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1-22 15:07:53

조르다노 브루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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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무한하게 퍼져 있고 태양은 그중에 하나의 항성에 불과하며 수많은 항성들은 각각의 지구를 거느리고 있다.
Giordano Bruno
1548년 ~ 1600년 2월 17일
1. 개요2. 라이프스타일3. 그의 우주론4. 사형5. 사후6. 평가
6.1. 지동설을 주장해서 죽임을 당했다?
7. 기타

1. 개요

이탈리아도미니코회 수도자이자 철학자. "La Cena de le Ceneri"와 "De l'infinito universo et mondi"에서 무한 우주론을 주장하였으며 교황청에 의해 화형을 당해 생을 마감했다.

2. 라이프스타일

1548년 나폴리 왕국의 놀라(Nola)에서 직업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스 고전문학, 논리학, 변증법을 배웠으며 로마 가톨릭교회의 도미니코회의 수사로 활동했으나, 후에 개신교인 칼뱅파로 개종했다. 가톨릭교회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을 것을 우려하여 1576년에 나폴리를 떠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전설을 말하거나 학문을 가르쳤다. 브루노는 라틴어·희랍어에 능통하였고 다방면에 박식하였으며 신플라톤주의의 피치노나 피코 등의 영향을 받고 있어 마법이나 점성술에도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591년 베네치아 공화국(현재의 이탈리아의 일부)에서 잡혀 8년 간의 감옥 생활을 했다. 그는 자신의 몇몇 사소한 신학적 오류는 시인했지만, 자신의 기본 교의의 신학적 성격보다는 오히려 철학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을 변호했다. 종교재판소의 재판관들은 브루노에게 자신의 이론을 무조건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브루노는 그러나 자신의 견해가 신과 창조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견해와 양립할 수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은 철회할 것이 전혀 없다고 자신의 과학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브루노는 로마 교황청 이단 심문소로부터 이단의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아 로마에서 공개적으로 화형에 처해졌다. 1600년 2월 8일. 사형 선고를 받을 때 "말뚝에 묶여 있는 나보다 나를 묶고 불을 붙이려 하고 있는 당신들(그를 사형하려는 로마 교황청 측) 쪽이 더 공포에 떨고 있다" 라는 내용의 발언으로 유명하다.

3. 그의 우주론

브루노의 발언이나 주장 가운데 가장 이단으로 여겨진 부분은 그의 세계관과 우주관이다.

16세기 후반, 코페르니쿠스의 모형은 유럽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브루노는 코페르니쿠스가 관찰보다 수학적 일관성을 중요시한 것을 비판했지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코페르니쿠스에 동의했다. 그렇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이론 안에 있는 "천구는 불멸하며, 지구, 달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라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브루노가 활동하던 시기의 코페르니쿠스 모형은 아직 논리적 결함이 많았고, 천동설이 더 명쾌하게 설명하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동의하는 천문학자는 거의 없었다. 이 시기의 요하네스 케플러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아직 젊은 사람들이었다. 브루노는 천문학자는 아니었지만, 가장 빠른 시기에 지구 중심설과 천동설을 배척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세계관을 받아들였다.

브루노의 주장에서 가장 획기적이었던 것은 "지구 자체가 회전하고, 따라서 지구상에서는 천체가 회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브루노는 우주가 유한하지 않다고 주장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세상의 중심은 지구 또는 태양이다"라는 논리를 초월하여 3세기 플로티노스와 같은 사상, 즉 우주의 중심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는 당대 천동설지동설을 주창하던 양 측이 보편적으로 따르던 "우주는 유한하다"는 믿음에 반하는 생각이었다. 브루노는 태양 주위의 행성들, 즉 태양계와 같은 시스템은 우주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라고 생각했다.

브루노는 천구에서 움직이지 않는 들이 바로 항성이라고 주장하였고, 빛과 열을 발산하는 항성과 그 주위를 돌며 빛과 열을 받는 행성을 구분하였다. 브루노는 고대 원소설(물, 공기, 불, 흙)은 믿고 있었지만, 우주가 특별한 물질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와 똑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지구상에서 보여지는 운동 법칙이 우주 어디에나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무한한 존재인 이상, 무한한 우주를 창조하는 것이 아무런 이상한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우주와 시간은 무한하며, 무한히 넓은 우주엔 지구가 아닌 곳에도 생명체가 존재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는 오로지 지구만이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당시의 기독교적 우주관을 뒤집는 것이었다.[1]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우주의 항성과 항성 사이에 있는 무수한 거리는 에테르에 의해 충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마법과 점성술, 신학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우주가 수학적 계산을 통해 분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별들의 의지에 의해 운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애니미즘적 우주관은 브루노 우주론의 특징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도덕관을 비판하는 한편, 성경은 도덕적 가르침을 위함이지 천문학적 함의가 아니라고 일축하기도 하였고 예수는 하느님이 아니라 마법사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4. 사형

정해진 해석 외의 나머지 모든 것을 부정하는 로마 가톨릭교회 주도의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브루노의 생각은 이단으로 몰아졌다. 권위적인 종교기구들만이 할 수 있는 성경의 해석에 반대되는 이러한 생각들은 일개 인간이 성경을 재해석 한 것으로 판단되었으며 이는 곧 신에 대한 불경이었다.

로마에서 그는 8년 동안 잔혹한 심문을 당하며 산탄젤로 성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예수회의 추기경인 로베르토 벨라르미노가 주재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종교 재판 심리 과정의 일부 중요한 문서들이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어떤 문서는 남아있으며, 그중 하나는 1940년에 발견된 요약집이다. 그가 지은 책과 그가 증언했던데 대한 혐의를 받고 있었으며, 죄목에는 신성모독, 비윤리적 행동, 교리에 대한 이단적인 해석, 그리고 그의 철학과 우주론에 대한 이론들에 대한 것이었다. 루이지 피르포(Luigi Firpo)는 다음과 같은 목록을 전한다.

1.기독교 믿음과 교리에 배치되는 의견.
2.삼위일체를 부인함.
3.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함.
4.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의견.
5.성체미사에 대한 다른 의견
6.복수의 세상이 있으며, 그들의 영원성을 주장함.
7.윤회와 인간 영혼이 짐승에게 들어간다고 믿음.
8.마법을 연구하고 점을 침.
9.성모 마리아의 처녀성을 부인함.

브루노는 베네치아의 자기변호에서 교회의 교리적 가르침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철학을 유지했다. 특히 브루노는 세상이 하나뿐이 아님을 믿었는데,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그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화형될 것이라는 협박에 회개하지 않았다. 그는 벨라르미노 추기경에게 "나는 내 주장을 철회해야 할 이유가 없고, 그러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철회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사형 선고가 내릴 때, 그는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은 채 자신을 기소한 사람들에게 "내 형량이 선고되는 것을 듣는 나 자신의 두려움보다 당신들의 두려움이 오히려 더 클 것이다"라고 말했다.

선고가 내려진 직후 예수회 사제들은 브루노의 턱을 쇠로 된 재갈로 채우고, 쇠꼬챙이로 혀를 꿰뚫었으며, 또 다른 꼬챙이로 입 천장을 관통시켰다. 1600년 2월 19일 일요일. 브루노는 망토를 입은 집행관들이 이끄는 수레에 실린 채 구경거리가 되어 로마 거리를 끌려다녔다. 예수회 사제들은 그를 발가벗긴 뒤 불태워 죽였다.

5. 사후

브루노의 저작물은 모두 1603년에 금서목록에 추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작의 대부분은 파리, 런던, 프랑크푸르트 등 이탈리아 반도 밖에서 출판되기 시작했다.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서는 철학자 피에르 벨과 마랭 메르센이 저작 속에서 브루노 철학을 거론했다. 수학자 요한 베르누이는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르네 데카르트의 우주론이 브루노 우주론의 표절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의 사상가 존 톨런드는 브루노의 글을 영어로 번역해서 적극적인 보급 활동을 실시했다. 그 톨런드의 영향 때문인지, 프랑스의 익명 자유 사상가에 의해 지하 문서 "조르다노 브루노 부활 '이 적혀 광범위한 독자를 얻었다.

19세기부터 독일에서의 범신론 논쟁 속에서 프리드리히 셸링은 브루노를 주인공으로 한 대화편 '브루노'를 저술했다. 또한 이탈리아의 통일이 고조되는 가운데 이탈리아에서 브루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저서의 편찬 및 전기 고증 등 실증 연구가 이루어지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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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빅토르 위고를 비롯한 당대의 유럽 지식인들은 브루노를 기리며 1899년에 그가 화형당했던 광장에 동상을 건립했고[2] 거기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브루노에게, 그대가 불에 태워짐으로써 그 시대가 성스러워졌노라.
그리고 그 날 교황 레오 13세는 89세의 나이에 노구를 이끌고 성 베드로 광장에서 몸소 단식기도를 바치면서 무언의 항의를 보냈다

조르다노 브루노의 명예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이다. 가톨릭 교회의 역사 잔재 청산을 호소하며 사회운동이 시작되었고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브루노에 대한 재판 과정을 다시 조사하도록 명령했다. 그 결과 "사형 선고는 부당"이라는 재심 판결이 내려졌다. 이로써 1979년 공식적으로 사형 판결이 취소되었다. 브루노가 처형된 지 무려 379년 만이다. 2000년에는 브루노 처형 400주년을 맞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접 폭력적인 사형 선고와 집행에 대하여 사과하였다.

6. 평가

조르다노 브루노는 당대 기준으론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정론과 위배되는 이론을 펼친 사상가였다. 또한 그는 수학적, 물리학적 연구를 통해 진리에 접근하는 천문학자가 아니라 이념과 연역적 사고로 자신만의 우주론을 만든 철학자였다. 때문에 브루노를 과학자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은 회의적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브루노는 자신이 몸담은 종교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고 사회 비판, 천문학적 의견 피력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쏟은 자유 사상가였다는 것이다. 브루노의 죽음이 기려지는 것은, 그가 주류 의견을 거슬렀다는 이유로 사형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고 이는 사상에 대한 억압의 폐해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이자 역사적 교훈이기 때문일 것이다.

6.1. 지동설을 주장해서 죽임을 당했다?

흔히 브루노가 지동설을 주장해서 죽었다고 잘못 알려져있으나, 사실 지동설 때문에 죽었다기 보다는 종교관이 당시 카톨릭의 종교관과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써먹기가 워낙 좋은 소재였기에 몇몇 과학자들에게 '이용'당했다. 대표적인게 칼 세이건인데, 그는 자신의 저서 코스모스에서 브루노를가 과학의 영웅이자 순교자인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의 우주에 대한 시나 생각에는 지동설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는 과학자가 아니었으며, 그의 죽음 역시, 코스모스에 묘사된 것 처럼 순수한 과학적 이유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브루노는 연금술의 신인 헤르메스와 이집트의 신 토트의 영향을 받았고 이의 영향으로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교회가 그를 10년 동안 감옥에 가둔 이유는 신비주의적 사고를 포기하라고 가둔 것이었다. 마리아의 처녀성 부정, 윤회설 주장, 마법 연구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동시 부정, 삼위일체 부정 범신론적 사고 이런 사유로 죽은 것이지 지동설 때문에 희생당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브루노는 철학자지 과학자는 아니었다. 후세에 과학적 진실을 위해 희생까지 한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과학적 진실을 지키려고 죽은 게 아니라 자신의 철학으로 교황청에 저항하다가 죽은 게 더 맞는 말이다. 순교자로 묘사되는 이유는 지동설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동설자들 역시 우주가 유한하다고 생각했고 다른 별들은 박혀있다 라고 생각했지 브루노 처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의 주장은 어떻게 보면 양쪽의 의견과 다 반하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노의 이야기는 도그마에 대항한 진실이자 종교에 대항한 과학으로 포장되어 전달되고 있으며, 이는 역사가 우화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7. 기타

코스모스(2014년도판 리부트) 의 제 1화(Standing Up in the Milky Way, 은하수에 서서)에 소개되었다.

Avenged Sevenfold 의 7집 The Stage의 9번째 수록곡 Roman Sky의 모티브가 되었다.
[1] 조르다노 브루노를 다룬 글에서 마이클 화이트는 이렇게 지구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생명체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그 생명체들이 신적 현상을 경험했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게 하기 때문에 당대에는 생각할 수 없는 주장이자 가장 위험한 생각이었을 것이라고 보았다.[2] 동상 건립이 허가된 데에는, 당시 이탈리아의 수상이었던 프란체스코 크리스피와 교황 레오 13세 사이의 갈등 또한 한몫했다(출처: 『로마의 역사』(장 이브 보리오 지음, 박명숙 옮김) P50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