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2 22:07:12

상퀼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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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어원3. 내용4. 평가

상퀼로트는 불량배인가? 그는 항상 발로 걷는 사람이며, 당신들 모두가 갖고 싶어 하는 돈도 없는 사람이고, 자신을 위한 시종이나 성도 없으며, 4층이나 5층에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단출하게 사는 사람이다.
그는 유용하다. 왜냐하면 그는 들판에서 일하는 법을 알고, 쇠를 주조할 줄 알고, 톱을 사용할 줄 알며, 쇠붙이 가는 줄을 사용할 줄 알며, 집에 지붕을 얹을 줄 알고, 신발을 만들 줄 알고, 공화국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마지막 피 한 방울을 흘릴 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노동을 하므로 당신은 카페 드 샤르트르에서 그를 분명 만나지 못할 것이고, 사람들이 작당을 하고 도박을 하는 도박장에서도 보지 못할 것이다.
저녁에 그는 분칠하지도, 향수를 뿌리지도, 혹은 여성 관중의 눈을 사로잡으려고 말숙한 부츠를 신지도 않은 채 자신의 구역으로 간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좋은 제안을 지지하고, 혐오스러운 정치인 도당이 제시한 제안들을 분쇄할 준비가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상퀼로트는 혁명의 모든 적들의 귀를 자를 날카로운 사브르를 항상 지니고 있다.
「주제넘은 질문에 대한 답변 : 상퀼로트는 누구인가?」, <1775~1830년의 혁명들>, 머린 윌리엄스, p100~101

1. 개요

Sans-culotte.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 정국을 주도한 파리의 빈민 대중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당대 이념적으로는 극단적 급진주의 성향을 보였다.

2. 어원

앙시앵 레짐 당시 귀족들은 주로 브리치 또는 퀼로트라고 불리는 쫄쫄이 반바지 하의를 착용했기 때문에, 긴 바지를 입고 다니는 평민들을 경멸하는 어조로 상 퀼로트(sans은 영어의 without과 같은 의미이다.)라고 불렀다. 한국의 사례로 보자면 '족보도 없는 놈'과 비슷한 뜻이었던 셈. 프랑스 혁명 이후 한때 파리의 급진적 서민들이 자신들을 자랑스럽게 지칭하는 표현으로 뜻을 바꾸어 부르기도 했으나, '9월 대학살'과 혁명군의 공포정치에 앞장서 폭력적 급진파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3. 내용

상퀼로트를 이룬 주요 계층들은 수공업자, 장인, 소상공인, 저소득 근로자 등 무산 시민으로(즉 농민이 아니라 도시인이다) 당시 파리에서는 빈곤층에 속했다. 따라서 이들은 사회와 경제적 평등을 기치로 내걸고 자신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고정 임금제, 빵을 비롯한 식료품의 가격 통제, 대중 민주주의, 지방 자치제와 같은 정책을 주장했고, 상당 부분을 관철시켰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베르사유 행진, 발미 전투[1] 등 프랑스 혁명 굵직굵직한 사건의 주축을 맡았으며 정치적으로는 자코뱅, 그 중에서도 가장 급진주의 계열인 산악파, 에베르파 등과 밀접한 관계였다. 특히나 1792년 자코뱅 지롱드당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정치적 위상이 급속도로 높아져서 진정한 혁명 정신의 소유자라고 평가받기도 했다.[2]

이들은 혁명세력이 정권을 잡고 세력 다툼에 빠졌을 때에도 시장과 거리를 실질적으로 장악한 혁명 최전선의 군중집단이었다. 물론 이로 인하여 인민재판과 같은 즉석 거리 심판이 이루어지는 등 부작용도 적지 않았으나 상퀼로트의 세력을 자코뱅과 지롱드, 어느 쪽에서도 무시할 수 없었던 힘은 그들이 민중에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혁명 시대의 초기 지도자, 로베스피에르는 상퀼로트의 조직력과 실행력을 가장 잘 활용했던 인물이었고, 이에 따라서 상퀼로트는 공포정치(Reign of Terror)의 홍위병으로 길거리를 장악했다. 상퀼로트가 경찰이자, 판사인 시대가 열린 것이다. 실제로 빨간 바지에 사람 머리를 꽂은 창 들고 돌아다녔으니 원조 빨갱이(...) 라 볼 수 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전쟁이 격화되면서 자코뱅과 상퀼로트의 연합전선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혁명전쟁이 격화되면서 로베스피에르징병과 같은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펼쳐야 했고 여기에 상퀼로트가 반발했기 때문. 결국 1794년 3월 에베르를 비롯한 상퀼로트의 주요 지도부들이 공안위원회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키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당하면서 상퀼로트는 몰락하고 만다. 한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이 처형으로 인하여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를 자신의 손으로 숙청한 셈이 됐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은 같은 해 7월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자신도 처형당하고 만다.

잔존한 상퀼로트 일파들은 1795년 파리에서 총재정부에 저항하는 봉기를 일으켰으나 무참히 진압당했고, 이를 계기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상퀼로트의 이념은 살아남아서 7월 혁명, 2월 혁명 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또한 파리 코뮌 역시 상퀼로트적 전통을 계승한 최후의 시도라고 평가받는다.[3]

역설적으로 프랑스 혁명의 행동대나 마찬가지였던 상퀼로트 세력은 이후 나폴레옹의 혁명 시기에는 왕정복고의 주축 세력이 되었다.

4. 평가

당시 영국 등 주변국의 평가나 우파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 입장에서는 좋게 볼래야 좋게 볼 수가 없는 집단이다. 그나마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과격한 도시 민중의 원형' 정도이며 폭도로 단언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시각을 가지는 것은 다름아닌 "9월 대학살" 때문이었는데, 계속 프로이센을 이기지 못해 파리 코앞까지 다가오자 장폴 마라가 언론을 통해 귀족과 성직자들을 죽이자고 선동하자 감옥에 갇힌 성직자를 비롯한 귀족들을 모두 학살했다. 이 중에 여성들도 강간을 당하고 살해당하는 등의 사실이 전 유럽에 퍼져서 많은 국가들이 기겁했다.

반면 좌파 진영에서는 이들을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사회주의의 초석을 다진 세력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다만 좌파 내에서도 평가는 엇갈리는데, 마르크스주의 계열 역사학자들은 이들에 대해서 꽤나 박한 평가를 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관점에 따르면 봉건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의 진입은 불가피한 역사적 진보이고 이 자본주의 내에서 다시 모순이 쌓이고 쌓여 폭발하는 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다.

그러나 상퀼로트들이 꿈꾸었던 사회는 소규모 자영농과 소상공인들이 주축이 되는 전근대 사회였는데 이러한 사상은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불리며, 사회주의 계열의 한 갈래이기는 하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과학적 사회주의와는 한참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즉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기에 상퀼로트는 역사가 공산사회로 이행하는 데 있어 장애물 정도였던 셈. 틀린 평가는 아닌게 상퀼로트들이 자코뱅 집권 시기 실시한 소농, 소상공인들을 위한 각종 사회 정책들이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프랑스는 산업자본주의가 발전하는데 상당히 애를 먹기도 했고, 프랑스 2월 혁명이 터져 공화국이 되었음에도 나폴레옹 3세에게 몰표를 던져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등 프랑스의 보수화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4]

다만 상퀼로트 세력은 프랑스 혁명의 종착점인 나폴레옹 시대에는 되려 왕정복고로 입장이 180도 바뀌는 등, 이들 자체가 정치 이념적 집단이라기 보다 사회 계층적인 이익집단에 가까웠다. 애초에 왕당파든 공화파든간에 특정시기에 한 정파가 부르봉파, 오를레앙파, 보나파르트파가 독주했고, 타정파는 야당으로 대항했다가, 대사건이 일어나면 재편과 이합집산을 거듭해서 편을 갈아타기도 하는것이 이 당시 프랑스 정국의 흐름이었다. 이로 인하여 프랑스 혁명 세력의 주축, 당파로 인정 받기보다, 한편의 민중 집단의 성격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는 상퀼로트가 '도시 빈민'으로 정의되었던 탓에, 가진 게 없어 과격하면서도 당장 굶어죽지 않기 위해 쉽사리 다른 정파에 가담하고(싼 값에 매수되고), 돈을 좀 벌면 상퀼로트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등 강력하긴 해도 안정적인 정치세력이 되기는 어려웠던 탓이다. 이는 마르크스가 소득이 있고 학력도 있는 이들까지 포함하는 프롤레타리아 개념을 제시한 후에야 개선되었다. 마르크스 이전의 상퀼로트는 교사, 변호사 등 인텔리 계층과 격리되어 있었다(그들도 하는 일이 사무직일 뿐 결국 일을 해야 먹고 산다는 것 같았지만). 사실 프랑스 혁명기는 본격적인 산업화 이전이라 증기기관의 생산력도, 대규모 사무직 수요도 없어 상퀼로트를 이루는 게 날품팔이와 자영업자로 제한되었던 탓이 컸다.

훗날이야 '노동자-농민' 연합이 생기지만 당시의 상퀼로트는 대규모로 조직된 도시 노동자 집단보다는 도시 날품팔이 수준이었고(그래서 모은 돈은 적은데 도시 물가가 오르면 즉시 생명이 위험했다), 혁명기의 농민들은 왕정이나 하다못해 교회를 지지했지 혁명정부를 지지하지 않았다. 즉 토지분배를 외치는 상퀼로트와 농민들은 딱히 한 집단이 아니었던 셈이다.


[1] 프랑스 혁명전쟁 당시 프로이센 군을 상대로 프랑스 국민군이 최초로 승리한 전투.[2] 심지어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한창인 시기에는 조금만 반동으로 몰려도 단두대로 직행했기 때문에 부르주아 출신의 온건 좌파나 귀족 출신들까지도 '여러분 저 비록 출신은 부르주아이지만 심정적으로는 여러분과 동질적인거 아시죠?'라는 점을 어필하려고 퀼로트를 벗어던지고 상퀼로트를 착용했다고 한다(...) 진정한 서민 코스프레[3] 이후로는 사회주의자들의 대다수가 상퀼로트와 같은 유토피아적 사회주의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를 지지하면서 자연스럽게 소멸한다.[4] 오늘날에도 프랑스는 선진국치고는 사회에서 소농들의 비율이 상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