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라트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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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뢰국: 리보니아 왕국(1570-1578), 쿠를란트-젬갈렌 공국(1918) | }}}}}}}}} |
1. 개요
라트비아의 역사를 서술하는 문서.
2. 고대
기원전 2000년경부터 고대 발트족의 거주가 확인되었다. 원래 발트인들은 오늘날 동유럽 전역에 거주하던 민족이었으나 서기 5세기 무렵부터 발트해 연안 늪지대 외 동유럽 전역에서 슬라브인들에 흡수,동화되면서 거주지가 축소되었다. 기원전 1세기 무렵 우랄어족 언어를 사용하는 발트핀족 계열의 리보니아인(리브인)들이 대거 이주해오면서 리보니아라 불리게 되었다. 고대의 이 지역은 교통이 불편한 늪지대에서 고립되어 전통 자연숭배 신앙인 로무바 신앙을 믿고 있는 여러 부족들이 서로 얽혀 살았다.서기 7세기 무렵 노르드인들이 이 지역을 약탈하고 정착한 것을 계기로, 라트비아의 여러 부족들도 흑해와 스칸디나비아를 잇는 무역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지역의 리보니아인[1]들과 라트갈레인들은 오늘날의 벨라루스의 기원에 해당하는 폴로츠크 공국에 공납을 바치며 살고 있었다. 폴로츠크 공국은 루스 카간국과 키예프 루스를 세운 노르드인들이 세운 무역 전초기지에서 출발한 나라였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라트비아 땅에는 발트어를 쓰는 부족들 인구가 135,000명 정도, 핀어를 쓰는 리보니아인은 20,000명 정도였다고 하며 노르드인들의 영향으로 삼포제 농업을 통해 호밀 같은 곡물을 경작했다고 한다.
3. 중세
폴로츠크 공국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라트비아의 여러 부족들은 기독교 대신 전통 발트 신화를 믿고 있었다. 독일인 선교사들이 이들을 개종하기 위해 발트해에 정착했는데, 이들이 처음 짚은 타켓은 세미갈리아인의 공격에 시달리던 리보니아인이었다. 1189년 독일인 선교사들은 리보니아인 추장들을 개종시킨 것으로 시작해서, 리보니아인 영토에 독일인 거주지를 세웠다. 리보니아인 추장이 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 성과는 지지부진하다는 핑계로 하노버의 베르톨드가 이끄는 소수의 북방 십자군이 1198년 리보니아의 독일인 거주지로 파견되었다. 베르톨드가 이끄는 십자군이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리보니아인의 포위 공격을 받아 전멸하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리보니아의 십자군을 증원할 것을 명령했고, 1199년 알브레히트 주교가 이끄는 북방 십자군이 리보니아에 들어왔다. 알브레히트가 이끄는 독일인들은 1201년 리가 주교구를 세웠으며, 1202년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을 창설한다. 리보니아 기사단의 임무는 리보니아 연안의 다신교도들에게 가톨릭을 전파함과 동시에 이 지역의 독일인 상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독일 도시들과의 해상 무역을 증진시키는데 있었다.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의 여러 부족들과 폴로츠크 공국이 힘을 합쳐 리보니아를 탈환하려 시도했지만,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거점마다 견고한 석조 요새들을 건설했다. 공성전이라고는 나무 성벽을 불지르는 것 밖에 못해본 라트비아인들은 공성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요새들을 탈환할 수 없었다. 라트비아의 동부 지역의 라트갈레인들이 검의 형제 기사단의 동맹이 되어 석조 요새들을 건설하는 것을 도와줬으나, 검의 형제 기사단은 배은망덕하게도 라트갈레 예르시카 공국 공후의 어린 부인을 납치해서 인질로 삼고 라트갈레 부족이 검의 형제 기사단에 무릎꿇을 것을 강요했다. 예르시카 공국을 봉신국으로 삼은 성과로 말미암아, 리가의 알브레히트 주교는 몇년 안가 대주교로 승진하고 리가도 대주교구를 갖춘 도시가 되었다.
이후 서유럽식 봉건제도가 도입되어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지역에 기사단령과 주교령이 세워젔다. 독일인 상인들이 대거 정착한 것은 덤. 농노가 된 라트비아인들은 일주일에 4~6일은 독일인 영주나 주교의 땅을 경작해야 했으며, 그 외에도 소득의 25% 가까이를 갖가지 명목의 세금으로 뜯겼다. 라트비아인 농노들은 기회만 되면 리가로 도망가려 들었고 도시로 숨어든 라트비아인들은 독일인인 척 행동하거나 정 안되면 유대인이 되기도 했다. 검의 형제기사단은 여러가지 야비한 수법과 지나친 원주민 착취로 인해 원성이 높았으며, 현지인들의 비협조로 사모기티아인과의 전쟁에서 여러차례 패전했다. 1236년에는 사모기티아인들과 세미갈리아인들이 사울레 전투에서 기사단 마스터와 기사 48명을 포함 3,000여명을 전사시키는 승전을 거두었으며, 1260년에는 쿠로니아인[2]들과 사모기티아인들이 두르베 전투에서 검의 형제기사단 그랜드 마스터를 전사하게 만들었다. 1270년에는 세미갈리아인들과 리투아니아인들의 연합에 맞선 카루제 전투에서 검의 형제기사단 마스터가 또 한 번 더 전사했다. 1279년에는 세미갈리아인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하여 독일인 상인들을 학살했으며 1287년 가로자 전투에서 검의 형제 기사 40여 명과 함께 기사단 마스터가 또또 다시 전사했다.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계속해서 많은 단원을 잃고 기사단 마스터가 계속 전투중에 죽어나가자,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보다 강한 튜튼기사단의 산하로 들어갔다. 여러차례 패전에도 불구하고 리가를 중심으로 한자동맹의 주요 참여 도시로 참가해 발트무역으로 많은 돈을 벌었던 리보니아 기사단은 세미갈리아인들이 기근에 시달리는 틈을 타서 1290년 세미갈리아 정복을 완료하였다. 리투아니아의 연대기에 따르면 약 10만여 명의 난민들이 독일인들의 농노가 되는 것을 피해 리투아니아로 피난왔다고 한다. 1298년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리보니아 기사단으로부터 라트갈리아를 정복하여 검의 형제기사단의 초창기 영토였던 라트갈레 지역은 다시 발트 민족의 땅이 되었다.[3]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이 승리하면서 제1차 토룬 조약이 맺어지고 당시 리보니아 기사단 영지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봉신국이 되었다. 1435년 리투아니아 내전에 참전한 리보니아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가 또 다시 전사한 것을 계기로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국은 리보니아 연맹으로 변경되었다. 리보니아 연맹과 함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봉신국이 된 쿠를란트 주교령은 이후 쿠를란트 젬갈렌 공국이 된다. 하지만 리가를 중심으로 해상 무역을 하던 독일인들을 전부 축출하는 것은 무모하다 생각했는지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라트비아의 독일인들의 기득권을 상당 부분 인정해주었고, 1494년에는 라트비아인 농노의 이동권을 박탈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한다.
1522년 리가 시의 독일인 상인들이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루터교회로 개종하기 시작하며 리가 대주교의 권위가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흔들리던 리가 대주교구를 밀쳐 넘어트리는 전쟁이 얼마 안 가 벌어지는데...
4. 근세
1558년 루스 차르국이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의 봉신국이던 리보니아 연맹으로 쳐들어왔다. 당시 리보니아 연맹의 독일인들은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서로 욕하고 싸우기 바쁜 상황이었고, 라트비아인 농노들은 독일인들도 유대인들을 싫어하는 상황이었다. 전쟁의 명분은 리보니아 연맹의 독일인들이 1554년 루스 차르국에 충성한다 했다가 1557년 다시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충성 대상을 바꾸며 약속을 위반했다였으나, 실상은 리보니아의 신,구교 분열이었다. 이반 4세의 군대는 순식간에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일대를 점령했다. 그러나 몽골군과 이반 뇌제의 영향을 받은 러시아 군이 점령한 지역 주민들에게 필요 이상의 야만적인 학살을 일삼자,[4] 라트비아인들의 민심은 순식간에 돌아서고, 리보니아의 독일인들도 덴마크와 스웨덴, 리투아니아에 다급히 구조를 요청했다.그 결과 루스 차르국과 덴마크, 스웨덴, 리투아니아 사이의 리보니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루테니아 영토였던 비텝스크와 스몰렌스크 역시 루스 차르국 군대에 공격을 받아 많은 주민들이 살해당하자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폴란드와 그동안의 동군연합 차원을 넘어 아예 연방으로 합쳐 같이 루스 차르국에 대항하자는 의미로 루블린 조약을 맺어 156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합쳐졌다. 폴란드군의 원조에 힘입어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리보니아와 벨라루스에서 러시아와 타타르 연합군을 간신히 물리치고 1578년 루스 차르국의 괴뢰국인 리보니아 왕국을 무너트리며 라트비아 일대를 탈환했다.
리보니아 전쟁의 결과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일대는 그야말로 초토화되면서 마리아의 영토 이른바 테라 마리아나라고 불린 리보니아 연맹은 해체되었다. 에스토니아 북부는 스웨덴령 에스토니아 공국이 들어섰고, 사레마 섬은 덴마크 영토가 되었으며 쿠를란트와 젬갈렌은 가톨릭 주교구가 박살난 김에 마지막 기사단장 고트할트 케틀러가 루터 교회로 개종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칭신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속국인 쿠를란트-젬갈렌으로 세속화되었다. 그리고 수도 리가를 비롯한 나머지 리보니아 지역은 리보니아 공국으로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직할령이 되었다. 다만 가톨릭에서 루터교회로의 개종은 당시에는 독일인 지주들과 상공업자들에게나 해당되는 사항일 뿐이었다. 1586년 빌헬름 대주교에 따르면 라트비아인과 리보니아인 농노들은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고, 평일에는 발트 토속 신앙 신들을 숭배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쿠를라트 젬갈렌 공국은 이후 해양력을 길러 서아프리카와 카리브 해에 식민지를 건설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웨덴이 북방전쟁의 결과로 이 지역을 리보니아 지역을 획득하였다.[5] 스웨덴이 라트비아를 지배할 당시 리가가 당시 스웨덴 왕국에서 인구가 두 번째로 많은 도시였다고 한다. 스웨덴은 과거 상류층 자제들만 입학이 가능했던 김나지움(일반 학교)에 도시 서민이나 농노의 자제들도 입학이 가능하도록 개선했다고 한다. 이후 다시 폴란드-리투아니아가 탈환한 적도 있었으나 대북방전쟁의 결과로 러시아가 라트비아를 차지했다. 자세한 건 쿠를란트-젬갈렌 참조.
서유럽에서 농노제가 점점 폐지되거나 완화되던 것과 달리 라트비아의 농노제는 이웃 폴란드나 러시아처럼 점점 개악되었다고 한다. 라트비아의 종주권은 리투아니아, 폴란드, 러시아, 스웨덴 사이에서 왔다갔다 했지만 다들 독일인 지주들이 라트비아인 농노들 위에 군림하는 사회 구조를 개혁하는데는 소극적이었다.
5. 근현대
대북방전쟁 이후 계속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지만, 라트비아인 농노들 위에 군림하던 독일인 지주들은 지위와 계급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는 새로 획득한 라트비아 영토에서 갑자기 귀족 계급을 물갈이할 경우 농노제를 바탕으로 한 러시아 귀족 사회에도 불온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카테리나 대제가 워낙 귀족 문화에 우호적이고 친독일적인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독일인 지주들이 너무 지나치게 강한 권한을 가질 경우 반란을 일으킬 염려가 있기 때문에 러시아 제국은 상황에 따라 라트비아인 농노들에게 여러가지 특혜를 주며 독일인 지주들과의 싸움을 부추기기도 했다.1804년에는 라트비아 농노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 상당수가 철폐되어 독일인 지주와 개신교 교회들이 타격을 입었으며, 쿠를란트(쿠로니아)에서는 1819년, 리보니아(세미갈리아)에서는 1820년 농노가 해방되었다. 라트갈레 지역은 러시아 본토와 비슷하게 1861년 무렵에야 농노가 해방되었다. 1820~30년대에는 라트비아인 농노들도 이름에 성을 쓰도록 법이 개정되었다. 하지만 독일인 지주들과 비슷한 성을 쓰는 것은 금지되었고, 상당수의 농노들은 Vērziņš(작은 자작나무), Kalniņš(작은 동산)같은 성의없이 만든 성을 대충 사용했다고 한다. 라트비아인이 농노에서 해방되고 법적 차별이 철폐되자 1820년대부터 라트비아어로 된 주간지들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라트비아인 농노들은 독일인 지주들로부터 해방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난한 농민으로써의 지위가 하루만에 개선된 아니었다. 라트비아의 사회 지도층 절대다수는 러시아인 관료들과 발트 독일인들이 양분하고, 도시 전문직은 유대인과 발트 독일인이고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는 라트비아인인 상황이 지속되었다. 도시에서 출세한 라트비아인은 대개 독일인과 동화되곤 했다. 그렇게 라트비아인들은 신분상승을 위해서는 독일어를 쓰며 독일인처럼 행세해야 했지만 1880년대부터 러시아 제국에서 라트비아의 러시아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상황이 180도 변한다. 러시아화 정책에 일환으로 러시아 정부가 라트비아에서 독일인, 독일어, 독일 문화를 본격적으로 억압하기 시작하자 더 이상 라트비아인 지식인들이 독일인 행세를 해야 할 이유가 사라진 것.
1850년대부터 jaunlatvieši(젊은 라트비아인들) 같은 단체를 만들어서 발트 독일인들과 주도권 다툼을 벌이던 라트비아 민족주의자들은 1880년대부터 라트비아 문학과 문화, 언어, 정체성 등을 재확립하거나 고대 라트비아 신화를 바탕으로 아예 새로 창조해나갔다. 20세기 초 리가는 러시아 제국에서 가장 서구화되고 산업화된 도시 중 하나로, 라트비아 민족주의자들은 넉넉한 후원을 받았으며 라트비아인 노동자들은 마르크스주의가 유대인과 독일인 자본가에 맞서는(...) 정의로운 사상이라는 뭔가 모순적인 생각을 가지고, 마르크스주의 노동 운동에 열성적으로 가담하곤 했다.
1차 대전 와중에 러시아 제국은 당시 150만여 명 정도이던 라트비아인 중 무려 4만여 명에 달하는 인원을 징집했는데, 상술한 이유로 이들 중 상당수가 볼셰비즘에 경도되어 있었다. 1차 대전 와중 라트비아 소총수 연대가 1917년 10월 혁명 당시 볼셰비키에 열성적으로 가담해서 맹활약을 펼쳤다. 초창기 볼셰비키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 중 제대로 군 기강이 잡혀있는 부대는 라트비아 소총 연대가 유일했다.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멘셰비키 정권이 1차 대전을 계속할 것을 고집한 것과 다르게 볼셰비키는 독일과 협상하여 즉각 정전을 선택하였고 이는 라트비아의 독립으로 연결되었다.
독일은 에스토니아와 묶어 발트 연합 공국이라는 국가를 세워 이 지역을 장기적으로 다스리려 했으나, 정작 그 독일은 1차 대전에서 졌고, 라트비아는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독립하였고 라트비아 제1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소련은 물론 붉은 군대를 통해 구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모두 회복하려 했지만 당시 소련은 내우외환에 시달리느라 독립국가 라트비아를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6. 현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발트 3국은 비교적 높은 발전을 이루었다. 각국 모두 군대를 내세운 권위주의 정부가 등장해 오랜 시간 독재를 한 적도 있었고 공산주의 정부의 쿠데타 시도도 있었으나 세 나라 모두 노르웨이와 맞먹을 만한 소득 수준을 자랑하면서 20년간 약간의 평화기를 누렸다. 그러나 1939년 8월 소련과 독일의 외무부 장관들이 폴란드를 중심으로 독일과 소련의 세력권을 나눈 조약인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자 평화도 오래가지 못했다. 조약을 바탕으로 독일은 핀란드를, 소련은 폴란드 동부에 있었던 발트 3국을 영향권 아래에 두었기 때문이다. 1940년 6월 소련은 리투아니아를 시작으로 발트 3국을 침공했다.소련과 공산당에 반대하는 사람은 처형됐고 농장과 사유재산은 국유화되었으며 종교생활 또한 금지됐다. 1941년 6월 중순, 각국마다 약 이틀에 걸쳐 약 1만 5천여명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발트 3국을 점령한 소련은 마을과 집을 무작위로 선정해 아무런 정보도 없이 두어 시간 내에 인근 기차역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아무것도 모른 채 기차에 오른 사람들은 화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로 이송되었다. 수많은 이들이 친인척과 이웃들에게 인사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하고 자취를 감추었지만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신문에 기사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정치범이라는 이유였다곤 하지만 실제로 정치범의 비율은 낮았으며 어린이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을 볼 때 그것은 단지 허울 좋은 구실에 불과했다. 그들 중 단 1%만이 고향으로 돌아왔을 뿐 상당수는 열차 이동 중에 숨지거나 집단 노동 중에 병을 얻어 목숨을 잃었다.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던 나치 독일과 소련 양국은 1년도 안 되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는 사이가 되었다. 1941년 6월 독일 군대는 동쪽으로 진격해 소련의 붉은 군대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소련의 공포정치에 떨고 있던 사람들에게 독일군은 해방군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독일이 발트인들을 위해 함께 싸우며 끝내 독립국가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고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군을 열렬히 환영했다. 젊은이들은 공산주의 소련에 맞서기 위해 독일군에 자원입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독일 역시 소련과 맞먹을 악행을 저질렀다. 젊은이들을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징용했으며 전쟁 물자를 강탈했고 이웃처럼 지내던 유대인들을 처형했다. 물론 위에서 언급되었듯 반유대주의가 팽배하던 시기라 정말로 유대인들의 죽음에 슬퍼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결국 독일은 끝내 패전국이 되었고 승전국으로서의 소련은 종전을 맞이하기 위해 발트 지역에 군대를 보내 나치 독일을 내쫓았다. 누군가에게는 나치로부터 지역 사람들을 해방시킨 것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악랄한 공포정치가 다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독일의 자원친위대에 입대한 군인들과 가족들은 적군에게 동조했다는 명목으로 숙청됐으며 소련의 1차 침략 때보다 두 배나 많은 사람들이 시베리아로 압송되었다. 전쟁 이후 국제정세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소련, 영국의 정상이 모인 얄타 회담에서 우리에게는 민족 분단이라는, 발트인들에게는 세 국가 모두 소련의 공화국으로의 전락이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국민들의 안위와는 하등 관계없는 결정으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모두 또 다시 암울한 현대사를 시작해야 했다.
이후 1988년, 페레스트로이카 기조에 힘입고 리가 지하철과 다우가바강 댐 계획과 관련해 라트비아와 모스크바의 중앙정부간 대립이 두드러지자 다시 독립의 기운이 고조되어 노래 혁명을 통해 소련 해체 직전에 다시 독립을 쟁취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라트비아 제2공화국)
2004년 유럽 연합과 NATO에 가입했다.
21세기 들어서는 심각한 인구유출로 1980년대만 해도 인구가 260만 수준이었으나 현재는 180만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민장벽을 막아놓은 상태라 인구유출이 계속되면 나라의 존망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6]
[1] 핀-우골 어족에 해당한다[2]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의 이름이 쿠로니아와 세미갈리아에서 유래되었다. 세미갈리아를 독일어로 읽으면 젬갈렌[3] 후에 리보니아 연맹이 루터 교회로 개종한 이후에도 라트갈레 주민들은 리투아니아의 영향으로 가톨릭을 믿게 된다.[4] 점령지 주민들을 벌거벗긴 후 목매달고 나서 화살을 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반 4세는 노브고로드 시민들을 처형할 때도 시민들의 옷을 벗겨서 처형하였으며, 정적들을 제거할 때도 정적들의 영지의 여성 농노들을 전부 벌거벗긴 상태에서 도망가게 하며 화살을 쏘는 것을 보며 즐겼다 한다.[5] 다만 라트갈레 지역은 폴란드-리투아니아가 계속 유지하였다.[6] 물론 러시아내에서 라트비아 혈통을 지닌 러시아인들은 꽤 많으나, 이들 대부분은 러시아에 동화되어 라트비아어를 할줄 모르고, 자신의 정체성도 러시아인으로 여기기때문에 라트비아 입장에서 섣불리 불러오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