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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쳅스크는 벨라루스의 도시로 오늘날에는 인구 36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다우가바강 수운을 중심으로 중세부터 번영하던 도시이다.2. 역사
벨라루스 일대에 거주하던 슬라브 크리비치족들의 정착지에서 기원하였으며, 키예프 공국의 영향권 하에 들던 도시로 정교회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었다. 러시아 연대기에 의하면 키예프 공국의 스뱌토슬라프 1세가 세미갈리야인(오늘날 라트비아인의 조상 중 한 갈래에 해당)을 정복한 지역에 건설했다고 한다. 키예프 공국이 몽골 제국에 의해 멸망한 이후 해당 지역은 폴로츠크 공국과 함께 백(白)루테니아로 불렸다. 13세기 중엽 이후로는 중세 리투아니아에 벨라루스에 해당하는 영토를 장악했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초창기 중심 도시이기도 했는데, 리투아니아인들은 요가일라가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 연합을 이루기 전까지 나바흐루다크와 비쳅스크를 중심으로 한 루테니아의 정교회 귀족들과 긴밀한 사이였기 때문이다.1101년부터 1396년까지 비쳅스크를 중심으로 한 비쳅스크 공국이 존재했다. 원래는 폴로츠크 공국의 지배를 받던 공국이었으나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의 공격으로 폴로츠크 공국이 쇠퇴하고 비쳅스크의 공후들이 리투아니아에 투항하면서 폴로츠크와는 독립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비쳅스크의 마지막 공작 스비트리가일라가 1396년 비쳅스크 공작직을 내려놓으면서 비쳅스크 공국 영토는 리투아니아 대공국 영토로 완전 흡수되었다.
1597년 도시는 마그데부르크 법의 보호를 받기 시작했으며 동유럽의 상업 중심지 중 하나로 번영했으나, 18세기 초반 대북방전쟁 당시 이곳을 침공한 스웨덴 국왕 칼 12세의 스웨덴군에 의해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어 고적지가 드물어졌다. 다만 폴란드 지배의 영향으로 현재도 가톨릭 성당이 남아있다.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폴란드-리투아니아 결성 이후 도시는 폴란드의 유대인 인구 유입 정책으로 유대인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폴란드 분할 이후 1897년 인구 조사 결과 도시 인구 6만여 명 중 3만여 명이 유대인으로 나왔다.
독소전쟁의 시발점인 바그라티온 작전의 주요 목표 도시였다. 유대인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몰살되었으며 오늘날 비쳅스크의 주 민족은 벨라루스인이다.
3. 출신 인물
- 마르크 샤갈
- 미하일 보로딘 - 근교에서 출생
-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
- 조레스 알표로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