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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탁세스 왕조 8대 샤 Տիգրան | 티그라네스 4세 | ||
파일:티그라네스 4세.jpg | ||
제호 | 한국어 | 티그라네스 4세 |
아르메니아어 | Տիգրան | |
그리스어 | Tigránēs | |
고대 페르시아어 | Tigrāna | |
존호 | 샤 | |
생몰 년도 | 미상 ~ 1년 | |
재위 기간 | 기원전 8년 ~ 기원전 5년, 기원전 2년 ~ 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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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메니아 아르탁세스 왕조 8대 샤.2. 생애
티그라네스 3세의 아들로, 이복 여동생 에라토가 있었다. 그는 부친이 로마에 있을 때 태어났던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20년 부친이 로마군에 의해 아르메니아 왕위에 복귀한 뒤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기원전 8년 부친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고, 이복 여동생 에라토와 결혼하여 공동 왕으로 삼았다. 두 사람은 이베리아 왕국의 파라스마네스 1세와 결혼하게 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을 낳았다.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승인 없이 집권했기 때문에, 로마는 그를 반역자로 간주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티그라네스 3세가 사망한 후 아르메니아와 로마의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한다. 이는 그가 친파르티아 정책을 펼쳤다는 걸 의미한다. 4세기의 역사가 페스투스(Festus)에 따르면, 티그라네스 4세의 통치 기간 동안 아르메니아에서 반로마 정서가 형성되었으며 아르메니아 왕국이 매우 강력했다고 한다.
기원전 5년, 아우구스투스는 티그라네스 3세의 동생이자 티그라네스 4세의 삼촌인 아르타바스데스 3세를 아르메니아의 새 군주로 내세웠다. 티그라네스 4세와 에라토는 이에 맞서 파르티아 샤한샤 프라아테스 4세의 지원으로 아르타바스데스 3세와 맞섰다. 이 지원을 받은 반란으로 기원전 2년 아르타바스데스 3세는 아르메니아에서 쫓겨났고 로마군과 함께 퇴각하던 중 병에 걸려 죽었다. 티그라네스 4세와 에라토는 프라아테스 4세가 로마와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지원을 중단하자 로마에 사절을 보내 용서를 청했고,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에 복종하고 공물을 늘리는 대가로 그들이 권력을 유지하도록 허용했다.
서기 1년 티그라네스 4세가 이민족과의 전투를 치르던 도중 전사했고, 서기 1년부터 서기 2년까지 단독 통치하던 에라토는 남편이 죽은 뒤 정치 혼란이 극심해지자 퇴위했다. 이리하여 아르메니아의 왕위가 공석이 되자, 아우구스투스의 특명을 받고 동방으로 파견된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메디아 아트로파테네의 왕 아리오바르자네스를 새 왕으로 세우고 유프라테스 강의 한 섬에서 프라아테스 5세와 면담해 파르티아의 동의를 받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