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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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62년 카르틀리 왕국과 카헤티 왕국이 연합해 만들어진 군주국.2. 역사
2.1. 헤라클리오스 2세
헤라클리오스 2세는 카헤티-카르틀리 연합 왕국을 결성한 뒤 나라를 전면적으로 개혁하고 조지아 전역을 통합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러시아에 사절을 보내 조지아에서 러시아 법률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여 승인을 얻었다. 이와 동시에, 조지아의 진보주의자들을 끌어들여 국가 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법안 초안을 작성하게 했다. 진보주의자들은 강력한 중앙집권 정부를 수립해 조지아 전체를 통솔하게 하고, 무역 관계를 최대한 활성화시키고 국내 무역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여겼다. 그들은 충분한 원자재를 가지고 있는 조지아의 특성을 살려 광업 및 채굴업에 힘을 기울여야 하며, 공예품 개발을 위해 교육받은 사람이 필요하니 학교를 곳곳에 설립하고 국가가 교사들을 지원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들의 대표인 요안니스 바그라토니는 조지아의 중세 관직인 에리스타비, 사타바도스 등을 폐지하고, 이들이 보유하고 있는 토지들을 소작농들에게 나눠줘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이 모든 제안을 수락하고 나라의 체계를 러시아식으로 개편했으며, 서양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초빙했다.그는 군대에도 손을 댔다. 상병, 하사관, 상사, 장교, 포병 대령 등 계급 조직을 확립했으며, 포병 지휘관으로 펠드저그마이스터(feldzeugmeister)를 설립했다. 이와 동시에, 왕국의 군대는 러시아에서 파견된 군사 고문으로부터 훈련을 받았다. 이러한 헤라클리오스의 전면 개혁에 반감을 품은 카르틀리 귀족들은 바크탕 6세의 사생아인 파이타를 새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1765년, 그는 이 음모를 적발하여 반대파를 모조리 처벌했다. 또한 노예 신분인 이들을 해방시키고 전 주인이 그들에게 손을 대지 못한다는 내용의 법령을 공표했다. 1763년 아르메니아 출신 러시아통 정치가 요제프 에민이 트빌리시를 망문하자, 그는 에민을 영예롭게 맞이하고 아르메니아인과 조지아인을 통합할 필요성에 관해 논의했다. 에민은 그가 지체없이 아르메니아인을 외세로부터 해방시키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는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했고, 인도의 마드라스에서 아르메니아인 해방운동조직을 창설한 샤하마르 샤카미르얀과 손을 잡았다.
그러던 1768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이 전쟁을 단행했다. 러시아 차르 예카테리나 2세는 1770년 그에게 사절을 보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참여하라고 독려했다. 그는 이 기회에 오스만 제국의 치하로부터 아르메니아를 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해 3월, 7,000명의 병력을 소집한 그는 코카서스로 진군한 1,200명의 러시아 분견대 지휘관 토틀레벤과 합세한 뒤 아할치헤로 쳐들어갔다. 4월 14일 사제르 요새를 공략한 연합군은 4월 17일 아즈쿠리 요새를 포위했다. 그는 아즈쿠리 요새를 공략하느라 시간 낭비하지 말고 아할치헤로 계속 진군하자고 제안했지만, 토틀레벤은 적 요새를 후방에 놔둘 수 없다고 판단해 공성전을 벌였으나 공략에 실패했다.
아할치헤 파샤가 구원군을 파견하자, 토틀레벤은 4월 19일에 갑자기 철수했다. 그는 단독으로 아할치헤군을 격파한 뒤 아할치헤로 계속 진격했다. 아할치헤 파샤는 이를 막기 위해 1,500명의 병사를 케르트비시 요새에서 차출하여 반격했지만, 그는 이번에도 격파했다. 얼마 후 8,000명의 오스만군이 아스핀자 근처에 나타나자, 그는 적군 대부분이 므트바리를 넘도록 허용한 뒤 야간에 아가바 에리스타, 시몬 무크란바톤, 쿠디아 보르바할렐리가 분견대를 이끌고 적의 퇴로를 끊게 했다. 1770년 4월 20일, 그가 이끄는 조지아군은 아스핀자 전투에서 오스만군과 맞붙었다. 그의 군대는 오스만군을 상대로 맹공을 퍼부었고, 후방에 매복하고 있던 아가바, 시몬, 쿠디아 휘하 분견대가 적이 다리 쪽으로 후퇴할 때 가로막았다. 이 전투에서 오스만군 4,000명이 전사했고, 여러 지휘관이 목숨을 잃거나 사로잡혔다. 또한 수많은 포로와 깃발, 기마 및 대포들을 노획했다.
그러나 토틀라벤이 러시아군을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가버린 데다 오스만군이 더 많은 병력을 보낼 기미가 보이자 조지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771년 다시 공세를 개시해 케르트비시 요새를 공략했고, 1772년 조지아 총대주교 안톤과 그의 아들 레반이 이끄는 사절단을 러시아에 파견해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1773년 솔로몬 1세와의 상호 방위 동맹을 연장한 그는 1774년 의무군을 창설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그는 항시 5,000명의 병력을 보유할 수 있었고 아들 레반이 이들의 지휘관을 맡았다. 1777년 크사니 공국을 완전히 폐지하고 왕국의 영역에 배속시켰으며, 1778년, 간자의 통치자 알리 칸을 상대로 공세를 가해 상당한 타격을 입혔고, 1779~1780년에 예레반 칸국을 몰아붙인 끝에 굴복시켰다.
1782년 12월 21일 러시아 제국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왕국을 보호해달라고 공식 요청했다. 1783년 7월 24일, 게오르기에프스크에서 러시아 제국과 카르틀리-카헤티 연합 왕국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었고, 그해 11월 2일 2개의 러시아 대대가 트빌리시에 진입했다. 1784년, 조지아인과 러시아인 연합군은 라차 토후국을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1785년 9월, 아바리의 통치자 오마르 칸은 2만 대군을 이끌고 조지아로 쳐들어갔다. 러시아군이 승산이 없다고 철수해 버리는 바람에 대항할 여지가 없던 그는 오마르 칸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돌려보냈다. 1786년, 그는 아할치혜의 쉴레이만 파샤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그해 12월 18일 사가레조에서 고위급 간담회를 열고 지원에 소극적인 러시아에서 다른 나라로 외교 방향을 수정하는 문제를 논의했지만, 협조를 얻을 만한 나라가 따로 없었기에 러시아와 계속 손잡기로 했다.
한편, 이메레티의 국왕 솔로몬 1세는 자신에게 후계자가 없는 점을 고려하여 그의 손자이며 자신의 조카인 다비트 아르칠로비치를 후계자로 삼았다. 그런데 1784년 솔로몬 1세가 사망한 후 다비트 2세가 밍그렐리아 공작 카지아 2세 다디아니 등 일부 귀족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이메레티 왕으로 추대되었다. 1789년, 그는 손자 다비트를 왕좌에 앉히기 위해 이메레티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1789년 6월 10일 맛호지 전투에서 이메레티 귀족들의 배신으로 패배한 다비트 2세는 아할치헤로 도주했다. 다비트 아르칠로비치는 왕국의 수도 쿠타이시에 입성한 뒤 솔로몬 2세를 칭하고 즉위했다.
1790년, 이메레티 왕국의 군주 솔로몬 2세가 파견한 사절단이 그를 찾아와서 자신들이 그의 왕국에 합류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국무 회의를 열었다. 기오르기 바토니쉬빌리, 다비트 오르벨리아니, 차부아 오르벨리아니, 조지아 총대주교 안톤은 찬성했지만, 이오란 무크란 바토니 등은 반대했다. 그는 고심 끝에 이메레티 왕국을 병합하면 이메레티의 주군을 자처하는 오스만 제국을 심히 자극하여 전면전이 벌어질 우려가 있으니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고, 그 대신 그의 손자인 솔로몬 2세의 이메레티 왕위를 인정하고 원조를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얼마 후, 다비트 2세가 솔로몬 2세를 무찌르기 위해 투르크군과 함께 이메리티로 진군했다. 한때 수도 쿠타이시를 장악하고 이메레티 왕위에 복귀했으나, 1791년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은 솔로몬 2세에게 패배하고 오스만 제국에 망명했다. 그는 다비트 2세와 솔로몬 2세를 중재하여 화해시킨 뒤 다비트 2세가 이메레티로 귀환하여 많은 영지를 받게 했다. 하지만 왕위에 복귀할 야심을 포기하지 않았던 다비트 2세는 1792년 다케스탄에서 용병을 고용해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또다시 패배하고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했다.
1794년 이란을 통일하여 카자르 왕조를 창건한 아가 모하마드 칸은 조지아를 정복하기 위한 군사 원정을 기획했다. 1795년 6월, 코카서스 남동부의 많은 지역을 공략한 모하마드 칸은 예레반과 슈시 칸국을 마저 정복하러 군대를 파견했다가 헤라클리오스 2세의 아들 알렉산드레에게 격파되었다. 모하마드 칸은 헤라클리오스가 이란의 종주권을 다시 인정하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단절한다면 왕위를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헤라클리오스가 거부하자, 모하마드 칸은 그해 9월 35,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지아로 쳐들어갔다. 양군은 크르차니시 전투에서 맞붙었다. 초반에는 조지아군이 상대의 맹공을 번번이 격퇴했지만, 모하마드 칸의 끈질긴 공격을 견디지 못한 조지아군 일부 부대가 이탈하면서 헤라클리오스는 끝내 패배앴다. 이 전투에서 5천 명의 병력을 잃은 그는 트빌리시로 도주했다.
모하마드 칸이 트빌리시를 공격해오자 "이 소중한 도시를 떠나느니 차라리 죽겠다"라고 선언했지만, 경호원들과 가족들의 필사적인 호소에 굴복하여 도시를 떠났다. 모하마드 칸은 트빌리시에 입성한 뒤 도시를 황폐화시키고 백성들을 학살했다. 러시아 제국은 게오르기예프스키 조약에 의거해 조지아에 구원군을 보내야 할 의무가 있었지만, 헤라클리오스의 연이은 요청에도 제때 움직이지 않다가 트빌리시가 함락된 뒤에야 뒤늦게 출진했다. 그러나 1796년 예카테리나 2세가 사망했고, 뒤이어 차르가 된 파벨 1세는 모든 러시아군을 조지아에서 철수시켰다. 그 후 모하마드 칸이 러시아와 동맹을 맺은 조지아인들을 징벌하기 위한 2차 원정을 계획했으나 1797년 암살당하면서 조지아는 망국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2.2. 기오르기 12세와 망국
헤라클리오스 2세는 생전에 세 번 결혼했다. 1740년 케테반 음하이트제와 결혼하여 아들 바크탕과 딸 루수단을 낳았다. 1744년 아내가 사망한 뒤 1745년 안나 아바시제와 재혼하여 기오르기 12세, 타마르를 낳았다. 1750년 다레얀 다디아니와 결혼하여 8남 9녀를 낳았다. 그는 두번째 아내에게서 낳은 기오르기 12세를 후계자로 일찌감치 지명했다. 이에 현 왕비 다레얀 다디아니 왕비는 헤라클리오스 2세에게 자기 아들들 중에서 후계자를 세우라고 강력히 권고했다. 그러나 헤라클리오스 2세는 그녀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798년 1월 11일 헤라클리오스 2세가 사망한 뒤, 기오르기 12세가 왕위에 올랐다.그러나 다레얀 다디아니 왕비와 이울론, 알렉산드레 왕자는 그의 즉위에 반발했다. 그들은 보르찰로, 카라바흐, 샴샤딜 등 무슬림이 다수인 지역을 점거하고 새 왕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이에 대응하여 아버지가 창설했던 "의무군"을 복원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는 한편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기독교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으며,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정교회를 전파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한편, 그는 아버지의 친 러시아 정책을 이어갔다. 러시아에 러시아군을 조지아에 진주시켜달라고 요청했으며, 조지아인들에게 러시아 시민권을 발부해달라고 청했다.
1799년 4월, 파벨 1세는 카헤티-카르틀리 연합 왕국과 후원 계약을 체결하고 그해 가을에 러시아군을 파견했다. 1799년 11월 26일 러시아군이 트빌리시에 진주하여 그의 영접을 받았다. 1800년 6월 2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조지아 사절단은 시민권에 관한 문서 초안을 러시아 외교부에 넘겼다. 그는 이 문서에서 자신의 후손, 성직자, 귀족 및 그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들이 러시아 제국의 시민권을 받아들이고 러시아인이 하는 모든 것을 신성하게 수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장남 다비트가 왕위를 이어받도록 해주기를 희망했다.
1800년 9월 23일, 또다른 러시아군 연대가 트빌리시에 도착했다. 그해 11월 7일, 라자레프 장군이 이끄는 2개의 러시아 연대가 이오리 강 유역의 카카베티 마을 인근에서 조지아군과 함께 알렉산드레 왕자와 연합한 아바르 칸의 아제르바이잔군을 격멸했다. 이후 중병에 걸린 그는 라자레프 장군과 러시아 정부에서 파견한 관료들이 조지아의 권력을 장악하는 걸 용인했다. 1800년 11월 14일, 파벨 1세는 조지아 사절들에게 조지아인들에게 러시아 시민권을 발부하겠다고 약속했으며, 그의 아들 다비트를 왕으로 인정해주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1800년 12월 28일 그가 사망한 후, 파벨 1세는 조지아를 러시아에 병합하고 다비트를 러시아에 소속된 조지아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1801년 1월 1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파벨 1세의 카헤티-카르틀리 왕국 합병에 관한 선언문이 공포되었고, 그해 2월 중순 트빌리시에서도 발표되었다.
1801년 3월 12일 파벨 1세가 암살된 뒤 새 차르에 오른 알렉산드르 1세는 조지아를 러시아에 합류시키는 문제를 재고려했다. 그들은 조지아가 중동에서 러시아의 진출에 중요한 교두보임을 고려하여 카르틀리와 카헤티의 자치 행정을 폐지하고 러시아 행정기구를 도입하기로 결의했다. 이 결정에 따라 기오르기 12세의 장남 다비트는 축출되었고, 라자레프 장군이 조지아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러시아의 결정에 분노한 다레얀 다디아니 왕비와 자식들은 조지아의 러시아 병합과 기오르기 12세의 장남 다비트 12세의 권력 승계를 절대적으로 거부했다. 이중 알렉산드레 왕자는 이란과 오스만 제국을 오가며 30여 년간 러시아를 상대로 항전했으나 끝내 진압당했다. 이리하여 조지아는 러시아에 완전히 병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