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31 23:55:03

티그라네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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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탁세스 왕조 4대 샤
Տիգրան | 티그라네스 2세
파일:220px-Tigran_Mets.jpg
제호 한국어 티그라네스 2세
아르메니아어 Տիգրան
그리스어 Tigránēs
고대 페르시아어 Tigrāna
존호
생몰 년도 기원전 140년 ~ 기원전 55년
재위 기간 기원전 95년 ~ 기원전 55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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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메니아 아르탁세스 왕조 4대 . 아르메니아의 최전성기를 이끈 왕으로 티그라네스 대왕이라고도 불린다.

2. 생애

기원전 140년경 출생한 것으로 전해진다. 아버지는 2대 샤 아르타바스데스 1세라는 설과 3대 샤 티그라네스 1세라는 설로 나뉘는데, 기록이 워낙 부족해서 어느 쪽이 맞는지 분명하지 않다. 기원전 105년 파르티아명군 미트리다테스 2세가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아르타바스데스 1세를 굴복시킨 뒤, 그는 파르티아 궁정에 인질로 끌려가 그곳에서 10여년간 억류되었다.

기원전 95년 티그라네스 1세가 여행 도중 사망한 뒤, 그는 "아트로파테네의 70개 계곡"을 파르티아에 헌납하는 대가로 아르메니아의 샤로 등극했다. 이 지역이 어디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는 파르티아의 봉신으로 만족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고, 아르메니아를 강대국으로 육성시킬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기원전 91년, 미트리다테스 2세가 사망했다. 그 후 파르티아는 30여 년간 샤한샤들의 기록이 거의 전해지지 않을 정도로 정국 혼란이 심해졌고, 동방에서 쳐들어온 이민족들을 막느라 다른 곳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이 틈을 타 영토를 대대적으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먼저 기원전 94년 아르메니아 고원을 양분하고 있던 소페네스 왕국의 마지막 군주 아르타네스를 폐위시키고 소페네스를 병합했다. 그 후 강력한 공성 부대와 중기병대를 구축하여 군사력을 강화했고, 이를 바탕으로 아트로파테네의 70개 계곡을 탈환했다.

기원전 88년부터 85년까지 카파도키아, 아디아베네, 고르디에네, 메디아 아트로파테네, 페니키아를 공략했으며, 기원전 82년 안티오코스 12세나바테아인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틈을 타 셀레우코스 제국의 본거지인 안티오키아를 포함한 킬리키아와 시리이 북부 지역을 정복했다. 그는 기원전 87년에 파르티아 왕가의 여름 별궁이 있는 엑바타나를 약탈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정복 전쟁 외에 바빌론과의 부역 관계를 개선하고 아랍인과도 무역 관계를 맺었으며, 자신의 형제를 메소포타미아 서쪽의 무역을 통제하는 니시미스의 통치자로 임명하는 등 외교 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기원전 80년대 후반, 그는 폰토스의 군주 미트리다테스 6세와 동맹을 맺고 미트리다테스의 딸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했다. 미트리다테스가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에서 영역을 대대적으로 확장하는 동안, 그는 동방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데 주력하고 미트리다테스에게 인력과 물자를 지원했다. 다만 전쟁에 직접적으로 뛰어드는 건 자제했다.

파일:아르메니아 터키.png

이렇듯 영토 확장을 성공적으로 이어간 그는 자신을 샤한샤로 칭하기 시작했다. 그는 흰색과 자주색 줄무늬가 있는 튜닉과 보라색 외투를 입었으며, 항상 보석으로 장식된 티아라를 어디에서나 착용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하인을 자처한 4명의 측근에게 둘러싸였다고 한다. 그에게 정복된 국가들은 자치권을 인정받았지만 공물을 바치고 보조병을 보내야 했으며, 현지인들은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그의 의향으로 인해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는 그리스 문화의 숭배자로도 유명했다. 기원전 83년부터 착공을 시작한 수도인 티그나케르타는 헬레니즘 양식으로 설립되었다. 이 도시는 22m 높이의 성벽과 마굿간을 통합한 인상적인 요새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스 극장, 사냥 공원 및 유원지와 같은 편의 시설도 있었다. 그는 3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이 도시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대부분은 카파도키아에서 왔다고 한다. 또한 그리스어가 페르시아어 및 아람어와 함께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69년, 셀레우코스 제국의 잔여 세력이 남아있던 프톨레마이스를 함락시키고 여성 군주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를 사로잡았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그는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를 셀레우키아에 감금한 뒤 나중에 죽여버렸다고 한다. 아마도 그녀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다른 야심가들을 막으려는 목적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를 죽인 뒤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셀레우코스의 후계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아내와 딸들을 사로잡았다."

기원전 70년,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연전연패한 미트리다테스 6세가 아르메니아에 망명했다. 루쿨루스는 미트리다테스 6세를 넘기라고 요구하고자 처남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를 보냈다. 풀케르는 안티오키아에서 그를 만나 "루쿨루스의 개선식에 참석할 미트리다테스를 맞이하거나 당신에게 선전포고하기 위해 왔다"라고 말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젊은이가 자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당찬 태도로 나오는 것에 놀라워하여 호화로운 선물을 보냈지만, 아피우스는 왕이 보낸 선물 중 그릇 하나만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루쿨루스가 서신에서 자신을 왕중왕이 아니라 '왕'이라고만 칭한 것에 분개했고, 미트리다테스를 넘기길 거부했다. 이에 루쿨루스는 아르메니아와 전쟁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기원전 69년, 루쿨루스는 카파도키아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아르메니아로 진격했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2,000~3,000명의 기병대를 귀족 미트로바르자네스에게 맡겨 로마군을 견제하게 했다. 미트로바르자네스는 로마군이 숙영지를 설치하고 있을 때 돌격했지만, 3,500명의 강력한 분견대가 이들을 격파했다. 그는 패배 소식을 접하자 만카이오스에게 티그라노케르타 수비를 맡기고, 자신은 타우루스 산맥에서 전투 부대를 모집하기 위해 떠났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티그라노케르타는 25미터 높이의 두껍고 우뚝 솟은 성벽이 있었고, 식량이 풍부해서 장기간 농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이 도시를 건설할 때 수많은 주민을 강제로 끌고 왔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티그라네스를 원망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주민들은 루쿨루스를 응원했으며 아르메니아군이 도시 인근의 언덕에 나타났을 때 로마인들에게 그 쪽을 가리키며 조심하라고 외쳤다고 한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루쿨루스는 2개 군단과 500명의 기병만 이끌었다고 한다. 반면 플루타르코스는 16,000명의 군단병과 3,000명의 기병, 투석병, 궁수를 갖췄다고 기술했으며, 에우트로피우스는 로마군의 병력이 18,000명이었다고 기술했다. 한편 아르메니아 전역에서 동원된 티그라네스의 군대 규모는 로마군을 압도했다. .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25만 보병과 5만 기병이 그의 지휘를 받았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루쿨루스가 원로원에 보낸 편지를 인용해, 2만 투석병과 궁수, 55,000명의 기병, 15만 보병이 티그라네스 2세의 지휘를 받았다고 기술했다. 에우트로피우스는 더 나아가 60만 아르메니아 카타프락토이와 10만 보병이 루쿨루스를 상대했다고 주장했으며, 헤라클레아의 멤논은 8만 명의 보병과 기병이 티그라네스의 지휘를 받았다고 기술했다. 현대 학계는 이러한 수치가 과장된 것이 분명하다고 보지만, 로마군에 비해 압도적인 수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본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티그라네스 2세에게 루쿨루스를 먼저 공격하지 말고 보급로를 차단해 굶주리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미트리다테스가 자신이 로마군을 격멸하여 명성을 떨치는 걸 시기해 그러는 거라 여기고, 전투대형을 갖춘 로마군을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절로 왔다기엔 너무 많고, 싸우러 왔다기엔 너무 적다."

그러나 이후 벌어진 티그라노케르타 전투(기원전 69년 10월 6일)에서, 아르메니아군은 참패했고 티그라노케르타는 로마에게 귀순했다. 그는 짐마차에 타서 가까스로 빠져나간 뒤 미트리다테스 6세와 함께 아르메니아 북부에서 새로운 군대를 모으면서 파르티아 샤한샤 프라아테스 3세에게 구원군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그는 구원군을 보내준다면 파르티아로부터 탈취했던 영토를 되돌려주겠다고 제의했다. 루쿨루스는 포로로부터 이러한 정보를 입수하고 파르티아에 사절을 보내 자신과 동맹을 맺으면 티그라네스 2세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도록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프라아테스 3세는 양측의 제안에 딱부러진 대답을 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루쿨루스는 소르나티우스 등 폰토스에 남아있는 부하들에게 병사들을 동원해 자신과 합류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매사에 엄격한 루쿨루스를 따르기보다는 소아시아에 남아서 약탈을 벌이길 갈망했다. 장교들은 이들을 통제하는 데 실패했고, 결국 루쿨루스를 돕지 못하고 폰토스를 떠나야 했다. 이 소식이 고르디에네에 있는 루쿨루스의 진영에 이르렀을 때, 장병들은 이들을 부러워하며 자기들도 자유롭게 약탈하길 갈망했다. 루쿨루스는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얼른 전투를 벌여서 전쟁을 가능한 한 빨리 마무리하기로 했다. 하지만 티그라네스 2세가 결전을 회피하자, 루쿨루스는 결전을 강요하기로 하고 기원전 68년 아르메니아의 옛 수도인 아르탁사타로 진군했다. 티그라네스 2세는 결전을 미룰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로마군과 격돌했다. 그 결과 아르메니아군은 또다시 참패했고, 아르탁사타는 루쿨루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이후 미트리다테스와 티그라네스가 캅카스 산맥 너머로 도주하자, 루쿨루스는 이들을 추격하려 했다. 그러나 약탈을 제한하고 힘든 행군을 강요하는 루쿨루스에게 강한 반감을 품고 있던 장병들이 트리부누스 밀리툼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선동에 따라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그들은 루쿨루스가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비옥하기로 유명한 메소포타미아의 아르메니아 영토를 침공하도록 강요했고, 루쿨루스는 그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별 소용이 없자 어쩔 수 없이 메소포타미아로 남하하여 니시비스를 포위했다. 그러나 니시비스 공략은 지지부진했고, 티그라네스는 이 틈을 타 빼앗겼던 영토 일부를 탈환했다. 미트리다테스 역시 폰토스로 귀환하여 그곳에 주둔중이던 로마군을 젤라에서 요격해 7,000명을 죽이고 폰토스를 탈환했다.

기원전 66년, 폼페이우스가 루쿨루스를 대신하여 동방 원정에 착수했다. 이때 티그라네스 2세의 셋째 아들 티그라네스가 아버지와 갈등을 벌이다가 파르티아 궁정으로 도망쳤다. 프라아테스 3세는 젊은 티그라네스를 자기 딸과 결혼시킨 뒤, 파르티아군을 맡겨 아르메니아로 가게 했다. 파르티아군은 아르메니아의 수도 아르탁사타를 포위했지만, 쉽사리 공략되지 않자 젊은 티그라네스에게 분견대를 맡긴 뒤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티그라네스 2세는 아들을 물리쳤고, 젊은 티그라네스는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폼페이우스에게 귀순했다. 티그라네스 2세는 곧 미트리다테스 6세와 동맹을 끊고 로마에 복종하기로 했으며, 폼페이우스는 그가 왕위를 유지하는 걸 허용하되 6,000달란트를 배상금으로 지급하게 하고, 젊은 티그라네스를 소페네스의 통치자로 삼았다.

기원전 65년, 티그라네스 2세는 아들 티그라네스를 체포한 뒤 로마로 추방했다. 프라아테스 3세는 이를 빌미로 삼아 아디아베네, 고르디에네,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탈환했다. 이후 프라아테스 3세는 폼페이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젊은 티그라네스를 자신에게 넘겨주고 유프라테스 강을 로마와 파르티아의 경계로 공식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폼페이우스는 고르디아네를 반환하라고 요구하면서, 젊은 티그라네스를 넘길 수 없다고 답했다. 그 후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고르디아네를 공략하고 아르메니아에 넘겼다. 그 과정에서 별다른 무력 충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아프라니우스는 메소포타미아를 통해 시리아로 귀환하는 중 많은 병사가 탈수병으로 죽어나가는 바람에 전력을 크게 잃었다.

기원전 64년 로마군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철수하여 폰토스 왕국과 전쟁을 재개하자, 프라아테스 3세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아르메니아를 공격했다. 하지만 쉽사리 승패를 가리지 못했고, 양자는 폼페이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의 입장을 호소했다.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명령없이는 행동할 수 없다며 개입을 거부했다. 결국 두 왕은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는데, 메소포타미아와 아디아베네는 파르티아의 영역이 되었고, 고르디아네는 아르메니아의 영역으로 확정되었다.

그 후 티그라네스는 로마의 동맹국 군주로서 통치를 이어가다가 기원전 55년 약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아들 아르타바스데스 2세가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