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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삼니움 전쟁 시기인 기원전 310년, 로마군이 삼니움 편에 가담한 에트루리아군을 격파한 전투.2. 상세
기원전 311-310년, 삼니움 편에 가담한 에트루리아군이 로마에서 북서쪽으로 30마일 남짓 떨어진 수트리움 시를 포위했다. 로마군은 수트리움을 구하기 위해 집정관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를 잇따라 파견했지만, 두 사람 모두 에트루리아군을 상대로 상대적으로 우세한 전과를 거뒀음에도 포위망을 뚫는데 실패했다. 이에 룰리아누스는 에트루리아군이 포위를 알아서 풀게 만들기로 마음먹었다.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로마와 에트루리아 사이의 경계에 키미니 숲이 있었다. 이 숲은 그 당시에는 사람이 절대로 지나갈 수 없다고 여겨겼고, 로마군은 단 한 번도 이 숲을 지나가지 않았다. 룰리아누스의 장교 중 한 명이 자신이 에트루리아의 도시인 카에레에서 자라서 키미니 숲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면서 숲을 정찰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룰리아누스의 허락을 받은 뒤 노예 한 명과 함께 숲을 통과한 뒤 움브리아의 도시인 카메리움에 도착하여 그곳의 원로원과 우호 조약을 맺고 로마 진영으로 돌아왔다.
룰리아누스는 부하의 성공에 고무되어 숲을 강행돌파하기로 했다. 이후 숲 가장자리에 자리잡은 에트루리아 전초기지의 감시를 피해 군대를 하루 만에 이동시키는 데 성공했고, 키미니 언덕에 자리를 잡은 뒤 주변 시골에 식량 수십병들을 보내 닥치는 대로 약탈하게 했다. 그 지역 농민들이 민병대를 결성해 맞섰지만 모조리 격파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에트루리아인들은 대군을 일으켜 룰리아누스의 로마군을 향해 진격했다. 양측은 에트루리아 연맹의 주요 도시 국가 중 하나인 페루시아 인근[1]에서 대치했다. 로마인들은 숲 밖의 평원에 진영을 세웠고, 에트루리아인들은 숲을 빠져나와 로마 진영에서 적당한 거리에 전투 대열을 편성했다. 룰리아누스는 적지에 고립되어 있어서 병사들의 사기가 낮다는 것을 눈치채고 에트루리아인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대신 부하들에게 하루 종일 진영에 남아 있으라고 명령했다.
다음날 새벽, 룰리아누스는 부하들에게 숙영지 바깥의 성벽을 파내고 흙을 사용하여 도랑을 메우라고 지시했다. 해가 떠오르기 직전에 작업이 완료되자, 룰리아누스는 이제 평평해진 성벽을 건너 완전히 전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에트루리아인들을 공격하게 했다. 몇몇 에트루리아인들은 맞서 싸웠지만, 대다수는 진영이나 가까운 숲으로 도망쳤다. 로마군은 적 숙영지에 공격을 퍼부은 끝에 날이 저물 무렵에 공략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날 6만에 달하는 에트루리아인이 죽거나 생포되었다고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명백한 과장으로 간주한다.
수트리움을 포위 공격하고 있던 에트루리아군은 이 소식을 접하자 급히 포위를 풀고 철수하면서, 로마는 수트리움을 지킬 수 있었다. 그 후 에트루리아 연맹의 페루시아, 코르토나, 아레티움이 평화 협약을 요청했고, 로마는 이들과 30년 휴전을 맺기로 했다. 다른 에트루리아 도시 국가들은 병력을 규합해 로마에 맞섰지만 바디모 호수 전투에서 패배한 뒤 기원전 308년 역시 30년 휴전을 맺고 전쟁에서 이탈했다. 이로써 로마는 삼니움 쪽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었다.
[1] 리비우스는 수트리움 인근이라는 기록도 있다고 밝혔지만, 현대 학자들은 페루시아 쪽이 더 가능성 높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