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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디움 협곡 전투 영어: Battle of Caudine Forks | ||
시기 | 기원전 321년 | |
장소 | 이탈리아 카우디움 인근 협곡 | |
원인 | 제2차 삼니움 전쟁의 일부 | |
교전 세력 | 로마 공화국 | 삼니움 |
지휘관 | 티투스 베투리우스 칼비누스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카우디누스 | 가이우스 폰티우스 |
병력 | 4개 군단 | 미상 |
피해 | 미상 | 미상 |
결과 | 삼니움의 승리 | |
영향 | 제2차 삼니움 전쟁의 격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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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삼니움 전쟁 시기인 기원전 321년, 로마군이 카우디움 협곡에서 삼니움족의 매복에 걸려 궤멸 위기에 몰리자 항복한 뒤 굴욕당한 전투.2. 배경
기원전 354년, 로마와 삼니움은 리리스 강을 양국의 경계로 삼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로마는 기원전 334년 리리스 강 건너편에 있는 프레겔라스에 식민도시를 세움으로써 이 조약을 위반했다. 삼니움 측은 사절을 보내 항의했지만 묵살당했고, 양자의 갈등은 고조되었다. 하지만 삼니움인들은 기원전 334년부터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도시 국가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기원전 331년에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돕기 위해 이탈리아에 출진한 에페이로스 왕국의 국왕 알렉산드로스 1세 에페이로스를 상대하느라 로마 쪽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못했다.그 후 삼니움족이 알렉산드로스 1세를 패사시키며 위세를 떨치자, 기원전 328년 캄파니아의 네아폴리스에서 친삼니움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삼니움인들에게 자신들을 지켜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삼니움 병사 4,000명과 놀라 출신의 병사 2,000명이 도시에 진주했다. 이에 로마는 삼니움족이 지난 제1차 삼니움 전쟁 이후 캄파니아에 병력을 일절 보내지 않겠다고 했던 협약을 위반했다며 항의했지만, 삼니움인들은 로마가 먼저 약속을 위반했다며 거들떠보지 않았다. 이에 로마는 전쟁을 선포하고 네아폴리스 공방전을 통해 네아폴리스를 공략했다.
그 후 로마군은 삼니움을 상대로 시종일관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325년 임브리니움 전투에서 삼니움 20,000명을 전사시켰으며[1]. 기원전 324년 독재관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가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삼니움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뒀다. 이에 삼니움 측이 평화 협약을 맺자고 요청했고, 독재관은 철수했다. 이후 양자는 1년간 휴전을 맺었지만, 삼니움 귀족 브루툴루스 파피우스가 로마가 제시한 요구 조건을 거부하고 전쟁을 재개하자고 촉구하자 이에 호응한 삼니움 정부가 전쟁을 재개했다. 기원전 323년, 로마군은 삼니움과 산니움의 동맹이 된 아풀리아인들을 상대로 공세를 개시했다. 그들은 적군을 만나지 못해 전투를 치르지는 못했지만 진군로 주변의 마을과 농지를 황폐화시켰다.
기원전 322년 용병을 고용한 삼니움인들이 자기들의 영역으로 재차 쳐들어온 로마군을 상대로 반격을 시도했다. 처음에는 실수로 불리한 지형에 숙영지를 세운 로마군을 삼니움 기병들이 몰아치고 뒤이어 삼니움 보병대가 압박해 들어오면서 삼니움이 드디어 승리하는 듯했다. 그런데 삼니움 기병대가 로마군 전체가 뛰쳐나와서 싸우는 터라 적진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 적진에 뛰어들어 약탈을 자행하느라 전투에서 이탈했다. 그 사이에 로마 기병대가 재정비한 뒤 아군 진영을 약탈하느라 정신없는 적 기병대를 물리치고 뒤이어 적 보병대의 측면과 후방을 요격했고, 삼니움인들은 크게 패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삼니움인들이 로마 기병대에 의해 살해된 군대 사령관을 포함하여 매우 큰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삼니움인들은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전쟁 재개를 주도했던 브루툴루스 파피우스를 잡아다가 로마에 바치려 했지만, 파피우스는 그 전에 자살했다. 이후 전쟁 중에 포로로 잡힌 모든 로마 포로와 막대한 보물을 로마에 바치면서 평화 협약을 맺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거듭된 승리에 의기양양해진 로마 원로원은 이참에 삼니움을 완전히 정복하기로 마음먹고 삼니움족의 요청을 거부했다. 기원전 321년, 집정관 티투스 베투리우스 칼비누스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카우디누스는 각각 2개 군단씩 총 4개 군단을 이끌고 삼니움족의 영역으로 쳐들어갔다. 이에 삼니움인들은 가이우스 폰티우스를 지휘관으로 삼고 로마군에 대적했다.
3. 경과
삼니움 지휘관 가이우스 폰티우스는 정면승부로는 로마군을 절대로 이길 수 없으니 유인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먼저 10명 가량의 삼니움 병사들을 양치기로 변장시킨 뒤 일부러 로마군의 진군로 주변에 양을 방목하게 했다. 로마군이 평범한 양치기로 여기고 불러다가 삼니움인들의 동향을 묻자, 그들은 삼니움인들이 로마와 동맹을 맺은 아풀리아의 루케리아를 포위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에 두 집정관은 서둘러 루케리아로 가서 삼니움족을 완벽하게 섬멸하기로 했다.리비우스에 따르면, 2개의 도로가 아펜니노 산맥에서 루케리아로 이어졌다. 아드리아 해를 따라 있는 첫번째 도로는 평평하고 장애물이 없었지만 멀리 돌아서 가야 했기에 루케리아까지 가는 데 많은 시간이 들었다. 카우디움 협곡을 통과하는 산길은 훨씬 짧아서 빠른 시일에 루케리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은 두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좁고 산악지대가 끊임없이 펼쳐졌다. 좁은 산길을 가다보면 중간에 풀이 무성하고 물이 잘 공급되는 평원을 만날 수 있었지만, 평원을 통과하면 루케리아에 이르기까지 좁고 험준한 길을 가야 했다고 한다.
두 집정관은 적이 도망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카우디움 협곡을 통과하는 산길로 가기로 했다. 로마군은 몇 시간 동안 좁은 길을 강행군한 끝에 평원에 이르렀다. 평원에 숙영지를 세워서 휴식을 취한 뒤 행군을 재개했지만, 두번째 산길을 지나가던 중에 바위 덩어리와 도끼에 베인 나무 줄기로 앞길이 완전히 막혀버린 것을 발견했다. 그때 삼니움인들이 협곡 위의 언덕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로마군은 그제야 함정에 걸렸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돌아가려 했지만, 첫번째 산길마저 막혔다는 것을 곧 확인했다. 그리하여 로마군은 협곡에 갇힌 채 훨씬 높은 언덕에 자리잡은 적에게 둘러싸여 궤멸될 위기에 몰렸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삼니움 지휘관 가이우스 폰티우스는 수많은 로마군을 협곡에 가둬버리는 작전이 성공한 것에 무척 흥분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선뜻 판단하지 못했다. 공격을 시작한다면 궁지에 몰린 저들이 저항을 심하게 해서 막심한 피해를 볼 게 자명했고, 그대로 굶겨죽이자니 언제 끝날 지 기약하기 어렵고 또다른 로마군이 구원하러 달려올 수도 있었다. 이에 삼니움인 중 가장 현명하다는 평을 받던 아버지 헤렌니우스 폰티우스에게 조언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에 헤렌니우스는 아래와 같이 답했다.
"그들 전원을 정중하게 대접한 후 로마로 살려보내라."
삼니움인들이 "어떻게 잡은 적병들인데 그냥 돌려보내느냐?"며 반발하자, 폰티우스는 아버지에게 재차 서신을 보내 다른 방안은 없냐고 물었다. 그러자 헤렌니우스는 이렇게 답했다.
"그들을 모두 죽여라."
폰티우스는 아까는 모두 살려보내라고 해놓고 이제는 다 죽이라고 하는 아버지의 권고를 이상하게 여기고, 아버지를 전장으로 모셔오게 한 뒤 어찌된 영문이냐고 물었다. 이에 헤렌니우스가 답했다.
"우리가 저들을 잘 대접해서 돌려보낸다면, 저들은 우리가 베푼 선행에 감동할 것이며, 우리는 매우 강력한 국가와 평화와 우호를 확립할 것이다. 반면에 저들을 모두 죽인다면, 로마는 두 집정관의 군대를 전부 잃어버렸으니 힘을 회복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여러 세대 동안 전쟁을 미뤄야 할 것이다."
폰티우스는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고심하다가 재차 물었다.
"둘 중 하나를 택하지 않고 중간의 길을 택하는 건 어떻습니까? 삼니움은 마땅히 받아야 할 승리를 받을 것이며, 로마인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패배를 받을 겁니다."
헤렌니우스가 눈에 띄게 화를 내며 답했다.
"그것은 친구를 구하지도 않고 적을 제거하지도 않는 짓이다. 로마인들은 패배하더라도 가만히 있을 줄 모르는 자들이다."
마르크 가브리엘 샤를 글레르(Marc Charles Gabriel Gleyre) 작, <멍에 아래 로마인>, 1838년.
그러나 폰티우스는 아버지의 충고를 듣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곧 전령을 로마군에 보내 자신의 뜻을 전했다. 로마군은 프레겔라스를 비롯한 삼니움의 영역에 세워진 모든 식민도시에서 철수해야 하며, 병사들은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튜니카만 입은 채 멍에[2] 아래로 기어가라는 것이었다. 두 집정관은 병사들을 살리기 위해 이를 받아들였고, 로마 장병들은 삼니움 전사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받으며 멍에 아래를 통과해야 했다. 이를 거부한 로마 병사들은 가차없이 살해당했다고 전해진다.
4. 카우디움 협곡은 실존했는가?
리비우스는 로마군이 2개의 산길 사이의 카우디움 협곡에서 꼼짝없이 갇혀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했다고 밝혔다. 그의 설명은 19세기까지 그대로 받아들여졌지만, 현대 역사학자 및 지리학자들은 아펜니노 산맥의 어느 산길과 언덕에도 리비우스와 같은 지형을 갖춘 곳을 찾아볼 수 없다며 리비우스의 설명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나마 전투가 벌어진 유력한 장소로 캄파니아와 삼니움 사이의 산길이 지나가는 아르파이아 마을이 지목되지만, 이 곳을 지나는 산길은 2개가 아니라 하나뿐이고 폭도 그리 좁지 않으며, 그 주변의 언덕 역시 완만해서 로마군이 충분히 올라갈 수 있었다.스티븐 P. 오클리(Stephen P. Oakley)는 2005년 논문에서 이 점을 지적하면서, 로마군이 이런 지형에서 전투를 시도조차 안하고 항복한 연유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리비우스가 독자들의 일반적인 기대에 부합하는 표준적이고 틀에 박힌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전투가 벌어진 장소의 지형을 꾸며냈다고 봤다. 즉, 리비우스는 로마군의 항복이 삼니움 족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장소 자체가 싸우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불가항력이었다고 강조하고자 '매우 좁고 험준하며 다른 길은 없는' 협곡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존 바이런 쿠너(John Byron Kuhner)는 리비우스가 로마인 독자들에게 중간을 택하려는 경향은 최악의 선택을 야기한다는 것을 분명히 전달하고자 지형을 일부러 이렇게 설정했다고 주장했다.# 로마군은 협곡 중간에 갇혀버렸고, 삼니움인들은 협곡의 두 극단 지점을 점거하고 안전을 확보했다. 그러나 삼니움인들은 몰살시키거나 관대하게 풀어줘서 화해를 꾀한다는 두 가지 선택 중 하나를 택하는 대신 풀어주는 대신 굴욕을 안겨주는 선택을 했다. 이런 어중간한 선택은 로마인들이 전력을 유지하면서도 반감을 품게 만들었고, 삼니움인들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마키아벨리는 <리비우스의 첫 10권에 대한 담론>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조십스럽게 피해야 하는 것은 삼니움들이 로마인들은 카우디눔 협곡에 가둔 뒤 취한 중간 선택이다. 그들은 포로들을 명예롭게 풀어주거나 모두 죽이라고 촉구하는 노인의 조언을 듣지 않고 중간 선택을 체택했고, 로마인들은 무장해제하고 멍에 아래로 통과하면서 굴욕과 분노로 끓어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노인의 경고가 사실이고 자신들이 선택한 길이 재앙이라는 것을 깨닫고 슬픔에 빠져들었다.
5. 로마의 반응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군은 카우디움에서 맺은 협약을 준수하겠다고 보장하기 위해 장교 및 재무관들, 600명의 기병들을 인질로 넘겼다고 한다. 병사들은 숙영지가 있는 카푸아 인근에 이르렀지만, 너무 부끄러워서 차마 도시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고, 카푸아 시민들은 그들을 가엽게 여겨 직접 보급품을 전달했다. 한편 로마에서는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슬픔에 빠졌고 상점은 문을 닫았으며, 포로 로마노의 모든 활동은 중단되었다. 조국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시킨 군인들을 추방하라는 요구가 빗발쳤지만, 막상 군인들이 비참한 몰골로 돌아오자 저절로 잠잠해졌다.한편, 두 집정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와 가이우스 폰티우스는 로마로 귀환한 뒤 어떠한 공직 활동도 하지 않다가 새 집정관이 선출되자 원로원에 출석해 이 협약은 로마 시민들의 동의 없이 맺어졌기 때문에 무효이며, 따라서 전쟁을 재개하더라도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적에게 거짓 맹세한 자신들을 삼니움에게 넘기라고 요청했다.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여 두 집정관을 삼니움인들에게 넘기며 협약이 파기되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폰티우스는 그들의 인도가 위장된 것이라고 판단해 받아들이길 거부했고, 두 집정관은 로마로 귀환했다. 그 후 재개된 전쟁에서 로마군이 승기를 잡았고, 기원전 318년에 삼니움족이 평화 협약을 맺자고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2년 휴전을 맺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리비우스는 다른 사료에서는 로마군이 카우디움에서 맺어진 협약을 존중했다는 내용이 있다고 밝혔고, 에드워드 토고 살몬은 로마군이 기원전 316년에 적대 행위가 재개될 때까지 카우디눔 평화 협약을 존중했으며 기원전 321년과 기원전 316년 사이의 로마와 삼니움의 전쟁은 리비우스가 순전히 꾸며낸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현대 학계에서는 로마가 카우디눔에서 맺은 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전쟁을 곧바로 재개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며 확답을 내리지 않고 있다.
[1]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의 기록. 다만 현대 학계에서는 명백한 과장으로 간주한다.[2] 리비우스는 소의 멍에였다고 밝혔고, 아피아노스는 창을 멍에로 사용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