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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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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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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에라스뮈스
Erasmus
파일:에라스무스.jpg
이름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로테로다뮈스[1]
Desiderius Erasmus Roterodamus
출생 1466년 10월 28일
부르고뉴국 로테르담
사망 1536년 7월 12일 (향년 70세)
스위스 바젤
국적
[[네덜란드|]][[틀:국기|]][[틀:국기|]]
학력 파리 대학교, 콜레주 드 몽테귀[2]
케임브리지 대학교, 퀸스 컬리지
토리노 대학교 (신학 / 박사, 1506년)
분야 기독교 철학, 르네상스 인문주의
종교 가톨릭[3]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인문주의자2.3. 죽음
3. 사상
3.1. 인문주의와 교육3.2. 자유의지
4. 저서
4.1. 우신예찬
5. 온건한 가톨릭 인문주의자6. 어록7. 여담

[clearfix]

1. 개요

르네상스 시대 네덜란드가톨릭 사제이자, 당대 유럽 인문주의자들을[4] 대표하는 지식인. 주 활동 분야는 성서학, 교부학 등 주로 고전 문헌 연구이다.

그는 중세 스콜라학의 사색적이고 현학적이고 논리학적인 '대학교수의' 신학에 반대하여, 농부와 주부들도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하고 명료하며 수사학적인 '사목자의' 신학을 추구하였다. 때문에 에라스무스의 관심은 자연히 조직신학보다는 성서학과 교부학에 있었으며, 흩어진 여러 사본을 수집해서 원시적인 그리스어 신약성서 비평본을 구성하고 이를 직접 다시 라틴어로 번역해서[5] 당시 가톨릭에서 권위있던 불가타 성경[6]의 오역을 지적했으며, 히브리어·그리스어·라틴어 학습을 통한 인문주의적 교양을 강조했다.[7]

대표적인 저서로는 《우신예찬》, 《격언집》 등이 있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에라스뮈스는 1466년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성직자인 아버지와 의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에라스뮈스라는 이름은 그의 아버지가 좋아하던 성인포르미아의 에라스무스에서 따왔다. 4살에 학교에 입학하여 9살 때 아버지에 의해 라틴어 학교에 보내졌고 그곳에서 라틴어 시를 지을 만큼 높은 학문적 재능을 보였다. 1483년 흑사병으로 부모를 잃고 난 후, 후견인은 에라스뮈스를 '공동생활 형제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맡겼다. 에라스뮈스는 당시 수도원의 엄격한 규율과 혹독한 생활을 겪으면서, 수도원의 타락과 부정 축재에 대한 문제의식을 키우게 된다.

2.2. 인문주의자

21살이 되던 해 에라스뮈스는 생계 문제로 스테인에 있는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에 입회, 가톨릭 사제가 되었다. 하지만 수도원 생활에 회의를 느낀 그는 수도원을 떠나 1493년 베르겐 주교의 비서가 되었다. 베르겐 주교의 밑에 있는 동안 에라스뮈스는 수도원의 지루한 삶에서 벗어나 세속적 삶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뛰어난 라틴어 실력을 눈여겨 본 베르겐 주교는 그가 프랑스 파리에 가서 공부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덕분에 에라스뮈스는 파리 대학교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며 당시의 지식인들과 교류했다. 하지만 파리 대학교에서 에라스뮈스의 공부는 만족스럽지 못했던 듯하다. 파리 대학교에 있는 동안, 그는 그곳에서 가르치던 스콜라 철학을 비판했다.

1499년, 에라스뮈스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퀸스 컬리지를 방문한다. 영국 방문은 그가 인문주의자의 길을 걷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영국에서 토머스 모어[8], 존 콜렛 등 당시의 인문주의자들과 교류했고, 어린 시절의 헨리 8세를 만나기도 했다. 그는 영국에서의 지적인 교류를 계기로 고전과 인문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1506년 그리스어와 인문주의를 더 배우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탈리아로 넘어간다. 에라스뮈스는 이곳에서 그리스인들에게 직접 그리스어를 배운다. 1509년에는 영국으로 다시 넘어와 토머스 모어의 집에 머무르면서 작품을 쓴다. 그 작품이 바로 교회의 허위와 위선을 풍자한 『우신예찬』이다. 우신예찬에서 그는 우신(愚神, 바보 신)을 내세워 교황, 성직자 뿐만 아니라 군주와 학자들을 비판한다. 이 때문에 『우신예찬』은 금서로 지정되지만 유럽에서 이 저서의 파급력은 엄청났고, 에라스뮈스는 종교개혁가를 비롯한 인문주의자들 사이에서 유명해지게 된다.
"아마도 신학자들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지나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거만하고 화를 잘 내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600개에 달하는 논거를 한 조(組)로 묶어 내 주장을 취소하도록 몰아세울 것이다. 내가 그것을 거절하면 그들은 즉각 나를 이단자로 선언할 것이다. 스콜라 신학자들이 추구하는 방법은 난해한 것들 가운데 가장 난해한 것을 더욱 난해하게 만들 뿐이다."
『우신예찬』 中
그가 이전에 저술했던 『격언집(Adagia)』, 『기독교도 병사의 휴대서』 등에도 이러한 인문주의적 태도가 담겨져 있다. 또한 그는 가톨릭과 인문주의의 융합에도 관심을 가져, 인문주의의 문헌적 연구를 통해 성서의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고자 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1516년 신약성서의 각종 그리스어 원전 사본을 합쳐서 사상 처음으로 그리스어 성서를 활자화하고 상세한 주해와 라틴어 번역을 첨가한 『교정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펴낸다. 이 업적은 신학자로서 그의 명성을 높여주었으며, 성경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 성과는 이후 종교개혁의 밑바탕이 되었다. 루터의 그 유명한 독일어 번역 성경이 바로 에라스뮈스의 라틴어판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는 여러 책을 통해서 수도회 문화와 당대의 사색적인 스콜라학을 비판하여 많은 종교개혁가들의 지지를 받으며,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대한 박식함으로 유럽 최고의 지성으로 등극한다. 하지만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가 벌어지고 종교개혁가들이 투쟁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하자 에라스무스는 이를 거절한다. 그가 원한 것은 가톨릭 '신학'과 '규율'의 쇄신이었지, 가톨릭 '교회'의 근본적인 구조 변화가 아니었고, 신학이나 규율의 문제는 온건한 대화와 교양있는 출판 및 독서 문화를 통해 개선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2.3. 죽음

그는 네덜란드의 섭정인 헝가리의 메리 여왕으로부터 초대를 받아 브라반트로 가던 도중, 스위스 바젤에서 이질 증상으로 1536년 갑자기 병사했다.[9] 그가 사망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신이시여..."였다. 그의 시신은 바젤 성당에 안치되었다. 1622년, 그가 태어난 로테르담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파일:Rotterdam_standbeeld_Erasmus.jpg

3. 사상

3.1. 인문주의와 교육

처음으로 말을 더듬으며 하는 말이 그리스도이름이기를, 또한 첫 유아기가 복음에 따라 양성되기를 바란다. 나는 이 유년기가 그리스도에 의해 인도되어 아이들도 그분을 사랑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 아이들이 활력이 넘치는 성숙한 때가 되기까지 이 가르침을 받을 수 있기를, 그래서 평온하게 자라나기를 바란다.
-에라스무스, 〈성령강림 청원기도〉Paraclesis
에라스뮈스는 고전 연구를 통하여 ‘인간성’(humanitas)의 개념을 인간의 덕, 윤리, 고결 등의 의미로 규정하고, 그 개념이 기독교적인 것과 일치한다고 보았다. 당시 극단적인 인문주의자들이 '그리스로마 고전'과 '신학'의 조화를 포기한 데 반해, 에라스뮈스는, '인문주의적 교양'과 '그리스도교 신학' 사이에 모순이 없다고 보았다. 그는 이런 차원에서 히브리와 고대 그리스어로 된 성서의 원전을 연구함으로써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의 단순함과 명료함을 회복하자고 주장했고, 스콜라학의 논리학적이고 사색적인 신학보다는, 고대 교부들이 하였던 수사학적이고 문학적이며 이해하기 쉬운 신학을 추구했다.[10] "에라스무스가 『그리스도교 병사의 교본』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과 그 밖에 다른 여러 작품에서 제시하고자 했던 단순한 철학은 다름 아닌 모든 이들, 심지어 가정주부와 농부들에게까지도 다가갈 수 있는 그런 철학을 의미했다. 그는 이 책의 서두에서, 그리스도는 강력하고 복잡한 스콜라 철학자들의 책들을 읽을 수 없는 단순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돌아가셨기 때문에, '복음과 사도들 그리고 아주 전문적인 주석가들로부터 보다 순수한 원천들을 끌어들이고, 그리스도의 철학이 갖는 근본적인 특징들을 단순하게 종합해서 간략하고 명료하게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명료함, 단순성, 순수함, 원천들(ad fontes), 곧 성경과 교부들로 돌아가는 것, 이 모두는 에라스무스가 몹시 열망하는 그리스도교 철학의 목적들이다."[11]

그는 고대의 고전 작품에서 순수한 인간성과 숭고한 신성을 찾았으며 그것이 기독교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대의 지식이 기독교를 윤리적 종교로 승화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소유한 이성의 궁극적 원천은 하느님의 이성(로고스; logos)이므로, 그리스 철학자들이 탐구한 이성적 지혜가 기독교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룬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신념은 다음과 같은 자신의 글로 대변된다. "거룩한 소크라테스여, 우리를 위해 기도하라."

즉, 그는 고전 문학에서 발견되는 인문교육의 이상으로서의 교육적 가치와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되는 성경 속의 예수의 삶에서 발견되는 도덕적 가치를 결합함으로써 학문과 종교의 조화를 추구했다. 이는 고대 그리스고대 로마의 고전들과 그 시대 교부들의 저작 속에 포함된 정신을 종교적 도덕의 표준으로 간주함으로써 그것을 성스러운 것으로 해석하는 기독교적 인문주의의 철학적 원리를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이런 맥락에서 참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좋은 시민을 위한 학문과 도덕을 내포한 인문주의 교육을 통해 그리스 로마의 고전들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에라스뮈스는 평민이든 상인이든 귀족이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인간다움을 갖추기 위해서 이러한 인문주의 교육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특히 아동교육에서 교사의 역할을 중시했는데, 아이들은 상상력이 풍부하기 때문에 교사가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의 상상력에 기초해서 공부의 과정에 놀이의 외양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육을 통해서 아이들이 교사를 좋아하고 존경하여 그를 본받고자 하며, 인문교양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불명예를 싫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문교육은 공공의 책임이기 때문에, 교육을 책임질 교사들 역시 법제화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3.2. 자유의지

종교개혁이 시작되고 가톨릭개신교가 갈라선 이후, 교황청의 요청에 의하여 에라스뮈스는 마르틴 루터의 『노예의지론』을 반박하는 글을 쓴다. 그는 『자유의지론』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인간이 신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구원을 위해 어떤 역할도 할 수 없다는 루터의 견해를 거부한다.

그는 루터의 노예의지대로라면, 선한 일을 하도록 예정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형벌을 전가하는 것이 과연 정의가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하느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의 관계에 관한 여러 교부 철학자들의 논쟁을 개괄한 뒤, 그는 양 극단을 통합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의지에 속하지만 실제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도 자유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에게도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일에는 시작, 과정, 결말의 세 단계가 있는데 시작과 결말은 하느님이 예정한 것에 속해서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지만, 시작과 결말의 중간인 '과정'에는 인간의 의지가 작용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개별적 행위는 하느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라는 두 원인이 동시에 작용하며, 하느님의 의지는 주도적 원인, 인간의 의지는 이차적 원인이 된다.

그는 불을 예로 들어 이 관계를 설명한다. "불의 본래 성질로 인해 불이 날 경우, 그 불이 일어나게 만드는 하느님은 일차적 원인이다. 만약 일차적 원인이 없어지면 불은 결코 일어날 수가 없다." 즉, 건조한 날씨로 메마른 숲속에 누군가 성냥불을 버리면 산불이 난다. 이 경우, 불이 나기 좋은 건조한 날씨와 적당한 산소량 등, 가연성이라는 불의 성질은 일차적 원인이고 성냥불을 던지는 행위는 이차적 원인이다. 성냥불을 아무리 던져도 불이 날 조건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불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일차적 원인으로서 하느님이 예정한 결과로 귀결되며, 그럼에도 선과 악의 행위는 인간 의지의 작용에 따라 일어날 수 있으므로 하느님은 그 인간 행위의 의지를 파악하여 포상 또는 징벌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에라스뮈스의 자유의지 변론은,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음에도 모든 것은 이미 신이 결정한 것'이라는 장 칼뱅의 이중예정설로 이어진다.

4. 저서

4.1. 우신예찬

에라스뮈스는 이탈리아에 있으면서, 청빈과 기도, 눈물과 고행에 몰두해야 할 교황 율리오 2세가 그렇게도 많은 재물과 영광, 세금과 면죄부를 통해 쾌락에 빠져 있으면서 전쟁을 자신의 주된 업무로 생각하는 것을 보고 극한 실망감에 빠진다. 그리고 1509년 이탈리아를 떠나 영국으로 오는 길에 그는 이런 물음에 사로잡힌다. 사람의 생각을 사로잡고 행동을 부추기는 동기가 무엇인가? 진실과 사랑, 지성과 현명, 이런 고상한 것보다는 허영과 욕망, 정념과 어리석음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아닌가? 그리고 그는 영국 런던에 도착하여 토머스 모어 집에 머물면서 일주일 만에 『우신예찬』[12]을 쓴다.

『우신예찬』의 주인공은 '모리아(Moriae; 우신, 바보신)'이다. 모리아는 라틴어로 '어리석은 여신'을 말하는 것으로, 토머스 모어의 '모어'와 유사해서 선택한 단어라고 에라스뮈스는 밝힌다. 물론 모어는 어리석음과 거리가 멀지만, 그는 친절하고 너그러울 뿐 아니라 유머감각이 뛰어나 자신의 재치 넘치는 풍자에도 크게 즐거워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3] 에라스뮈스는 『우신예찬』에서 '어리석음'을 대략 3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하나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어리석다고 말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하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사실 똑똑한 사람들이 어리석은 짓을 많이 한다는 의미로도 사용한다. 또한 그는 바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혜로운 자들을 말할 때도 '어리석음'을 사용한다.

그는 "스토아 학자라도 아버지가 되고 싶다면 바보신(우신)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것"이라며, 무엇으로 인간을 만드는지 묻는다. "머리나 얼굴로? 가슴으로? 손 아니면 귀처럼 정숙한 부분으로? 아니 그렇지 않다. 인류를 널리 번식시켜 퍼뜨리는 그 부분은 너무 우스꽝스럽고 바보 같아서 웃지 않고는 언급할 수 없는 부분이다."[14] 그리고 바보신은 생명이 어리석음을 통해 태어날 뿐 아니라 어리석음 때문에 유지된다고 역설한다. "사람은 어리석고 미칠수록 즐겁고 어리석을수록 타인과 잘 어울린다. 아첨과 속임수가 없다면 백성이 지배자를, 상전이 하인을, 마님이 하녀를, 선생이 학생을, 아내가 남편을, 지주가 소작인을 어떻게 견뎌내겠는가?" 바보신은 이렇게도 반문한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법칙, 또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에 의해 다스려진 나라가 단 하나라도 있는가?" 영웅들의 고귀한 행위도, 수많은 찬란한 글도, 도시도, 제국도, 사법행정도, 종교도, 인간의 계획과 판단도 모두 어리석음과 허영, 광기에 의해 유지된다. 인간이 이용하는 기술도 명예욕 때문에 나온 것이며 온갖 학문과 예술도 모두 이와 같은 것 때문에 나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어리석음은 인간의 본성에 꼭 어울린다. 인간은 어리석음으로 인해 온갖 근심과 걱정을 벗어날 수가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삶을 즐길 수 있다.

또 바보신은 실상은 어리석으면서도 현명한 척하는 어리석음을 폭로한다. 자기 아내가 수많은 남자를 가졌는데도 마치 정숙한 부인이라고 생각하는 남편들, 사냥에 미쳐 날뛰는 귀족들, 노름꾼들, 거짓말쟁이들,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해 면죄부를 받았다고 즐거워하는 사람들 등은 모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바보신은 '기독교적 어리석음'을 논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이나 힘있는 자들, 가진 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여자들과 어부들을 가까이 한 것, 짐승 중에서도 가장 어리석은 당나귀를 고르신 것, 성령이 독수리의 형상이 아니라 비둘기의 형상을 하고 내려 온 것, 자신을 따르는 신도들을 양이라고 부른 것, 그리고 심지어 자신을 어린양이라고 부르게 한 것 등은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높이 인정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바보신은 반문한다. 또한 사도 바울로에 따르면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에겐 하느님의 능력이며, 하느님은 세상의 미련한(어리석은) 것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어리석음과 혈연관계를 가진 종교라는 것이다.

5. 온건한 가톨릭 인문주의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세례를 받은 사람도 서품을 받은 사람도 교회에 가는 사람도 아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마음 내면 가장 깊이 끌어 안고서, 믿음 깊은 행동으로써 그를 모방하려는 사람이다"
Erasmus. D. The Education of a Christian Prince (1965) p.153
에라스뮈스는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영적인 삶에 있어서 두 가지를 요구한다. 하나는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지식이다. 지식은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는 무기로서, 성경과 고전을 통해서 얻어진다. 이를 통해 그는 오로지 내적이고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의 삶을 따라가고자 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지, 미사 참례나 고해성사 등의 형식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주의 타파는 당시 가톨릭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개혁은 교육으로 이루어져야 된다는 것이 에라스뮈스의 주장이었다.

따라서 에라스뮈스는 루터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았다. 처음에 루터의 가톨릭 비판에 동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에 대해 지지해달라고 요청하고 그리스도교 사회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질 것으로 예상되자, 에라스뮈스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비이성적으로 움직일 것을 우려하였고 “격렬한 언동보다 정중한 중용을 지킴으로써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며 자신의 온건 노선을 견지했다. 그가 바랐던 것은 어디까지나 교육을 통한 교회 체제 내의 개혁이었지, 그리스도교 세계의 분열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간이 적절한 인문주의 교육을 받으면 그 이성의 자유의지로 종교의 부패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런 맥락에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의지(은총)이고 인간은 자유의지가 없다'는 루터의 『노예의지론』을 반박했던 것이었다. 에라스뮈스는 고전과 교부시대 철학자들을 근거로 하느님이 인간에게도 자유의지를 주었음을 알리는 『자유의지론』을 썼고, 루터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당대 최고 지식인을 논리로 이길 수 없자 루터는 논리를 펼치는 것을 그만두고 에라스뮈스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는다.[15] [16]

비록 에라스뮈스의 『우신예찬』이 오랫동안 가톨릭교회의 금서목록에 올랐지만, 에라스뮈스 스스로가 자신을 가톨릭 신자로 인식했고, 개신교를 거부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가령 자신이 후원하던 한스 홀바인이 끝내 프로테스탄트가 되자 분노하는 등, 에라스뮈스의 가톨릭 정체성은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으며,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가톨릭에서 파문을 당한 적도 없다.
인문주의와 종교개혁 사이의 모든 긴장은 1525년에 아주 확연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해에 쯔빙글리와 루터는 모두 에라스무스를 공개적으로 공격하는 글을 썼는데, 두 사람 모두 '의지의 자유' 개념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두 개혁자들이 보기에 인간의 의지의 완전한 자유에 대한 에라스무스의 가르침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지나치게 낙관적인 견해를 이끌어낼 우려가 있었다. 쯔빙글리의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에 관한 주석"(Commentary on True and False Religion)과 루터의 "노예의지론"(On the Bondage of the Will)의 출판은 인문주의와 종교개혁 사이에 늘 있어왔던 긴장을 모든 사람에게 명백히 드러냈다.
-앨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 씀, 최재건 번역, "종교개혁사상"(Reformation Thoughts: An Introduction) 제3증보판 111쪽
에라스뮈스와 교황청의 갈등 때문에, 에라스뮈스를 가톨릭도 개신교도 아닌 제3의 분파로 오인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에라스뮈스는 '신학적 견해'가 가톨릭 '신학'과 차이가 있을 뿐 죽을 때까지 가톨릭 신자로 남았으며, 심지어 반교도권주의자조차 아니다. 만년의 에라스뮈스는 비교리적인 회의주의자도 아니고, 자유사상가도 아니었고, 오히려 신앙심 깊고 계시와 결부되어 있는 교회에 충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신학자였다.(Karl Heinz Oelrich, Der späte Erasmus und die Reformation, Münster, 1961)
육체의 외관과 '유대이즘', 율법 준수와 선행을 실천하는 것을 과도하게 신뢰하는 것에 대한 단죄,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권리 요구는 루터에게도 역시 아주 소중한 동기들이었다. 그러한 이유에서 에라스무스는 독일 종교개혁가들에게 호감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 올바른 가톨릭 신자로서 교회의 구조에 관한 문제는 '그리스도교 철학'이나 신학에 속한 사안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교회 교도권에 속하는 문제이므로 신학자들을 포함해서 모든 신자들은 그분들의 장엄한 결정들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에라스무스는 생각했다.
-바티스타 몬딘Battista Mondin, 『신학사』Storia della teologia 제3권, 윤주현(역), 183-184쪽
가령 교회론 문제만 하더라도, 에라스뮈스는 교회론을 신학의 대상이 아니라고 봤다는 점에서 확실히 가톨릭 신학 정통과는 거리가 있고, 루터와도 당연히 다르다.[17] 에라스뮈스에게 있어서 '신학'이란 사실상 성경과 교부에 관한 '문헌학'의 영역으로 축소될 뿐이다. 그러나 동시에 에라스뮈스는 비록 교회론이 신학의 대상은 아니지만 교회는 순명의 대상이라 봤으며, 신학자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교도권에 순명해야 한다고 봤다. 즉, 에라스뮈스는 형식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가톨릭 정체성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에라스뮈스의 신념은 개신교 진영의 필리프 멜란히톤과 특별히 통하는 면모가 많았다.
카를 5세는 9년 동안의 부재를 끝내고 독일로 돌아왔으며 교회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있었다. 종교적인 대립은 평화적인 토의에서 논의되고, 개혁들에 대해서도 협의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새 신앙인들을 위하여 루터의 동료이며 친구인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1479-1560)은 신앙고백서를 완성하였다. 그것은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Confessio Augustana으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을 위하여 세계사적 의미를 획득하였다. 이 신앙고백은 1530년 6월 25일 제국의회에서 낭독되었다.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인문주의자인 멜란히톤은 항상 타협적인 경향이었고 또한 그 점에서 인문주의자인 프라이부르크의 에라스무스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며, 새 교리를 실제로는 옛 교회의 교리와 거의 차이가 없는 것처럼 표현하였다. 사람들은 아직 공통의 기초 관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교회와 신앙의 일치는 누구로부터도 근본적으로 의문이 제기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멜란히톤, 신앙고백서 끝에 이렇게 쓸 수가 있었다.
"이것은 가톨릭 교리의 총체 안에 들어 있다. 보는 바와 같이 거기에는 저자로부터 알려진 한에서 성서나 가톨릭 내지는 로마 교회와 어긋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논쟁은 신앙이 아니고 단지 평신도의 양형 영성체 재도입, 거래 미사와 구석 미사의 폐지, 고해의 강요, 단식 규정, 수도서약, 주교 재치권 등의 폐지 같은 몇 가지 개혁 요구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아욱스부르크에 체재하는 교황사절 캄페조에게 6월 26일 이러한 편지를 썼다.
"우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황직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로마 교회와 하등의 다른 신앙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비록 예식에서의 완전히 사소한 차이만이 일치를 방해하고 있을지라도, 교회가 우리를 단죄하지 않는 한 우리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그리스도와 로마 교회에 충실하게 머무를 것입니다."
이렇게 화해적인 자세는 재일치를 위한 좋은 토대처럼 보였다. 황제 자신도 비타협적인 교황주의자는 아니고, 그의 마음의 밑바탕에는 에라스무스적인 뜻에서의 개방적인 인문주의자였기에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구 신앙인과 신 신앙인 신학자들로 2개의 위원회를 임명하였다. 그들의 대변인은 멜란히톤과 에크였다. 가톨릭에서는 에크·파베르·코흘레우스에 의하여 완성되고, 8월 3일에 낭독된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의 반박서」가 심의의 기초로 결정되었다. 협의에서 양측은 서로 양보하였다. 에라스무스의 정신이 모든 참가자들에게서 생동하고 있었다. 즉, 누구보다도 황제가 변호하고 있던 표어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일치를, 타협하겠다는 최대한의 각오, 자신의 요구를 최소한으로 줄이자는 것이었다. 결국 5가지만이 논점으로 남았는데, 그것은 평신도의 성혈 배령, 사제의 결혼, 수도서약, 그동안 프로테스탄트 영주들로부터 약탈당한 교회 재산의 반환, 미사의 희생적 성격 ― 미사 전문에서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이었다.

처음 4가지 논점은 교회의 규율과 관련된 것이었고, 마지막 논점만이 신앙과 관계된 것이었다. 가톨릭에서 양보의 용의가 얼마나 컸는지는, 황제가 1530년 9월 14일 캄페조 교황사절에게 위에서 지적한 마지막 논점들도 프로테스탄트에게 동의해 주기를 바란다는 청원과 함께 대리를 파견한 사실에서 가장 잘 확인된다. 교황사절은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가 보고를 보낸 로마에서는 기대를 걸었다. 교황 글레멘스는 당시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하나인 가예티노 추기경에게 조언을 청하였다. 추기경은 평신도의 성혈 배령과 사제의 결혼에 대해서는, 그것이 다만 규율의 문제이고 신앙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긍정적인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결정은 앞으로의 공의회에서 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 두 문제는 그때부터 공개토론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멜란히톤은 만약 적어도 이 두 논점에서 양보한다면 재일치의 길에는 아무런 방해가 없을 것이라고 언명했기 때문에, 황제는 이 2가지의 양보를 로마로부터 얻어내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트리엔트 공의회는 1563년에 가서야 그것들을 다룰 시간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어 적어도 평신도의 성혈 배령은 허용되었으나 때는 이미 30년이 늦은 후였다.

1530년 아욱스부르크에서는 일치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때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정신은 멜란히톤과 에라스무스의 정신이었고, 루터의 것은 아니었다. 루터는 파문된 자로서 제국의회에 참석할 권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코부르크 요새로부터 토의 과정을 대단히 정확하게 지켜보았고, 계속된 서신교환으로 자신의 신봉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멜란히톤의 양보에 대하여 그는 신랄한 비난만 하였다. 또한 그는 어떠한 대화도 근본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는 8월 26일 아욱스부르크로 작센 선제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는 교리의 일치에 관한 토의에 대해서는 도무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August Franzen · Remigius Bämer · Roland Fröhlich. 2001. 《Kleine Kirchengeschichte》 한국어판 311-313쪽.
실제로 에라스뮈스와 멜란히톤 둘 다 당시엔 타협적이고 미온적이며, 신앙의 중요한 측면을 흐리고 있다는 비판을 자기 진영에서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엔, 비록 두 사람이 전적으로 옳은 건 아니더라도, 서로에 대한 분노와 혐오의 한복판에서 이성과 대화를 중시한 점이 양측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현대 개신교계는 에라스뮈스를 루터와 영향을 서로 주고받은 (비록 개신교 종교개혁가는 아니지만) 종교개혁가로 인정하고 있는 추세이며, 가톨릭 내부에서 가톨릭 개혁운동을 벌인 온건주의자로 (비록 가톨릭 신학적으로 비정통에 속하지만) 꽤 예우해준다. "외부로부터의 충격요법을 시도했던 다른 종교개혁가보다, '내부에서의 개혁'이라는 훨씬 어려운 길을 걸었다"면서 존경하는 시선도 있다. 교파 불문하고 한국 개신교 신학대학에서 에라스뮈스를 반드시 언급한다. 학부 과정에서는 루터파 파트를 공부할 때 반드시 언급하고, 대학원 과정에서는 꽤 비평적으로 분석한다.

종합적으로, 에라스뮈스의 신앙심은 다음과 같이 평가될 수 있다:
역사 서술의 입장에서 에라스무스의 모습은 인문주의의 다른 위대한 대변자들에게 유보된 것과 동일한 대우를 받고 있다. 1700년대와 1800년대의 역사 기술은 에라스무스를 종교개혁의 선구자요 루터의 동맹자,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의 기수로 보았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에 대한 최근의 역사 기술에서는 인문주의를 종교적-가톨릭적 의미에서, 정신 문제들을 강하게 느낀 운동으로 개정해 나아가는 맥락에서 재해석한다. 즉 역사 기술은 당시의 에라스무스를 문화적, 종교적 문제들에 민감한 가톨릭 지성인이자 진실한 신자로서, 또한 복음적인 진리를 통해 스콜라 시대의 복잡하고 추상적이며 난해한 언어보다 분명하고 단순하며 이해 가능한 언어를 찾고자 노력했던 한 신학자로 바라본다. 에라스무스의 ‘그리스도교 철학’과 ‘성경신학’은 정확히 말해 바로 이러한 요청들에 응답을 하고자 했다. 그래서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에라스무스에 관한 수많은 연구 과정에서 에라스무스의 새로운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가 무엇보다도 신학자로서, 아니 오히려 진지한 신학자로 보인다.
... 비록 에라스무스가 오랫동안 수도복을 입고 『세상을 경멸함에 대하여』De contemptu mundi라는 작품을 쓰긴 했지만, 수도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사제이자 진실한 신자였으며 최고의 가톨릭 지성인이었다.
-바티스타 몬딘Battista Mondin, 『신학사』Storia della teologia 제3권, 윤주현(역), 193-194쪽

6. 어록

막이 내릴 때까지 모두가 역할을 맡는 연극이 아니라면 인생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소경의 나라에서는 외눈박이가 왕입니다.
당신은 성인들을 숭배하고 그들의 유물을 만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들이 물려준 최고의 것, 즉 순수한 삶의 모범을 경멸합니다.
『기독교도 병사의 휴대서』
나는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파벌에 봉사할 수 없고 하지도 않을 겁니다. [18]
이 세계, 즉 지구라고 불리는 행성 전체는 그 위에서 살고 숨쉬는 모든 사람들의 공동 국가입니다. [19]
나는 내 모든 관심을 그리스어에 돌렸습니다. 돈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그리스 작가들의 책을 사는 것입니다. 그 후에 나는 옷을 사겠습니다.
Jacob Batt에게 보낸 편지(1500년 4월 12일) [20]

7. 여담

  • 자국어 발음을 우선하는 국립국어원의 한글표기 규칙에 따라 네덜란드어 발음인 '에라스뮈스'로 쓰는 것이 원칙이다. 다만, 그가 저술한 대부분의 책들이 라틴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한국 학계에서는 라틴어 발음인 '에라스무스'를 많이 사용한다.[21]
  •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이자, 독일 초상화 예술의 정점인 한스 홀바인토머스 모어에게 추천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 이 페이지에 실린 홀바인이 그린 에라스뮈스의 초상화가 에라스뮈스의 초상화들 중 가장 유명하다. 후에 홀바인은 토머스 모어헨리 8세의 초상화도 남겼다. 이들의 초상화 또한 북유럽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 특이하게도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에라스뮈스의 목조 조각상이 있는데 그 기원은 윌리엄 애덤스[22]가 타고온 선박 에라스뮈스호의 선미상(船尾像)을 누군가가 노획하여 도치기현 류코인(龍江院)이라는 절에 세워졌다고 한다. 현존하는 유물은 일본의 국보이다. 2012년부터 에라스뮈스 대학교를 주축으로 로테르담에서 반환 요청의사를 꾸준히 밝혀오는 중이나 매번 거절당하는 중이다. 네덜란드-일본 정상회의때도 마르크 뤼터 총리가 정중하게 반환의사를 보였음에도 아베 신조일본 총리는 "방법을 생각해보겠다"며 즉답을 회피했다.
  • 독일을 위한 대안싱크 탱크인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뮈스 재단 또한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다. 네덜란드 출신의 범유럽주의자인 에라스뮈스의 이름을 독일의 반EU정당인 대안당의 정책연구소에 썼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뮈스 재단 측에서는 "에라스뮈스의 자유주의 사상과 유럽적 가치관이 대안당과 일치하여 그의 이름을 땄다"고 밝혔다. #

[1] "에라스뮈스"는 그의 세례명이고, "데시데리위스"는 그가 1496년부터 추가해서 사용한 이름이다. "로테로다뮈스"는 그의 출신 지역 로테르담을 말한다. 라틴어인 이 단어들을 모두 함께 직역하면 "로테르담의 사랑받는 갈망"이 된다.[2] Collège de Montaigu. 파리 대학교 산하 인문학부(Faculté des Arts).[3] 에라스무스의 개혁적 성향 때문에 '형식적으로만 가톨릭'이라는 오해가 많지만, 에라스무스의 정체성은 분명하게 가톨릭이었고, 심지어 반교도권주의자조차 아니었다. 또한 가톨릭의 자유 의지론을 옹호하여 루터의 노예 의지론(인간은 천성이 악하여 예수와 하느님을 통하지 않고는 선을 행할 수 없는 노예 의지의 상태에 있음)과 반대되는 입장에 있었고, 가톨릭 원칙주의자인 토머스 모어와 자주 서신을 주고 받으며 친교하였다. 에라스무스의 가톨릭 신앙에 대해서는 후술.[4] 인문주의로 번역되는 독일어 'Humanismus'는 독일의 교육자 프리드리히 이마누엘 니트하머(Friedrich Immanuel Niethammer, 1766–1848)가 직업적, 과학적 교육을 강조하는 세태에 대항해서 그리스·라틴 고전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취지에서 1808년 처음 사용한 말이다. 다만 '인문주의'가 아닌 '인문주의자'는 훨씬 이전부터 사용된 고전적인 표현이다.[5] 신약성서는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어인 코이네 그리스어로 쓰였는데 이를 중세 라틴어로 번역했다.[6] 382년에 히에로니무스가 교황 다마소 1세의 명을 받고 원문에서 번역한 라틴어 성경. 중세에 이르러서는 서방교회 전체가 이것을 표준적인 성서로 사용하게 되었다.[7] 이러한 인문주의적 면모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과의 연결성에서도 중시되지만, 이 부분은 굉장히 미묘한 문제다. 외견상 에라스무스식 인문주의와 개신교는 공통점(스콜라학에 대한 반감, 성경 원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이 둘은 서로와 동일시될 수 없는 중대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가령 루터가 토착어 성경을 통해 독일 민족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을 결부시킨 데 반해서, 에라스무스는 토착어를 반대하고 국제어로서의 라틴어를 미는 확고한 세계시민주의자였다. 또한 인용 고전의 신학적 정통 여부에서 에라스무스가 루터보다 훨씬 리버럴했으며(예: 오리게네스의 잦은 참고) 은총과 자유의지의 관계, 결정적으로 교단 정체성에서 중대한 견해 차이가 있었다.[8] 대화는 당연히 라틴어로 나눴다.[9] 병자성사도 받지 못했는데, 에라스무스가 병자성사를 요청했는지 여부는 알려져있지 않다.[10] 다만 공정함을 위해 스콜라학을 옹호하자면, 스콜라학은 역사적 상황이 교부 시대나 초기 근대와 달랐다. 교부 시대는 상당 기간에 걸쳐, 헬레니즘 다신교, 마니교, 아리우스파 등이 교부들과 공존하고 있었다. 이런 역사적 상황에서 교부들의 문체는 자연스럽게 사목적, 호교적, 수사학적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상대를 설득하여 올바른(최소한 교부들이 보기엔 올바른)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해 문학적이고 명료한 화법을 사용했다. 반면 스콜라학의 시대는 이미 가톨릭이 서방을 통일한 상태였고, 유다인, 무슬림, 각종 이단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통일된 세계였던 건 분명하다. 이런 역사적 상황에서, 스콜라학자들은 호교적이고 수사학적인 '사목자의' 문체보다는 사색적이고 논리적인 '대학교수의' 문체를 사용한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둔스 스코투스 중 누가 더 옳은지는 대중과는 별 상관이 없는 신학 내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쇄술의 발명 이후 대중의 독서 수요가 급증하면서 스콜라학의 사색적이고 형식논리학적인 문체는 호소력이 낮을 수 밖에 없었고,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에라스무스는 옛 교부들의 수사학적 문체에 강한 호감을 느낀 것이다.[11] 바티스타 몬딘Battista Mondin, 『신학사』Storia della teologia 제3권, 윤주현(역), 181-182쪽[12] 원제: Moriae Encomium. (우신예찬)[13] 에라스뮈스 『우신예찬』 김남우 옮김. 열린책들. 2011. p.12~13[14] 성기를 말한다.[15] 이렇게 둘 사이의 관계가 틀어졌지만, 에라스뮈스가 루터를 싫어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에라스뮈스는 루터가 트레엔트 공의회에 의해 이단자로 낙인 찍히자 교회에 루터의 선처를 요구하기도 했다. 루터 또한 에라스뮈스와 사이가 틀어지기 전에 에라스뮈스를 따라 신약성서 독일어 번역본을 만든 만큼, 에라스뮈스의 학문적 권위는 인정했다.[16] 에라스뮈스는 루터에게 급진적 개혁을 자제할 것을 당부했다. 루터는 에라스뮈스가 유유부단하다고 판단했지만, 사실 에라스뮈스는 루터의 급진적 개혁으로 인해 교회 내 강경 세력이 확고해져, 결국 교회가 영구히 분열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17] 가톨릭에서도 루터교에서도 교회론은 신학의 대상이다.[18] 여기서 파벌은 기독교 파벌을 말한다. 출처: Spongia adversus aspergines Hutteni (1523), § 176, As quoted in Desiderius Erasmus of Rotterdam (1900) by Ephraim Emerton, p. 377[19] This world, the whole of the planet called earth, is the common country of all who live and breathe upon it. (The Complaint of Peace, 1521)[20] Ad Graecas literas totum animum applicui; statimque ut pecuniam accepero, Graecos primum autores, deinde vestes emam. (에라스무스 전집 1집; 1974))[21]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관용어를 허용하기 때문에, 에라스무스를 쓰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22]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 된 영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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