루는 각 위원회를 서로가 서로를 선출하도록 치밀하게 조정하여 국정운영을 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이러한 귀족공화정의 귀족들의 삶은 편안하거나 안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전쟁이 나면 항상 전투의 선두에 서고,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워야 했다. 국가를 수호하고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책임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4. 현대적 의의

이러한 귀족공화제는 로마 공화정부터 베네치아 공화국까지 거의 1천 년에 걸쳐 지속되었던 정체(正體)이자 시스템으로, 오랫동안 이탈리아에서 발전된 도시공화주의가 민주적이었던가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현재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가장 먼저 이야기되는 민주주의와의 상관성은 분명한 역사적 실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귀족공화제가 현대적 의미에서의 진정한 민주사회로 평가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새로운 기반은 고대 귀족이나 중세를 지배했던 가톨릭이 아니었다는 측면에서 자유 증진을 통한 새로운 사회구성체의 등장에 대해서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특히 대부분의 이탈리아 공화정에서 노예제도를 폐기하였던 점과 농업이 아닌 상업과 원시공업체제를 통해 경제적 부를 획득한 부르주아 계층의 등장은 근대사회로의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이는 민주주의 확장에 대한 사회 조건의 전제 조건이 될 수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도시 공화주의는 현대적으로 어떤 해석이 가능한 것일까? 비록 당대의 귀족공화제가 오늘날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현대의 민주주의적 특징을 모두 갖지는 않았을지라도 일정 부분 현대적 해석이 가능한 면면들을 나타내고 있었다. 첫째는 직접 민주주의와 대의제의 과도기적 형태라는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이 문제는 당대의 여러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권력 분점과 제도적 보완의 예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둘째는 이탈리아 도시 공화주의가 현대 서구 여러 선진 공화주의 국가들, 다시 말해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등의 국가에 전해지면서 현대 공화주의 원형이라는 정치적 의미를 충분히 획득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러한 귀족공화주의는 서구 민주주의의 내용과 모습을 되새겨볼 수 있는 거울이자 전형이라는 측면에서 현재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을 담당하고 있으며,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를 조화롭게 운영하는데 기반이 되는 풀뿌리 민주주의와 공동체적 이상을 구현하는 데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할 것이다.

5. 창작물에서 귀족공화제인 나라들

6. 관련항목

  • 공화주의
  • 전제군주제
  • 과두제
  • 마키아벨리 - 흔히 군주론으로 대변되는 정치 처세술 저자로 대중에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사상의 기저를 이루는 진가는 공화주의로, 실상 그는 열렬한 공화주의자였다. 그는 대표저작 『로마사 논고』를 통해 로마 공화정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사례를 깊이 연구했으며, 보편권력이라는 한 사람의 의지보다는 국가를 이루는 시민의 참여와 자유로운 질서에서 힘이 나온다고 보았다. 마키아벨리는 국가가 사적 이익의 투쟁 공간으로 변하고 공적 제도가 사익에 의해 침탈되면서 로마의 몰락이 시작되는 것으로 인식했다.
  • 몽테스키외 - 삼권분립을 주장한 법의 정신에서, 군주정, 전제정과 함께 공화정(귀족,민주)을 예시로 들었다. 그의 대표작 『로마인의 위대성과 쇠퇴의 원인에 관한 고찰』 참조.
  • 막스 베버 - 그의 관료제 저작에 종종 귀족공화제를 서술했으며, 정치지도자가 데마고그적 수단을 사용하여 대중의 신임과 신용을 얻어 자신의 세력을 확보하는 경향이 등장했는데, 이를 ‘지도자 선택의 시저주의 환상’이라 명명했다. 베버는 관료적 기구를 복종시키면서 시저주의적 지배의 위험을 견제하는 장치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 존 롤즈 - 개별적인 유, 불리를 모르는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 속의 '원초적 상태'에서 합리적 인간은 최소극대화 원리에 입각한 자유와 합의를 중시하는 중도주의적 입장을 선택한다것이 정의론의 핵심이다. 후기 롤스 저작인 『정치적 자유주의』에서는 『정의론』에서의 구상을 이어가면서도, 거기서 제시한 정의론이 어떤 인간 본성에 대한 특정한 가정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정치제도'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것으로, 서로 다른 철학적, 종교적, 형이상학적 신념을 지닌 시민들 간의 '중첩적 합의'를 통해 자신의 정의론을 정초할 수 있다는 점을 논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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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거는 민주적인가》, 버나드 마넹 지음, 곽준혁 옮김, 후마니티스(주), 2015 (8쇄) p.96 에서 재인용.[2] 몽테스키외는 추첨은 민주정과 선거는 귀족정과 서로 어울린다고 상정하였다[3] 참고로 Aristocracy에서 Ar-는 고귀한, 또는 위대한을 의미하는 형용사이며, 독일어 Arbeit(노동), 산스크리트어 Aryan과 동계어이며, 또한 이란의 국호도 Aryan에서 온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