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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제국 13대 샤한샤 𐭐𐭓𐭇𐭕 | 프라아테스 3세 | ||
제호 | 한국어 | 프라아테스 3세 |
파르티아어 | 𐭐𐭓𐭇𐭕 | |
영어 | Phraates III | |
존호 | 샤한샤 | |
생몰 년도 | ? ~ 기원전 57년 | |
재위 기간 | 기원전 69년 ~ 기원전 5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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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르티아의 제13대 샤한샤.2. 생애
시나트로케스 1세의 아들로, 기원전 69년부터 왕위에 올라 자신의 동전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가 즉위한 해에 로마군 사령관 루쿨루스가 아르메니아 대왕 티그라네스 2세를 시리아와 킬리키아에서 몰아내고, 폰토스 왕국의 국왕 미트리다테스 6세를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티그라네스 2세와 미트리다테스 6세는 아르메니아 북부로 철수한 뒤 프라아테스 3세에게 구원군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이때 티그라네스 2세는 이전에 파르티아로부터 빼앗았던 영토를 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아르메니아-폰토스 연합군을 격파한 뒤, 루쿨루스는 포로로부터 이러한 정보를 입수하고 파르티아에 사절을 보내 자신과 동맹을 맺으면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도록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프라아테스 3세는 양측의 제안에 딱부러진 대답을 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이후 루쿨루스는 병사들의 파업과 미트리다테스 6세의 반격으로 더 이상 군사 활동을 하지 못하고 시리아로 철수했다.기원전 66년, 프라아테스 3세는 루쿨루스의 뒤를 이어 폰토스 원정에 착수한 폼페이우스에게 사절을 보냈다. 폼페이우스는 파르티아가 이전에 잃어버린 영토를 모두 되찾는 걸 용인할 테니 원군을 보내달라고 제안했다. 당시 티그라네스 2세의 아들 티그라네스는 아버지와 갈등을 벌이다가 파르티아 궁정으로 도망쳤다. 프라아테스 3세는 젊은 티그라네스를 자기 딸과 결혼시킨 뒤, 파르티아군을 맡겨 아르메니아로 가게 했다. 파르티아군은 아르메니아의 수도 아르탁사타를 포위했지만, 쉽사리 공략되지 않자 젊은 티그라네스에게 분견대를 맡긴 뒤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티그라네스 2세는 아들을 물리쳤고, 젊은 티그라네스는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폼페이우스에게 귀순했다. 티그라네스 2세는 곧 미트리다테스 6세와 동맹을 끊고 로마에 복종하기로 했으며, 폼페이우스는 그가 왕위를 유지하는 걸 허용하되 젊은 티그라네스를 소페네스의 통치자로 삼았다.
기원전 65년, 티그라네스 2세는 아들 티그라네스를 체포한 뒤 로마로 추방했다. 프라아테스 3세는 이를 빌미로 삼아 아디아베네, 고르디에네,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탈환했다. 이후 프라아테스 3세는 폼페이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젊은 티그라네스를 자신에게 넘겨주고 유프라테스 강을 로마와 파르티아의 경계로 공식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폼페이우스는 고르디아네를 반환하라고 요구하면서, 젊은 티그라네스를 넘길 수 없다고 답했다. 그 후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와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고르디아네를 공략하고 아르메니아에 넘겼다. 그 과정에서 별다른 무력 충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아프라니우스는 메소포타미아를 통해 시리아로 귀환하는 중 많은 병사가 탈수병으로 죽어나가는 바람에 전력을 크게 잃었다.
그러다 기원전 64년 로마군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철수하여 폰토스 왕국과 전쟁을 재개하자, 프라아테스 3세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아르메니아를 공격했다. 하지만 쉽사리 승패를 가리지 못했고, 양자는 폼페이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의 입장을 호소했다.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명령없이는 행동할 수 없다며 개입을 거부했다. 결국 두 왕은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는데, 메소포타미아와 아디아베네는 파르티아의 영역이 되었고, 고르디아네는 아르메니아의 영역으로 확정되었다.
기원전 57년, 두 아들 오로데스 2세와 미트리다테스 4세에 의해 프라아테스 3세가 살해되었다. 두 형제는 곧 파르티아의 패권을 놓고 내전을 벌였는데, 수레나스 가문의 지원을 받은 오로데스 2세가 기원전 54년 승리하여 파르티아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