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The Greatest Frenchman | ||||||||
※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 |||||||||
TOP 1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콜뤼슈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11위~100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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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가방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엠마뉘엘 수녀 | 장 물랭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볼테르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크리스찬 카브롤 | 쥘 페리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미셸 사르두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하룬 타지프 | 에리크 타바를리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다비드 두이예 | 장 자크 골드만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달리다 | 레옹 지트론 | 니콜라스 윌로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파트리크 푸아브르 다르보르 | 프랑시스 카브렐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르노 | 베르나르 쿠슈네르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미셸 세로 | 미셸 드러커 | 라이무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레이먼드 풀리도르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질베르 베코 | 조제 보베 | 장 페라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뤽 베송 | 티노 로시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세르지 레기아니 | 프랑수아즈 돌토 |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
<colbgcolor=#002395><colcolor=#fff> 빅토르 위고 Victor Hugo | |||
본명 | 빅토르마리 위고 Victor-Marie Hugo | ||
출생 | 1802년 2월 26일 | ||
프랑스 제1공화국 브장송 | |||
사망 | 1885년 5월 22일 (향년 83세) | ||
프랑스 제3공화국 파리 | |||
묘역 | 프랑스 파리 팡테옹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소설가, 극작가, 시인, 정치인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2395><colcolor=#fff> 팡테옹 안장일 | 1885년 6월 1일 | |
사조 | 낭만주의 | ||
학력 | 리세 루이르그랑 | ||
활동 | 1829년 - 1883년 | ||
부모 | 아버지 조제프 레오폴 시지스베르 위고 (1773-1828) | ||
어머니 소피 트레뷔셰 (1772-1821) | |||
배우자 | 아델 푸셰 (1803 - 1868; 사별) | ||
자녀 | 아들 레오폴드 빅토르 위고 (1823) 딸 레오폴딘 위고 (1824-1843) 아들 샤를 위고 (1826-1871) 아들 프랑수아 빅토르 위고 (1828-1873) 딸 아델 위고 (1830-191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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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작가, 정치인, 시인. 프랑스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이자 서양 문학사의 가장 영향력있는 작가 중 한 명이다.2. 생애
2.1. 어린 시절
1802년 2월 26일 프랑스 제1공화국 브장송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나폴레옹 휘하의 군인이었고, 어머니는 왕당파 집안의 여인이었다.[1] 10살 때 코르디에 기숙학교에 입학한 이래, 독서와 시 창작에 매료되었던 위고는 이듬해 그의 일기에 “나는 샤토브리앙[2]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라고 기록해 두면서, 불과 11살의 나이에 프랑스의 문호가 될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것이다.2.2. 초기, 중기
위고는 20살이 되던 1822년, 아내 아델과 결혼한 직후 그의 첫 시집인 《오드와 잡영집(Odes et Poésies Diverses, 1822》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문필활동을 전개하여 시집 《오드와 발라드집(Odes et Ballades, 1826)》, 《동방시집(Les Orientales, 1829)》, 소설 《아이슬란드의 한(Han d'Islande, 1823)》, 《뷔그자르갈(Bug-Jargal, 1826)》, 《사형수 최후의 날(Le Dernier jour d'un condamné, 1829)》 등 왕당파적·가톨릭적인 색채가 농후한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이후, 여러 잡지에 문학평론을 싣기도 하고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간의 문학 논쟁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낭만주의 문학 이념의 초석을 다졌다.마침내 위고는 희곡 《크롬웰》의 서문 발표를 통해 고전주의 문학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나서면서 낭만주의 작가들의 수령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또 크롬웰은 고전주의 연극의 신조였던 이른바 ‘삼일치의 법칙’(행위, 시간, 장소의 통일)을 과감히 깨트린 작품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당대에는 워낙 파격적이어서 상연이 불가능했지만, 그 희곡의 ‘서문’이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면서 위고는 낭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이후 그는 시집 《동방시집 (1829)》을 간행하고 문단의 총아가 되었다. 희곡 《에르나니 (1830)》는 객석에서 고전주의자와 낭만주의자가 저마다 야유와 박수를 보내는 대소동의 와중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고,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1831)》은 소설가로서 위고의 명성을 확고히 해 주었다.
1832년, 위고는 자신이 쓴 희곡 《뤼크레스 보르지아》가 극장에서 초연되었을 때 배우 쥘리에트 드루에라는 여배우를 처음 만났으며 이후 반세기 동안 지속된 두 사람의 불륜 관계가 시작되었다. 위고의 생애를 이야기하려면 그 주위의 수많은 여인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녀를 넷이나 낳은 본처 아델은 남편의 외도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자신도 비평가 생트 뵈브와 외도 행각을 벌였지만, 그래도 40년 넘게 꿋꿋이 가정을 지켰다.[3]
수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린 위고의 애정 행각은 말년까지도 계속되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가까웠던 애인은 레 미제라블의 원고를 정서하고 망명지까지 따라가는 등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쥘리에트였다. 1841년에 위고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지만, 1843년 가을에 제일 아끼던 딸 레오폴딘이 익사하는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우울증에 시달린 위고는 작품 활동을 한동안 중단했다(문학사가 랑송은 만약 위고가 이날 이후로 완전 침묵했다 하더라도 문학사에서는 이미 확고한 위치를 마련했을 것이라 단언한다). 대신 정치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된 위고는 왕실과의 친분으로 1845년에는 자작 작위를 받지만, 그해 여름에 여배우 레오니 당트와의 간통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는 굴욕을 맛본다. 이후 그는 대외 활동을 중단하고 칩거한 채 필생의 대작 레 미제라블의 집필에 몰두한다.
2.3. 중후반기
1848년에 2월 혁명이 일어나자 위고는 보궐 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848년 6월에 제2공화국의 중도노선에 반발한 급진파와 노동자가 봉기했을때에는 의회 대표로서 바리케이드를 친 봉기군에게 파견되어 항복을 권고하는 역할을 맡았다. 투항을 거부하자 국민방위군을 진두지휘하면서 봉기를 진압하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 위고는 이를 안타깝지만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여겼으나, 이 경험은 훗날 그가 레미제라블을 집필할때 큰 역할을 하게 된다.대통령 선거에서 위고는 루이 나폴레옹을 지지했지만, 곧이어 반동 정치가 시작되자 격렬하게 정부를 비판한다. 1851년 12월에 루이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제정을 선언하자, 반정부 인사로 낙인 찍힌 위고는 벨기에로 피신한다.
망명 중에도 프랑스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계속 발표하던 위고는 결국 벨기에에서 추방되어 프랑스 서부 해안에서 가까운 영국령 채널 제도의 건지 섬으로 향한다. 부인과 자녀는 물론이고 애인 쥘리에트까지 위고를 따라 함께 망명길에 오른다. 1859년에 루이 나폴레옹은 사면령을 내렸지만, 위고는 이를 거부하고 여전히 망명지에 남아 있었다. 고독한 망명 생활 중에서 창작열은 더욱 뜨거워졌고, 위고의 시집 가운데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징벌(Les Châtiments, 1853)》, 《명상시집(Les Contemplations, 1856)》, 《세기의 전설(La Légende des siècles, 1859)》(제1집), 소설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 1862)》, 《바다의 노동자(Les Travailleurs de la Mer, 1866)》등의 대표작이 연이어 간행된다.
1870년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루이 나폴레옹의 제2제정이 몰락하자, 위고는 9월 5일 밤에 기차를 타고 파리에 도착해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는다. 국회의원에도 당선되었지만 복마전 같은 현실에 실망한 나머지 금세 의원직을 포기한다. 그해 3월 13일에 위고의 큰아들이 갑작스레 사망하고, 불과 일주일 뒤에 파리에서는 코뮌이 수립되었다가 두어 달 만에 분쇄된다. 벨기에에 머물던 위고는 비록 코뮌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그 가담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그로 인해 위고는 졸지에 코뮌 동조자로 오해 받아 벨기에에서 추방당했고, 이후 파리로 돌아와서도 냉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실망한 위고는 가족과 함께 예전의 망명지인 건지 섬으로 떠나, 그곳에서 1년간 머물며 말년의 대표작인 《93년(Quatrevingt-treize, 1874)》을 집필한다. 1876년에는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지만, 1878년에 뇌출혈을 일으킴으로써 결국 정계에서 은퇴했다.
2.4. 말년
1881년 2월 26일, 위고의 80세 생일은 임시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군중이 그의 집을 찾아와 박수갈채를 보냈다. 생애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한 위고는 8월 31일에 유언장을 썼다.“신과 영혼, 책임감. 이 세 가지 사상만 있으면 충분하다.
적어도 내겐 충분했다. 그것이 진정한 종교이다. 나는 그 속에서 살아왔고 그 속에서 죽을 것이다. 진리와 광명, 정의, 양심, 그것이 바로 신이다. 가난한 사람들 앞으로 4만 프랑의 돈을 남긴다. 극빈자들의 관 만드는 재료를 사는 데 쓰이길 바란다.
내 육신의 눈은 감길 것이나 영혼의 눈은 언제까지나 열려 있을 것이다. 교회의 기도를 거부한다. 바라는 것은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단 한 사람의 기도이다.”
2년 뒤에 그는 위의 유언장을 더욱 짧게 고쳐 썼다. 다만, 유언장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남기는 금액이 4만 프랑이라는 이야기와 5만 프랑이라는 이야기가 있어 확실하지 않다.적어도 내겐 충분했다. 그것이 진정한 종교이다. 나는 그 속에서 살아왔고 그 속에서 죽을 것이다. 진리와 광명, 정의, 양심, 그것이 바로 신이다. 가난한 사람들 앞으로 4만 프랑의 돈을 남긴다. 극빈자들의 관 만드는 재료를 사는 데 쓰이길 바란다.
내 육신의 눈은 감길 것이나 영혼의 눈은 언제까지나 열려 있을 것이다. 교회의 기도를 거부한다. 바라는 것은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단 한 사람의 기도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5만 프랑을 전한다. 그들의 관 만드는 값으로 사용되길 바란다. 교회의 추도식은 거부한다. 영혼으로부터의 기도를 요구한다. 신을 믿는다.”
1885년 5월 18일에 위고는 폐렴으로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22일에 파리 시에서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검은 빛이 보인다.”였다. 그날 밤에 파리에는 천둥과 우박을 동반한 비바람이 몰아쳤다. 6월 1일에 장례식이 국장으로 치러졌고, 200만 명의 인파가 뒤를 따르는 가운데 그의 유해는 팡테옹에 안장되었다. 랑송은 “그의 시신은 밤새도록 횃불에 둘러싸여서 개선문에 안치되었고, 파리의 온 시민이 판테온까지 관의 뒤를 따랐다."고 평했다.
위고의 장례식, 1885년 6월 1일 | 팡테옹 내부에 있는 위고의 무덤 |
3. 대표작
4. 그에 대한 말들
위고는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디킨스처럼 보편성을 추구한 작가들 가운데 마지막에 속한다. 나는 20세기에 위고와 견줄 만한 작가가 없다고 생각하며, 21세기에도 그런 작가가 나올지 의심스럽다.
― 해럴드 블룸#
― 해럴드 블룸#
위고, 낙관주의의 화신, 신에 의해 가치있는 유일한 대화자, 파리 코뮌의 용기 있는 변호자로 인식된, 냉정한 시인...이 가난한 사람들의 성가대의 선창자, 노동계급이 읽고 있는 유일한 사람, ... 이 놀라운 남자: 반신부 반 무정부주의자 반 세기의 논쟁의 여지가 없는 주권자.
― 장폴 사르트르#
― 장폴 사르트르#
위고의 천재성은 단순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신화를 창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레미제라블이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교육적인 작품으로 크게 성공한 것은 그의 시적이고 신화적인 인간 본성관 때문이다.
― V. S. 나이폴#
― V. S. 나이폴#
가장 유명하고 가장 대중적인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는 기상천외한 인물이었다. 장수하며 방대한 문학 작품을 써낸 작가이자 재능 넘치는 데생 화가이며, 정치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정치인이자 만족할 줄 모르는 만인의 연인으로 ‘세기의 전설’이었다.
그의 삶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그는 역사의 현장 속으로 직접 뛰어들었으며 급작스럽게 정치적 성향을 바꾸면서도, 인도주의적인 자신의 신념만큼은 충실하게 지켰다. 정치적이기보다는 이상주의적이었던 그는 ‘권력가’라기보다는 자유와 정의를 섬기는 ‘사상가’였다.
― 델핀 뒤샤르 (프랑스 역사학자)#
그의 삶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그는 역사의 현장 속으로 직접 뛰어들었으며 급작스럽게 정치적 성향을 바꾸면서도, 인도주의적인 자신의 신념만큼은 충실하게 지켰다. 정치적이기보다는 이상주의적이었던 그는 ‘권력가’라기보다는 자유와 정의를 섬기는 ‘사상가’였다.
― 델핀 뒤샤르 (프랑스 역사학자)#
60년 이상에 걸친 문예 활동 동안 그는 가사와 풍문, 서사, 철학시, 경구, 소설, 역사, 비판적 수필, 정치 연설, 장례 연설, 일기, 편지 공개와 비공개, 시와 산문의 드라마 등 예외적으로 다양한 장르로 풍성하게 글을 썼다. 위고는 가장 위대하고 유명한 프랑스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 영어 위키피디아#
― 영어 위키피디아#
5. 명언
""Right is right only when entire" (정의는 완전무결할 때에만 옳다)" [6]
"궁핍은 영혼과 정신을 낳고 불행은 위대한 인물을 낳는다."
"아무것도 누구도 모방하지 말라 사자를 따라하는 사자는 원숭이가 되어버린다."
"우주를 사람으로 축소시키고 그 사람을 다시 신으로 확대시키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미래를 창조하기에 꿈만큼 좋은 것은 없다. 오늘의 유토피아가 내일 현실이 될 수 있다. "
"죽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무서운 건 진정으로 살지 못한 것이지" - 레 미제라블
"이데올로기를 상대하기 위해 파병하는 것은 무의미하다."[7]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행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지상에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이 책 같은 종류의 책들도 무익하지만은 않으리라" - 레 미제라블
“신과 영혼, 책임감. 이 세 가지 사상만 있으면 충분하다. 적어도 내겐 충분했다. 그것이 진정한 종교이다. 나는 그 속에서 살아왔고 그 속에서 죽을 것이다. 진리와 광명, 정의, 양심, 그것이 바로 신이다. 가난한 사람들 앞으로 4만 프랑의 돈을 남긴다. 극빈자들의 관 만드는 재료를 사는 데 쓰이길 바란다. 내 육신의 눈은 감길 것이나 영혼의 눈은 언제까지나 열려 있을 것이다. 교회의 기도를 거부한다. 바라는 것은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단 한 사람의 기도이다.” -죽기 전에 쓴 유언장에서
"그 사람, 내 아버지, 내 어머니, 나, 우리는 모두 광부였다. 작업은 가혹했고 주인은 착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빵이 모자라서 석탄을 깨물고 있었다. 우리는, 그를 불쾌하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일을 조금 줄이고 임금을 조금 낫게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우리에게 주었는가? 총탄이다." - 황량한 세월 중에서
6. 기타
- 쾌활하고 호탕한 성격이었고 바람둥이로도 이름이 자자했다. 나이 80살 먹어서도 메이드들이나 여러 여성과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동갑내기 친구인 알렉상드르 뒤마나 명탐정 비독도 비슷한 면이 있었다. 위고가 사망했을 때 그를 기리기 위해서 파리의 모든 사창가가 하루동안 문을 닫았다.
- 당시 엄청나게 오래 83살까지 살다보니 막내를 빼고 모든 자식과 아내 아델과 연인 드루에마저도 먼저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는다. 드루에는 죽기 전에 편지로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을 곁에서 돌보고 싶어도 이젠 몸이 말을 안듣는군요. 먼저 가서 먼저 간 아이들과 같이 천국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라는 글을 남겨서 위고를 더 슬프게 했다.
- 자녀들이 하나같이 비극적으로 사망했는데, 큰아들은 태어난지 3달만에 죽고, 둘째이던 큰딸 레오폴딘은 19살 나이에 남편과 함께 보트에 탔다가 돌풍으로 배가 뒤집혀 익사했다. 남편은 수영을 잘했으나 레오폴딘이 임신한 몸인데다 드레스로 인해 몸이 무거워서 가라앉자 그녀를 구하려고 6차례나 잠수를 반복하다 결국 함께 익사하고 말았다. [8] 나머지 두 자녀인 샤를, 프랑수아 빅토르도 차례로 병으로 죽었기에, 위고가 죽을 당시 남은 건 막내딸인 아델 뿐이었다. 하지만 아델은 실연당한 뒤로 충격으로 23살 때 자살까지 기도했다. 겨우 목숨은 구했으나 실어증에 걸려 웃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으며 그대로 65년을 살았다. 그마저도 1872년에는 정신이상증세를 보여 43년은 정신병원에서 지내야 했다. 그래서 둘째 아들 샤를의 딸인 손녀 잔이 위고의 마지막을 돌봤고, 유언으로 잔에게 인사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 색정광이란 비난도 있던 위고지만, 자식들을 너무나도 아꼈기에 하나둘 먼저 떠나는 것에 대하여 슬픈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마지막 남은 막내딸인 아델의 마음을 풀어보고자 다른 남자도 소개하고 산책이나 온갖 용하다는 의사에게 진찰도 했으나, 35년동안 단 한마디도 딸에게 어떤 말을 들을 수 없음을 슬퍼하며 눈을 감았다고 한다. 심지어 딸은 아버지 장례식 때조차 말없이 그냥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그나마 감정은 살아 있어서인지 말 대신 글로 대화를 나누었다고. 그렇게 아버지인 위고가 죽고 나서도 말 없이 살다가 1915년 88살로 독신으로 눈을 감았다. 아델의 이야기는 이자벨 아자니 주연의 '아델 H 이야기[9] 이야기'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사랑에 집착하다 미쳐가는 이자벨 아자니의 광기 연기가 일품. 그나마 둘째 아들인 샤를 위고의 후손들이 현재까지도 살아있어 직계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 기네스북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가장 짧은 편지를 보낸 바 있다. 자신의 책에 대한 반응이 궁금하여 출판사에 편지를 보냈는데 큼직한 종이에 물음표 하나만 딸랑 적었다고 한다. 출판사는 역시 세상에서 가장 짧은 답장을 해주었는데 답장에는 느낌표 하나만 딸랑 있었다고 한다. 위고가 "?(잘 팔립니까?)"라고 보내자 출판사가 "!(네, 잘 팔립니다!)"라고 보낸 이야기로 그 책이 바로 그의 불후의 명작인 레 미제라블이다.[10] 덧붙여서, 반대로 이 세상에서 가장 긴 편지를 쓴 사람은 인도의 초대 총리인 자와할랄 네루가 딸인 인디라 간디에게 보낸 편지로 교도소 안에서 썼는데 책으로 나온 세계사 편력이 바로 이 편지다. 한국에선 3권짜리 책으로 나왔는데, 1500페이지에 달한다.
-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위고가 집필한 희곡 Le roi s'amuse(환락의 왕)를 읽고 베르디가 이를 바탕으로 오페라를 만든 것이다. 위고는 처음엔 자신의 작품으로 오페라를 제작한다는 것을 대단히 싫어했지만 정작 완성된 오페라를 감상한 뒤에는 자신의 원작보다 더 훌륭하다는 칭찬을 남겼다.
- 조커(DC 코믹스)의 모티브 중 하나인 괭플랭이 등장하는 웃는 남자도 이 사람 작품이다.
- 강령술을 통해 영혼을 불러와 대화를 나눈 후 작품에 반영했다. 링크 이 부분은 2017년 11월 5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소개되었다.
- 작가로 크게 성공해 사회적으로 명망 높고 부유한 삶을 살았음에도, 특이하게 정치적으로는 매우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자세를 취해 왔다. 현대로 비유하면 일명 '강남 좌파', '리무진 리버럴'(Limousine Liberal)에 가까운 형태이다. 게다가 그중에서도 굉장히 특이한 것이 젊은 시절에는 오히려 모계의 왕당파 신념을 이어 받은 전형적인 근왕파 보수였던 반면, 오히려 나이를 먹어 가며 결정적으로 1848년 혁명과 프랑스로 몰려든 각지의 망명객들과 교류하며 반대편으로 기울었다. 레 미제라블을 통해 억압받는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은 매우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며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황제가 될 당시 공화정을 지키겠다며 직접 무기를 들고 대항하기도 했다. 인생 늘그막에는 파리 코뮌으로 인해 당국의 추적을 받거나 유배에서 돌아온 사람들을 비호해 주고 그들의 사회 재정착을 돕는데 큰 힘을 썼다. 정계에서도 당대 프랑스 의회 내에서 루이 블랑과 함께 좌파의 거두로 활약했으며, 저 멀리 프랑스의 멕시코 침공에도 반대해 당시 멕시코 대통령이자 프랑스군에 대항한 베니토 후아레스에게 지지를 보냈다. 또 그는 여성의 인권과 평등권을 옹호했는데, 프랑스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된 것은 1944년 4월 21일 자유 프랑스 임시정부의 포고령부터라는 점을 감안하면 시대를 앞섰던 비전이다.
- 저작권을 비롯한 작가들의 권리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국제저작권법의 모태가 된 베른 협약이다.
- 한 가지 재미있는 게 후아레스가 전쟁에서 승리한 뒤 꼭두각시 황제였던 막시밀리아노 1세를 처형할 당시, 빅토르 위고는 막시밀리안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후아레스에게 요청했었다. 막시밀리안 본인은 선량한 인물이었고 나폴레옹 3세와 멕시코 보수파에게 이용당한 면이 크므로 후아레스에 대한 지지와는 별개로 위고가 구명운동을 벌인 것이 이상하지는 않다. 후아레즈 본인도 개인적으로는 막시밀리안에게 호감을 가졌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후아레스는 정치적인 이유로 막시밀리아노 1세를 처형한다.
- 한편 미국의 일에도 관여하여 노예 해방론자 존 브라운의 사형을 반대하는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비록 존 브라운은 그대로 처형당했지만.
- 베트남의 신흥종교인 까오다이교의 성인이기도 하다. 링크 아닌 게 아니라 자칭 진보 인사라는 양반들도 당대의 인종주의적 편견에 빠져 있던 시대에 위고의 휴머니즘은 식민지 피지배민들에게도 닿아서 베트남, 북아프리카 등의 프랑스 식민지인들의 지위 향상을 위해서도 노력했으며, 이들을 프랑스의 하인이 아니라 나름의 문명이 있는 문화 민족으로서 동등한 입장에서 바라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프랑스 제국이란 체제 내에서 지위 향상을 주장했다는 시대적, 입지적 한계는 벗어나지 못했지만 말이다.
- 레 미제라블에서 동양의 퇴비를 매우 극찬한 바가 있다. 장 발장이 마리우스를 업고 파리의 하수구로 달아나는 장면에서 "우리 유럽인들은 이 아까운 자원들을 그냥 갖다 버리는데, 동양의 농부들은 이것을 활용하여 농사를 지었고, 그 덕분에 아시아의 경작지들은 천지창조 때 만큼이나 젊다!"라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그후로도 수십 년 동안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동양식 퇴비를 비위생적이라고 덮어놓고 까던 것에 비하면 매우 선견지명을 가졌던 것이다.
* 2017년 6월 30일 구글 두들에 등장했다. 6월 30일은 위고가 레 미제라블을 완성한 날이다.
- 축구선수 위고 요리스의 이름은 빅토르 위고의 이름을 따서 지은 거라고 한다.
7. 외부 링크
[1] 이 배경은 훗날 레 미제라블에서 그의 자전적인 캐릭터, 마리우스 퐁메르시를 창작할 때 사용하였다.[2]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거두로 그 당시 활동하던 대부분의 문호들이 자유주의 성향이었던데 비해 그는 왕당파 보수주의자였기에 세속주의에 맞서는 가톨릭 교회를 옹호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미식가이기도 한데 그가 즐겨 먹었다는 스테이크에 그의 이름이 붙은 것이 바로 샤토브리앙 스테이크이다.[3] 위고의 성욕에 대한 집착이, 첫째 아내 아델이 친한 친구이던 평론가 생트 뵈브(1804~1869)와 바람이 나서 야반도주하자 여성에 대한 증오가 생겨서 그랬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위고는 다른 여성들과 여러 관계를 맺었으나 자식은 아델에게 얻은 자식 밖에 없었다. (첫째 아이는 태어난지 3달 만에 사망했고 갓 태어난 막내딸 아델은 아내를 그리워한 위고가 그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아델은 생트 뵈브와 사랑에 빠지자 가차없이 사랑을 찾아 떠났고 위고는 이혼을 고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델은 서류상으로는 평생 위고의 아내로 살았다. 아델은 1837년에 생트 뷔브와의 관계를 끝냈으며 이후 쥘리에트 드루에와도 일종의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4] 위고의 대표적인 희곡.[5] 오페라 리골레토의 원작이다.[6] 드라마 모범택시(드라마)의 기획의도에 인용되기도 한 명언이다.[7] 하나의 이념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는 자신의 의견을 역설한 것이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파시즘에 맞서던 많은 지식인들에 의해 차용되었다.[8] 영화 '아델 H 이야기‘에서도 아델이 언니의 익사 악몽에 시달리는 장면이 등장한다.[9] 아델이 자신이 위고의 딸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쓴 가명[10] 이 일화는 명탐정 코난에서도 패러디되었다. 선대 괴도 키드(쿠로바 토이치)와 쿠도 유사쿠가 그대로 써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