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04 21:49:12

기원전 296년 에트루리아-삼니움 전역


삼니움 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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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1. 개요

제3차 삼니움 전쟁 시기인 기원전 296년, 로마군에트루리아-삼니움 연합에 대항하여 전개한 일련의 작전.

2. 상세

기원전 297년 티페르눔 전투에서 매복 공격을 시도한 삼니움군을 격퇴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는 동료 집정관 푸블리우스 데키무스 무스의 로마군과 합세한 뒤 4개월 동안 삼니움족의 여러 마을과 농지를 파괴했지만, 삼니움족이 전투에 불응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겨울이 다가오자 캄파니아의 겨울 숙영지로 귀환했다. 그 사이, 삼니움족은 에트루리아와 동맹을 맺고 갈리아인을 끌어들여 로마에 공동으로 대항하기로 하고 에트루리아에 사절을 보내 동맹을 제의했다.

기원전 296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루키우스 볼룸니우스 플람마 비올렌스가 새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전직 집정관 룰리아누스와 무스는 총독의 자격으로 6개월간 삼니움 전선에서 임페리움을 행사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후 카이쿠스가 에트루리아 전선에서 에트루리아군과 대결하는 동안, 비올렌스는 삼니움 전선으로 가서 룰리아누스, 무스와 함께 삼니움 각지를 황폐화했다. 이에 삼니움 장군 겔리우스 에그나티우스는 다른 장군들에게 오로지 요새에 틀어박혀 수비에 전념하라고 지시한 뒤 자신은 특별히 차출된 정예병을 이끌고 에트루리아로 이동했다.

에트루리아 도시 국가들이 로마군의 기세를 두려워해 동맹 제의를 거절하자, 에그나티우스는 직접 에트루리아 의회에 참석해 에트루리아와 삼니움이 힘을 합쳐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삼니움 스스로 로마를 이길 수 없지만, 강인한 삼니움인과 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에트루리아인이 힘을 합친다면 주변 국가들을 학대하는 호전적인 로마인들을 응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논변에 설득된 거의 모든 에트루리아 도시 국가들이 에그나티우스를 지원하기로 했고, 로마의 강한 압박을 받고 있던 움브리아인 역시 그를 돕기로 했다. 에그나티우스는 여기에 더해 켈트인을 용병으로 고용하려 했다. 에그나티우스는 이렇게 확보한 연합군을 이끌고 카이쿠스의 로마군을 몰아붙였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카이쿠스는 에그나티우스에게 연전연패해 군대의 신뢰를 잃었다고 한다.

이 무렵, 비올렌스는 삼니움에서 3개 요새를 공략한 뒤 루카니아 평민들의 소동을 진압하기 위해 룰리아누스를 루카니아 쪽으로 파견하고 무스에게 삼니움의 농촌 지역을 계속 약탈하게 했다. 그러던 중 동료 집정관이 곤경에 처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에트루리아 전선으로 향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일부 연대기에는 카이쿠스가 비올렌스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나중에 그런 적 없다고 잡아뗐다고 한다. 하지만 리비우스 본인은 카이쿠스가 실제로 편지를 보낸 적이 없다고 여겼다.

카이쿠스는 비올렌스가 자신을 돕기 위해 오자 열등감을 느끼고 삼니움으로 되돌려 보내려 했다. 비올렌스가 그와 함께 연합군을 물리치겠다고 밝히자, 카이쿠스는 동료 집정관의 임페리움을 탐낸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다가 적군이 로마 진영 가까이에 이르자, 군인들은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적에 맞서 싸우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결국 카이쿠스는 뜻을 접어야 했다.[1] 이후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에트루리아-삼니움 연합군은 7,900명이 전사하고 2,010명이 생포되는 패배를 당했다고 한다.

비올렌스는 룰리아누스와 무스의 총독직이 곧 만료되기 때문에 삼니움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그러던 중 삼니움인들이 새 군대를 일으켜 캄파니아의 카푸아와 파레르눔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방향을 돌려 캄파니아로 향했다. 막대한 약탈품을 챙긴 채 삼니움으로 귀환하던 삼니움군은 비올렌스의 습격으로 인해 참패하고 뿔뿔이 흩어졌고, 삼니움 사령관 스타이우스 미나티우스(Staius Minatius)는 생포되었다. 이후 삼니움 전선에 도착한 비올렌스는 룰리아누스의 군대를 에트루리아 전선으로 북상시켜 카이쿠스와 합세하게 했다. 룰리아누스는 지시에 따라 에트루리아로 가서 카이쿠스와 합세한 뒤 카메리눔에 군대를 주둔시킨 후 로마로 귀환했다. 또한 비올렌스는 무스의 군대를 인계받은 뒤 삼니움에서 작전을 수행하다가 겨울이 다가오자 겨울 숙영지로 귀환했다.

기원전 296년 말, 삼니움-에트루리아-움브리아인들이 대군을 편성했고 켈트계 종족인 세노네스족까지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졌다. 로마는 지금껏 수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네 개 종족 연합군과 맞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로마인들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해 가장 뛰어난 군사령관으로 인정받고 있던 룰리아누스를 기원전 295년도 집정관에 재선임하고, 이례적으로 제비뽑기를 하지 않고 에트루리아 전선으로 낙점했다. 여기에 비올렌스를 집정관에 재선시켜서 룰리아누스와 함께 하도록 했다. 하지만 룰리아누스는 이를 거부하고, 자신과 오랫동안 함께 한 동지인 무스를 동료 집정관으로 삼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이고, 그 대신 비올렌스의 임페리움을 1년 연장해 삼니움에서 작전을 계속 수행하게 했다.

그러나 룰리아누스가 로마에 가 있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카메리눔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이 세노네스족의 습격으로 궤멸되었다.(카메리눔 전투)[2] 룰리아누스는 생존병들을 수습한 뒤 무스의 군단과 합세했다. 이후 에트루리아인, 삼니움인, 움브리아인, 세노네스인으로 구성된 연합군과 센티눔 평원에서 조우하면서 이탈리아의 패권이 갈릴 센티눔 전투의 막이 올랐다.
[1] 다만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카이쿠스가 동료 집정관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그와 함께 싸우려 하지 않았다는 이 기록은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카이쿠스 본인을 질시한 경쟁 귀족들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주장한다.[2] 리비우스의 또다른 기록에 따르면, 카메리눔의 식량 채집원들이 움브리아족의 습격을 받아 패퇴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