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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문화 강국 중 하나로, 20세기 전까지 서양 문화를 주도한 나라는 프랑스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 국왕 카를 5세는 프랑스 문화에 심취한 프랑스빠였고, 또 오랜 적국이던 오스트리아에서 혼인 동맹을 위해[1] 프랑스로 시집 온 마리 앙투아네트도 오스트리아 궁정에서부터 프랑스어를 사용했기에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었다. 수도없이 프랑스와 싸웠던 독일의 전신 프로이센 왕국의 위대한 왕 프리드리히 대왕도 독일어 대신 프랑스어를 쓸 정도로 프랑스 문화에 심취하였으며, 크림 전쟁,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와 싸운 러시아 제국 또한 상류층은 프랑스어를 쓰며, 이를 자랑스러워 할 정도로 프랑스 문화의 영향이 짙었다.

또한 프랑스는 최초의 현대적 백과사전인 《라루스 백과사전》이 탄생한 곳이다.[2] 해당 백과사전을 만들게 된 계기는 "세상 사람들이 모든 분야에 대해서 진실을 알게 되면 저절로 합리적인 판단을 하게 될 것"이라는 계몽주의 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이는 백과사전파로 철학사(史)에도 이름을 남겼다.

외래 문화에도 수용적이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로커 데이비드 보위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한 것이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폴 매카트니도 받았으며, 국적에 관계없이 프랑스와 관련있는 예술인이 있다면 심의 후 그들에게도 훈장을 수여한다.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전도연이나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그린 이케다 리요코도 그 경우이다.

기득권이나 거대 집단에 대한 투철한 저항의식도 그 문화의 한 특징으로, 비판의 대상에 대한 풍자나 희화화가 존중되는 분위기이다. 샤를리 엡도같은 주간지도 그런 분위기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샤를리 엡도 총격 테러 이후 프랑스인들이 펜을 들고 추모에 나선 것은 바로 자신들의 그런 문화가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파괴된 것에 대한 충격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2. 프랑스어

18~19세기 동안 유럽의 문화, 예술, 외교 언어영어가 아니라 프랑스어였다.[3]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는 프랑스어를 직접 프랑스어로 지칭하지 않고 국제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는 당시 프랑스어의 위상을 잘 알려주는 단편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로마 제국 쇠망사》의 저자인 영국인 에드워드 기번도 원래는 자기의 저서를 프랑스어로 쓰려고 했을 정도였으니까. 어쨌든 지금도 UN 공용어이긴 하다.[4] 또한, 프랑스어권 나라들을 중심으로 프랑코포니가 결성되었고 프랑코포니 회원국들 간에 교류가 많은 편이다. 언어학, 사회학 학술 용어로 원래 모어가 다른 문화, 공동체, 사회 간 교류 과정에서 통용되는 공통어[5]를 라틴어로 Lingua franca라 하는데,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프랑크인의 말', 즉 프랑스어란 뜻이다. 이만큼 근대 유럽에서는 보편적인 국제어가 프랑스어였다는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5개 국어 능력자인 근세 유럽의 패왕 카를 5세명언도 있다. "나는 하느님께 스페인어로, 여자에게 이탈리아어로, 남자에게 프랑스어로, 그리고 내 애마에게 독일어로 말한다." 즉 종교적으로 경건한 언어로는 스페인어[6], 사교적으로 작업 걸기 좋은 언어로는 이탈리아어, 남자들 간의 공적이고 사무적인 자리에서는 프랑스어가 대접받았다는 말.독일어는 뭐임 진짜... 이 말은 카를 5세가 아니라 프로이센의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2세의 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혁명 이전 러시아에서는 특히 이러한 경향이 심하여 아예 프랑스어=고급 언어 또는 지식인의 언어라는 생각이 상류층을 중심으로 퍼져 있었고, # 당연히 이들의 모국어인 러시아어귀족들 사이에서 평민이나 쓰는 천박한 언어로 격하되었다. 도스토옙스키톨스토이의 작품을 보면 상류층 인물들끼리 프랑스어로 이야기하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원서를 보면 계속 러시아어가 나오다가 갑자기 그 부분에서만 프랑스어가 갑툭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예카테리나 2세 시절의 러시아 황실의 공식 언어는 프랑스어였다.

게르첸, 투르게네프 같은 19세기 러시아 귀족 상류층 출신 지식인들은 아예 어렸을 적부터 집안에서는 프랑스어 가정교사를 두고 모어로 러시아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를 말하고 배우며 자라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시대적 배경이 그렇다보니 이 '프랑스어 가정교사'들은 프랑스 혁명으로 쫒겨나온 프랑스 귀족, 망명객들인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19세기 중후반쯤 되면 이런 러시아의 정치적 낙후성과 봉건성을 주로 욕하고 까던 입장이었던 서유럽 지식인들 사이에서 "프랑스어 자체는 어디 프랑스 본토 사람 뺨치게 잘 구사하면서 막상 고향의 농노나 아랫사람 대하는건 아시아적 폭군스런 러시아 귀족" 같은 너무도 19세기스런 일각 진보적이면서도 위선적으로 차별적인 시선은 흔한 스테레오타입이었다.

물론 예외란 건 항상 있는지라 오히려 가끔 사상적으로 극렬 자코뱅같은 사람들이 저 러시아인 귀족 자제들의 가정교사가 돼버린 경우도 있어서[7] 오히려 프랑스어란 다리를 통해 나머지 유럽의 진보적, 계몽주의적 사상을 적극적으로 흡수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당장 게르첸이 이랬고, 러시아 혁명가 전통의 최초의 큰 대대적 봉기였다 평가받는 데카브리스트의 난도 대불 전쟁시 프랑스 혁명과 맞서 싸우면서 오히려 그 영향을 받은 소장파 장교들이 주도했다. 나중에 20세기 초 되면 러시아 지식인 전통에서 이런 러시아인들 스스로가 자국 문화를 부끄럽게 여기고 서구 문화만 추종하는걸 또 부끄럽게 여기는 슬라브주의 지식인 세력이 떠오르면서 오히려 태어나서 평생 일상언어론 프랑스어만 쓰던 귀족, 상류층 인텔리 출신 슬라브주의자 지식인이 집안 하인, 농민들을 통해 러시아어를 배우기도 했다.

만화 《오르페우스의 창》에서도 독일인유리우스 폰 아렌스마이야가 맨 처음 러시아에 가서도 오랫동안 레오니드 유스포프 후작의 집에서 아무 문제 없이 대화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 프랑스어에 있다. 러시아에 도착하기 이전에도 기차에서 만난 러시아 자본가와 프랑스어로 유창하게 대화를 나누자, 그 러시아인이 유리우스의 프랑스어 능력을 대단히 칭찬했었다. 나중에 유스포프의 집에서도 처음에는 러시아어를 못 알아들어 당황하자, 유스포프와 그 여동생이 프랑스어로 말을 걸면서 대화가 시작된다.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심지어 프랑스어의 vous(당신)이라는 낱말의 느낌을 표현하기에는 러시아어 вы(당신)은 너무나 부족하다는 안나의 독백도 있다. 그런데 웃긴 건 вы라는 2인칭 복수가 경칭 2인칭을 의미하게 된 것 자체가 프랑스어 영향이다. 이전에는 경칭 비경칭 관계없이 단수 2인칭은 ты, 복수는 вы였다. 소설의 다른 부분을 보면, 러시아의 귀족들은 심지어 러시아어는 서투르고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

이런 프랑스어 동경은 러시아가 좀 심하긴 했으나,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가 비슷했으며, 심지어는 빅토리아 시대 이전의 영국인들까지도 자신들의 언어가 프랑스어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 현대 영어는 프랑스어의 영향을 상당히 받아서 추상적인 고급 어휘들은 대부분 프랑스어에서 유래한다. 오히려 현대 프랑스어에서 사라진 중세 프랑스어의 어휘와 발음을 영어가 더 많이 간직했다고도 한다. 거기에다 19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의 상류층들도 프랑스어를 배웠고 프랑스어가 당시 이스탄불의 가게에 터키 문자와 프랑스어의 로마자를 같이 사용했을 정도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의 국호도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프랑스어식 표기는 'Corée'였기 때문에 영어식 국호도 Corea로 한 경우가 종종 생기게 된 것. 그러나 영국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면서 Korea로 바뀌게 되는데, 정작 조선 당국은 고려에서 유래한 국호가 꺼림칙하여 Chosun이나 Empire of Dai Han의 표기를 했지만 통용되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는 일본의 Korea 표기 조작설을 참조하도록 하자.

러시아만큼이나 영어가 안 통하지는 않고, 남유럽보다는 영어 실력이 높으나 공항 근무자 말고는 공무원들조차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드문 지역이 존재하고 있다. 문제는 프랑스에서 관광객이 길가다가 영어로 행인에게 길을 물어보면 대체 뭐라는 거야 하는 반응이 나온다는 난센스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이런 이야기는 거짓말이거나 혹은 적어도 크게 뻥튀기한 이야기라고 한다. 프랑스 국민들이 영어를 썼을 때 저렇게 반응하는 건 프랑스어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 아니라 그냥 영어를 못해서라고. 오히려 프랑스인들은 과시욕이 많아서 자기가 외국어를 할 줄 아는 것을 보이기 위해 못 알아들어도 손짓발짓으로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8]

하지만 실제로 영어로 물어봐도 대답해주려 노력하는 편이다. 오히려 외국인이 어설프게 프랑스어 쓰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서 프랑스어로 물어보면 영어로 답해주는 사람도 있다. 흔히들 프랑스는 언어에 대한 자부심이 많아서 영어를 할 줄 아는 프랑스 국민에게 영어로 물어봐도 프랑스어로 대답해준다는 난센스가 있는데 그건 잘못 전해진 얘기로, 오히려 그 자부심 때문에 외국인의 어설픈 프랑스어를 싫어하고 프랑스어로 물어봐도 영어로 대답해준다. 거기다 한국보다 영어 공부 열풍이 더 심한 나라이다. 취업 시에도 토익을 보는 회사가 많다. 2018년 2월 24일에 프랑스 정부는 영어 학습 장려에 나서고 있다. #[9]

2018년 3월 20일에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코포니의 날을 맞이하면서 국외에 있는 프랑스어 학습 기관을 지원해, 프랑스어 교육 기회를 두 배로 확대하기로 발표했다.#

프랑스어에도 영어에서 유래된 어휘들이 늘어나고 있고,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전인 '프티 로베르'의 2019년 개정판에도 영어에서 유래된 신조어들이 대거 수록되었다고 르파리지앵이 2018년 5월 14일에 보도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프랑스어가 영어에 짓눌리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아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영어를 쓴다는 이유로 프랑스어권 학자와 예술가 100명이 프랑스어를 쓰라는 성명서를 내는 일도 있었다. #

프랑스의 신분증에 영어가 병기되자 프랑스내에서 논란을 빚고 있다.#

3. 프랑스 요리

세계에서 인지도 높은 요리하면 중국 요리, 튀르키예 요리, 프랑스 요리, 이탈리아 요리가 꼽히는 편인데, 그 중에서도 중국 요리와 투탑을 이루는 편이다. 중국 요리가 매우 다양한 식재료와 요리법으로 유명하고, 튀르키예 요리가 동방과 서방의 음식문화를 결합시킨 결정체로 대접 받는다면, 프랑스 요리는 맛을 최대로 살린 고급 요리로 유명세가 있다. 반대로 말하면 프랑스 요리는 전세계적으로 대중화되었다기보단 고급 요리로 유명하다.

치즈포도주, 바게트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에스카르고, 푸아그라, 송로버섯, 오뇽 그라티네 수프, 뵈프 부르기뇽 등이 프랑스의 특색이 담긴 요리라 할 수 있다.

바게트는 정말 처럼 먹는다. 프랑스인들은 바게트를 한 덩이 떼어내서, 부드러운 부분이 위로 가고 딱딱한 껍질이 아래로 가게 해서 먹는다. 이렇게 먹어야 입 안이 안 까진다. 그리고 각종 요리를 먹고 나면 나오는 기름이나 양념, 국물도 바게트로 닦아내서 먹기도 한다.

프랑스 식품법도 요리에 매우 까다로워서 와인의 조건을 엄격하게 규정해놓았다. 바게트는 밀가루, , 소금, 이스트로만 만들어야 한다던가, 와인은 순수하게 포도만 써서 만들어야 한다던가...

프랑스에서 의 소비가 줄어들고 있다보니 프랑스 정부는 경연대회를 통한 빵홍보를 하고 있다.#

선진국치곤 어지간한 식재료들도 매우 저렴해서 요리만 잘 한다면 일반인들도 진수성찬을 즐기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정도다. 우스갯소리로 거지도 프랑스에선 캐비어를 먹을 수 있다는 소리가 돌 정도. 실제로 팔리지 않고 시중에 남아있는 캐비어를 거두어서 기초생활수급자들한테 정부에서 준 적도 있었다.

4. 종교

4.1. 라이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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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1905년 정교분리 이래로 ‘의식의 자유’를 의미하는 ‘라이시테(Laïcité)’의 가치를 사상적, 정치적 이념으로 숭상하게 되면서 국교가 없으며, 철저한 수준을 넘어 강경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강한 정교분리를 추구하는 세속국가이다. 이를테면 독일이나 미국 등 일반적인 서방 국가의 정교분리는 국가가 특정 교단을 편들어주지 않는 개념인데 프랑스의 정교분리는 공적인 장에서 아예 종교를 철저하게 배제하자는 개념이다. 덕분에 독일에서는 기민련 등의 종교정당이 원내에서 활발히 활동할 수 있지만, 프랑스에서는 할 수 없다.

4.2. 가톨릭

과거부터 프랑스는 가톨릭 전통이 깊은 국가였고, 21세기 초 기준으로도 (물론 나이롱 신자도 있지만) 약 48% 인구가 가톨릭 신자이다. 프랑스가 가톨릭 국가가 된 기원은 메로빙거 왕조의 클로비스 1세가 496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성직자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지지를 받아 프랑크 왕국을 탄생시킨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게르만족에는 아리우스파 이단이 퍼져 있었기에 프랑크는 게르만의 가톨릭화에서 선봉장을 맡게 되었다.

프랑스의 역대 왕조에게 가톨릭은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종교뿐 아니라 국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이뤄왔다. 특히 교육과 행정은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성왕 루이 9세, 성녀 잔 다르크로도 유명하다. 부르봉 왕조 시절까지 프랑스 왕국은 가톨릭 신앙을 전제했고, 프랑크 왕국이 가톨릭에 기반해 국가가 건설된만큼 그 후계를 자처하는 프랑스 왕국은 언제나 샤를마뉴의 왕국일 것을 요구받았다.

다만 프랑스의 통치자들은 대체로 자국 가톨릭교회를 교황에게 충성하는 조직이 아니라 프랑스에게 충성하는 조직으로 만들고 싶어했고, 이런 현상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 국민 의회 위원들에게까지 이어졌기에, 교회가 세속 국가의 이해 관계에 많은 영향을 받곤 했다. 서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가톨릭 교회가 교황보다는 자신에게 복종하길 원했지만, 일찍부터 강력한 국가를 갖춘 프랑스는 이러한 점이 더욱 두드러졌다. 아비뇽 유수로 가톨릭 세계를 장악하기도 했고, 30년 전쟁 때는 합스부르크를 억제하기 위해서 개신교 편에서 싸우기도 했다.[10] 부르봉 왕조를 열었던 앙리 4세도 지배를 위해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이라 교회와의 관계가 애매했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에도 앙시앵 레짐의 주요 세력인 성직자들이 교황 말고 정부에게 충성하라는 강요를 받으며 밀려난 적이 있다. 이 과정에서도 혼란이 많았는데, 혁명 직전에는 오히려 가톨릭 신부들이 향촌의 지식인으로서 농민들에게 저항 의식을 퍼트리고 있었다. 종교의 특성상 계몽주의적 이신론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봉건제 해체의 동맹군에 해당하던 게 가톨릭 신부들이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직후 성립된 국민의회는 성직자 민사 기본법을 밀어붙이며 선서 거부 사제들을 박해하고, 최고 존재(Etre suprême) 숭배를 밀어붙이며 가톨릭 성직자들을 적으로 돌려버렸다. 여기에 지방의 특임 인민 대표들을 중앙이 통제하는데 실패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이 들어서고 프랑스에 공화정이 확립된 이후로는 왕당파, 반공화파의 주요 세력인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는데, 오늘날 프랑스의 라이시테도 이때 확립된 것이다.

프랑스는 계몽주의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곳이기에, 프랑스 가톨릭교회는 계몽주의와 싸우는 최전선을 맡게 되어서[11] 신학이 상당히 발달했다. 이탈리아 출신이긴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파리 대학교의 교수였고, 17세기에는 '프랑스 학파'라는 영성 교리 학파가 발달했다. 프랑스 오라토리오회의 창시자 추기경 베륄(Pierre de Berulle), 콩드랑(Charles de Condren), 올리에(Jean Jacques Olier) 등이 이 학파의 대가며 이 밖에 성 에우데스(St. John Eudes), 몽포르(De Montfort) 등이 이 학파의 신학을 가톨릭 영성생활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에도 신스콜라 학파의 자크 마리탱( Maritain Jacques),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앙즈(Antoin-Gilbert Sertillanges) 등을 배출했으며, 20세기의 가장 저명한 신학자 중 하나인 앙리 드 뤼박(Henri de Lubac) 추기경도 프랑스 출신이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프랑스 가톨릭교회와 인연이 깊다. 파리 외방전교회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파리 외방전교회의 한국 선교가 한국 가톨릭을 형성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파리 외방전교회는 교황청 포교성성(인류복음화성) 선교 지침에 따라 아시아 선교를 목적으로 교구 사제들로 결성된 프랑스 최초의 외방전교회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주석성경>에서 입문과 각주는 프랑스의 공동 번역 성경(La Traduction Oecuménique de la Bible = TOB)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한국 가톨릭교회와 파리 외방전교회의 인연은, 미사성사를 집전할 사제가 필요했던 조선의 신자들이 1811년과 1827년 2차례에 걸쳐 교황청에 편지를 보낸 것으로 시작된다. 프랑스 남서부의 가톨릭 성지 루르드의 무염시태[12] 성당에는 선교사들이 서해의 거친 풍랑을 헤치고 무사히 조선 땅에 도착한 것을 성모 마리아에게 감사하는 감사비가 새겨져 있다. 이 감사비는 1876년 무염시태 성당 축성식 때 성당 벽돌판에 새긴 것으로, 성모 마리아한국 가톨릭주보성인(수호성인)이기도 하다.

파일:external/info.catholic.or.kr/%ED%95%9C%EA%B5%AD%EC%9D%98%ED%8C%8C%EB%A6%AC%EC%99%B8%EB%B0%A9%EC%A0%84%EA%B5%90%ED%9A%8C%EC%88%9C%EA%B5%90%EC%9E%90.jpg

왼쪽 위부터 성 모방 나 베드로 신부, 성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13], 성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 푸르티에 신 요한 신부, 프티니콜라 박 미카엘 신부, 성 오매트르 오 베드로 신부, 성 도리 김 헨리코 신부, 성 베르뇌 장 시메온 주교[14], 성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15], 성 위앵 민 루카 신부, 성 볼리외 서 루도비코 신부, 성 브르트니에르 백 유스토 신부다.

파일:etrange.jpg
<선교사들의 출발(Le depart des Missionnaires)>. 왼쪽부터 위앵 신부, 도리 신부, 볼리외 신부, 브르트니에르 신부. 그림 속 뒤돌아보는 아이는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피에르 드 쿠베르탱으로, 이 그림을 그린 샤를 쿠베르탱의 아들이다.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고, 나머지 주교들과 신부들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울 새남터와 충청남도 보령시 갈매못에서 순교했다. 그 외에 경기도 용인시 손골성지, 의왕시 하우현성당 등에서도 이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조선을 북경교구에서 분리하여 조선대목구(천주교 서울대교구)를 설정한 이래, 파리 외방전교회가 조선 천주교회의 사목을 맡았다.[16] 파리 외방전교회는 지금까지 한국에 173명의 선교사를 파견했고, 그 중 14명이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다. 파리 외방전교회는 170여 명의 순교자를 배출했는데 이들 중 12명이 한국에서 순교했고, 그 가운데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10명의 순교자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때 시성되었다. (한국 103위 순교성인)

파리 외방전교회 프랑스인 선교사들은 초대 조선대목구장부터 1942년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가 제10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되기까지 약 110년간 9대에 걸쳐 조선대목구장직을 승계했다. 천주교 대구대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 제2대 교구장 무세 주교, 제9대 조선대목구장이자 천주교 대전교구 초대 교구장 아드리앙 조셉 라리보 주교, 천주교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 두봉 주교도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이다.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파견된 프랑스인 신부들은 한국에서 수녀회도 창설했다. 루이 델랑드 신부(한국명 남대영)가 예수성심시녀회를, 피에르 생제르 신부(한국명 성재덕)는 성가소비녀회를 창설했고, 두 수녀회는 현재 한국 가톨릭에서 여러 활동들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한국인 가톨릭 사제 양성에도 힘썼다. 성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 성 모방 나 베드로 신부 등은 3명의 조선 소년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이 세 소년이 바로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2번째 한국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 최방제[17] 프란치스코다.

또한 한국 가톨릭 최초의 수도회도, 프랑스에서 진출해온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이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조선 땅에서도 가톨릭을 자유롭게 믿을 수 있게 되고, 2년 후인 1888년에 프랑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 4명(프랑스인 수녀 2명, 중국인 수련수녀 2명)이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많은 일을 해오고 있고, 오늘날도 한국에서 제일 큰 수녀회로 성장해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사회의 변화와 맞물려 프랑스의 많은 교구수도회에서 성소자[18]가 급격히 감소했다. 프랑스의 수도자 수는 40% 이상 줄었다. 같은 기간 프랑스의 사제와 신학생도 30%가 줄었다. 짧은 기간에 엄청난 수가 감소한 것이다.

그래서 일부 수도회는 다른 대륙, 특히 아시아, 아프리카로 방향을 돌려 필리핀, 대한민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인도, 콩고 등지에서 성소자를 대거 양성했다. 현재 45세 미만의 수도자 가운데 절반이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나왔다. 2012년을 기준으로 양성 중인 여성 수도자(수녀) 490명 중 310명이, 남성 수도자(수사) 392명 중 140명이 외국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신학 개혁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 전통 가톨릭 운동의 발원지 중 한 곳이 프랑스다. 전통 가톨릭 운동은 프랑스, 스위스, 미국에서 시작되었고 프랑스, 스위스의 전통 가톨릭 운동은 성 비오 10세회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전통 가톨릭 신자 수가 성공회 신자 수보다 많다고 한다.[19]

현재는 합법적인 전통 가톨릭 단체부터 시작해서 비합법이지만 가톨릭의 일부로는 인정받고 있는 성 비오 10세회와 교황 공석주의자 단체까지 여러 전통 가톨릭 단체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전통 가톨릭 단체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다른 교구수도회와는 달리 성소자가 감소하지 않고 꾸준히 증가하거나 적어도 현상을 유지하고 있다. 미사 참례율도 교구에 비해 월등히 높다. 프랑스는 전통 가톨릭 운동의 발원지이자 가장 활발한 국가답게, 미국과 함께 전통 가톨릭 단체에서 운영하는 성당공소가 가장 많은 국가다. 전통 가톨릭 운동을 직접 볼 수도 있다. 샤르트르 도보 순례나 노트르담 대성당 순례 등 가톨릭의 주요 야외 신심 행사는 크게 둘로 나뉘어서 진행된다. 하나는 교구 주관으로 열리고 다른 하나는 성 비오 10세회 등 전통 가톨릭 단체들의 주관으로 열린다. 양쪽 다 가톨릭의 이름으로 진행되며 참여 인원이 수천명 이상이다. 가톨릭 사립학교들도 양분되어 있다. 일부 가톨릭 사립학교는 교구수도회에서 운영하며, 다른 일부 가톨릭 사립학교는 전통 가톨릭 단체나 그 지도를 받는 수도회에서 운영한다. 학교 규율은 전통 가톨릭 쪽 가톨릭 사립학교가 더 엄격하다. 성 비오 10세회는 파리에 사립 대학교를 하나 세워 운영하고 있다.

전통 가톨릭 단체에서 운영하는 성당 중 유명한 성당으로 파리의 생 니콜라 뒤 샤르도네 성당(Église Saint-Nicolas du Chardonnet)이 있다. 18세기 중반에 세워진 이 성당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프랑스 정부의 정교분리 정책 강화로 소유권은 프랑스 정부에 넘어갔지만 운영은 교구에서 하고 있었다. 하지만 1977년 성 비오 10세회를 지지하는 원로 사제[20]와 신자들이 성당을 점거[21]한 후 지금까지 성 비오 10세회에서 운영하고 있다. 점거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가 성당을 방문하여 성당을 점거한 원로 사제와 신자들을 격려하였고, 본인도 이 곳에서 여러 번 미사를 봉헌했다. 성 비오 10세회에서는 이 성당을 보수하고 주임신부를 임명하는 등 관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다른 유럽국가들처럼, 프랑스의 가톨릭 또한 세속화의 물결을 피할 수는 없었다. 현재 프랑스의 미사 참여율은 대체로 10% 내외에 불과하다.#

4.3. 개신교

16세기 에라스무스마르틴 루터의 영향을 받아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프랑스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면서 장 칼뱅과 같은 프로테스탄트 개신교 신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를 저술했고 망명지인 스위스 제네바에서 주로 활동하며 개신교 신학을 정립한 인물로 꼽힌다.

한땐 위그노를 중심으로 개신교 신자도 상당수 있었다. 가톨릭을 이념으로 신봉하던 프랑스 왕국에서는 전통적으로 개신교를 고깝게 보아 탄압했고, 이에 대해 개신교인들이 반발해 위그노 전쟁이라는 전쟁이 터진 적도 있다. 이에 앙리 4세낭트 칙령을 발표해 개신교인들의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지만, 왕권과 위그노의 갈등은 계속되어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폐지했고 다시 개신교인들은 탄압받았다.

루이 16세1787년에 베르사유 칙령(The Edict of Versailles)을 발표해 비 가톨릭 교도에게 가톨릭 교도와 동등한 시민권과 신앙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 도중에 제정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으로 개신교인들의 권리는 확실하게 보장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현재도 프랑스개신교는 소수 종교이다. 2010년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인구중 2%만이 개신교도이다. 위그노 전쟁 시기에도 위그노 숫자는 10% 미만이었고 루이 14세때 탄압으로 공식적으론 0%였고 18세기 루이 16세 시기엔 2%로 측정했다. 탄압을 거치면서도 버티다가 박해가 해제되어 프랑스로 다소 복귀하거나 숨긴 신앙을 선언하는 등 시기를 거쳐 지금도 비슷한 비율이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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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2차대전 당시에는 레지스탕스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도 했었다.

프랑스 개혁교회와 프랑스 복음주의 루터교회가 병합하여 프랑스 최대 개신교 교단, 프랑스 연합 개신교회를 설립했다.

4.4. 이슬람

프랑스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무슬림 인구 비율이 높은 편이다. 이미 20세기 중반부터 과거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22], 사하라 이남(특히 서아프리카)등지에서 엄청난 이민을 오면서 이슬람교 신자만 전체 인구의 9%로 서유럽에서 무슬림 비율이 가장 높다. 특히 북아프리카 출신이 70% 이상이다. 출신국별로 알제리 35%, 모로코 25%, 튀니지 10% 등이며 이들은 주로 파리, 릴, 리옹, 마르세유 등 대도시의 외곽에 집단을 이뤄 살고 있다. 유럽 난민 사태로 프랑스는 현재 치안이 좋지 않은데 내전이 계속 일어나는 서아프리카의 프랑스어권 국가 출신 난민들(대다수가 이슬람교)이 프랑스로 몰리고 있어서 계속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교의 부상은 프랑스의 라이시테 원칙과 큰 충돌을 빚고 있다. 최근 이라크,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등 북아프리카와 무관한 서아시아 난민들의 수도 늘고 있다.

2020년 10월 16일에 프랑스에서 사뮈엘 파티 피살 사건이 발생했고 교사를 참수한 18세 체첸인이 체포됐다. # 그리고 프랑스 정부는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 외국인 231명을 추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프랑스 정부가 테러로 이어질 수 있는 극단·급진주의 조장이 의심되는 모스크에 대해 조사에 나선다고 밝혔다. #

2020년 12월 10일에 프랑스 정부가 이슬람 극단주의의 확산을 막는다는 취지로 입법한 이른바 공화국 원칙 강화법의 초안을 공개했다. #

이슬람좌파주의라는 단어가 프랑스내에서 논란을 빚고 있다. #

4.5. 기타

프랑스 내에도 정교회, 콥트 정교회, 유대교, 불교,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도 있다.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0.8% 정도이다. 언뜻 보기에 적어보일지 몰라도 세계적으로는 이스라엘, 미국 다음으로 유대인이 많이 거주하는 나라다.

5. 문화예술

공통된 특이점으로는 영미권 문화에 대한 구애가 상당히 강하다는 거다. 에드가 앨런 포라던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처럼 프랑스의 지지를 받아 발굴된 예술가들도 있을 정도.

발레 용어들은 거의 다 프랑스어다.

5.1. 건축

중세부터 근대 이전까지 유럽 건축 양식의 트랜드를 주도했던 국가. 중세에는 고딕 양식을 가장 먼저 완성한 국가로, 초기 고딕의 야심작 노트르담 대성당, 전성기 고딕의 완성형 샤르트르 대성당, 고딕의 완성형이라는 아미엥 대성당, 랭스 대성당 등 많은 걸작 들을 가지고 있다. 영국, 독일, 스페인 등의 주변국의 성당 건축은 프랑스 고딕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탈리아는 대체적으로 고딕을 외면했으나 밀라노 대성당처럼 받아들인 사례가 없지 않다.

근세에는 절대주의 왕정의 화려한 귀족 문화를 프랑스가 주도했으며, 바로크로코코와 같은 장식적인 양식의 발달을 이끌었다. 베르사유 궁전으로 대표되며 이 궁전은 다른 국가들의 동경을 받았다. 이 시기에 설립된 학교 에콜 데 보자르에서는 이후로 많은 유명한 미술가와 건축가가 양성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는 엄정한 느낌의 신고전주의 건축과 이론을 주도하였다. 나폴레옹 개선문이 대표적.

왕정복고 이후에는 다시 예전의 화려한 장식을 집대성한 보자르 양식이 유행했으며, 이는 당대 유럽 건축의 표준처럼 여겨졌다. 이 시기에 파리 오페라 하우스처럼 극도로 화려한 건물들이 출현한다.

근대에는 아르누보 같은 새로운 장식적인 양식이 잠시 인기를 얻었었고, 에펠탑과 기계관으로 산업 혁명 시대의 건축을 선도하는 역량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세계의 경제/문화의 중심은 미국으로 넘어갔고, 프랑스 건축의 주목성은 낮아졌다. 그럼에도 20세기 건축의 거장 소리 듣는 르 코르뷔지에나 21세기 거장 장 누벨 등 유명 건축가들이 꾸준히 나와 세계적 트렌드를 제시하고 있다.

5.2. 패션

샤넬, 에르메스, 루이비통 등 럭셔리 브랜드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물론 또 다른 럭셔리 브랜드 강국 이탈리아가 있긴 하지만, 프랑스가 세련된 디자인이란 이미지가 있다면 이탈리아는 장인 정신이란 이미지가 있어 느낌은 좀 다르다.[23] 파리를 세계 관광 1순위 도시로 만든 것도 럭셔리 브랜드들이 즐비한 16구나 샹젤리제 거리가 한몫했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럭셔리 부띠크 안에는 한국, 중국, 일본 등 아시아인 일색이다.

5.3. 프랑스 미술

* 자세한 내용은 미술사 관련 정보 참고.

18세기 이후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는 프랑스 미술이 곧 서양 미술 그 자체였다. 르네상스이탈리아, 바로크독일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면 이후 등장한 로코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탈인상주의, 야수파, 입체파, 초현실주의 등의 사조들은 전부 프랑스 미술계를 중심으로 나온 사조들이다.

프랑스에서 활동한 예술가만 해도 앵그르, 들라크루아, 쿠르베, 뒤샹, 마티스,샤갈, 반고흐, 카바넬, 툴루즈 로트렉, 마네, 드가, 로댕, 밀레, 쇠라, 피사로, 모네, 피카소, 고갱, 세잔, 르누아르, 위트릴로매우 많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미술 중심이 미국 뉴욕으로 넘어갔지만, 여전히 어느 정도 미술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5.4. 프랑스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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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프랑스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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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횟수 세계 1위이자, 세계에서 가장 풍부하고 영향력 있는 문학력을 자랑한다. 프랑스 작가들은 서사시, 서정시, 희곡, 소설 및 여러 산문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또한 프랑스 문학은 다른 나라의 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17세기에 고전주의라고 부른 프랑스 문예운동은 다른 유럽 문학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18세기의 프랑스 작가들은 유럽의 지적인 생활을 지배했다. 19세기20세기 초의 지배적인 문예사조인 사실주의상징주의는 프랑스 문학이 주도해서 영국미국의 많은 작가들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작가들은 형식, 언어, 문체, 전통에 특히 많은 비중을 두었고 다른 나라의 작가들에 비해 규칙과 모범을 철저히 따랐다. 프랑스 문학의 특징은 일반적으로 합리주의와 형식 실험이라는 개념으로 요약된다.

합리주의는 인간 행동의 원칙으로서 이성을 강조하는 사상인데 문학에 도입되면서 분명하고 자기 통제적이며 형식적으로도 잘 다듬어진 문학을 합리주의라고 하게 되었다. 프랑스 문학에서 합리주의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만 강한 실험 정신 또한 여러 시기에 걸쳐 프랑스 문학에 나타난 특징이었다. 실험적인 작품들은 종종 감성적이고 열정적이며 비전통적인 문학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들로는 빅토르 위고, 알렉상드르 뒤마, 알베르 카뮈, 마르셀 프루스트, 에밀 졸라, 귀스타브 플로베르, 기 드 모파상, 오노레 드 발자크, 볼테르,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장폴 사르트르, 쥘 베른, 샤를 보들레르, 스탕달, 앙드레 지드, 아르튀르 랭보, 스테판 말라르메, 앙드레 말로 등이 있다.

5.6. 프랑스 음악

샤르팡티에, 드뷔시, 베를리오즈, 생상스, 비제, 오펜바흐, 포레, 구노, 라벨, 사티, 풀랑 등 유명한 작곡가는 많긴 하지만 프랑스의 클래식 음악은 타 분야에 비해 비교적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한다. 이는 예술의 나라임을 자처하는 프랑스에게 음악 분야는 실로 뼈아픈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음악의 본고장인 독일, 오스트리아는 물론 러시아에도 밀리는 수준이다. 정부 차원에서 설립하여 육성했던 파리 오케스트라는 어느 정도 수준에는 올라있지만 독일, 미국, 영국의 정상급 오케스트라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24][25]

물론 앞서 언급한 프랑스 음악가들은 결코 무시당할 위치가 아니며 클래식 음악의 역사에 핵심적인 기여도 많지만, 바흐, 모차르트, 헨델, 베토벤 등등이 포진한 독일계 국가들에 비하면 유럽 최고의 문화대국을 자부하는 프랑스치고는 좀 빈약한 느낌이 있다. 이는 2차 대전 당시 프랑스인 가족과 대화를 하게 된 독일군 장교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문학하면 프랑스지요. 독일에 대단한 문필가가 누가 있던가요? 괴테? 실러? 그림형제? 하지만 프랑스는 라신느, 모파상, 발자크, 뒤마, 위고 등등 너무나 대단한 문학가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도 음악하면 반대로 독일이 최고지요."

서양음악에서는 초중기 낭만주의 시대의 꽃이라고도 불린다. 서양음악계 전통적 명가인 오스트리아의 경우, 영토 분쟁으로 인해 혼란했기 때문에 예술가들의 왕래가 자연스럽게 프랑스로 집중되었고[26], 프랑스는 당대 젊은 음악가들의 산실이자 새로운 음악계의 사교창이 되었다.[27] 허나 쇼팽은 요절했으며 탈베르그, 칼크브렌너 등의 여러 메이저 음악가들이 매너리즘에 빠지면서 점차 영향력이 감퇴하고 당대 가장 왕성히 활동하던 리스트가 거점을 독일의 바이마르로 옮기면서 낭만주의 중기에 들어서 독일 등에 비하면 상당히 정체되기도 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드뷔시가 당시 클래식 음악계를 꽉 잡고 있었던 바그너에 대항해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음악사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버르토크, 프로코피예프 등이 주창했던 인상주의와 완전히 상반되는 반낭만-민족주의, 혹은 스트라빈스키, 라벨 등이 주창한 신고전주의가 당대 음악계를 지배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당대에서는 잊혀졌고 신고전주의적인 라벨[28] 이후로는 서양음악계에서 이후로도 그다지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몽땅, 피아프, 버킨, 아르디 등의 샹송 가수들은 [29] 6-70년대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붐을 일으켰으며 그 밖에 현대 아이돌의 시초라고 평가되는 Yé-yé Boy, Yé-yé Girl 등이 유명했으며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제인 버킨의 남편으로 유명한 세르주 갱스부르가 있다.

이 때까지만 해도 프랑스 대중 음악은 프랑스 특유의 낭만적인 느끼함이 담긴 음악이라는 게 세간의 인식이었으나 이후 90년대 들어서는 AIR, 다프트 펑크, 저스티스, M83, 피닉스 등 프랑스의 일렉트로니카 뮤지션들이 국제적으로 인정 받고 있다.

특히 일렉트로니카는 프랑스의 종특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일렉트로니카를 전 세계에 유행시킨 장 미셸 자르부터 어릴 때부터 유튜브에서 주목받은 일렉트로니카 뮤지션 마데온, 1984년부터 현재까지 롱런하고 있는 유명 DJ 데이비드 게타까지 전세계에서 주목받는 일렉트로니카 뮤지션들 중 프랑스 출신들이 유난히 많다.

꾸준히 훌륭한 록 밴드들을 배출하는 영국이나, 크라우트록씬으로 대변할 수 있는 독일 등에 비하여 록 음악으로는 비교적으로는 잘 알려져있지는 않으나, 프랑스 다양한 록 밴드들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라고 할 수 있다. 80년대 중후반에는 마노 네그라, 누아르 데지르 등의 밴드가 앞장서서 프랑스에 펑크 물결을 일으켰고, 알랭 바슝 등의 뮤지션들은 록 음악과 샹송을 결합한 독특한 스타일로써 대중과 평론 모두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 국민 밴드로 불릴 수 있는 텔레폰, 앙도쉰 등 프랑스에서도 록 음악이 탄탄한 매니아 층이 있는 장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0~20년대에는 La Femme, Birds in Row, Mendelson 등의 밴드들이 인디 씬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90년대 아기가수로 화제를 모은 조르디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유명한 프랑스 가수다. 그리고 셀린 디옹 또한 주로 미국에서 활동한 캐나다 가수지만 프랑스어 곡도 지속적으로 내어[30] 90년대 프랑스 대중음악을 지배했다. 대표적으로 D'Eux 음반은 프랑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44주간 1위를 한 명반이다.

프랑스 가요계에 대해 덧붙여서 말하자면 인기가 많은 자국 뮤지션들 중에서 래퍼들의 비율이 상당히 높고 백인들보다 흑인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게 특징이다. 그리고 이들 중 대다수는 프랑스 본토 출신보다는 알제리, 코트디부아르, 콩고, 말리 등 과거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일부 국가들에서 온 이민자 1세대인 경우가 훨씬 많다.[31] 프랑스 래퍼들 중에서는 90년대의 MC 솔라나 IAM이 미국에서도 이름이 알려질 정도로 성공했고, 현대에는 메트로 김스 등이 알려져 있다.

이처럼 과거에는 음악 분야가 저조했으나 대중음악 부분에서 급부상한 점은 여러모로 옆 나라 영국과 비슷하다. 자세한 내용은 영국/문화 문서 참조.

5.7. 프랑스 만화

2016년 기준 세계 만화 시장 점유율 4위를 차지하며 전 세계적으로 3억 5천만부 이상 팔린 만화인 아스테릭스가 나온 나라이다. 또한 세계적인 만화제인 앙굴렘 국제만화제를 개최하는 나라로 세계적인 만화 강국 중 하나이다. 프랑스에선 예술 분류법으로 만화를 9번째 예술로 칭하기도 한다.

유럽 최고의 애니메이션 강국이기도 하다. 지금은 캐나다의 DHX미디어 산하로 들어간 북미 애니회사인 DiC 엔터테인먼트도 장 샬로팽이라는 프랑스인이 설립한 회사였다.[32]

EBS에서 서양 애니메이션들을 적극적으로 수입하여 방영했던 시절에도 《노마는 평범해》, 《말썽꾸러기 띠떼프》, 《달려라 스피로우》, 《꼬마 슈퍼맨 잼잼》, 《단짝친구 뭉치와 두리》, 《마녀들이 사는 법》[33] 등 프랑스 애니메이션이 상당히 많았다. 고전 만화의 리메이크나 한국 및 다른 나라와의 공동제작도 활발하다.

한편, 프랑스는 유럽 최강의 만화 양덕후를 가진 나라이기도 하다. 특히 20세기엔 일본 만화 매니아들이 많아, 《UFO로보 그렌다이저》는 프랑스에서 Goldorak이란 이름으로 방영되어 순간적으로 시청률 100%라는 전설을 남겼다는 소리도 있다. 그래서 일본 철강기업과 협력관계를 가진 프랑스 기업이 그렌다이저 철강모형을 만들어 선물했지만, 정작 UFO로보 그렌다이저가 자국에선 흥행하지 않은 일본 기업인들은 "아니, 이게 뭐죠?"라고 낯설어해 프랑스인들이 실망한 실화도 있다고. 프랑스의 덕력은 그야말로 대단해서 아마추어들의 자체자작 특촬물인 《총사전대 프랑스 파이브》라는 것도 있다. 일본 만화가 프랑스어로도 많이 번역이 되어 있어서 일부 양덕들 중에는 프랑스어로 번역된 일본 만화를 보기 위해 프랑스어를 배우자는 우스갯소리도 하는 모양. 물론 불법유포도 많.. 물론 이는 한쪽만의 짝사랑은 아니라, 20세기 일본에서도 파리 신드롬이라는 반대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21세기 들어선 아시아권 만화에도 관심을 많이 가져서, 한국 만화 페스티벌도 단독으로 열려 한국 만화가들이 사인회를 하러 갔는데 반응이 좋아 만화가들이 놀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좀 더 정확하겐 한류 영향으로 한국 문화도 좋아하는 양덕후들이 늘어나면서 하위 개념인 웹툰 등에도 관심이 늘어난 모양.

프랑스의 이 두 가지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를 들자면, BL계 만화로는 이례적인 100만 부 돌파라는 성적을 올리며 일본에서 TVA화까지 된 《순정 로맨티카》가 프랑스 만화 판매고 집계 TOP 10 중 5위까지 올라가는 기염을 토한 바가 있다. 그리고 슈가슈가룬도 인명, 지명이 프랑스어라서 프랑스에서도 인기를 많은 편이다.

5.8. 비디오 게임

프랑스는 유럽 게임계에서 꽤 알아주는 강국이다. 프랑스에서 개발된 게임들 중 《고인돌》, 《블루스 브라더스》처럼 명작 고전게임도 있고 《어둠속에 나 홀로》, 《어나더 월드》, 《알파 웨이브즈》 같은 나름대로 독특한 테이스트를 통해 다른 게임들에도 영향을 준 작품들도 있다.

유통쪽에서도 프랑스 계열 회사가 몇몇 있다. 세계적인 게임 소프트웨어 배급사중 하나인 유비소프트가 프랑스를 근거지로 하고 있고, 지금은 아타리 게임스[34]라는 이름으로 바뀐 인포그램도 소프트웨어 개발사를 거느리거나 흡수했었다. 그 밖에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과 어드벤처류 게임들로 유명한 퀀틱 드림도 프랑스 파리에 본거지를 두고 있다. 한동안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를 거느렸던 비방디 역시 프랑스 회사이며 모바일 게임 제작사로 유명한 Ketchapp 또한 프랑스 회사이다. 그 외에 유명한 게임 개발사로는 아소보 스튜디오, 아케인 스튜디오[35]가 프랑스에 위치해 있다.

또한 과거 큰 인기를 끈 아키네이터, 인크레디박스가 제작되었으며, Stray는 2022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6. 스포츠

6.1. 축구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월드컵에서 우승 2회, 준우승 2회, 3위 2회, 4위 1회를 기록했고 2회 연속 월드컵 결승 진출을 달성하고[36], UEFA 유로에서도 우승 2회, 준우승 1회, 4강 진출 2회를 기록한 상당한 강호이다. 그 외 대회에서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우승 2회, UEFA 네이션스 리그 우승 1회, 올림픽 축구 금메달 1회, 은메달 2회를 기록하였다. 또한 프랑스 프로축구 1부 리그인 리그 1도 최상위 인기 스포츠 리그로 인기가 많다.

프랑스가 이렇게 축구를 좋아하고 또 잘하는 데에는[37] 역사적인 배경이 어느 정도 있다는 의견도 있는데, 백년전쟁 이래 영국과 오랜 시간 앙금이 있는 프랑스는 그 영국의 국기이자 자존심인 축구에서 영국을 꺾으면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고 이것이 프랑스 축구 발전의 원동력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38] 그래서 축구 경기장을 짓고 FIFA 월드컵을 개최하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 결실로 자국에서 개최한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우승을 기록하는데 성공한다. 게다가 주변 유럽국들 대비 훨씬 빠르게 비백인 선수들도 적극 국대로 차출하면서[39] 이른바 '아트사커'라 불리는 프랑스 축구 대표팀만의 색깔을 드러낸다. 심지어 2018 월드컵 우승 이후부턴 킬리안 음바페가 대표팀 에이스를 맡고 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우승 이전에는 자국 리그가 비교적 잘 안 알려져 있어서 듣보 취급을 받기도 했지만, 실제 전적 보면 유럽에서 이탈리아, 독일 다음 순위권인 잉글랜드, 스페인과 비슷한 기류를 형성해왔으며, 21세기 들어선 독일, 이탈리아마저 앞질러 스페인과 함께 유럽 축구판을 주도하고 있는 느낌도 있다.[40] 또한 프랑스에는 세계 축구계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이 많다. 프랑스인이었던 로베르 게링이 처음으로 FIFA를 만들었으며, 줄 리메월드컵을 만들었고, 앙리 들로네는 UEFAUEFA 유로를 만들었다. UEFA 챔피언스 리그도 프랑스의 스포츠 일간지 '레키프(L'Equipe)'의 주최로, 편집자 가브리엘 아노가 주도하여 전신인 유러피언 컵으로부터 시작되었다.[41]

20세기 프랑스 국가 대표팀의 축구 실력은 플라티니, 지단같은 스타 플레이어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기복이 매우 심한 경우도 많았지만, 21세기 들어선 유스 시스템 개선 등으로 2006년 월드컵 준우승, 2018 러시아 월드컵 우승을 거두었고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도 결승까지 올라가 승부차기 끝에 준우승을 하는 등 전반적인 흐름이 꾸준해서, 역대 우승 2번에 준우승 2번의 성적으로 유럽국들 중에서도 최상위권 성적을 보이고 있다.[42]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항목도 참조.

참고로 프랑스 축구 응원구호는Allez Les Blues(가자, 푸른 전사여)인데 한국의 짝짝 짝 짝짝 대~한~민~국! 처럼 축구로 시작 된 응원 구호가 이제 사실상 모든 스포츠의 응원 구호로 자리매김하였다 할 수 있다.

6.2. 럭비

럭비 역시 프랑스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는 스포츠이다. 축구는 백인과 더불어 아프리카계 흑인 및 중동 이민자 등 여러 그룹에서 두루 인기가 있지만, 럭비는 특히 백인을 중심으로 인기가 있다. 유튜버 조승연이 프랑스인 모델 파비앙 코르비노와 함께한 방송에서 나온 얘기로는 축구가 하층민들의 스포츠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보니, 상류층들의 경우에는 'Je suis pas le foot'(나는 축구 관심 없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43] 이런 인기와 같이 인프라도 꽤 좋아서 2007 럭비 월드컵2023 럭비 월드컵 2번의 월드컵을 개최하였다.

오래 전부터 잉글랜드와 앙숙이자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답게 이런 인식이 럭비에서도 유감 없이 표출된다. 올림픽 럭비에서 첫 금메달을 받은 게 프랑스였다. 프랑스 럭비 유니언 국가대표팀은 해마다 열리는 식스 네이션스 챔피언십에 참가하고 있으며, 잉글랜드 럭비 유니언 국가대표팀과의 경기는 Le Crunch라고 하여 최고의 라이벌 경기로 여겨진다. 2022년 대회에선 압도적인 실력으로 나머지 다섯 나라를 누르고 그랜드 슬램으로 12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2023년까지 10번 치러진 럭비 월드컵에선 5번을 4강에 진출하고 3번 준우승한 전통의 강호다.# 하지만 이런 강력한 전력을 갖고 있음에도 자국에서 개최한 2023 럭비 월드컵에선 강력한 우승 후보였음에도 그보다 더한 괴물팀 남아공 럭비 국가대표팀에 1점차 통한의 패배를 당해 8강 탈락하면서 첫 우승이 좌절됐다.

프로 리그인 TOP 14는 세계 럭비 유니언 리그 중에서 최고로 여겨지며, 평균 관중수가 1만 5천명에 육박할 정도로 상당히 인기가 많다. 축구의 프리미어 리그와 같은 위상이라고 보면 된다. 프랑스에서 뛰는 외국인 선수들은 대부분 럭비 강국이면서도 대형 프로 구단을 갖고 있지 못한 아르헨티나, 사모아, 피지, 통가 등 남반구 출신인데, 국가대표 선발을 포기하고 프랑스행을 선택한 젊은 영국, 아일랜드 선수들도 있을 정도로 대회 수준이 높고 선수 생활 여건도 좋다. 때문에 점점 많은 최상급 선수들이 프랑스 리그로 향하고 있다. TOP 14 결승전은 해마다 최다 관중을 끌어 모으며, 대통령이 직관하러 오기도 한다. 스타드 툴루쟁 vs ASM 클레르몽 오베르뉴. 이런 수준 높은 리그를 갖고 있기 때문에 럭비판 유로 챔피언스리그 격인 유러피언 럭비 챔피언스 컵에서 프랑스 클럽은 28번 결승에 오르고 12번 우승하면서 럭비 종주국인 잉글랜드의 15번 결승 진출과 10회 우승을 압도하고 있다. 저 12번 중 혼자 6번 우승한 스타드 툴루쟁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기팀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격차는 점점 벌어질 예정.


2024 파리 올림픽에서 남자 7인제 럭비팀이 금메달을 땄다. 우승의 주역 중 하나인 앙투안 뒤퐁이 올림픽 폐막식 기수를 맡는 등 오늘날에도 럭비의 위상은 프랑스에서 매우 매우 높다.

이러다 보니 여자 럭비 국가대표팀도 꽤나 강호인데, 남자 대표팀만큼의 위상은 없지만 여자 럭비 월드컵에서 4강에 8번 진출했다.

2010년대까지 백인 중심의 스포츠였던 터라 2007년 월드컵을 개최할 당시 장 마리 르 펜을 비롯한 프랑스 백인 우월론자들이 "많은 흑인이 포함된 프랑스 축구대표팀보단 순수 백인으로 이루어진 럭비 대표팀이야말로 진정한 프랑스 대표팀이다."#라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럭비 대표팀에도 흑인들이 늘어나면 어쩔려고..[44][45]

6.3. 농구

농구도 2020년대 기준 FIBA 랭킹 10위권 안에 드는 세계적인 강호다. 유로 바스켓에서 1949, 2011 대회를 준우승했고 2013 대회에서 드디어 첫 우승을 차지했다. 1948, 2000 올림픽 남자 농구에서 은메달, 2012 올림픽 여자 농구에서 은메달을 딸 정도로 올림픽에서도 상당한 강호였다. 농구 월드컵에서는 1950년 1회 아르헨티나 대회 6위를 차지하고, 1954년 브라질 대회에서 거둔 4강[46]이 역대 최고 기록이었다가 2014 FIBA 농구 월드컵 스페인에서 개최국이자 강력한 우승 후보 스페인을 8강전에서 65-52로 누르며 60년 만에 최고 성적인 4강(3위)까지 차지했다. 다만 2016 리우 올림픽 남자 농구는 8강전에서 스페인에게 67-92로 참패했다.

자체 프로리그는 유럽에서도 프로 농구 인기가 높다고 평가받는 스페인 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프랑스 흑인 사회에선 인기가 좋다고 하고 실제 국가대표팀도 흑인 선수들이 제법 있다. 특히 2020년대 들어선 빅터 웸반야마가 NBA 유망주로 주목받으면서 농구 인기가 다시 오르고 있다고 한다. 그 외 유명 선수로는 NBA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부흥기를 이끈 공격형 가드 토니 파커가 있다. 올해의 수비수상을 여러번 수상한 루디 고베어 역시 프랑스 출신이며 에반 포니에, 니콜라스 바툼 등 나름 쏠쏠한 레벨인 선수들까지 꽤 많은 프랑스 출신 선수들이 NBA에서 발자취를 남겼고, 지금도 남기고 있다.

2019 FIBA 농구 월드컵 중국에서도 3위를 기록하며 2회 연속 3위를 차지했다. 준우승한 아르헨티나에게 4강전에서 66-80으로 패했다.

2020 도쿄 올림픽 평가전에서 일본에게 지는 이변을 보였지만 막상 올림픽에서는 확 다른 모습이었다. 조별리그에서 미국을 이기는 파란을 보이며 결승까지 파죽지세로 올라갔다. 비록 결승에서 다시 만난 미국에게 82-87로 아쉽게 패했지만, 21년 만의 올림픽 남자 농구 은메달이라는 쾌거를 이뤄냈다.

하지만 2023 FIBA 농구 월드컵 필리핀-일본-인도네시아 조별리그에서부터 극도로 부진하여 최약체인 레바논에게도 85-79로 겨우 이기고 라트비아에게 88-86로 지더니 캐나다에겐 65-95로 대패하며 토너먼트 탈락했다. 순위 결정전으로 추락하여 18위를 기록하며 2010 튀르키예 대회 13위 이후로 오랫만에 10위권으로 추락했다.

6.4. 배구

배구도 세계적인 강호이다. 2014년 세계선수권 4강 및 2015년 월드리그 우승[47] 및 그해 유럽선수권까지 제패했다. 2016 리우 올림픽에도 진출했다. 2018년 월드리그에서 개편된 발리볼 네이션스리그에서도 전체 1위를 차지했다.[48] 2020 도쿄 올림픽 진출도 확정지어 2회연속으로 올림픽 본선무대를 밟게되었다. 토니우티를 중심으로 에르벵 은가페, 케빈 르루, 보이어, 틸리 등이 세계무대를 호령하고 있다.

2020 올림픽 남자 배구에서 러시아를 이기고 처음으로 금메달을 받았고 2024 파리 올림픽에서도 우승했다.

6.5. 야구

유럽에서 독일, 체코와 더불어 중상위권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대중적인 인지도가 있는 종목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디비시옹 1 베이스볼이라는 세미프로리그도 운영 중에 있으며, 클럽 팀은 매년 개최되는 유럽 챔피언스 컵 본선에 프랑스 야구 국가대표팀은 격년마다 개최되는 유럽야구선수권대회 본선에 출전하며 2013년 WBC부터 예선에 참가하고 있다.

나름대로 인프라는 구축이 되어 있지만 관중 수나 중계와 같은 이러한 상업적인 부분에 있어선 열악한 편이다. 2017년 12월 야구와 소프트볼 선수가 약 1만 3천명으로 등록되었다.

6.6. 탁구

탁구도 유럽에선 스웨덴, 독일 등과 함께 나름 강국 중 하나인데, 유럽 탁구의 레전드이자 프랑스 최초의 올림픽 탁구 메달리스트인 장 필립 가티엥 등이 90년대엔 나름 유명했다.

그 이후 한동안 탁구 인재가 나오지 않았으나 2010년대 이후 유럽 최상위권 실력자 시몽 고지가 등장했고, 2024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프랑스 탁구 천재 듀오 르브론 형제가 등장함에 따라 베테랑이 된 시몽 고지가 르브론 형제와 함께 프랑스 탁구의 황금세대를 이끌고 있다.

황금세대란 말을 대변하듯 혜성같이 등장한 르브론 형제를 앞세워 2023년부터 유의미한 성과를 내고 있다. 23 유로피안 게임 단식에서 금메달(펠릭스 르브론), 단체전에서 동메달 딴 것을 시작으로 2024년 세계선수권에선 프랑스 남자 대표팀이 비록 결승에서 중국에 완패하긴 했지만 결승까지 오르며 은메달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자국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에서도 에이스 펠릭스 르브론의 활약을 앞세워 단식에서 동메달, 단체전에서도 동메달을 따냈다.

6.7. 테니스

20세기엔 대중적 인기는 있어도 딱히 테니스 강국은 아니었으나, 2000년대 중반부터 가엘 몽피스(최고 랭킹 6위), 조 윌프리드 송가(최고 5위), 리샤르 가스케(최고 7위), 질 시몽(최고 6위) 등의 90년대생 톱랭커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고, 그 아래 중견급에서도 뤼카 퓌예(최고 10위), 브누아 페어(최고 18위), 아드리앙 만나리노(최고 22위), 우고 움베르(최고 25위), 제레미 샤디(최고 25위) 등등 탄탄한 선수들이 대거 등장하며 2010년대에 프랑스 테니스의 황금기를 이뤘다.

복식에서도 니콜라 마위(복식 최고 랭킹 1위), 피에르위그 에르베르(복식 최고 랭킹 2위) 등이 활약하며 프랑스 테니스의 위상을 드높였다.

다만, 전체적인 선수층은 매우 탄탄한데 비해 단식 세계랭킹 1위를 한 프랑스 선수는 이상하게 역대 한 명도 없다. 해외 매니아들도 신기하게 보는 상황.

6.8. 사이클

매년 6~7월에는 세계적인 사이클 경기인, 저 유명한 투르 드 프랑스가 열린다. 이 대회의 전통으로는 매 마지막 스테이지에 파리의 개선문 로터리에서 크리테리움이 열리는 것이 있다.

6.9. 펜싱

펜싱의 발상지이자 종주국이며, 프랑스의 국기이다. 한국에서의 이미지와는 달리 유럽에서는 이미 생활 체육의 일부로 자리잡아 유럽인들에겐 친숙한 스포츠.[49] 기본적으로 유럽 검술, 그 중에서도 프랑스 검술을 바탕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올림픽의 모든 펜싱 경기는 프랑스어로 진행된다. 또한 에페, 사브르, 플뢰레 등 거의 모든 펜싱 용어가 프랑스어에서 유래하였다.[50]

6.10. 모터스포츠

6.10.1. 레이싱

레이싱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나라로 서킷에서나 랠리에서나 위대한 선수들을 배출하였다. 자국에서 열리는 유명한 모터스포츠 이벤트로 르망 24시가 있다. WRC가 랠리, F1이 온 로드 오픈 휠 레이스를 대표한다면 이쪽은 내구레이스를 대표하는 포지션.

6.10.2. 서킷

서킷 레이스의 대표스포츠인 포뮬러 1에서는 비록 아일톤 세나의 죽음으로 인해서 반대급부로 악역을 떠맡아야 했지만 그럼에도 역대 탑5 안에 들 만한 4회 챔피언인 알랭 프로스트가 프랑스 출신이다. 과거 2013년에는 F1에 4명의 프랑스인이 있었는데, 로맹 그로장, 장에릭 베르뉴, 샤를 픽, 그리고 쥘 비앙키[51]가 있었으며 현재는 피에르 가슬리, 에스테반 오콘 두 명만 남아있다.

6.10.3. 랠리

WRC의 세바스티앙 로브는 무려 9연속 챔피언, 그냥 WRC를 가지고 놀았다. F1의 전설 슈마허조차도 7회 챔피언에 5연속 챔피언이다. 9연챔은 그냥 10년 가까이 혼자 다 해먹었다는 소리. 이제는 그만 지겨웠는지 서폿 참전을 하기로 결정하였으며, 2022년에도 참가중이다. 현재는 세바스티앙 오지에가 로브 다음으로 8회 챔피언 자지를 가지고 있다. 다카르 랠리의 창시자인 티에르 사빈도 프랑스인이며, 또한 완주조차 힘들다는 이 랠리에서 10회나 우승한 페테르 한셀 역시 프랑스인이다. 이쯤되면 레이스, 특히 랠리 계열을 거의 싸먹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6.10.4. FMX

프랑스의 FMX 선수 다비드 리날도
프리스타일 모토크로스의 숨은 실력자들이 있는 곳이다. 위 영상의 다비드 리날도가 X Games에 경악할 만한 기술[52]을 들고와 깜짝 우승을 한 바 있으며, 니트로 서커스에서 활동 중인 통 파제 역시 FMX계에서 꽤 이름이 알려져 있다.

6.11. e스포츠

전통적인 e스포츠 강국으로서, 오랫동안 다종목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게임 관련 산업에 대해서는 유럽 국가치고는 제도적으로 다소 수위가 높은 탄압이 있고 일정 수준 이상으로 오르지 못해 '최강국'의 자리에 오른 경우는 얼마 없다.

21세기 들어 몇년 간 콘솔 플랫폼의 e스포츠 종목 장악력을 획기적으로 회복시켜 준 어드밴스드 워페어에서 오히려 본토인 북미 시장조차 압도하고 최고봉에 올라섰고 동시에 카운터 스트라이크: 소스 최강국으로 불렸다.[53][54] CS:GO에서도 Team LDLCTeam EnVyUs가 각각 한 차례씩 메이저 대회를 우승하면서 한 때 최정상 자리를 유지했었다. 지금은 Team VitalityG2 Esports를 필두로 예전 영광을 되찾으려고 하고 있다.[55]

그 외에 세계에서 가장 유서 깊은 대회였고 초일류급 3대 메이저 중에서도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ESWC의 본고장으로 유명했지만 이제는 간판이나 겨우 걸칠 정도로 약소화됐다. 작년부터 출혈이 너무 심했는지 게임개발 컨퍼런스 형태의 행사로 전환되었고 이스포츠 종목 대회는 하위 이벤트로 격하시켰다.

6.12. 올림픽

현대 올림픽도 프랑스인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이 많이 기여하여 근현대에 부활시켰다. 덕분에 올림픽 본고장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제1회 하계 올림픽 다음으로 프랑스가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었다.[56] 그리고 1924년 다시 파리에서 하계 올림픽을 개최했지만, 이후 90년이 되어가도록 다시는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지 못하고 있다. 2012년 하계 올림픽 유치전에서도 최종 투표까지 간 끝에 영국 런던에 밀려 탈락했다. 그나마 동계 올림픽은 1924,[57] 1968, 1992년에 걸쳐 3번이나 개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다가 2017년에 드디어 2024 파리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며 파리는 런던에 이어 두 번째로 한 도시에서 세 번의 올림픽을 유치한 도시가 되었고, 프랑스도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동/하계 올림픽을 각각 3번씩 유치한 나라가 되었다.

성적으로 보자면 유도 종목에서 종주국 일본 다음으로 가장 많은 메달을 따고 있는 유도 강국이다. 당장 현 중량급 최강자 리네르도 프랑스 국적의 선수다. 프랑스의 올림픽 유도 메달 획득 현황

양궁은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남자 개인전 금메달(세바스티앙 플루트), 2008 베이징 대회 여자 단체전 은메달, 2016 리우 대회 남자 개인전 은메달(장샤를 발라동)까지 메달 3개를 받은 나름 양궁 강호였다. 그래도 2024 자국 올림픽을 위해 한국 감독 오선택을 영입하여 착실하게 후원하며 남자 단체전 은메달, 여자 개인전 동메달을 받으며 양궁 메달 2개를 자국 대회에서 해냈다.

7. 문화재

약탈 문화재가 소장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루브르 박물관은 문화재 반환요구가 거세지기만 하는 상태. 말 그대로 약탈품 전시장인 대영박물관에 비교하면 문화예술의 중심지답게 자국 미술품도 상당 비율을 차지한다. 물론 배째라 하지만 그런 프랑스도 이집트에겐 여러 문화재들을 돌려줬는데 고대 이집트 연구에 프랑스가 가지고 있는 자부심이 엄청나기 때문이다.[58]

그나마 한국에게는 약탈 문화재 반환에 호의적인 편이다. 외규장각 도서 반환과정에서 대통령들이 직접 나서 반대파를 잠재운 사례는 유명. 결론부터 말하자면 프랑스는 외규장각 도서에 대해서 사기친 적은 없다. KTX에 TGV를 집어넣은 게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하는 조건 때문이었다는 것도 순 개드립. 외규장각 문서를 참고.

8. 출산율

선진국에서는 2020년대 기준 1.x 후반대에서 2명까지도 가는 높은 출산율을 보이고 있다. 이런 이유에 대해선 후술되어있듯 여러 이유가 거론된다.
프랑스 출산율 2.0이 부럽다? "100년 걸렸다"
KBS 월드 리포트 영국·프랑스, 출산율을 높여라

일하는 시간이 짧고 육아를 해야 하는 부모를 위해 시간과 금액에 대한 지원이 잘 되어있는데 아버지도 이러한 혜택을 다른 나라보다 더 많이 받을 수 있다. 보육원(유치원) 제도가 상당히 발달되어있고,지역 사회보장 부서에서 애들을 동반할 시엔 공공장소 줄 설 필요없이 맨 앞으로 갈 수 있는 카드를 발급해주고, 그 외에 양육비를 포함한 기타 혜택을 외국인도 차별없이 그대로 받을 수 있다. #

그리고 제도뿐 아니라 문화도 주목해봐야 할 부분인데, 성적으로도 상당히 개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이가 놀이를 하는 것이 좀 불안하고 위험해 보이더라도 아이들의 그런 행동 자체가 스스로 사회에서 부딪힐 고난을 견디게 해주는 교육이 된다고 여기므로 편하게 부모들이 나름대로의 휴가를 즐기면서 놀 때는 같이 잘 논다고 한다. 서구 사회가 한국보다는 아이를 어른같이 키워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프랑스는 특히 더 그런 부분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프랑스 자국인뿐만이 아니라 외국인 거주자들도 출산율이 같이 높다.

그러나, 제노포비아 정서, 한국 한정으로는 저출산 우려에 언론에서 프랑스의 대책을 소개하며 유교적인 가족관(교육열, 혼외 출산 거부)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프랑스의 출산율은 이민자 때문이라는 1차원적인 주장도 많이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알려진 통계로는 이민자들도 막 이민 온 사람이라면 몰라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에는 다른 프랑스인들과 다르지 않은 출산율을 보인다고 한다. 즉, 과장된 이야기라는 것이다. 프랑스 국립인구조사국(INED)에서는 2019년 아예 이런 주장을 부인하였다. 19%가 이주 여성을 어머니로 두고, 이주민의 출산율이 2.8인 것은 사실이지만 프랑스인 토박이의 출산율도 1.8이었고, 이주민은 0.1만 합계출산율을 올렸다는 것이다. # 국립통계경제연구소(INSEE)에서는 더 자세한 통계를 내놓아서 2014년에는 북아프리카 출신들이 3명대, 심하게는 3명대 중반으로 이주 전의 국가보다도 높은 합계출산율을 보이기도 하지만 보수적인 스페인, 이탈리아계 이민자는 오히려 합계출산율이 프랑스인 토박이보다 낮았다고도 하였다. #

프랑스로 이민한 비프랑스인들도 출산율이 1.7명으로 상당히 높지만, 제도와 정책이 더 좋은 독일은 1.1명으로 오히려 낮다고도 한다. 독일의 경우 양육시설이 주변국에 비해 상당히 열악한 편인데, 오히려 유럽의 국가를 관찰하면 이런 양육을 위해 양육시설에 투자가 이루어지거나 반대로 독일이나 이탈리아처럼 소홀해지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18세기 장 자크 루소가 자식을 고아원에 버려 프랑스에서도 비난하는 여론이 있었으나, 프랑스에서 그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고 할 정도로 양육이 어려운 부모에 대한 양육시설에 대한 개념은 역사가 꽤 오래되었다.

간단히 계산만 해봐도 프랑스의 출산율을 이민자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알 수 있다. 프랑스의 이슬람 비율은 10%인데, 당연히 과거 제국주의 시절 식민지 국가 출신으로 고향을 떠나서 프랑스로 건너왔던 이민자들도 많기 때문에 정착하여 몇 대 이상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경우도 매우 많다. 그리고, 알제리 출신으로 부모들이 이민을 와서 마르세유에서 태어난 지네딘 지단이 있다. 지단의 정체성은 당연히 프랑스인이다.

그 외에 비무슬림 프랑스인의 출산율을 1.5라고 해보자. 그럼 프랑스 평균 출산율인 2.0이 되기 위해서 이슬람인들의 평균 출산율이 몇명이 되어야 하는가? 6.5명이다. 전 세계에서 출산율이 6.5명을 넘는 나라는 거의 없다. 1.8이라고 하면 3.8명으로 그나마 현실감있게 보이는데, 프랑스 이외의 유럽 선진국 중에 2015년 출산율이 1.8명 이상인 나라는 (역시 이민자가 많은) 영국 뿐이다.

프랑스의 백인도 한국 기준에서는 후술하지만 부모 양육 부담은 덜지만 굉장히 한국의 전통에서 보았을 때는 '부도덕한', '콩가루 집안'에 어울리는 가족관이나 성문화를 지니고 있다. 예컨대 한국에서의 '불륜'이라는 단어는 어원 자체가 인간의 도리를 넘어섰다는 말이지만, 프랑스에서는 금전 스캔들은 몰라도 불륜 스캔들은 정치인에게 흠이 안된다는 식으로 말이다. 신생아의 62.2%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이 낳은 아기이며, 프랑스인조차 절반은 2살도 안된 아기를 때려보았다는 등 자국에서도 이건 너무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

그러나 이민자 가정이 출산율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결코 낮지 않다. 2010년 기준 프랑스의 신생아 중 24%는 이민자 가정으로부터 태어났다는 통계가 존재하며 이들 중 대다수는 마그레브를 포함한 과거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지 출신인 것으로 나타난다. 프랑스에서 이슬람교 비율을 생각하면 실제로 이민자 가정이 프랑스 전체 출산율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압도적이진 않지만 생각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9. 성문화

유럽 나라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성 문화는 상당히 개방적이다. 이것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서유럽권 국가 대부분이 이렇다. 독일[59]에서 온천이나 공중목욕탕은 남녀혼탕이며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의 성 개방도는 이탈리아 같은 남유럽을 훨씬 능가한다.[60][61]

TV에 영화는 물론 뮤직비디오, 거리의 온갖 광고물, 온 가족들이 모여 TV를 보는 시간대 프로그램이나 CF까지 남녀의 알몸 노출, 성행위 장면이 버젓이 나온다. 심지어는 프랑스의 주택 공급 부족을 풍자하던 2008년제 포스터에는 부모들이 자고 있는 그 침대에서 알몸을 드러내고 섹스를 하는 부부의 모습을 담은 포스터가 신문에 실렸다. 그런데 이걸 기사로 보도하는 한국 신문에도 모자이크만 해 놓고 그대로 실렸다(…). 대부분의 유럽권 국가에서는 나체 장면은 별로 문제가 안 되는 듯하다. CF에 나체가 나오는 것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대부분 서유럽권 국가가 그렇다.

영화판도 선정성과 폭력성에 대해 굉장히 관대하다. 웬만한 영화들은 대부분 전체 관람가를 받고, 12세 미만 관람 불가등급만 돼도 표현이나 수위가 센 영화들이 많다. 프랑스의 16세 미만 관람 불가등급이 최고 등급이다.

리옹에 있는 옷가게에서 겨울 정기 세일을 맞아 속옷만 입고 온 쇼핑객 선착순 100명에게 2벌의 옷을 무료로 제공하는 행사를 열었다.#

1970년대 말 프랑스에서 유행한 노래 중에 "69억 98만"이라는 노래가 있었는데[62], 섹스를 즐기는 프랑스인의 실상을 꼬집는 가사 내용을 담고 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서기 2000년이 되면 세계 인구는 69억 98만 명이 된다네. 필경 천재도 많아지겠지만 멍청이 또한 늘어날 걸세. 중국 인구는 10억, 자이르는 1억 명이 된다네. 그런데 사랑 놀음이라면 세계 챔피언인 우리 골족은 언제까지 5,000만에 머물러야 하는지
사방에서 매일 같이 열리는 쌍쌍파티가 끝나도 누구 하나 아이 가졌다는 이야기를 듣기 어렵네. 길게 말할 것도 없네. 이제부터라도 저녁 시간 TV를 끄고 아이 만드는 일에 전념하세. 정말 이러다가는 프랑스인이 UN이 보호해야 하는 소수민족으로 전락할 위험도 있다네.
저런 노래가 나왔을 때의 합계출산율은 1.8~2명대로, 나름 평범한 유럽 국가 수준의 출산율은 보이고 1.3~1.4명대의 서독보다는 아득히 출산율이 높았다. 한국에서는 합계출산율이 1.5~1.7명이던 80년대에도 '둘도 많다'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산아제한을 포기하지 않았다.

프랑스 소설 《개미》 중에서는 "19살에 아직 숫처녀로 남아있는 여자는 아마 공상과학소설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게다"라는 구절도 나온다.

하지만 이런 문화 덕분인지 서유럽/북유럽 선진국들 중에서 출산율이 높은 나라이다. 다른 유럽 선진국들이[63] 출산율 감소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에서도 출산율 문제에 한해서는 별로 걱정이 없다. 물론 나라에서의 전방위 육아 지원과 여러 가지 복지 정책들도 있지만 그건 다른 유럽 선진국들 대부분도 비슷한 수준이다. 인구, 특히 노동가능 인력은 국력의 가장 기초가 되는 자원 중 하나이니만큼 프랑스 내에서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의식이 대부분이다.

프랑스에서는 집 내놓는 광고에 집주인이 여대생 한정으로 월세를 받지 않는다고 기재하기도 한다. 물론 월세 대신 바라는 건 성상납이다. 자국 내 안티포르노 페미니스트들이 개선을 요구하는 것 중 하나라고 한다. 성해방주의의 관점에서 봤을 땐 외부의 강요 없이 두 성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진 경우는 별 문제가 없고, 또 많은 프랑스인들이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어서 '개선'이 되고 있지는 않다.[64]

프랑스는 또한 야설의 본고장이며, 일본의 출판사 중 이것에서 유래한 프랑스 서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회사가 있다. 독자층이 청소년인 소설이나 만화도 섹드립이 공공연하게 나온다. 타라 덩컨 시리즈띠떼프가 대표적이다.

국가별 농담에서도 프랑스의 성 문화는 빠지지 않는다. 우스갯소리로 예시가 몇 가지 있다.중간에 공산주의 유머가 있다
  • 겨울이 되자 영국인은 일할 시간이 줄었다며 불평하는데 프랑스인은 사랑할 시간이 늘었다고 좋아한다.
  • 영국인의 행복은 따뜻한 방 안에서 벽난로 불쬐기, 프랑스인의 행복은 여행지에서의 원나잇 스탠드, 소련인의 행복은 한밤에 KGB가 들이닥쳤을 때 번지수 잘못 찾았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 세 사람이 자동차 때문에 죽었는데, 독일인아우토반에서 고속으로 달리다가 사고로 죽었고, 프랑스인은 강변에서 카섹스를 하다가 주차브레이크가 풀려서 통째로 빠지는 바람에 익사했고, 소련인은 자동차를 사려 저축하다 굶어 죽었다.
  • 독일 여행사가 커플 투어에서 지정받은 호텔의 침대가 2개로 나뉘어져 있어서 정상적인 성생활을 즐기지 못했다는 이유로 한 고객에게 소송을 당했는데, 재판관은 두 침대를 묶어서 즐기면 된다! 라는 이유로 소송을 기각했다. 이를 두고 프랑스인은 100% 여행사가 유죄라는 발언을 했다는 루머가 있다.

이렇게 성적으로 개방적인 것 때문인지 창작물에서 등장하는 프랑스 출신인 사람들은 어쩐지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이미지가 매우 강하다. 전세계적으로 흥행한 영화 《타이타닉》에서도 여주인공 로즈가 남주인공 잭의 스케치북을 보다가 여자의 누드 그림들을 발견하자 잭이 "프랑스 여자들을 그린 거에요."라고 둘러대는 장면이 나온다. 프랑스 남성의 경우는 문란한 바람둥이 같은 이미지로 많이 나온다.

프랑스 왕실에서도 후사를 많이 볼 수 있어 왕들에게 후궁, 정부(情婦)를 장려하기도 했고, 또 여러 여자를 거느려야 남자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 외에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고 소심했던 루이 16세는 "남자답지 못하다"는 이미지가 있었다. 게다가 우리가 아는 프랑스의 예술인들, 예를 들어 뒤마, 사르트르 등도 어린 나이부터 성관계를 하고 여러 여자와 염문을 뿌리곤 했다.

심지어, 정치가들도 사생활 문제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그렇게 흠이 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유명한 잘나가는 정치가들의 사생활을 보면 그냥 불륜 정도는 거의 따라오는 일상일 정도다. 애초에 프랑스에서 잘 나가는 유력 언론들은 정치가들의 사생활이나 가십거리나 다루는 것이 "우리 언론이 이딴 사생활이나 다루는 것은 3류 찌라시로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다!"라고 광고하는 꼴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회의 단면을 단적으로 보여준것이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스캔들. 프랑스인들은 자기네 대통령이 불륜을 저질렀다는것에 분노한것이 아니라. 불륜을 저지를때 국산(프랑스산)오토바이가 아니라 이탈리아제를 썼다는데 분노했다. 심지어 프랑스 대통령 중에는 유부녀와 섹스하다 복상사로 사망한 경우도 있다. 이정도면 말 다한 셈.

사회 자체는 성에 대해 굉장히 개방적이지만, 그렇다고 프랑스인 개개인이 모두 섹스만 밝히는 교미둥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프랑스의 대외적 이미지가 서적으로 어떻다고 프랑스인에게 어쩌고 저쩌고 말하면 유머로 넘기는 사람은 웃으면서 넘어가겠지만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개인주의가 매우 강한 프랑스인 특성상 자기는 다르다고 화낼 것이다. 어디까지나 유머는 유머이고 스테레오 타입은 스테레오 타입이므로, 위의 국가별 농담 내용은 진지하게 생각하지 말고 말고 웃고 넘기기만 하자. 성에 폐쇄적인 국가들에서도 할 거 다하는 사람들이 있고, 반대로 개방적인 국가들에서도 안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프랑스의 성적 개방성은 서양에서도 유서 깊으면서도 특출난 경우라 다른 서양 사람들, 특히 프랑스랑 교류할 일은 예나 지금이나 너무나 많지만 문화적 차별점 또한 너무나 강한 영미권에서는 종종 곤혹스러워하는 문화충격 요소이기도 하다. 당장 상술한 여대생 성매매 문제도 자국 학계와 문화계 페미니스트 계열에서는 주로 여성 문제에 입각하여 단순하고 역겨운 성 차별적 '착취'로 보는 반면, 현지 프랑스에서는 범죄적인 외부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경우에 대해서는 '성인들끼리 그럴 수도 있다' 정도의 시각을 갖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일반적인 사회생활이나 일상 문화에서, 여전히 심지어 기혼자더라도 진짜 심각한 선만 넘지 않으면 가벼운 수준의 유사연애적 친밀감은 성인으로서 가져야 할 어느 정도 기본적인 사회적 소양으로 취급받는 경향이 있다.

예전부터 남녀칠세부동석 등의 남녀 분리 문화가 존재했고, 미투 운동이나 펜스룰 등의 굵직한 성 관련 문제를 겪어오며 성적 보수주의가 깊게 뿌리박힘으로써 연인·친구 관계가 싹트기 힘든 한국의 문화 코드에 익숙해져 있는 채 프랑스에 가면 적어도 문화적 엄숙주의에 관련하여 비슷한 구석이라도 있는 영미권에 가는 것보다도 스트레스가 심하다.[65] 과정 섞어 말하자면 배우자가 뻔히 싱글, 커플, 남녀 뒤섞인 회사 파티나 사교 모임에 간다고 해서 여기에 딴지를 걸거나 간섭하는 사람을 오히려 사회적으로 바보 만들기 때문이다. 여기선 배우자 있는 남녀라도 분위기나 무드만 맞으면 손 잡는 정도는 '볼륜'이라 생각하지도 않고 (?!), 누가봐도 빼도박도 못하게 배우자, 파트너가 외도를 해도 차라리 맞바람을 피는 것을 상식적인 대응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렇게 맞바람을 서로 피우고서까지 감정을 풀었다면 다시 언제 그랬냐는듯이 만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물론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인 만큼 극단적으론 영미권의 인셀같은 청년층의 연애권력과 관련된 사회적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웃한 다른 메이저 서양문화권이며 한국인들에겐 개방적인 사회로 더 익숙한 영미권에 비하면 확실히 프랑스인, 프랑스 사회 본인들도 여전히 바람둥이 프랑스인이란 스테레오타입을 어느정도 즐기는 성향 또한 남아 있다. 이렇게 일상에서 적당한 수준의 남녀상열지사를 일종의 문화적 코드로 즐기는 프랑스와 반대로 현대 영미권의 청년층은 오히려 갈수록 경제적 불안과 각종 사회적 위기감으로 인한 초식남화와 여기 맞물린 페미니즘 비롯한 각종 젠더 담론 등등 성문화적인 측면에서 오히려 이전 세대에 비해 더 엄숙적으로 변해가는 추세이다. 이런 성에 대한 사회적 태도와 여기에 연관된 문화적 차이는 라이시테 항목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 영미권 신좌파적 정체성 정치 vs 프랑스 고유의 제도, 사회적 이념간 충돌 같은 굵직한 사회적 담론에서부터, 좀 더 일상적인 차원에서의 상호 파견이나 유학 등의 교류에서도 나타난다. 프랑스로 유학을 갔더니 사방에서 자기 꼬시려는 것으로 오해하는 영국·미국인, 반대로 잠재적 성범죄자로 오해받거나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불안해하는 뉴욕·런던의 프랑스인에 대한 일화는 종종 들을 수 있는 사례이다.

10. 여담

  • 프랑스는 2020년대에도 담배에 대해 관대한 경향이 있어, 길거리나 대중매체에서 흡연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미국, 호주 같은 영미권은 혐연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강하게 자리잡았고, 네덜란드, 독일 같은 대륙권 북유럽 국가들은 흡연권 자체는 존중하되 철저한 흡연 구역, 흡연실 설치 등으로 격리를 하려는 반면, 프랑스나 남유럽권인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같은 나라들은 아직도 유럽연합 실내 흡연 금지 조항을 진지하게 안보고, 조금만 구석진 곳에 있는 식당, 주점 같은데 가면 여전히 손님들 들어오는 건 막지 않는데 셔터 반 정도 내리고 '우린 공식적으론 오늘 장사 접었고, 지금부턴 개인 건물이니 담배 필거임 데헷'하며 재떨이 끄집어내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차선책으로 전자담배라도 퍼트리는게

11. 관련 문서


[1] 갑자기 부상하는 프로이센이라는 공통의 적을 마주해서 동맹이 필요해졌다.[2] 볼테르 등이 편찬에 참여했다.[3] 좀 더 길게 보면, 20세기 초중반까지는 프랑스어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외교 분야에서 링구아 프랑카로 작용하였다. 그렇다고 영어가 힘이 없었던 건 아니고 상업, 상인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하는 언어로 정평이 나 있었다.[4] 나머지는 중국어, 스페인어, 아랍어, 러시아어, 그리고 당연히 영어.[5] 공용어하곤 또 다른 개념이다[6] 서고트 왕국 멸망과 정복 후 이슬람과의 최전선에서 800년 가까이 싸워 다시 기독교화 시켰다.[7] 프랑스 혁명기에도, 그 이후 러시아 혁명기에도 사상적으론 전혀 아무런 상관 없이 단순히 특정 정치인 계파나 라인을 잘못 탔다, 그냥 아무 생각 없는 가벼운 언행이 의심을 샀다, 이런식으로 목숨 날아간 사람이 엄청 많았다. 이러다보니 사상적으론 혁명에 동조해도 세상의 편지풍파에 휘말려 어쩌다보니 혁명의 반대편에서 싸우던 러시아에서 망명객이 되는것도 충분히 가능했던 일이다.[8] 프랑스 국민이 생각하는 영어를 못하는 이유는 프랑스어의 지위와 그로 인한 학습자의 태도, 영어와 프랑스어의 언어학 음성학적 차이이다. 후자보다는 전자에 더 무게를 두는 편이다.[9] 그렇다고 다짜고짜 영어로만 밀어붙이는 건 비영어권이 다 그렇듯 적절한 상황은 아니니 적어도 간단한 프랑스어로 노력하는 티는 보이는게 좋다. 외국인 관광객, 특히 동양인이 Pardon(빠ㅎ동), merci(메ㅎ시), bonjour(봉주ㅎ), excuse moi(익스큐즈 므와)정도만 올바르게 써줘도 프랑스인 입장에선 감지덕지해야할 상황이다.[10] 다만 30년 전쟁가톨릭개신교의 종교 전쟁이면서도, 합스부르크와 반대편의 전쟁이기도 하기 때문에 프랑스 가톨릭은 개신교가 아니었다. 교황 우르바노 8세도 프랑스의 참전 때 중립을 지켰을 정도다.[11] 당연하지만 계몽주의가 지향하는 모든 것을 가톨릭교회에서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신론, 반기독교 등을 거부하는 것이다.[12]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라는 뜻[13]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14]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4대 교구장[15]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5대 교구장[16] 이전까지는 북경교구의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와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가 조선 천주교회의 사목을 맡았다. 주 신부는 1801년 신유박해순교했고, 유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가 조선을 맡게 됨에 따라 중국으로 돌아갔다.[17] 마카오 유학 도중 병으로 사망했다. 친형인 최형 베드로는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하나.[18] 사제수도자를 지망하는 사람. 성소란 하느님의 부르심이라는 뜻이다. 넓은 의미에서 성소는 사제, 수도자, 결혼 생활, 독신 생활, 삶의 양식과 직업 모두를 가리킨다. 하지만 좁은 의미에서의 성소란, 사제나 수도자로서의 부르심을 의미한다.[19] 성공회영국아일랜드를 제외하고 서유럽에서 교세가 거의 없다시피 한 편이다.[20] 몬시뇰, François Ducaud-Bourget[21] 그 당시 교구에서 임명한 주임신부는 진보적이고 사회 참여적인 Pierre Bellego 신부였다. 점거와 함께 쫓겨났다.[22] 특히 알제리모로코[23] 다만 그래서인지 많은 프랑스 브랜드들도 이탈리아에서 생산하는 경우가 많다. 신발은 거의 이태리 생산이다.[24] 프랑스 악단의 잘 알려진 녹음은 앙드레 클뤼탕스, 샤를 뮌슈, 장 마르티농, 정명훈 과의 녹음 정도를 제외하면 많이 없는 편이다. 유명한 지휘자의 수도 영국과 독일, 오스트리아에 비해 적은 편인데 그나마 존재했던 프랑스 국적의 유명 지휘자들 중 앙드레 클뤼탕스는 벨기에, 안트베르펜 태생이었고 샤를 뮌슈는 출생당시 스트라스부르가 프랑스의 영토가 아니었다. 이외에도 프랑스인이었다가 미국으로 귀화한 피에르 몽퇴도 있고 미국인이었다가 프랑스로 귀화한 윌리엄 크리스티도 있다.[25] 클래식 음반사 쪽은 프랑스의 유명 음반사였던 파테가 영국 컬럼비아를 거쳐 EMI 뮤직 프랑스가 됐다. 그래서 메이저 레이블 중에서는 프랑스 음악이 탄탄한 편이지만 영국의 본사에 종속된 탓에 레퍼토리와 상관 없이 영국 본사의 기획하에 영국 악단의 녹음 위주로 돌아갔다. 다른 레이블로는 에라토가 있지만 당시 마이너 레이블이다보니 프랑스의 악단을 적극적으로 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명 지휘자들이 프랑스의 악단을 그냥 거쳐가는 단계로 생각하고 많은 녹음을 지속적으로 내지 않았고,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유명 지휘자들(장 마르티농, 앙드레 클뤼탕스 등)이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음반사들이 전성기를 맞이할 때 녹음을 많이 할 기회를 놓쳤다. 여기에 비교적 최근에 오래된 악단의 이름을 한 번 이상 바꾼 경우가 많아 대중에 각인시킬 기회가 적었고, 단원과 지휘자 사이의 마찰이 타국가보다 심하여 거장들이 꺼린 것도 있다.[26] 쇼팽이 이 케이스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오스트리아고국인 폴란드와의 외교 분쟁으로 인하여 유학 중 냉대받자, 프랑스를 경유하여 영국으로 가려다가 프랑스에서 칼크브랜너, 리스트 같은 당대의 메이저 음악가들과의 교류로 인해 안정적인 기반을 확보한 까닭에, 임종 직전까지 프랑스에 눌러 앉게 되었다. 물론 부계가 프랑스인이라서 그 자신이 프랑스를 제 2의 고국이라 여긴 이유도 있긴 하다[27] 이 때문에 프랑스 클래식 음악은 국민악파 성향이 짙은 러시아나 영국의 것과 비교해 어떻다고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28] 재즈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29] 흔히 프랑스 대중음악을 샹송(Chanson)이라고 부르나 샹송은 프랑스어로 노래 혹은 가요를 뜻한다. 그러니까 한국 노래는 샹송 코렌(Chanson coréenne)이다.[30] 퀘벡주 출신으로 원래 모어가 프랑스어이다. 영어는 상업 가수 데뷔를 전후해 제대로 익힌 것으로, 심지어 세번째 영어 앨범인 The Colour of My Love까지도 프랑스어 흔적이 강하게 느껴졌을 정도. 셀린 디옹은 기본적으로 영어 앨범 하나에 프랑스어 앨범 하나를 번갈아 출시하였으며, 영어권 투어에서도 세트리스트에 반드시 프랑스어 곡을 하나 정도는 넣을 정도로 프랑스어에 애착을 가졌다.[31] 옆나라 독일도 자국 대중가요계에 인기 가수들 중 이민자 1세대들의 이름이 많이 포진되어 있긴 하지만(이쪽은 주로 동유럽권 국가들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많다.) 프랑스만큼 그 비율이 압도적이진 않다.[32] 1980년대까지의 딕은 RTL 산하에 유럽 애니메이션 회사라는 이미지가 강했다.[33] 원제는 Grand-mère est une Sorcière.[34] 게임기 1세대 때의 그 아타리는 아니고 임포그램이 아타리로부터 상표권만 이어받은 뒤 회사명을 아타리로 고친것이다.[35] 지부는 텍사스 오스틴[36] 2018, 2022[37] 사실 월드컵까지 우승할 정도로 강국이 된건 1990년대 후반 이후부터긴 하다.[38] 외교 관계와는 별개로 아직도 양국의 국민감정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고는 하지만 이것도 사실 사람마다 다르다. 대중문화 등의 영향으로 오히려 영국에 대해 좋게 생각하는 프랑스인도 많아졌다. 이전처럼 사이가 험악하지는 않을 뿐이다. 당장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시절에는 동맹이기도 했다. 이는 과거에 프랑스와 극도로 사이가 안 좋았지만 현재는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한 독일 또한 해당되며 독일 또한 프랑스의 주요 라이벌 팀이다.[39] 주변 축구 강국인 독일이나 영국은 21세기 들어 비백인 선수를 국대에 본격 뽑기 시작했고, 스페인은 2020년대 들어서나 이게 두드러진 반면 프랑스는 98 월드컵부터도 비백인 선수들이 이미 꽤나 두각을 보였다.[40] 영국은 리그적으로는 EPL이 주도하고 있는 느낌이 있지만, 국대에선 으레 네임밸류에 비해 못한 성적을 내고 있다. 그나마 2020년대 기준으론 이전 국대보단 성적이 나은 편. 오죽하면 2020년대 영국 국대 주장을 맡고 있는 해리 케인이 자국 대표팀 우승 못한다고 뭐라하는 선배들에게 '비판은 좋은데 그래도 선배들보단 우리가 전반적인 성적은 낫잖아요'라는 웃픈 말을 할 정도.[41] 오히려 영국인들은 정작 유럽 및 국제 축구 대회에 대해 시큰둥했다. 월드컵조차도 그랬고, 유로와 챔피언스 리그조차 뭐하러 나가냐고 무시했던 역사가 있다. 그래서 영국은 축구 종주국 치고 국제 대회 성적이 빈약한 편이다.[42] 특히 1966년 월드컵에서 우승 1회 한 이후로는 결승에도 못 올라가고 있는(다만 유로 결승은 2020년대 들어 올라가고 있다. 우승을 못해서 그렇지..) 앙숙 잉글랜드는 확실히 누르고 있다.[43] 파비앙 또한 김용만의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프랑스는 축구의 나라라기보단 럭비의 나라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에서 프랑스 백인들의 축구와 럭비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다.[44]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2020년대에 들어선 여전히 국가대표팀과 프로 리그에 백인이 과반이긴 하나 유색인종, 특히 흑인의 비율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유색인종이 과반이 될 날도 머지 않았다.[45] 참고로 프랑스 축구 대표팀은 흑인들이 백인보다 더 많은 경우도 많긴 하다. 다만 이 흑인들은 21세기 들어 아프리카에서 난민같은 케이스로 건너온 흑인들이 아니라 과들루프, 마르티니크 등 애초에 프랑스령 해외 영토 출신인 선천적 프랑스 국적자들이 많다. 티에리 앙리 등이 대표적. 괜히 인종차별 얘기가 나오는게 아니다. 백인도 지네딘 지단 같은 경우 프랑스 태생이긴 하지만, 알제리 혈통이라 아랍계 백인이랄 수 있다. 앙투안 그리즈만도 이민계 자손. 반면 2010년대 기준 아직 럭비는 대부분이 프랑스 태생 백인이다.[46] 4위, 프랑스를 66-60으로 이기고 3위를 차지한 게 바로 필리핀으로 이 3위는 아시아 역대 최고 성적이다.[47] 당시에는 2그룹에 속해 한국, 일본 등과 겨뤄서 전승을 거뒀고 결선라운드에서는 1그룹 국가들을 모조리 제치고 우승했다.[48] 다만 결선라운드에서 러시아한테 져 최종적으로 준우승을 했다.[49] 한국이나 일본에서 생활 체육으로 어느 정도 자리잡은 검도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될 듯하다.[50] 펜싱과 같이 종주국의 언어로 경기가 진행되며, 경기 용어들이 모두 종주국의 언어에서 유래한 또다른 올림픽 종목으로는 한국의 태권도, 일본의 유도 등이 있다.[51] 쥘 비앙키는 2014년 망해가던 마러시아 F1 팀에서 활약하며 마러시아와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희망으로 불렸지만 2014년 일본 그랑프리에서의 사고로 2015년 사망하였고, 이는 F1의 안전장치 헤일로가 생기는데 큰 역할을 하며 아직도 쥘 비앙키를 그리워하는 F1 팬들도 있을정도다.[52] 오토바이째로 백플립을 하면서 뒤돌아 앉는 기술[53] 현역 CS:GO 프랑스 선수들중 대부분이 소스출신이다. Happy, apex, Rpk, shox, SmithZz, NBK, kennyS, xms가 대표적인 소스 출신.[54] 물론 1.6에서도 스타 플레이어를 배출한 적이 있다. SIXER는 1.6때 전성기 시절 한 끝발 날린 스타플레이어이며 살아있는 레전드 중 하나인 프랑스 선수이고 kioShiMa도 1.6 출신이다.[55] 현재 두 팀 모두 유럽 다국적 팀으로 전환했다.[56] 1900년도 제2회 파리 대회[57] 제1회 샤모니 대회[58] 알다시피 로제타석에 써있는 고대 이집트어를 해석한 게 프랑스인 샹폴리옹이고 프랑스는 이집트 연구에 프랑스만큼 기여한 나라는 없다고 뽐내고 있다. 그런데 이집트가 안 돌려주면 프랑스 학자는 이집트 입국 불허한다는 강압을 벌이자 백기를 들 수밖에.[59] 여기는 프랑스, 스웨덴보다는 보수적이라 구 서독 지역을 중심으로 워킹맘에 대한 인식이 한국과 비슷하게 부정적인 면이 있다.[60] 이탈리아스페인 같은 남유럽은 한국인들 생각보다 보수적인 편이다. 아직 가톨릭의 영향력이 상당히 강력하기 때문에 결혼 후의 불륜 등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한다. 미국 또한 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매우 보수적인 편이다. 오죽하면 유럽산 청불영화를 찾아보는 미국인들도 있다.[61] 프랑스의 영화감독 줄리 델피가 감독 겸 여자주연을 맡은 2007년작 영화 <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에서도 비교적 성에 보수적인 미국남자 주인공이 우연히 여자친구를 따라 프랑스에 오면서 그녀의 문란한(?) 성적 과거를 듣고 기겁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심지어 여친의 전남친이라는 놈팽이들도 죄다 주인공 앞에서 자랑스레 나 지금 네 여친 어렸을 적 처녀 따먹었다! 내가 그녀의 눈을 뜨게 해줬다! 수준의 저속한 섹드립을 남발하고, 여주의 부모님은 68혁명을 겪은 세대라 성에 관해 자유개방주의를 고수하다보니 젊은 시절 서로 성에 관해 터치안했다는 얘기를 듣고 남주가 듣고 콩심은데 콩난다고 어이없어 한다. 다만 이 영화가 무조건 문란한 프랑스인이라 희화화한 것은 아니고, 여주는 정상인에 상식인이며 여주인공 주변의 인물들이 유독 이상한 것이다. 심지어 상술한 전남친 하나는 주인공 커플이 잠시 소원해지자 기다렸다는듯이 여주와 한번 해보려다가 정신을 차린 여주에게 바로 제지당한다. 그리고 극중 둘은 이미 나이를 먹을대로 먹은 커플이라 서로 과거에 다른 상대랑 여러번 연애를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여주인공도 자신을 문란한 여자로 모는 미국남친에게 너도 과거에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녔고 내가 나이가 몇인데 처녀이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느냐, 너야말로 쪼잔하게 굴지 마라며 항의한다.[62] Michel Sardou - 6 Milliards 900 Millions 980 Mille[63]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등[64] 이 특정 문단은 현재 전체적으로 증거하는 자료가 없다.[65] 특히 90년대 이후에 태어난 젊은 세대의 한국인은 영미권에 가면 성문화보단 차라리 유머감각에 적응이 더 힘들 지경이고, 애초에 미국은 생각보다 매우 보수적인 나라라 특유의 마초이즘/영웅주의 문화에만 적응하면 끼리끼리 잘 어울릴수 있다.[66] 이 탓에 주님승천대축일이 6월 3일이면 5월의 공휴일 2개가 모두 토요일이 되고 6월 2일이면 5월의 공휴일 2개가 모두 일요일인 탓에 5월에도 휴일이 없다.[67] 비슷한 이치로 한국은 성탄절이 토요일이면 추석 이후 설날까지, 성탄절이 일요일이면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개천절부터 다음 설날까지 평일인 공휴일이 없다. 또한 성탄절이 금/토요일이면 어린이날이나 부처님오신날부터 추석까지 평일인 공휴일이 하나도 없다.[68] 쿠로후네 사건대정봉환 이후 메이지 유신이 실행되면서 프랑스를 포함해 여러 유럽 열강들의 문화를 수용해가며 근대화를 추진했고, 탈아입구의 영향으로 유럽의 문화를 추종하는 기조 또한 퍼져나갔기에 그에 대한 기반은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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