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e50040><colcolor=#ffffff> 마리세골렌 루아얄 Marie-Ségolène Royal | |
출생 | 1953년 9월 22일 ([age(1953-09-22)]세) |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다카르 우아캄지구 | |
국적 | 프랑스 |
학력 | 낭시 제 2대학교 시앙스포 국립행정학교 |
소속 정당 | |
경력 | 프랑스 국회의원 (되세브르 2구) 되세브르 주의회 의원 환경부 장관 국가교육부 장관 아동가족인권부 장관 푸아트샤랑트 주 의회 의장[1] 에너지 - 지속가능한 개발 및 환경부 장관 프랑스 양극지방 특임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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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정치인으로 프랑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될 뻔한 인물이다.2004년부터 2014년까지 푸아투샤랑트 레지옹 의회의 의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2017년까지 생태지속발전자원장관을 지냈다. 200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니콜라 사르코지에 패해 낙선했다.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주지사부터 대통령 후보까지 그야말로 남자들이나 할 직책을 해 보았으니 프랑스에서 가장 강력한 여성이기도 하며 종종 힐러리 클린턴과 비교되는 경우가 많지만, 미국과는 달리 이 쪽은 그렇게 알려진 편도 아닌 지라... 쉽게 말하면 지금은 대한민국의 정동영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2] 개혁진영의 유력 여성 정치인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게 지역구 다선 국회의원을 해본 추미애와 비교되기도 한다.[3]
2. 생애
1953년 자크 루아얄과 엘렌 드아이의 딸로 태어났다. 특이하게도 출생지가 프랑스가 아닌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인데, 당시에는 세네갈이 프랑스령이었으므로 프랑스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봐도 무관하다.부친은 군인이었는데, 식민지 장교답게 성향은 전형적인 보수였다. 거기다가 루아얄의 남동생은 현재 국민전선(!)에서 활동 중인 극우 성향이다. 이렇게 극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라다 보니, 루아얄이 정치를 하겠다고 하자 "계집애가 무슨 정치냐"며 부정적으로 보았고, 결과적으로 가족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이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낭시 제2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가, 큰언니의 제안으로 파리 정치대학에 입학했다. 이후에는 국립행정학교에서 수학했는데, 이 무렵 훗날 대통령이자 실질적인 남편[4]이 되는 프랑수아 올랑드를 만났고, 또한 도미니크 드빌팽 전 총리와도 함께 수업을 들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드빌팽은 우파 성향의 자크 시라크 정권 하에서 총리를 지낸 사람이었다. 뭐 당시에는 이념적으로 틀어지리라고 누가 믿었을까...
3. 정치 활동
1978년 사회당에 입당했다. 1980년부터 행정법원의 판사로 일하다가, 2년 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특별고문이었던 자크 아탈리에 의해 등용되어 6년 간 대통령궁에서 근무했다.1988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서 프랑스 민주연합의 아성인 되세브르 주의 서부 지역 선거구에 출마하여 예상을 깨고 당선되었으며, 이를 두고 "낙하산이 가면 도착은 성공적이다"라고 말했다. 이로써 당내에서 인지도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각종 장관직을 지내다가 2004년 푸아투샤랑트의 지역의장으로 당선되었다.
4. 첫 번째 대선 도전 (2007년)
200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의 예상치 못한 승리와 뒤이은 총선에서의 대승으로 다시 실권을 가지게 된 자크 시라크 정권이 오래지나지 않아 지지율이 급속히 추락했고, 결국 2004년 지방선거에서 26개 레지옹 가운데 단 3곳만 건지는 대패를 당하며 레임덕을 겪게 되었고 대중운동연합의 정권재창출 여부도 불확실해졌다. 당시 헌법에 따라 시라크는 3선도 가능했지만 이를 고사했다. 설상가상으로 지지율 하락에 반등을 얻은 사회당은 5년 전의 아픔을 잊고 이번에는 정권을 잡으리라는 희망을 갖기 시작했지만, 당장 거물인 리오넬 조스팽이 사라지면서 그를 대신할 수 있는 강력한 후보를 찾느라 고심했다. 여기서 반등을 얻은 사람이 바로 루아얄. 근데 조스팽이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곧바로 출마를 선언하면서 안개가 끼나 싶었는데, 정계 은퇴 번복에다가 너무 늦은 복귀 때문인지 여론조사에서 루아얄에게 한참 밀렸고, 결국 출마는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잭 랑,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로랑 파비위스부터 심지어는 실질적인 남편이었던 프랑수아 올랑드까지 매우 다양한 주자들이 거론되었으나, 최종적으로 루아얄, 스트로스칸, 파비위스 3인으로 결정되었고 경선에서 루아얄은 60.65%를 얻어 다른 후보들을 여유있게 제치고 곧바로 사회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주요 정당에서 최초로 나온 여성 후보[5]라는 점에서 각계의 이목을 이끌었으며, 대중운동연합에서는 남성 후보인 니콜라 사르코지가 선출되면서 200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는 일명 "성별 대결"로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리하여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만큼 프랑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막상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는데다가 사르코지 측에서 루아얄을 포퓰리스트라고 공격하면서 안개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이어 사르코지가 비록 여당 후보였지만 시라크의 이미지를 지우기 시작하면서 여기에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우파가 오래 집권한 만큼 언론들도 우파적인 성향이 강한 게 프랑스인지라, 당연히 언론들이 친(親)사르코지적인 태도를 취한 것도 루아얄에게는 매우 불리했다.
또한 노선적으로도 당시 영국의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6]와 유사했으며 이를 모델로 삼았고, 무엇보다도 조스팽이 총리 시절(1997-2002)에 도입한 주35시간 근무제 유지를 공약으로 내걸었는데, 이는 각계에서 크게 호응을 얻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블레어도 당시 영국 내에서 상황이 좋지도 않았고, 안그래도 노동당의 노선을 배반한 우익분자라고 제대로 찍혔는데 그런 노선을 추종하겠다는 얘기는...
결국 1차에서 25.87%를 득표해 결선 진출에는 성공했으나, 31.18%를 득표한 사르코지에게 만만치 않은 득표차로 뒤져 2위를 기록했으며, 결선에 가서도 46.94%를 득표해 53.06%를 득표한 사르코지에 밀려 떨어졌다. 최초의 여성 후보가 떨어졌으니 많이들 아쉬워하는 분위기였으나, 그래도 1차 당시의 좌파 표심의 단순 합계(36.44%)보다는 많이 얻었으니 다행이라고 할 수는 있다.[7] 이후 사르코지 당선에 축하 메세지를 보내며 결과에 승복했다.
5. 대선 패배 이후
대선 패배에 대한 책임으로 바로 직후에 있었던 총선에 불출마했고, 이로서 1988년부터 20년 가까이 지켜온 되세브르 2구도 델핀 바토(Delphine Batho) 의원에게 기어이 내주었다.[8] 이듬해에는 당권에 도전했지만, 대선 당시의 영향이 가시지 않았는지 마르틴 오브리에 밀려 떨어졌다.6. 두 번째 대선 도전 (2011년)
하지만 사르코지 정권도 서서히 지지율이 하락하기 시작했고, 2012년에 가서는 사회당의 집권이 확실시되면서 또다시 대선 주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2011년, 사회당에서도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으며 루아얄은 기어이 재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분명 후보가 될 것이라고.그러나 지난 대선에서 패배한 전적 때문에 재출마하는 것이 옳은 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대선 직후 실질적인 남편이었던 올랑드와 헤어졌으며 이번에는 올랑드가 201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는 바람에, 그야말로 부부대결이 되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많았다. 당연히 부부대결이면 표가 갈라지기 십상이고 무엇보다도 루아얄은 대선 패배에 대한 책임으로 밀리면서, 지난 대선 경선 때 패했던 스트로스칸이 비교적 유리한 구도를 잡기 시작했는데...
하필 스트로스칸이, 그것도 빼도박도 못 하는 성폭행 스캔들로 구속된 것이다. 이 때문에 사회당은 잠깐 위기를 맞는 듯 싶었으나 이를 금방 극복하고, 루아얄은 이를 틈 타 후보로 선출되리라 믿었는데... 역으로 스트로스칸의 표가 올랑드로 몰리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위기에 처했다.
결국 6.95%만을 득표해, 1위나 2위는커녕 3위를 기록한 아르노 몽트부르(17.19%)에 밀려 본선에서 탈락했다. 대신 전 남편인 올랑드가 결선에 진출하게 되었고, 과거에 대한 정이 조금 남아 있었는지 올랑드를 지지했다. 다행히도 올랑드가 후보로 선출되었으니,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이 틀리지는 않은 듯?
7. 이후
어쨌거나 대선에서 올랑드가 선출되면서 사회당은 정말 오래간만에 정권을 잡았고, 루아얄은 바로 총선에 도전했지만 아쉽게도 떨어졌다. 막 환갑을 앞두고 각종 쓰라린 패배를 겪었으니 일찍이 정치 생명이 끝난 게 아닌가 싶었는데...2014년 생태지속발전자원장관으로 임명되면서 아직은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2015년 기준으로는 권력서열 3위에 속했는데, 이쯤이면 여성으로서는 그나마 다행인 듯? 하지만 올랑드 정권이 곧바로 지지율을 까먹으면서 모든 것이 불투명해졌다.
8. 세 번째 대선 도전? (2017년)
하지만 이후에도 대선 주자로 거론되었으며, 올랑드의 상황이 나빠지면서 일부를 중심으로 올랑드와 틀어진 루아얄을 다시 대선 후보로 거론하기 시작했다. 이 "이혼" 문제만 잘 건드려도 후보가 될 가능성이 그나마 있었으며 여론조사에서도 지지율이 집계되기 시작했는데...문제는 겨우 6%밖에 안 되는 등, Again 2011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거기다가 올랑드가 사회당의 좌파 노선에서 상당히 벗어나 우파적인 면모를 띈 것이 문제였고 당장 그 밑에서 총리를 지내다가 도전장을 던진 마뉘엘 발스도 우파적이라는 소리를 들어서 털리는 판국에, 그것도 10년 전에 상당히 우파적인 태도를 취해 좌파들의 지지를 제대로 얻지 못한 루아얄이라면 오죽할까? 어떤 여론조사에서는 아예 소속 정당부터가 달랐던 크리스티앙 토비라에게도 밀렸는데...[9][10]
결국 불출마를 선언했다. 안그래도 2000년대 들어 당이 너무 우경화한 점에 지지자들이 불만을 품었고 그래서 진정한 좌파를 꿈꿨는데, 올랑드나 발스처럼 우파적이었던 루아얄이라면 얄짤 것 없었다. 거기다가 2010년대에 들어서는 정치적으로도 힘이 약해졌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으니...[11]
9. 근황
이후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가 출범하면서, 자신이 맡고 있던 장관직도 그만 두었다. 사회당은 망하다가 총선까지도 제대로 망했고, 이제는 대권 주자로 꼽히기는 커녕 잠정 은퇴 상태이다. [12]2020년에 극지 특임대사 시절 직원들과 예산을 자신의 사적인 일에 동원했다는 의혹에 대해 조사 중이다.# 연금개편 구상을 공개적으로 비판해 정부와 잦은 마찰을 빚어와 극지 특임대사에서 결국 해임됐다.#
10. 사생활
1978년부터 프랑수아 올랑드와 동거했다. 하지만 뭐 사실상 결혼한 거랑 다를 게 없었고, 그렇게 해서 자녀도 두었다. 그러나 이미 동거가 보편화 되어있는 프랑스에서는 이런 문제를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실제로 이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사람들도 딱히 볼 수 없는 걸 보면...하지만 대선 패배 직후 결별했다. 이후 올랑드는 기자 발레리 트리에르바일레르와 사귀며 동거를 시작했다.[13] 그 후 2011년에는 대선 후보 경선에서 맞붙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전의 정 때문인지 그렇게 나쁜 사이는 아닌 걸로 보인다. 어쨌거나 올랑드가 루아얄을 장관으로 등용했다는 점도 보면...
11. 각주
[1] 행정책임자도 겸한다.[2] 공교롭게도 둘 다 1953년생으로 동갑이다. 그리고 둘 다 개혁 진영의 대통령 후보로 도전했다가 떨어졌고 이후에는 별다르게 도전하지 않는 것을 보면...[3] 거기다가 주변 환경은 오히려 보수 쪽으로 정치에 입문하기 쉬울 법했을 환경이라는 점도 공통점이다. 추미애는 보수 텃밭인 TK 출신, 루아얄은 보수적인 군인 집안 출신이다. 정계에 입문하기 전에 판사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는 점도 유사하다.[4] 결혼하지는 않았으므로 정식 남편은 아니었다. 뭐 그래도 사실상 남편이기는 했지만...[5] 다만 프랑스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는 아니다. 5년 전에도 아를레트 라기예르, 크리스티안 토비라 등이 출마했었고, 특히 라기예르는 1974년부터 꼭 출마했던 사람이다. 참고로 라기예르가 프랑스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다.[6] 참고로 블레어와도 1953년생으로 동갑이다.[7] 다만 우파 표심을 단순 합계했을 경우 45%로 실제 결과보다 격차가 더 크기는 한데, 이번 선거에서는 18.57%를 득표해 3위를 기록한 중도 성향의 프랑수아 바이루와 10.44%로 4위를 기록한 극우 성향의 장마리 르펜이 캐스팅 보트를 쥐었다. 즉 이들의 표심이 중요했는데 우파도 르 펜을 빼면 34.56%로 좌파의 단순 합계에 밀리는 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바이루의 표심이 그냥 양쪽으로 비슷하게 분배되었고, 르 펜의 표심은 사르코지로 갔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8] 이후 델핀 바토 의원은 2007년 총선에서부터 계속해서 해당 지역구를 수성해 2024년 현재도 해당 지역구의 국회의원직을 유지하고 있다. 참고로 바토 의원은 2018년 사회당에서 유럽 생태녹색당으로 당적을 옮겼다.[9] 참고로 15년 전에 대선 후보로 출마해 좌파 진영에 고춧가루를 뿌린 인물 중 하나다.[10] 그리고 사회당의 경선이라지만, 일부 연대 정당들도 사회당 경선에 도전장을 내밀기도 한다. 이 때문에 에마뉘엘 마크롱이 앙 마르슈!를 창당하기 전 사회당 경선에 출마할 것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었다. 뭐 신당 차리고 독자 출마하는 방향으로 돌렸지만.[11] 당연히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반등을 얻은 것은 선명 좌파였던 브누아 아몽이었고, 이 반등 속에 후보로 선출되었다지만 주류들의 비토를 얻은 채 5위로 떨어졌다. 거기다가 주류들이 앙 마르슈!로 이적하면서 사회당은 별 의미가 없어졌고 앙 마르슈!가 사실상 사회당을 계승하고 있는 중이다. 일각에서는 루아얄 일대도 여기에 참여하는 게 아니냐고 주장하기도 한다.[12]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2022년에 치러지고, 그 때는 69세라 좀 고령이다. 거기다가 사회당은 당 내부의 혁신과 원래의 정체성을 되찾는 작업을 하고 있어서, 당내 오른쪽 성향의 후보들은 밀려날 것이 뻔하다.[13] 무난하게 헤어진 루아얄과 달리 트리에르바일레르와 결별한 건 올랑드가 여배우 쥘리 가예와 바람이 나서 2년이나 몰래 두 집 살림하며 뒤통수 거하게 때리고 헤어진 거라 그녀는 올랑드를 파멸시키겠다며 이를 갈았고 결국 기자 출신인 그녀가 올랑드의 사적인 망언과 부적절한 행동을 폭로하면서 안 그래도 인기 없던 올랑드는 그대로 침몰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