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트비아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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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뢰국: 리보니아 왕국(1570-1578), 쿠를란트-젬갈렌 공국(1918) | }}}}}}}}} |
라트비아 공화국 Latvijas Republika | ||
국기 | 국장 | |
1918년 ~ 1940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발트 연합 공국 | 라트비아 SSR | |
국가 | Dievs, svētī Latviju! 하느님, 라트비아를 축복하소서! | |
위치 | 라트비아 | |
수도 | 리가 | |
정치체제 | 공화제 | |
국가원수 | 대통령 | |
언어 | 라트비아어 | |
통화 | 라트비아 루블(1918 ~ 1922) 라트비아 라트(1922 ~ 1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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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18년부터 1940년까지 라트비아에 존속했던 정부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 에스토니아 제1공화국과 함께 소련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후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다.2. 역사
라트비아는 근대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에 있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소비에트 러시아가 독일 제국과 굴욕적인 조약을 맺을 때 러시아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독일은 에스토니아와 묶어 발트 연합 공국이라는 국가를 세워 이 지역을 장기적으로 다스리려 했으나, 정작 그 독일은 1차 대전에서 패배하여 지배력이 미치지 못했다.
이에 라트비아는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1918년 11월에 독립을 선포했고 독일 측의 행정기구로부터 행정권을 인수했다. 하지만 독일계 자유군단은 라트비아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라트비아의 공산주의자들과 친볼셰비키 세력은 서방 공세를 진행하는 볼셰비키의 지원을 받아 라트비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Latvijas Sociālistiskā Padomju Republika)이라는 공산주의 국가를 세웠다. 그러나 소비에트 러시아는 자기 능력을 넘어선 공세를 펼친 대가로 현지 볼셰비키와 라트비아로 진주한 붉은 군대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했고, 자유군단 역시 외부 지원을 받지 못해 독립국가 라트비아에 밀려 세력이 축소되었다. 이렇게 라트비아 독립에 반하는 세력은 1920년에 모두 소멸되었다. 이 때 독일계 자유군단과 볼셰비키 세력 축출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카를리스 울마니스였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결국 라트비아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다. 1920년에는 제헌의회가 소집되었고, 여기서 1922년에 독일 바이마르 헌법과 스위스 연방 헌법을 본뜬 자유주의적 헌법을 제정하였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초반까지의 라트비아는 의회인 사에이마를 중심으로 한 의원내각제로 운영되었다. 사에이마는 극단적인 다당제로 의석 수를 차지한 정당만 10개가 넘었다. 전반적으로 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자당(Latvijas Sociāldemokrātiskā strādnieku partija)과 라트비아 농민연합(Latvijas Zemnieku savienība)이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했으며, 이들이 내각을 꾸려 국가를 운영했다. 또한 2%의 인구가 절반 넘는 토지를 보유하는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농지개혁을 추진하여, 발트 독일인 대지주들의 토지가 농민에게 분배되었고 이는 발트 독일인들의 힘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러나 당시 라트비아는 1차대전 및 러시아 제국의 붕괴로 인해 붕괴한 산업기반을 재구축하고[1], 소련과의 국경분쟁을 해결해야 하는 등 수많은 내외의 과제를 안고 있었다. 또한 독립한 라트비아에는 수많은 소수민족이 있는데(발트 독일인, 러시아인, 유대인 등) 라트비아 정부는 단일민족국가를 지향했고 이는 소수민족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1929년의 대공황은 라트비아에 커다란 혼란을 야기했다. 이 틈을 타 독립 직후부터 당시까지 총리를 역임해온 카를리스 울마니스는 1934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헌법과 의회를 폐지하고 스스로 대통령과 총리를 겸하여 행정명령으로 통치하는 권위주의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울마니스 자신의 민족주의적 신념에 따라 라트비아 내 소수민족(유대인 등)을 탄압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독일은 나치당 일당독재 하에서 재무장을 빠르게 추진해갔고, 소련이 혁명 시절 피해를 회복하며 공업화를 추진해나가자 라트비아는 위기에 빠졌다. 라트비아는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는 등의 노력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으나,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가 소련의 영역으로 결정됨에 따라[2] 라트비아의 운명은 정해졌다. 1940년 소련군은 라트비아에 진주했고, 의례적인 국민투표를 통해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우고 소련에 가입시킴으로써 라트비아 제1공화국은 무너졌다.
현재 라트비아(라트비아 제2공화국)는 이 시절의 정부를 계승하고 있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