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The Greatest Frenchman | ||||||||
※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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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베르 베코 | 조제 보베 | 장 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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뤽 베송 | 티노 로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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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지 레기아니 | 프랑수아즈 돌토 |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 |
<colbgcolor=#000><colcolor=#fff> 본명 | 오스카클로드 모네 Oscar-Claude Monet |
출생 | 1840년 11월 14일 |
7월 왕정 파리 | |
사망 | 1926년 12월 5일 (향년 86세) |
프랑스 제3공화국 지베르니 | |
최종 국적 | 프랑스 제3공화국 |
직업 | 화가 |
화풍 | 인상파 |
자녀 | 장 모네 미셸 모네 |
종교 | 가톨릭 → 무종교(무신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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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인상주의’의 창시자이며,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화가로 손꼽히는 인물 중 한 명이다. 대상을 뚜렷하고 명확하게 표현하는 전통 회화 기법을 거부하고, 자연의 빛과 색채를 중시하며 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포착하는 데 중점을 두어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대상의 색과 형태를 포착하여 그리는 인상주의로 당대 미술계의 새로운 움직임을 일으켰다.
인상주의라는 말 자체가 클로드 모네의 그림 중 매우 중요한, <인상, 해돋이>라는 작품에서 시작이 된다. 이 그림은 1874년 모네,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에드가 드가를 포함한 일군의 화가들이 개최했던 '앵데팡당 전(展) ( Salon des Artistes Indépendants )' 에 처음으로 선보였는데, 이 전시에 대한 비평문에서 비평가 루이 르루아는 <인상, 해돋이>가 스케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했으며, [1] 부정적인 의미에서 이 전시회에 '인상주의자의 전시회'라는 별칭을 붙였다. 하지만 이들은 인상주의자라는 단어를 자랑스럽게 받아들였다.
“카탈로그에 실릴 제목을 나에게 물어보는데. 이 그림을 르아브르의 풍경이라고 정직하게 말할 수 없어서 그냥 인상이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다른 인상파 화가들조차 빛의 변화를 포착하는 데에만 집중해서 대상 자체의 형태를 파악하기 어렵고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인상주의의 한계를 자각하고 화풍을 바꿀 때까지도 그만은 끝까지 인상주의 화풍을 고수했다. 인상주의를 시작하고 인상주의를 끝까지 지킨, 실로 인상파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인물. 오늘날 인상파라고 말할 때 떠올리는 작품의 대부분이 바로 그의 작품이다.
2. 생애
1840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소년시절을 영국 해협의 항구 도시인 르아브르에서 보냈으며, 그곳에서 화가 외젠 부댕을 만나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며 자연광 묘사에 대한 기초적인 화법을 배웠다. 또한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의 풍경화가 요한 바르톨드 용킨트를 알게 되었고, 그로부터 공기 중의 빛을 포착해내는 기법을 익혔다. 훗날 모네는 용킨트를 가리켜 자신이 예술가의 눈을 키우도록 가르침을 베풀어준 진정한 거장이라 말하기도 했다.모네는 1859년 19세 때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쉬스에서 카미유 피사로와 만났다. 1860년 군대에 징집되어 1년간 알제리 주둔지에서 복무했으며, 1862년 장티푸스에 걸려 전역했다. 그는 파리로 돌아와 샤를 글레르 밑에서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알프레드 시슬레, 프레드릭 바지유 등과 어울리며 공부했다. 이들의 우정은 훗날 새로운 미술의 움직임을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1867년 그의 뮤즈이며 애인이었던 카미유가 그의 첫 아들 장을 낳았다. 1869년 르누아르와 함께 파리에서 가까운 센 강변의 라 그루니에르에서 함께 작업했다. 1870년 모네는 카미유와 결혼했으며, 이어 발발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했다. 그는 런던에서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존 컨스터블 등의 영국 화가의 작품을 접했다. 이것은 명쾌한 색채표현이란 점에서 커다란 기술적 향상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1871년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 집을 마련했다. 1873년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으로 이뤄진 무명 예술가 협회를 조직했는데, 이것이 훗날 인상주의의 모태가 되었다. 1874년 첫 번째 그룹전을 열어 '인상, 해돋이'를 출품했다. 이 전시를 관람한 비평가 루이 르로이는 모네의 '인상, 해돋이'에 대한 조롱의 의미를 담아 처음으로 인상주의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리고 인상파란 이름이 모네를 중심으로 한 화가집단에 붙여졌다. 모네는 이후 1886년까지 모두 8회 동안 이어진 인상파 전시에서 5회에 걸쳐 여러 작품을 출품하여 인상파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굳혔다.
모네는 1876년 미술품 수집가인 에르네스트 오셰데와 그의 아내 앨리스를 만나 작품을 의뢰받았다. 2년 뒤, 후원자인 오셰데가 경기 불황으로 파산하고 벨기에로 잠적해 버리자,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그의 아내 앨리스는 여섯 자녀를 데리고 모네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이듬해 모네의 아내가 사망했고, 앨리스와 모네는 연인이 되었다. 1883년 모네는 노르망디 지방의 지베르니(Giverny)로 이사해 사망할 때까지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으며, 두 사람은 1892년 에르네스트가 사망하자 재혼했다.
모네는 1890년 이후부터 하나의 주제로 여러 장의 그림을 그리는 연작을 많이 제작했다. 대표작으로 '수련'이 있으며 이 시기에 그린 작품은 대부분 지베르니의 정원을 소재로 한 것이다. 모네는 젊은 시절 지베르니의 풍경에 감탄하면서 "내가 이 다음에 큰 돈을 벌면 지베르니에 집을 얻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늙어서도 그 풍경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았는지 모네는 정원사를 여섯 명이나 두었는데도 자신 또한 정원 관리에 참여했다.
젊은 시절부터 바라왔던 곳에 집을 얻고 부유한 생활을 하던 모네였지만 그에게 크나큰 시련들이 닥친다. 가난했던 시절 함께 배고픔을 견뎌냈던 친구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기 시작하고 모네 본인도 백내장에 걸려 다시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모네는 백내장에 걸려도 자신은 그림을 그려야겠다며 얼마 남지 않은 생명력을 불태웠지만 점점 시력이 악화되어 간 탓에 말년에는 회화의 상태가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실제로 백내장이 악화된 1910년대 후반~임종 직전의 수련 그림은 매직아이를 보는 수준으로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그저 수많은 선의 모임으로만 보인다.
모네는 거의 실명해가는 상태에서도 빛에 따라 달라지는 정원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죽기 1년 전인 1925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죽어가는 노화가의 마지막 투혼인 셈이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그린 그의 말기 회화가 추상화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2]
모네 역시 당대 프랑스 화단의 유행을 따라서 상당한 수준의 자포네스크 취향을 보여 주었다. 위 그림은 첫 번째 아내 카미유[3]에게 기모노를 입히고[4] 그린 초상화로, 심지어 배경조차도 일본 그림이 그려진 부채로 도배했다. 지베르니의 자택 정원도 당시 유행했던 일본식 정원처럼 꾸미기 위해 일본식 다리를 세워 놓아서, 지베르니의 정원을 그린 작품에서 이 다리를 자주 볼 수 있다. 일본인에게도 상당한 호감을 보여 일본 귀족들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
3. 그에 대한 말들
클로드 모네는 인상주의 회화의 창시자, 지도자, 확고한 지지자였던 프랑스의 화가입니다.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인기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명성을 유지했습니다.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4. 화풍
“대상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바라보는 대상의 이름을 잊어야 한다.”
클로드 모네가 르아브르에서 보낸 유년 시절은 그가 훗날 작품을 창작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곳에서 노르망디 바닷가와 자연을 탐험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곳에서 급격히 변화하는 날씨가 자연의 모습에 미치는 효과를 관찰할 수 있었다.
모네에게 '겉모습으로의 현실', '빛이 보여주는 세상'은 매 순간 변화하여 생성되는 과정에 있었고, 이를 포착하려는 노력은 새로운 기법을 낳았다. 기존의 살롱 양식으로는 이 변화와 생명력을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모네는 새로운 기법, 즉 '인상파 양식'을 시도한다. 빛의 변화를 포착하려는 붓은 속도를 내야 했고, 그 결과로 그림에는 짧게 끊어지는 자유분방하고 거친 붓자국이 가득했다.
색 표현 역시 이전의 양식과는 달랐다. 모네에게 있어서 물체의 고유색이라는 것은, 기억과 관습이 만든 뇌의 편견일 뿐이었다. 그의 '눈'이 바라본 대상의 색채는 빛과 대기, 주변의 색에 영향을 받아 매 순간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회화는 한 대상을 다른 대상과 명확히 구분했으나, 모네는 대상을 구별하지 않고 윤곽선이 빛과 대기에 의해 이어져 있는 것으로 표현했다.
이런 과정에서, 전통적 의미의 선원근법, 구도, 채색, 드로잉 등의 회화 기법은 무의미해졌다. 이로써 모네는 회화에서 자유의 영역을 넓혔을 뿐 아니라, 다른 예술가와 대중들에게 대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가르쳐 주었다.
시간과 계절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에 매료되었던 모네는 '건초더미'(1888~1894), '포플러'(1892), '루앙 대성당'(1892~1894), '수련'(1912~1914)과 같은 연작 시리즈에서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다. 이 작품들은 똑같은 풍경이 시간의 변화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는 모습을 각기 다른 그림들로 그린 것이다. 명암이 마치 고체처럼 만질 수 있는 실체를 가진 것으로 보여, 회화 역사상 이정표가 되는 작품들이다. 모네의 후기 활동은 지베르니에 있는 수련 연못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작품들은 초대형의 벽화와 같은 캔버스 형식을 취했다. 식물들과 물이 색의 추상적인 환영 속에 녹아있고, 물감을 십자형으로 두껍게 칠하여 독특한 질감을 창조했다.
5. 기타
이름 때문에 에두아르 마네와 헷갈려 하는 사람이 많다. 알파벳 철자도 모네(Monet)와 마네(Manet)로 한 글자 차이. 사실 모네 생전에도 이름이 유사한 데다가 동시대에 같은 분야에서 활동하던 모네와 마네를 혼동하는 사람이 많았다. 마네는 처음에는 자신보다 한참 후배인 모네와 혼동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모네를 만나고 가까워진 이후로는 평생 동안 그와 교류했다. 위의 <풑밭위의 점심식사>도 마네의 동명의 그림을 패러디 한 것.일상을 밝고 아름다운 색채로 그려내 행복을 그린 화가로 불리는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와도 평생의 절친이었다. 비록 르누아르가 후기에는 인상파 화풍을 버리기는 하지만, 인상파가 인정받지 못하고 가난에 허덕이던 어려운 시절을 동고동락한 좋은 친구 사이였다.
이런 인상파 화가들의 어렵던 시절을 묘사한 3부작 영드 '빛을 그린 사람들 (The Impressionists)'도 있다. 2006년 BBC에서 제작된 드라마로, 마네, 모네, 드가, 세잔, 르누아르 등 주요 인상파 화가들의 젊은 시절을 다루고 있다.
모네의 대표작인 연작인 '수련'은 250여점 정도로 워낙 많이 그려져서 외국의 웬만한 네임드 미술관은 하나씩 나눠 갖고 있다. 상설 전시로만 여덟 점을 걸어놓고 있는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이 독보적이고
수련 연작이 워낙 많이 그려진 작품이라 흔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런 네임드 미술관들이 소장하고 있는 물건들은 모네가 혼신의 힘을 들여 그린 벽화급의 물건들로 상설전시를 위해 아예 방을 따로 만들어서 걸어놓고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물건들이다.[6] 물론 상술했듯이 선명한 수련부터 매직아이 수련까지 있어서 수련만 보고 다녀도 충분하다.
2022년 10월 23일, 독일 포츠담의 바르베리니 미술관에 소장된 모네의 작품 건초더미가 마지막 세대라는 독일 환경단체가 으깬 감자를 던지면서 시위를 해 테러를 당했다. 또, 2024년 기후운동단체 '식량반격'(Riposte Alimentaire) 소속 활동가가 '양귀비 들판'에 훼손하였다.#
2022~23년에 '모네인사이드'라는 이름의 미디어아트 전시가 있었다. 모네의 친구이자 아트 딜러(art dealer)였던 폴 뒤랑 뤼엘이 내레이션을 맡았다.
6. 작품목록
그의 대표작이자 인상파의 이름의 기원이 된 그림인 <인상, 해돋이>[7] |
<풀밭위의 점심식사> |
<푸르빌의 절벽 산책로> 현재 시카고 미술관에 있으며 1882년 푸르빌에 장기 체류하면서 그린 그림이다. [8] |
<지베르니 화가의 정원> 모네 자신이 평소 가꾸던 정원을 배경으로 그린 1900년 작품이다. 모네가 가꾸던 정원은 현재도 남아 관리되고 있다. |
7. 창작물에서
모네는 우키요에를 수집하는 등 일본을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주로 일본 창작물에서 등장한다.7.1. 핑크레이디 클래식 에서의 모네
절친 르누아르와 더불어 67화에서 등장한다. 자기네가 새로이 창조한 인상파 화풍을 두고서 혁명이라고 자화자찬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당장 끼니를 때울 밥도 없어서 아사 직전에 처하다가 때마침 지나가던 한겨울, 윤현석에게 음식을 얻어 먹는다.7.2.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에서의 모네
맨 오른쪽의 인물. 졸라맨을 닮았다.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애니메이션 4기 1화에서 르누아르와 세잔의 그림시합에 카미유 피사로, 알프레드 시슬레, 에드가 드가와 함께 심사위원으로 출연한다.
알프레드 시슬레와 마찬가지로 비중은 적다. 심지어 실타래 혹은 회전초로 나온 에드가 드가보다도 존재감이 없다.
작위적인 연출인지 모르지만 애니메이션에서 오류가 있다. 맨 처음 인물 소개를 할 때 일장기를 든 인물이 모네라고 나오지만 이후 심사위원으로 나왔을 땐 피사로가 졸라맨을 닮은 인물을 모네로 소개한다.
7.3. 음악 판타지 꿈에서의 모네
2:26부터
프레데리크 쇼팽의 녹턴 두 번째 파트에서 모네 작품들이 나오는데 하루를 보여주며 유화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 준다.
[1] '날로 먹는 장인 정신이 참으로 인상 깊다'고 평했다.[2] 정확히 말하면 1923년에 수술을 받아 기적적으로 백내장 제거에 성공했다. 다만 어딜 어떻게 깎은 건지 수술 이후부터는 자외선을 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백내장 환자는 색채를 볼 때 적색을 더 강하게 느끼는데, 수술 이후 모네가 일부 수련 그림들을 덧칠하면서 유독 파란색을 강조한 경우가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3] 모네의 영혼의 뮤즈. 모네와는 화가와 직업 모델로 만난 사이이며, 서로 빠르게 사랑에 빠졌다. 모네 집안에서는 천한 직업 모델과의 결혼을 반대했지만, 모네는 기어코 카미유와 결혼하고 그녀를 죽을 때까지 사랑했다. 모네와 어려운 시절을 함께 이겨내었으나 몸이 약해 병에 걸려 1879년 둘째를 출산하면서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 그림처럼 카미유를 모델로 한 그림을 자주 그렸던 모네는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도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클로드는 평생 카미유를 사랑하여 그녀의 그림을 많이 그렸지만 카미유를 찍은 사진은 한 장밖에 남아 있지 않다. 모네의 두 번째 아내인 알리스 오슈데가 카미유를 질투하여 그녀의 사진을 불태워버렸기 때문이다.[4] 이는 모네가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시기 당시 사람들의 취향인 화려한 색감을 따라 그림이 팔리게끔 한 것으로, 다소 억지로 카미유에게 기모노를 입힌 이 일을 두고두고 미안해했다.[5] 수련 뿐 아니라 많은 수의 모네 작품이 초기부터 후기까지 고루 있다.[6] MoMA에서 전시중인 그림의 사이즈는 가로 12m 세로 2m의 압도적인 크기로 감히 모마의 하일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모네가 수련 연작을 기증하기로 한 뒤 이를 전시하기 위해 맞춤 설계를 한 오랑주리는 말 할 것도 없고...[7] 르아브르 항구의 풍경이 모티브다. 참고로 모네는 이 그림을 무려 3시간만에 완성했다.[8] 푸르빌의 절벽 산책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