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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제국 초대 샤한샤 𐭀𐭓𐭔𐭊 | 아르사케스1세 | ||
제호 | 한국어 | 아르사케스 1세 |
파르티아어 | 𐭀𐭓𐭔𐭊 | |
그리스어 | Ἀρσάκης | |
존호 | 샤한샤 | |
생몰 년도 | ? ~ 기원전 217년 | |
재위 기간 | 기원전 247년~ 기원전 2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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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제국의 초대 샤한샤.파르니족의 지도자로, 셀레우코스 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파르티아 지방을 공략하고 나라를 세웠다.
2. 생애
'아르사케스'(Arsaces)는 고대 이란어 'Aršan'에서 유래한 것으로, '영웅'을 의미한다. 이 이름은 아르사케스 왕조가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생각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를 포함해 아케메네스 왕조의 일부 통치자들도 사용했다. 중앙아시아 스텝 지역의 유목민인 파르니족의 지도자로, 종종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역을 침략하여 약탈했다. 기원전 250년 아트레크 계곡 근처에 있는 아스타우네를 점령했고, 기원전 247년 자신이 세운 도시 아사크에서 왕위에 올랐다.기원전 245년, 셀레우코스 2세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시리아 전쟁에 집중하느라 동방에 신경쓰지 못하는 틈을 타, 파르티아의 사트라프 안드라고라스가 셀레우코스 왕조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회하고 독립국을 세웠다. 이로 인해 파르티아는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지원받지 못하게 되었고, 아르사케스는 이 틈을 타 파르티아에 대한 공세를 지속했다. 기원전 238년, 아르사케스는 안드라고라스를 처단하여 파르티아 대부분을 장악했고, 기원전 237년 헤카톰필로스를 함락하여 새 수도로 삼았다.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아르사케스의 동생 티리다테스가 파르티아 남쪽의 영역을 차지했으나 기원전 238년 셀레우코스 2세에 의해 패배하고 쫓겨났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2세가 아나톨리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동생 안티오코스 히에락스를 토벌하러 서쪽으로 간 사이에 다시 돌아와서 영토를 되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역사가들은 고고학적 증거가 없고, 교차검증도 되지 않는 티리다테스는 허구의 인물이며 아르사케스가 파르티아 전역을 계속 통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셀레우코스 2세의 반격은 어렵지 않게 막아냈지만, 북방에서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통치자 디오도토스 2세와 비슷한 시기에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에, 아르사케스 1세는 양면 전선을 지속하는 건 무익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디오도토스 2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전쟁에 집중했다. 로마 역사가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아르사케스 1세는 파르티아에 정착한 뒤 군인들을 징집하고, 요새를 지으며, 마을을 강화했다고 한다. 그는 아사크 외에도 파르티아의 자파오르테논 산에 다라 시를 건설했으며, 역시 건설한 니사 시는 기원전 1세기까지 왕조의 수도로 이용되었다.
화폐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아르사케스 1세의 이름이 새겨진 동전은 기원전 217년까지 주조되었다. 이로 볼 때 그는 기원전 217년까지 통치했을 것이다. 사후 아들 아르사케스 2세가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