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어: الهجوم على صحيفة شارلي إبدو
프랑스어: Fusillade au siège de Charlie Hebdo
영어: Charlie Hebdo shooting
1. 개요
자유가 암살당하다 - 르 피가로지의 헤드라인 |
이 테러 이후 2015년 11월 13일에 2015년 11월 파리 테러가 같은 도시에서 일어났고 2년 후인 2016년 7월 14일에는 2016년 니스 테러가 일어나고 말았다.
영상에는 2명이 찍혔으나, 용의선상에 오른 사람은 세 명이었고 그중 한 명은 무혐의 처리되었다.
범인들은 AK 자동 소총과 RPG를 소지하고 있었으며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며 총기를 난사하였다고 보도되었다.
사망자는 필명 카뷔, 샤르브, 팅우, 본명 조르주 볼린스키 등 만화가 및 편집장을 포함한 직원 10명과 경찰관 2명이다. 사망한 경찰관 중 한 명은 무슬림이었는데 항복하는 경찰을 범인들이 확인 사살 하는 모습이 목격자들이 찍은 영상[1]에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이 영상은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로 퍼졌다.
전 유럽이 이 테러에 충격과 분노의 반응을 보였으며 11일 일요일에 파리에서 열린 추도 집회에 유럽의 지도자들이 집결했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필두로 유럽 연합 상임 의장,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이탈리아의 마테오 렌치 총리, 스페인의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 스웨덴의 스테판 뢰벤 총리, 튀르키예의 아흐메트 다우트오울루 총리 등 총 34개국 정상들이 참가했다.
에펠탑을 순찰 중인 프랑스 육군 제1외인공병연대 부대원들. 프랑스 국가경찰과 프랑스 헌병대 역시 평시의 근무복이 아닌 기동복을 입고 나왔다. 당시 프랑스 특경대, 당시 프랑스 국가 헌병대 사진 |
2015년 1월 8일 당시 프랑스 재난 경보 상황. 프랑스 전역에 주의보가 발령되었으며 파리와 북부에는 아예 준전시 상황에 가까운 4등급 테러 경보가 발령되었다.
1.1. 샤를리 엡도
"나는 보복이 두렵지 않다. 나는 아이도, 아내도, 차도, 신용도 없다. 약간의 허세를 보태자면, 나는 무릎 꿇고 사느니 선 채로 죽겠다."
- 샤를리 엡도 편집장 스테판 샤르보니에, 2012년 르몽드와 인터뷰에서#
- 샤를리 엡도 편집장 스테판 샤르보니에, 2012년 르몽드와 인터뷰에서#
샤를리 엡도는 이슬람에 대한 풍자를 자주 하던 언론으로 알려져 있다.(그간의 풍자 모음) 신좌파 성향이긴 하지만, 정확히는 성역 없는 비판과 풍자를 모토로 풍자, 시사만화를 싣는 시사 주간지이며 이슬람은 물론 나치, 샤를 드골, 기독교, 예수, 역대 교황(베네딕토 16세는 물론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리비아에 파병을 승인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심지어는 국민 전선의 마린 르펜과 이슬라모포비아까지 풍자하던 잡지사였다. 종합하자면 대체로 논조는 '모두 까기'에 가까웠던 언론사였다. 테러당하기 전 샤를리 엡도의 가장 최신 호 커버 스토리는 이슬라모포비아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기사
2011년에 이슬람을 풍자한다며 자신들의 회사명을 샤리아 엡도로 고치고 편집장이 무함마드라는 소식을 내자 화염병 테러를 당한 전적이 있다. 때문에 사건 이전에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행위' 또한 표현의 자유라는 말로 용인될 수 있는지 프랑스 안팎으로 논쟁을 불러일으키던 곳으로 폐간된 지 10년 뒤에 재발간했던 역사가 있다.
아랍을 뒤집어 놓은 프랑스 풍자주간지 《샤를리 엡도》의 무함마드 캐리커쳐 논쟁 - 표현의 자유인가?..., 한국디지털만화규장각, 2012년 9월 28일 샤를리 엡도의 역사가 설명된 기사.
이들은 테러 직전에도 2014년까지 프랑스를 공격하겠다는 IS의 선전에 ISIL과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를 조롱하는 만평을 올렸다.
프랑스에는 아직 테러가 없다. |
테러리스트: 잠깐, 기다려. 1월 말까지는 인사를 할 시간이 있거든. |
ISIL의 협박이 씨알도 먹히지 않음을 조롱하려고 그린 만평이다. 프랑스는 전통적인 신년 축제를 1월 말에 한다. 저 만평은 "너희들이 말하는 2014년이 다음 해 1월까지였구나?"라고 까는 내용이다. 그런데 2015년 11월 파리 테러가 일어나며 현실화되었다.
1.2. 희생자 명단
만화가 희생자 | |||
스테판 샤르보니에 (샤를리 엡도 편집장, 필명 샤르브, 1967년 8월 21일 ~ 2015년 1월 7일)[2] | 장 카뷔 (필명 카뷔, 1938년 1월 13일 ~ 2015년 1월 7일)[3] | 조르주 볼린스키 (1934년 6월 28일 ~ 2015년 1월 7일) | 베르나르 벨라크 (필명 팅우, 1957년 8월 21일 ~ 2015년 1월 7일) |
그 외 샤를리 엡도 총격 테러 희생자 | |||
프레데리크 부아소 | 향년 42세, Sodexo사의 샤를리 엡도 건물 관리 기술자 | ||
프랑크 브랭졸라로 | 향년 49세, 경찰, 샤를리 엡도 건물 경호 담당 | ||
엘자 카이아트 | 향년 54세, 심리 분석가 겸 칼럼니스트 | ||
필리프 오노레 | 향년 74세, 만화가 | ||
베르나르 마리스[4] | 향년 68세, 경제학자, 칼럼니스트 겸 편집자 | ||
아흐메드 메라베 | 향년 42세, 경찰, 무슬림. 총기 난사 당시 출동했다가 총에 맞았고 습격자들에게 자비를 구했으나 지하디스트들에게 확인 사살 당했다.[5] | ||
무스타파 우라드 | 교정원 | ||
미셸 르노 | 전직 저널리스트, 사건 당시 샤를리 엡도를 방문 | ||
몽루주 총기 난사 희생자 | |||
클라리사 장필리프 | 경찰, 아메디 쿨리발리의 총기난사 공격으로 사망 | ||
포르트 드 뱅센 인질극 희생자 | |||
이오아브 아타브 | 유대인, 향년 23세, 대학생. 튀니스 랍비장의 아들 | ||
필리프 브라암 | 유대인, 향년 45세, IT업체 사원 | ||
이오안 코앙 | 유대인, 향년 23세, 대학생. | ||
프랑수아미셸 사다 | 유대인, 향년 64세, 은퇴 노인 |
1.3. 범인
프랑스 국가경찰은 테러 주동자로 사이드 쿠아시(سعيد كواشي, Said Kouachi, 34)와 셰리프 쿠아시(شريف كواشي, Cherif Kouachi, 32) 형제를 지목하여 공개 수배했다. 그 외에도 이 사람의 주변인이었던 여러 사람들이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
용의자 중 한 명인 아미드 무라드(Hamyd Mourad)는 경찰에 자수하였다. 그는 친구들과 식당에서 식사 도중 자신의 얼굴이 방송에 나오면서 수배된 상태임을 알고 놀라 자수했다. 하미드가 용의선상에 오른 이유는 지하디스트들이 사용한 자동차에 그의 신분증이 남았기 때문이나 그는 자신이 무고하다고 주장했다.[6] 경찰은 아미드 무라드를 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1월 9일, 해당 테러의 용의자들인 쿠아시 형제들이 다마르탱앙고엘레(Dammartin-en-Goële)에서 인질극을 벌이고 있다는 속보가 나왔고 샤를 드골 공항의 활주로 두 곳이 폐쇄되었다. 현지 시각 4시(한국 시각 1월 10일 오전 1시)에 프랑스 국가 헌병대 GIGN과 프랑스 경찰 특공대 RAID와 GIPN의 공동 진압으로 사살되었다.
쿠아시 형제가 사살당한 장소에서 RPG-7과 화염병이 들어 있던 무기 상자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사건 초반에는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가 주요 의심선상에 올랐으나 관련 증언이 나옴에 따라 알카에다 아라비아반도 지부(AQAP)의 소행으로 확실시되었다가 곧이어 터진 인질극을 통해 사실상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와 알카에다의 합작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의 새로운 형태라 미국에서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좌측 남성은 아메디 쿨리발리(Amedy Coulibaly), 우측 여성은 알제리 이민자 출신 하야트 부메디엔(Hayat Boumeddiene). 부부 관계이다.
1월 8일 파리 남부 몽루즈에서 경찰을 대상으로 한 총기 난사 테러가 일어나 한 여성 경찰관이 사망했다. 초기에는 별개의 사건으로 보였으나 곧 이 사건 역시 샤를리 엡도 테러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경찰관 총기 난사의 범인인 쿨리발리는 곧 파리 시내에 있는 한 코셔 푸드 식료품점에서 인질극을 벌였다. 쿨리발리는 쿠아시 형제가 사살된 시각과 같은 시간에 프랑스 경찰의 진압 작전으로 사살되었으나 인질 4명이 살해당한 채로 발견되었으며 4명 모두 유대인이었다. 정보 혼선으로 진압 당시 사망자 4명, 중상자 4명, 경찰 2명 부상으로 보도되었으나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 사망자는 나오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현장에서 도주한 여성은 하야트 부메디엔으로 밝혀졌으며 쿨리발리가 그녀의 남편이자 이 사건의 공범으로 공개 수배가 내려졌다.
도주한 범인인 부메딘은 1월 11일 기준으로 프랑스에서 출국하여 시리아로 도망친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이 여성이 샤를리 엡도 사건이 있기 전인 1월 2일에 프랑스를 떠나 튀르키예로 도주했고 프랑스 국내의 지하디스트 양성 캠프에서 훈련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이에 대해 프랑스 당국이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워졌다.
아메디 쿨리발리는 인질극 도중 한 언론에 전화 통화로 자신이 이슬람 국가(IS) 소속이라고 밝혔으며 '쿠아치 형제가 샤를리 에브도를 맡고 자신은 경찰관을 맡았다'고 말해 사실상 IS와 알카에다가 공모했음을 인정했다. 이 두 단체가 손을 잡은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쿨리발리와 쿠아시 형제는 프랑스 내에서 활동하던 한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단체에 같이 소속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쿨리발리의 경우 과거 이슬람 국가의 지하드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모병 영상까지 찍은 것이 밝혀졌다.#
주범인 쿠아시 형제들에 대해 주변 이웃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장애인 시설에서 자발적으로 자원봉사를 할 만큼 박애 정신을 갖고 있었다.", "극단적인 이슬람주의를 갖고 있다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았다"고 증언했기 때문에 더욱 무슬림에 대한 공포심을 확산시켰다.
다만 독일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쿠아시 형제 중 동생은 벌써부터 당국에서도 주시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2008년에 알카에다 후원 문제로 형을 선고받았는데 집행유예로 풀려난 걸로 보인다. 또 워싱턴 D.C.발 보고에 따르면(이것도 독일 언론의 보도) 쿠아시 형제는 둘 다 수년 전부터 미국의 항공 금지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던 모양.
그런데 코셔 푸드 마켓에서 일하던 무슬림 알바생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그곳에 있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피해를 최소화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라사나 바틸리(Lassana Bathily)는 테러리스트가 경찰들과의 대치 상태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가게에 있던 인질들을 대부분 지하의 냉동 창고에 피신시키고 행동을 자제시킨 뒤 불을 꺼 테러범이 알아채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후 식품 운반용 엘리베이터를 통해 바깥으로 도망쳐 나와 경찰들에게 인질들을 지하에 피신시켰음을 알렸다. 그가 아니었으면 테러범은 지하드를 한다는 명목으로 현장에 있는 유대인들을 다 쏴 죽였을지도 모른다. # 이 알바생은 말리 출신으로, 프랑스 당국은 그에게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나는 유대인을 숨긴 것이 아니라 인간을 숨겼다"라고 말했다.
2020년 12월 8일에는 프랑스 검찰이 14명의 공범에게 최저 징역 5년에서 최고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2020년 12월 16일에는 프랑스 법원이 쿠아시 형제와 쿨리발리에게 무기를 제공한 혐의로 기소된 알리 리자 폴라와 하야트 부메디엔에게 징역 30년을, 핵심 공범으로 지목되었고 이미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모하메드 벨후세인에게 종신형을, 나머지 공범들에게는 죄질에 따라 각각 징역 4년, 8년, 13년, 18년, 20년 등을 선고했다.#
1.4. 반응
"플래카드가 없는 사람은 펜을 들어요! 펜이야말로 그들의 무기였으니!"
- 파리 추도 시위대 중에서 출처
- 파리 추도 시위대 중에서 출처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하나 됨입니다."
-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파리 공화국 광장에 운집한 추도 시위대들 |
독일 쾰른의 플래카드 '나도 샤를리다' | 영국 넬슨 기념상 앞에서 펜을 든 시위자 |
비록 논란이 많은 잡지사였지만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비판에 대해 테러로 답한 사건이기에 전유럽이 '자유가 암살당한 사건' 같은 수사들을 써 가며 샤를리 엡도의 직원들을 추모했다. 캐나다 몬트리올에서도 영하 21도에 가까운 날씨에도 1000여 명이 구 프랑스 식민 의사당에 모여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시위를 벌였다.
샤를리 엡도는 프랑스의 비판의 자유의 아이콘이 되었다.
또 SNS를 중심으로 샤를리 엡도의 저널리스트들을 추도하는 #JeSuisCharlie[7] 운동이 진행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지하디스트들을 이긴 것은 총이 아니라 펜이었다며 플래카드가 없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펜을 들고 누구도 언론의 자유를 부술 수 없다는 의지의 시위를 진행했다.
이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들인 만화가들도 앞다투어 Je Suis Charlie 운동에 동참했다.#1#2
한국의 만평가들도 이 참사와 관련된 만평을 그렸다.한국일보 중앙일보 국민일보 그 외
문화적, 민족적, 종교적, 그리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다음의 만평을 즐겨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미국 잡지 뉴요커에서 2006년 2월에 올렸던 정치적 올바름이 비판의 자유를 막아서는 안 된다는 만평이 트위터에서 재조명받았다.
미국에서는 총기 난사가 일어난 것에 대해 총기 규제 방안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여론도 제기되었다. 샤를리 엡도 총격 테러가 일어난 거리는 "Gun Free Zone", 즉 총기 금지 구역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여론은 총기 금지 구역은 당연히 테러리스트들과 범죄자들에게는 "Target rich environment"이며 마음 놓고 활동할 수 있는 곳을 정부에서 만드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다만 이 사건에 대해 만세삼창을 하며 쾌재를 부르는 이들도 있었는데 바로 이슬람 국가 지하드주의자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수니파 무슬림들이다. 이들은 아예 #JeSuisKouachi[8]라는 해시태그까지 달아 가며 어그로를 끌었다.
"멍청함은 승리할 수 없다"
이에 샤를리 엡도 테러에서 생존한 필진들은 성역 없는 풍자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세계 각지에서 샤를리 엡도의 폐간을 막기 위한 후원이 들어왔으며 원래 예정되었던 다음 주간지의 인쇄 부수를 백만 부가량 늘리기로 결정했다.# 이는 이슬람에 대한 비평을 틀어막아 버리려는 무슬림들에게 카운터로 작용할 수 있게 되었다.한편 이 사건에 다른 방향으로 쾌재를 부르는 쪽이 있었는데 이전부터 반이민, 반외국인 정책을 주장하던 국민 전선의 마린 르펜 등 프랑스 내 극우파들이다. 말 그대로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 재빠르게 여론에 편승하여 자신들이 이전부터 표현의 자유를 중요하게 여기며 이슬람과의 전쟁을 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작 샤를리 엡도가 르펜을 풍자한 만평을 내놨을 때는 르펜도 이들을 고소한 적이 있었다. 다만 르펜은 이슬람 극단주의 타파라는 명목을 들이대며 무조건적인 이슬람 까기를 자제하는 편이다. 르펜은 무슬림 하류층 표도 의식하거니와 이슬람권 북아프리카 나라에서 프랑스가 경제적, 정치적 이득을 취하는 게 많기에 저런 말을 겉으로나마 하고 있긴 하다.
그리고 보통 이런 사건이 벌어지면 그 즉시 사회단체로부터 이슬람 공포증을 경계하는 움직임과 목소리가 나왔지만 당시에는 정말 상황이 안 좋았다. 다른 사건도 아니고 언론사를 겨냥한 데다 수법 또한 무자비하고 잔혹하기 그지없어서 이런 사건이 일어날 때면 나오는 "일부만 보고 전체를 비하하지 말자"는 외침이 씨알도 안 먹힐 정도로 분위기가 악화되었다. "당신 곁에 있는 무슬림이 그 일부의 광신적인 무슬림이 아니라는 보장은 어딨는가? 관용에 목숨을 걸 수는 없다."는 반응이 나올 정도였다.
게다가 이 사건에 대한 프랑스 내의 이슬람 학생들의 반응이라는 기사는 반이슬람 정서에 그야말로 불을 지를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르몽드 기사 이 기사의 내용을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학생들은 "이슬람을 모독한 샤를리 엡도의 기자들만 죽었어야 했는데 경찰을 포함한 무고한 인명까지 희생돼서 유감이다"라고 답했다.
이것이 모든 무슬림들의 생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이 사건에 대해 이런 식으로 당당하게 인터뷰에 응했다는 점 자체만으로도 이슬람에 대한 여론은 충분히 악화되고도 남을 것이었다. 해당 기사에는 "이슬람권 학생들이 '생명의 존엄성'보다 '종교에 대한 자존심'을 더 우선시하는 것에 대해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내용까지 덧붙였다.
그리고 샤를리 엡도의 만평이 이슬람에 대한 모독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로 샤를리 대신 사건 현장에 출동했다가 죽은 경찰 아흐메드를 추모했다. 일명 #JeSuisAhmed.[9] 다만 이 운동은 '샤를리는 죽어도 싸다'는 의사를 대놓고 말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내 형제는 무슬림이었고 두 명의 테러리스트에게 죽었다. 그들은 가짜 무슬림이다"
- 말렉 마라벳, 총격 테러 당시 순직한 아흐메드 마라벳의 형제
- 말렉 마라벳, 총격 테러 당시 순직한 아흐메드 마라벳의 형제
물론 무슬림 사회의 모든 반응이 이런 건 아니다. 이 테러를 규탄한 무슬림들도 있다.#
무슬림 중에 테러를 규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확실히 좋은 것이지만 사실 사건이 터질 때 단순히 목소리를 높여 규탄하는 것이야 언제나 있었던 일이긴 하다. 중요한 것은 이슬람 내의 교리 개혁이 없는 이상 말뿐인 규탄이 될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는 교황청을 중심으로 중앙 집권적인 가톨릭과는 달리 이슬람이 쿠란 외에는 구심점이 없다는 것과 하나피파, 한발리파, 말리키파, 와하브파 등 다양한 파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개방적인 무슬림들 중에는 프랑스를 예로 들면 프랑스의 가치인 자유, 평등, 박애가 곧 이슬람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Karikatürist #Bizimcity #SalihMemecan #SabahGazetesi pic.twitter.com/JNleGBQbB5 — Salih Memecan (@Memecan_Salih) 2015년 1월 8일
만평가(Karikatürist): "농담이었어"(Şakaydı)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세속 국가인 튀르키예에서도 추모 만평이 나왔다. 또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사건 직후 올랑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애도를 표했다. 아흐메트 다우트오울루 총리와 함께 공식 연설에서 테러리스트들을 비난하며 "테러에 있어 종교나 민족은 어떠한 이유가 있더라도 그 원인이 될 수 없음을 다시금 강조하며, 파리에서 벌어졌던 테러들은 차별과 증오의 길을 열게 한 원인이 될 것이며, 종교와 문화의 차이가 적대감을 불러오는 세태에 반대하여 모든 이들이 연대 전선을 구축해야 함을 중요하게 발언한 가운데 튀르키예는 여태까지 그래 왔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테러를 방지하고 진압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이러한 문제를 치유할 방법들을 강구하겠다."고 발언했다.
마뉘엘 발스 프랑스 총리는 이슬람 극단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10일, 파리 남부 에브리에서 연설을 통해 "테러리즘과 이슬람 성전 운동, 이슬람 극단주의 등 형제애와 자유, 연대를 깨려는 모든 것과의 전쟁", "프랑스의 가치, 종교와 정치의 분리라는 원칙에 대한 확고한 메시지가 전달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테러 규탄 시위를 언급하며 "내일 프랑스와 프랑스 시민은 자랑스러울 것이다. 모두가 참여해야 한다"고 발언하였다.기사
파리의 식료품점에서 발생한 테러의 현장이 된 곳이 유대인 상점이었고 유대인 인질 4명이 살해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는 이 사건에 대하여 '형제들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한 것'에 애도를 표했다.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수반은 파리에서 열릴 테러 규탄 시위에 참가할 예정이라고 했다. 하마스는 "의견과 생각의 차이가 살인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강조하였으나 샤를리 엡도 테러범을 하마스에 비유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비난하기도 했다.
헤즈볼라 지도자인 하산 나스랄라는 공식 성명을 통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벌이는 행태가 더욱 더 이슬람과 선지자를 모독하고 있다며 간접적으로 테러를 비판하였다.
팔레스타인(만화)의 작가 조 사코는 가디언 지에서 약자를 향한 만평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가끔 어떤 집단은 조그만 풍자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임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번역
해커 집단 어나니머스는 이 사태에 대해 지하드와의 전쟁을 선언했으며 여러 지하드주의 사이트를 해킹했다.
"다 용서한다." |
1월 13일, 샤를리 엡도의 생존자 필진들은 이 시위에서 자신들을 추도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갑자기 친구라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역겹다"는 모두 까기의 끝판왕적 면모를 보여주는 만평을 게시했다. 이 만평에 이슬람권이 분노해 샤를리 앱도를 비난했다. 무슬림이 많이 사는 필리핀 남부에서는 샤를리 엡도의 풍자를 규탄하는 시위까지 열렸다.
한편으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이중 잣대와 표현의 자유의 남용 등을 이유로 샤를리 엡도에 대한 일방적 옹호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왔다.기사[10]
한편 이 사건 이후 독일 언론들은 특이하다면 특이한 반응을 내놨다. 풍자만화가 잘 발달했고 무함마드를 풍자한 만화도 넓게는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프랑스와 달리 이웃나라인 독일은 상황이 많이 달랐다. 이 사건 이전에는 독일 언론은 이슬람을 (비판의 목적으로) 익살스럽게 묘사하는 것조차 꺼렸고 당연히 무함마드의 캐리커처를 신문지상에 게재한다는 건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사실상 언론에서 이슬람을 풍자의 대상으로 다루는 것 자체가 터부시되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터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샤를리 엡도 총격 테러 이후 다수의 독일 일간지들이 무함마드를 우스꽝스럽게 그린 캐리커처들을 신문 1면에 게재했다. 기존의 독일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샤를리 엡도에 대해 독일 언론들이 연대 의식을 보여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 후속 사건
샤를리 엡도 총격 테러와 연관성이 있어 보이지만 확증은 없으므로 주의.- 같은 날 프랑스 르망의 한 모스크에 괴한이 수류탄 4개를 투척했다. 살상용이 아니라 고무탄이었다는 듯. 1개만이 제대로 기폭하였으나 사상자는 없었다. 또 주변의 이슬람권 상가들도 약탈당했다.#
- 인질극 사건이 벌어진 날 프랑스 몽펠리에에서 보석상을 털려던 강도들이 경찰과 대치하면서 가게 직원들을 붙잡고 인질극을 벌였다. 프랑스는 이로 인해 같은 날 인질극을 세 번씩이나 겪는 초유의 사태를 맞기도 했다.
- 비판의 자유를 주장하며 샤를리 엡도의 풍자 만평을 재인용했던 독일의 언론사에 화염병이 날아들었다. 무슬림의 소행으로 추정되었지만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고.
- 이 사건으로 프랑스는 IS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 걸로 알려졌다.#
- 이 사건의 여파로 유럽 각국이 자국 내 테러리스트들을 색출하기 위해 법 집행 기관과 군대에 경계령을 내렸으며 벨기에에서 2명의 테러 조직원들이 검거되었다.
- 1월 17일, 나이지리아에서 샤를리 엡도의 만평에 대한 항의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 차량과 교회 등에 방화가 벌어졌다.
- 11월 13일 금요일, 결국 같은 도시에서 또 다른 최악의 사건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 2016년 7월 프랑스 성당에서 테러가 일어났다.
- 샤를리 엡도는 2020년에도 무함마드 풍자 만평을 실었는데 다시 반발이 나왔다가 결국 현지 시간 9월 25일 구사옥 인근에서 파키스탄 출신 18세 남성이 흉기 테러를 저질러 경찰에 체포되었다.#
- 2020년 10월 16일에는 프랑스의 어느 교사가 샤를리 엡도의 만평을 수업에 사용했다가 길거리에서 참수를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용의자는 체첸 출신의 18살 남성으로 테러 현장에서 '신은 가장 위대하다'라는 구절을 외친 것으로 알려졌다. 마크롱 대통령은 교사가 학생들에게 표현의 자유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살해되었다며 강력히 비판했다. #[진실]
3. 사건의 의미
사실 샤를리 엡도는 68 운동을 계기로 만들어진 신문사로서 그야말로 모든 종류의 권위에 대해서 거침없이 과격한 풍자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과격한 표현 때문에 화제를 많이 부른 것에 비해서는 그다지 판매 부수가 많지는 않은 마이너한 신문사였으며 실제로 자금 부족으로 정간되었던 적도 있었다.이 잡지는 과격한 풍자 때문에 서구 주류 사회에서도 그다지 달갑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이 카니 백악관 대변인은 이 잡지가 불필요하게 도발적이고 "선동적이다."라고 비판하였으며 2012년 무함마드 나체 만평 사건 발발 직후에는 로앙 파비우스 전 프랑스 외무 장관이 불에 기름을 붓는 지각이 없는 행동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기사
하지만 그에 대한 입장이 어찌 되었건 간에 언론사에 대한 잔혹한 테러 행위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미국과 서유럽권에서는 정치적이거나 공적 활동에 제재를 가하더라도 표현의 자유 자체는 존중해 왔기 때문에 이런 물리적인 탄압 시도는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무슬림들의 집단 행동으로 시위나 공관 폐쇄가 일어났을 때 대체로 샤를리 엡도가 지나치게 무슬림을 자극했다고 욕을 먹던 사건 이전과는 달리 이 사건에서 샤를리 엡도의 편집이 "무슬림을 욕하는 행동",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비판한 파이낸셜 타임스의 토니 바버는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기사 살인과 테러는 명백하게 선을 넘은 행동인 것이다.
또 악마의 시, 디 인터뷰 해킹 사건에 이어 외부 세력이 한 나라의 표현의 자유를 억지로 침해하는 사례가 일어나면서 미국과 유럽권에서는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상황이 악화된 것은 '언론인들'의 집단의식에도 의미를 둘 수 있다. 샤를리 엡도가 비록 과격한 표현을 하는 약소 언론사지만 그래도 언론이므로 사회 여론을 주도하는 기자, 편집자, 방송인들에게는 오늘의 테러가 내일은 자신들에게도 닥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여담으로 이슬람권 국가들은 샤를리 엡도와 같은 과격한 조롱에 대해서 '종교적 상징물에 대한 비하 표현' 역시 '인종 차별'과 같은 수위로 놓고 제약을 가하자는 국제적 조약을 만들려고 협력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UN에 이 같은 주장을 제출하기도 했다. 미국이 표현의 자유를 명분으로 반대하는 견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슬람권이 조용히 밀어붙였다면 이슬람권에 대한 동정 여론 때문에 실제로 이 같은 조약이 장기적으로는 성립될 수도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이런 움직임은 지체될 가능성이 생겼다. 더구나 이 테러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내가 샤를리다"라는 운동에 반발해 프랑스 무슬림들이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라는 운동을 펼쳤기 때문에 빈축을 샀다. 이들도 소수가 아니라 2만 명이 추천하고 동참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프랑스의 많은 무슬림들이 이 사건을 지지하거나 암묵적으로 묵인한 것으로 보일 수 있으므로 이슬람 공포증은 더욱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12]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중동권의 반발과 "오늘 밤 나는 '샤를리 쿨리발리'[13]처럼 느껴진다"는 글을 올렸다가 테러 선동 혐의로 체포된 프랑스 코미디언 디외도네 음발라의 사례 등 프랑스 정부의 지나친 과민 반응 등으로 인해 '표현의 자유를 외치는 서방이 정작 표현의 자유에 이중잣대를 들이댄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샤를리 엡도 테러는 표현의 자유를 힘으로 완전히 억압하려 한 사례이므로 이 논리로도 옹호받을 수 없다. 자유를 파괴하는 자를 추종할 자유는 주지 않는다. 그러나 서구권에서도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입장에선 나치를 찬양하는 것이나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것뿐 아니라 그냥 논하는 것만으로도 터부가 되거나 법적 제재를 받는 시스템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오히려 이중잣대는 이슬람은 물론 일부 종교 단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사실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 유명 인사들은 풍자를 당해도 그냥 웃어넘기거나 비판하거나 고소하는 등의 수준에서 대응할 뿐인데 종교 단체에서는 알다시피 그런 것에 격노하며 이 사건처럼 직접 살해하기까지 하며 심지어 어느 무슬림 학생은 인터뷰에서 그 만화가들은 죽어도 되나 무고한 경찰관이 죽어서 안타깝다는 드립을 날려서 경악을 주었다.
테러리즘의 관점에서 보자면 샤를리 엡도 총격 테러 사건은 기존에 알카에다가 사용하던 '외로운 늑대(Lone wolf)' 타입을 넘어선 보다 발전된 단계의 테러리즘이다. 인터넷에 테러 관련 정보를 뿌리고 거기에 접촉한 불만분자가 스스로 테러하기를 기다리던 외로운 늑대 타입은 쉽게 발각되지 않는다는 장점은 있었지만 테러리스트의 숙련도가 낮기 때문에 피해 규모에는 한계가 있었다.
알카에다는 이슬람 극단주의 반란을 틈타서 '지배 영역', 일종의 '해방구'를 만들어내고 그곳에 안정적인 테러리스트 훈련 캠프를 설치했다. 여기에서 훈련된 대원들을 프랑스로 잠입시켰고 일종의 특수부대가 타격 작전을 행하는 것마냥 목표물을 정확하게 공격한 것이다. 론 울프를 넘어서 울프팩 전술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 게다가 이들의 전술로 보아 기존의 대테러 부대의 테러 전술을 학습하여 대응 전술을 고안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샤를리 엡도 총격과 동시에 유대인 식료품점이 공격당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사건은 샤를리 엡도만을 노린 테러라고 보기는 어렵다. 알카에다가 테러를 계획하면서 미리 '여러 개의 목표물'을 상정했는데 그중 하나가 샤를리 엡도였을 가능성이 있다.
4. 한국의 반응
자세한 내용은 샤를리 엡도 총격 테러/한국의 반응 문서 참고하십시오.논쟁적인 요소가 많아 문서를 분리하였다.
5. 관련 문서
[1] 해당 장면에 근접한 위치에서 찍힌 영상으로 살해당한 경찰관의 얼굴까지 식별 가능할 정도였다. 사건 이후 영상 속 고인의 얼굴에 모자이크 처리되었고 살해 장면도 편집되었다.[2] 샤를리 엡도의 만평 작가이기도 하다. 상당히 직설적이면서도 과격한 만평을 그렸으며 그로 인해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의 표적이 되고 말았고 스스로 예언했던 대로 2015년 1월에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에게 살해당했다.[3] 무려 1954년부터 만화를 그렸다고 한다. 조르주 볼린스키와 마찬가지로 하라-키리(Hara-Kiri) 시절부터 만화를 그렸으나 볼린스키보다 더 인지도가 있었다. 루이 14세처럼 77세 생일을 6일 앞두고 사망했다. 말 그대로 평생 현역.[4] 소설가 미셸 우엘베크와 친구였고, 테러 당일에 이슬람화된 프랑스를 다룬 우엘베크의 소설 복종이 출간되었다.[5] 그에 대한 기사 "내가 아흐메드다"[6] 하미드는 그의 여동생이 셰리프 쿠아시의 아내였다는 정도의 관계밖에 없었다. 이 여성도 조사 대상에 올랐으나 토요일에 무혐의로 풀려났다.[7] 주 쉬 샤를리, 내가 샤를리다.[8] 주 쉬 쿠아시, 내가 쿠아시다.[9] 주 쉬 아흐메드, 내가 아흐메드다.[10] 실제로 극단적 반이슬람주의자들이 좋다고 달려든 사례도 있었으니 샤를리 엡도의 모두 까기 행태는 그런 자들까지 포함한 만평일 것이다.[진실] 사실 이 사건은 그냥 학교에 빠진 것을 무마하기 위한 한 학생의 거짓말에서 시작되었다.[12] "나는 샤를리다"라는 말은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의미도 있지만 고인을 추모하기 위한 의미도 있다.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란 말은 결국 의도가 어찌 됐든 추모에 대한 반발 심리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표현의 자유"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 속에서 보호받으면서 사람의 죽음에 대한 추모를 공격하고 표현의 자유를 반대하는 셈이다.[13] 샤를리와 테러범 아메디 쿨리발리의 이름을 합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