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러시아의 관계에 대한 내용은 북러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
조선국 | 러시아 제국 |
1. 개요
조선과 러시아 제국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2. 역사
2.1. 나선정벌
자세한 내용은 나선정벌 문서 참고하십시오.조선과 러시아의 첫 만남은 껄끄러웠다. 17세기 중엽 러시아는 남방으로 영토 확장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르강 일대에서 청나라와 충돌해 서로간 영토확장에 분쟁이 생겼다. 결국 자신들의 영토를 지키고자 하는 청나라는 조선을 끌여들였고, 별 소득을 얻지 못했던 러시아는 물러나게 된다.
2.2. 제2차 아편전쟁
자세한 내용은 대한제국-러시아 제국 국경 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연해주가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고, 조선은 처음으로 서구 열강과의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국경을 잠그는 것부터 계속해서 러시아를 견제했고, 양국의 사이는 좋아지지 않았다. 또한 베이징 조약이 맺어지며 조선의 녹둔도가 러시아 제국에 넘어가게 되었다.
2.3. 조로수호통상조약
자세한 내용은 조로수호통상조약 문서 참고하십시오.2.4. 러시아의 조선에 대한 간섭
1884년 조로수호통상조약이 수립된 이후, 러시아는 조선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삼자 하는 야망이 있어서 점점 조선에 자기들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 때문에 1885년 영국이 거문도 점령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조선은 러시아와 친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남하정책의 일정중 하나인, 제주도 점령과(제주성 위협사건,1885년)[1] 용암포 점령, 절영도(現 부산광역시 영도구)의 조차와 같은 무리한 요구들을 대한제국에 요구하였다.
2.5. 아관파천
자세한 내용은 아관파천 문서 참고하십시오.을미사변 이후, 반일 감정이 생긴 고종은 친일파들이 장악한 경복궁을 떠나 조선과 친했던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고, 일본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대신 러시아의 영향력이 한층 강화됐다.
1896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참석을 명목으로 민영환 등이 러시아를 찾아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몇 가지 요구를 전달했다. 요구 내용은 국왕 호위 지원, 군사교관 지원, 궁내부 및 광산·철도 고문 파견, 조러 통신 가설, 차관 도입 등이었다. 러시아는 고문관 파견은 수용했으나 통신과 차관은 "생각해 보겠다"는 임장 정도만을 밝혔으며 나머지는 거절했다.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벌인 러일전쟁 무렵에는 조선이 러시아와 은밀히 연합하여 항일전선을 펴기도 했다. 그 증거로 1904년 7월, 조선의 고종 황제는 두만강 일대의 항일의병들한테 "러시아 군인들을 향해 총을 쏘지 말라", "말먹이나 양식을 제공해 주거나 길을 알려주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려 러시아군에게 협조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조선인 의병들이 러시아군과 연합하여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며, 러시아군에 소속되어 일본군과 싸운 선견한국분견대 부대원들의 총 수는 17,323명에 달했다(1905년 10월 1일).러시아군과 연합 작전을 계획했던 항일 의병부대들
식민사관에서는 한러관계는 조청관계와 유사하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러관계는 조청관계처럼 무조건 복종만 하지 않았다. 한러은행의 폐지를 예로 들 수 있다.
2.6. 러일전쟁 이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게 완패한 뒤, 러시아는 조선에게서 영향력을 거의 전부 상실했다. 더이상 조선은 러시아에 기댈 수 없게 됐고, 조선 내에서는 친러파가 몰락의 길을 걷고 친일파가 다시 권력을 잡았다.3. 관련 사건
4. 같이보기
[1] 이 사건의 경우 러시아 제국이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한 것을 구실로 점령시도를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