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스타브 카유보트 Gustave Caillebotte | |
자화상 | 귀스타브 카유보트 作, 오르세 미술관 소장 | |
<colbgcolor=#c2b6ba,#c2b6ba><colcolor=#474359,#474359> 출생 | 1848년 8월 19일 |
프랑스 공화국 파리 | |
사망 | 1894년 2월 21일 (향년 45세) |
프랑스 공화국 오드센 젠빌리에 | |
학력 | 파리 대학교 (법학 / 학사) 파리 보자르 |
직업 | 화가 |
부모 | 아버지 마르샬 카유보트 어머니 셀레스트 도프렌 |
형제 | 남동생 르네 카유보트 남동생 마르샬 카유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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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화가.2. 생애
귀스타브 카유보트는 1848년 8월 10일 파리에서 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는 파리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지만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참전했다가 귀환한 이후 방향을 틀어 미술을 공부했다.1873년 에콜 데 보자르에서 사실주의 화가 레옹 보나(Léon Bonnat)의 문하생이 되었고, 1874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젊은 나이에 부호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 마르시알 카유보트는 군수물자 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기 때문에 물려줄 재산이 많았다. 덕분에 카유보트는 미술 수집가이자 인상주의 화가들의 후원자가 되었다.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1874)의 기획과 후원을 맡았고, 제2회 인상주의 전시회(1876)에는 직접 참가해 <마루를 깎는 사람들>을 출품했다.
1881년 에드가 드가와 의견을 달리하며 모네, 르누아르와 함께 제6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불참했고, 1882년에는 드가가 불참한 가운데 모네, 르누아르와 함께 제7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그림을 출품했다. 강 주변의 풍경과 역동적인 모습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카유보트는 1894년 쥬느빌리에르에서 사망했다. 유언에 따라 그가 모은 작품들은 프랑스 정부에 기증되었다. 이 미술품들이 오늘날 오르세 미술관의 인상주의 컬렉션을 구성하고 있다.
카유보트는 오랫동안 화가라기보다 수집가로 알려져 있었다. 카유보트의 재능은 뛰어났지만, 집안이 부유한 관계로 자기 그림을 팔아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후 기증한 작품 목록에도 카유보트 자신의 그림은 빠져 있었다. 남아 있는 그의 작품들은 친척들이 상속해 소장하고 있던 것들이다. 이런 이유로 카유보트는 형편이 어려운 동료 화가들의 그림을 꾸준히 사들이고 재정적으로 지원했던 것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난 1950년대, 고국 프랑스도 아닌 미국에서였다. 점차 수집가들 사이에서 이름이 알려지던 카유보트는 1970년대 전시회에서 본격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카유보트의 화풍은 모네, 르누아르 등 당대를 풍미한 인상주의 화가들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대상을 해체하며 즉흥적인 인상주의 기법을 사용하지 않고, 치밀한 준비와 사실적인 묘사로 파리의 현대적인 모습을 담아냈다.
카유보트는 1894년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일드프랑스의 소도시 예르(Yerres)에는 그의 집안이 소유했던 저택 부지가 보존되어 있다. #
3. 대표작
마루를 깎는 사람들 (1875) (Les raboteurs de parquet) 오르세 미술관 |
예르 강, 비 (1875) (L'Yerres, pluie) 인디애나 대학교 에스케나지 미술관 |
창가의 젊은 남자 (1876) (Jeune homme à sa fenêtre) J. 폴 게티 미술관 |
파리의 거리, 비 오는 날 (1877) (Rue de Paris, temps de pluie) 시카고 미술관 |
지붕 위의 풍경 (눈 온 뒤) (1878) (Vue de toits (Effet de neige)) 오르세 미술관 |
4. 여담
- 카유보트는 평생 미혼인 채로 살았으나, 샬롯 베르티에(Charlotte Berthier)라는 11살 연하의 여성과 진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