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 벨라루스 | 우크라이나 |
1. 개요
삼국의 우애를 구가하는 노래 <세 자매(Три Сестры)>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삼국 모두 동슬라브 문화권에 속해 있으며, 코소보의 독립을 불인정하고 있다.
2. 역사적 관계
2.1. 19세기 이전
삼국은 키예프 루스에 뿌리를 둔 국가들이다. 그러나 키예프는 중앙집권화된 국가와는 거리가 멀었고 키예프 공국에서 갈라져 나온 여러 공국들은 서로 전쟁과 무역을 반복하는 사이였다. 벨라루스에 기반한 폴로츠크 공국은 슬라브족 외에도 발트어족 민족들을 흡수하였으며,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우크라이나 초르노젬 평야 일대는 과거 스키타이 유목민들과 고트족들이 거주하던 지역이기도 하였고, 그리스와 교류가 활발한 지역이기도 했다. 북부 해안 지대의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우랄어족의 발트핀어군 민족들에게 조공을 받으며 서구 국가와 해상무역을 주도하던 공화국이었고, 북부 삼림 지대의 블라디미르-수즈달의 경우 슬라브족 이주민들이 우랄어족 주민들을 동화시키나가던 상황이었다.역사가들은 (중세 루스) 공국에 기반한 정체성에서 근대 동슬라브 민족의 기원을 찾는다.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은 초기 근대 모스크바 공국의 전신이자, 궁극적으로 근대 러시아의 전신이 되었다. 벨라루스의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근원을 폴라츠크 공국에서 찾는다. 우크라이나 역사가들은 우크라이나 민족건설 프로젝트의 기초를 발견하기 위해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을 탐구한다. 그러나 이 모든 정체성은 키이우로 환원된다. 키이우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 큰 이점을 안겨준다. 이들은 자신들이 수도를 떠나지 않고도 자신들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유럽의 문 우크라이나 / 세르히 플로히 저 / 허승철 옮김
유럽의 문 우크라이나 / 세르히 플로히 저 / 허승철 옮김
13세기 몽골 제국에 의해 키예프가 멸망한 뒤, 해당 공국들이 각기 다른 정체성이나 문화가 더 빠른 속도로 분화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러시아의 직계 기원이 되는 모스크바 대공국[1]의 경우 킵차크 칸국의 오랜 지배를 받으면서 튀르크, 몽골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이후 킵차크 칸국의 후신 카심 칸국,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을 차례로 병합하면서 루스 차르국으로 거듭난다. 우크라이나는 적루테니아의 루테니아 왕국을 중심으로 폴란드, 헝가리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바, 루테니아 왕국 이후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폴란드 왕국의 영토로 넘어갔다. 벨라루스의 여러 루테니아 공국들[2]은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의 침략에 맞서 리투아니아와 손을 잡았고 이후 리투아니아가 요가일라 치세에 폴란드와 동군연합을 구성하게 되면서 폴란드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키예프의 주요 구성 공국 중 하나였던 노브고로드를 병합한 모스크바는 이후 루스 차르국이 되었다. 러시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정교회를 탄압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코사크들이 보흐단 흐멜니츠키를 중심으로 봉기한 것을 계기로 우크라이나 지역을 상당부분 점령하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일대를 꾸준히 약탈하던 크림 칸국을 18세기에 완전히 멸망시켰으며 이후 폴란드 분할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중부 나머지 지역 및 벨라루스 전역을 차지하였다.
우크라이나의 코사크들은 초창기에는 러시아 군대를 폴란드의 종교 탄압으로부터 정교회 신앙을 지켜주는 해방자로 환영하였으나, 러시아에서는 코사크 공동체 문화가 러시아의 농노제 유지 등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보고 혹은 러시아 대신 우크라이나가 주체가 되면 곤란하다는 이유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극도로 탄압하였다. 특히 표트르 1세 시절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을 비롯한 많은 토목 사업에서 징발된 코사크 상당수가 건설 현장에서 러시아 관리들의 학대와 굶주림 질병 등으로 죽어나갔는데 대개 공사에 동원된 코사크 중 1/3~1/6 가까이가 사망하였다 한다. 과거 폴란드 지배 시절에 자신들을 러시아인과 같은 정교회 신도로서 동일시하던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의 탄압과 여기에 분개한 이반 마제파의 봉기 등을 계기로 자신들을 러시아인과는 다른 독자적인 우크라이나인으로 자각하기 시작했다.
2.2. 19세기
러시아는 폴란드 분할을 통해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일대를 병합하면서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폴란드 분할을 계기로 우크라이나의 갈리치아와 자카르파탸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은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벨라루스도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1725년 당시 1,300만여 명 정도였던 러시아 인구는 19세기 초 4천만여 명으로 거의 백년만에 3배 이상 증가하였다. 더욱이 새로 얻은 영토에서 얻은 주민들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인들과 문화/역사적으로 동질성이 높은 민족 집단이기도 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주민들을 러시아인에 동화시키는 편이 유리했다.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지역은 강력한 러시아화 정책을 계기로 다시 러시아와 동일한 문화권으로 묶이게 되었다. 대표적으로는 동방 가톨릭 교회로 강제개종되었던 해당 지역 주민들을 정교회로 원복시킨 일과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를 제한, 금지한 조치를 들 수 있다. 전자의 경우 현지 주민들에게 환영을 받았으나(최소한 저항은 받지 않았으나) 후자의 경우 우크라이나 일대를 중심으로 상당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는 하나의 국가 안에 동일 문화권으로 묶여 인적 물적 교류가 상당히 활발하였다. 우크라이나 흑토 지대는 러시아 귀족들의 노른자땅이었으며 오데사 항을 통해 수출되는 우크라이나의 밀은 당시 러시아 제국의 주요 외화 획득원이기도 했다.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일대가 완전히 러시아화를 강요받는 상황은 해당 지역 지식인들의 활동에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니콜라이 고골은 우크라이나 출신 문인이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어 금지 조치로 러시아어로 글을 써서 세계적인 문호가 되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에서는 고골의 작품을 다시 우크라이나어로 번역해서 내놓기도 했는데, 러시아에서는 이를 무척 언짢게 여기는 상황이다. 비슷한 시기 활동하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시인 타라스 셰우첸코는 우크라이나어로 된 시를 쓰다가 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 후 폐인이 되었다. 여기에 불만을 품고 상당수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서부 갈리치아로 망명하였고 이후 갈리치아는 우크라이나 반러 민족주의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벨라루스의 경우 이런저런 이유로 우크라이나와 다르게 반러 감정이 적었다. 첫 번째로 러시아의 벨라루스 점령은 우크라이나의 경우와 다르게 일방적으로 러시아에 의해 일어난 일로, 벨라루스인들이 러시아의 탄압[3]에 대해 배신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또한 러시아가 벨라루스를 지배하던 당시 벨라루스인 민족주의자 지식인층 상당수는 완전히 폴란드화한 상황으로 폴란드화한 벨라루스 상류층들과 벨라루스인 농노들 사이에서는 코사크 지도자 대 일반 코사크의 유대 관계 같은 게 있을리가 없었다. 세 번째 이유로는 근세 내내 벨라루스가 러시아와 폴란드 사이의 전쟁터가 되면서 인구가 감소되고 도시가 파괴된 영향으로 벨라루스 지식층 및 민족주의 기반이 취약했던 점을 들 수 있다. 근세 초 벨라루스는 프란시스크 스카리나로 대표되는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벨라루스어 문예 작품들이 부흥을 맞이하였으나, 여러차례의 북방전쟁 특히 대홍수 과정에서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벨라루스 인구 상당수가 사망하거나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탈주하면서 발전이 이어지지 못했다. 근세 벨라루스 문예 부흥은 당시 예수회가 세운 학교 및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교회 부속 시설을 중심으로 부흥하였던 이유로 반가톨릭 성향의 러시아에서 흑역사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19세기 중반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해방령을 발표한다. 이 정책으로 해방된 농노들은 토지 상환금을 납부해야 했는데 폴란드인 혹은 친폴란드파 지주들이 많았던 벨라루스 지역에서는 러시아 본토보다 훨씬 더 가벼운 비율의 토지 상환금이 부과되었으나 비옥한 우크라이나 지역은 당시 러시아 고위 귀족들의 노른자땅이었던 이유로 러시아 전체에서 가장 무거운 비율의 토지 상환금이 부과되었다. 우크라이나의 농민들은 가장 비옥한 토지를 소유한 대가로 러시아에 가장 많은 부담을 짊어져야 했고, 이는 우크라이나 내 반러 감정을 증폭시키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2.3. 20세기
근세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와 함께 전 세계에서 가장 유대인이 많던 지역으로 아슈케나짐들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상업 및 금융업에 주로 종사하던 이들은 대개 소도시에 거주하며 마름이나 소상인으로 활동했다.[4] 때문에 경제적으로 부딪힐 일이 많은 현지 슬라브인의 불만과 증오는 다이렉트로 유대인들에게로 향했고, 반폴란드 봉기 때마다 유대인 학살이 일어났다. 폴란드 분할로 폴란드가 멸망한 이후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를 접수한 러시아 역시 현지인들의 불만을 유대인들에게로 돌리는 일이 많았고, 이 때문에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 동유럽 각지에서는 포그롬이 빈발하였다. 일부 유대인들은 러시아 본토로 이주하였지만 정부 당국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 유대인 정착을 금지시켰고, 때문에 러시아 내 유대인 인구 상당수는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오늘날 미국 유대인의 92% 가량이 아슈케나짐으로 이 중 상당수는 우크라이나나 벨라루스 출신이지만 이들은 포그롬에 대한 트라우마로 자신들을 우크라이나계 혹은 벨라루스계 미국인으로 여기지 않는 편이다.러시아에서는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이나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의 해외 이주는 방치, 허락하는 편이었지만 정교회를 믿는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이나 벨라루스인의 해외 이민은 제한하는 편이었다. 당시 우크라이나계, 벨라루스계 중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한 인구는 대개 러시아 제국 영토 밖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구성국이던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왕국 출신이 많았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폴란드 제2공화국 출신 정교회 인구 상당수가 아르헨티나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러시아가 1917년 혁명으로 소련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백군 난민들이 프랑스, 미국, 캐나다를 포함한 세계 각지로 흩어졌는데 백군 난민 중 정교회 신도들은 따로 독자적인 우크라이나계 혹은 벨라루스계 정체성을 갖기보다는 러시아계 정체성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소련 치하에서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구성 공화국이 되었다. 사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로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는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 항복 후 러시아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를 침공, 점령했다. 1922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자캅카스 등은 소련을 창설하는 공식 협정을 맺었다.
우크라이나 서부는 원래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 건국되었으나 폴란드와 전쟁에서 패배하여 점령당했으며, 벨라루스 서부 지역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와중에 폴란드의 영토가 되었다. 폴란드에서는 우크라이나계와 벨라루스계 주민들을 2등 시민 취급하며 차별하였고 이 지역에서는 반러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반폴란드 민족주의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소련은 폴란드 내 벨라루스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을 분할하여 소련 영토로 합병한다. 벨라루스 서부, 갈리치아 및 자카르파탸가 폴란드에서 소련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물론 전간기 소련이 차지한 지역도 극심한 탄압을 당했다. 우크라이나 중부, 동부 일대는 토질이 비옥하여 소출이 많던 지역으로 소련의 농업 집산화(콜호스)에 대한 저항이 가장 극심한 지역 중 하나였고,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 정권 시절 우크라이나 대기근이라는 참상을 겪는다. 또한 소련은 1920년대 코레니자치야(коренизация) 정책[5]의 일환으로 우크라이나의 민족문화를 장려했지만, 1930년대에는 러시아화로 정책 방향을 급선회하여 민족문화를 탄압하고 우크라이나 민족지식인들을 모조리 총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6] 여기에 폴란드 침공으로 점령한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을 가혹하게 탄압했고, 나치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하자 서부에 있던 수감자(주로 우크라이나인)들을 모조리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소련에 대한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 감정 및 상호 증오의 이유를 우크라이나 대기근이나 민족 지식인 숙청만으로 들기는 어렵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독일이 벨라루스 초토화 및 홀로코스트를 벌이며 현지 주민들을 학살하다, 현지인 파르티잔들의 저항을 받아 패퇴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소련이 자신들의 독립국가를 멸망시키고 재점령한 사악한 압제자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의 마수와 학살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주고 폴란드 동부를 병합해 영토를 넓혀준 대상이기도 하다. 소련에 대한 견해나 감정이 복잡다단할 수 밖에 없다.
1950년대 중반에 우크라이나 출신인 니키타 흐루쇼프가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 쪽으로 이전시켰다.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일어나면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러시아 측에서는 해당 사건에 대한 배상금 및 복구 비용을 우크라이나에 고정적으로 지출하게 되었다.
1991년 12월에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는 벨라베자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소련이 해체됐다.
2.4. 21세기
주요 사용 언어 | 러시아어 | 러시아어 벨라루스어 |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
면적 | 17,098,242km²[7] | 207,595㎢ | 603,628㎢[8] |
인구 | 145,912,022명(2021년) | 9,442,867명(2021년) | 41,527,205명(2021년 3월) |
수도 | 모스크바 | 민스크 | 키이우 |
통화 | 러시아 루블 | 벨라루스 루블 | 흐리우냐 |
1인당 명목GDP | $ 15,345(2022년) | $ 7,905(2022년) | $ 4,534(2022년) |
주요 민족 | 러시아인 | 벨라루스인 | 우크라이나인 |
소련 해체이후에 삼국은 서로 독립국이 되었다. 90년대 이후 벨라루스는 러시아-벨라루스 연맹국을 결성하고 독립국가연합(CIS), 유라시아 연합의 회원국으로 가입하는 등 친러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벨라루스의 독립 이후의 경제 정책은 소련 시절 계획경제를 완만하게 수정한 것으로 만약에 소련이 덩샤오핑 시절 중국처럼 점진적인 개혁개방을 취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의 예시로도 꼽히는 편이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견제하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이를 테면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에게 대기근에 대한 책임과 사과를 반복 요구하면 러시아 측에서는 "50년도 더 지난 일을 우리가 언제까지 계속 책임지는 데도 한계가 있다.", "미안하긴 하지만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대신 폴란드 영토 잘라서 너네한테 줬잖아." "당시 우리 본토에서도 기근으로 인한 사망자가 속출했었다."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다.(...) 반면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관련해서는 러시아가 책임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복구 비용을 고정 지원하는 상황이다.
2010년대 유로마이단, 크림반도 합병, 돈바스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는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되었고, 우크라이나는 아예 CIS에서 탈퇴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사이의 관계도 점차 악화되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국은 서로 항공기 취항을 금지한 상황이고, 서방에서는 라이언에어 4978편 벨라루스 강제착륙 사건을 계기로 벨라루스의 항공기 취항을 제재하는 상황이 되었다. 우크라이나는 반러 정책과 더불어 친서방 외교 정책을 추구하지만 서방 국가들은 적극적인 지원을 꺼리는 상황이다.
우크라이나는 소련 해체 이후 지지부진한 경제개혁, 2008년 세계금융위기,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몰도바, 아르메니아와 함께 유럽 내 최빈국으로 주저앉았다. 이 중에서도 가장 주된 이유를 꼽자면 첫째, 소련이 붕괴됨에 따른 구 소련 국가들과의 교역망 붕괴를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로부터 국제시세 대비 3%에 공급받던 원유를 붕괴 후 80%로 공급받게 되었다. 둘째, 레오니드 크라우추크 대통령의 계획경제 유지를 들 수 있다. 계획경제는 1994년까지 유지되었고, 그 결과 기록적인 초인플레이션 및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연 -10~-20%대)을 기록했다. 1994년부터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한 서방의 도움을 받아 국유기업 사유화, 예산적자 축소 등 초보적인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1999년부터 재정 및 에너지 제도 개혁, 대기업 및 토지사유화를 통해 본격적인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하면서 우크라이나는 플러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게 되었다. 하지만 경제성장의 스타트를 너무 늦게 끊은 탓에 이미 다른 동구권 국가들에 비해 뒤처져 있었고, 부정부패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며, 레오니드 쿠치마 재임기 경제난이 좀 나아지나 싶었더니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집권하자 권위주의가 심각해지면서 우크라이나의 경제적, 정치적 위기는 심화되었다. 2014년 유로마이단을 겪고 권위주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되었지만, 2008년에 기록한 국민소득 최대치는 아직까지도 뛰어넘지 못하는 실정이다.
결론적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소련 해체 이후 부패 청산에 실패하였고,[9] 이로 인해 양국 모두 포퓰리즘 정치인들이 득세하는 상황이 반복되며 서로간의 견해 차이를 좁히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해당국들의 부정부패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는 이상 러시아-벨라루스-우크라이나 관계가 제대로 개선되기는 어렵다 하겠다.
벨라루스가 러시아와의 ‘국가통합’에 합의하기로 결정했다. 양국은 구체적으로는 2023년 12월까지 단일 가스시장 조약을 체결하고, 석유 및 단일전력시장 창설도 추진할 계획이다.# 우크라이나는 국가가 삼면으로 포위된 형국이 되었다. 다만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완전한 통합이 어렵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어 미래는 불투명하다.
2022년 2월 24일부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국 사이에서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벨라루스군과 합동훈련을 하던 러시아군은 벨라루스 정부의 묵인 하에 우크라이나-벨라루스 국경을 넘어갔다. #
2022년 3월 1일에 젤린스키 대통령은 유럽연합(EU) 가입 신청서에 서명했다.
벨라루스측이 우크라이나 외교관들을 추방시켰다.#
비탈리 클리치코 키이우 시장은 키이우-모스크바 우호 광장을 마리우폴 광장으로 바꾼다고 밝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초기, 벨라루스 철도 노동자들과 해커들로 이루어진 반체제 세력들이 러시아군의 철도 이용을 막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우호 광장에 세워진 동상이 철거됐다.# 벨라루스가 긴급군사훈련을 실시하자 우크라이나는 대응을 한다고 밝혔다.# 벨라루스가 우크라이나 접경지 3곳에 특수부대를 파견해 주둔시켰다.#
벨라루스 국민의 67%가 러시아가 벨라루스에 주둔해 우크라이나 침공을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0월 14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벨라루스가 '대테러 작전'을 선포했다.#
러시아가 전쟁 장기화를 선언해 벨라루스를 활용할 가능성이 제기됐다.#
12월 19일, 러시아가 키이우 등 우크라이나에 공습을 가한 가운데, 푸틴 대통령이 벨라루스를 방문했다.# 푸틴 대통령과 루카셴코 대통령은 회담에서 벨라루스의 우크라이나 전쟁 참전설 대신 서방의 제재에 맞서기로 했다.#
12월 20일, 벨라루스 측이 러시아와의 연합훈련을 고려해 우크라이나 국경지역의 출입을 제한했다.#
12월 25일, 벨라루스는 러시아에서 받은 이스칸데르 탄도미사일, S-400 방공미사일을 운용할 준비가 됐다고 밝히며 우크라이나가 사정권에 들어섰다.#
2023년 6월 9일, 푸틴 대통령은 벨라루스에 전술 핵무기를 배치할 것이라고 밝혔고 우크라이나의 반격이 시작됐다고 밝혔다.#
7월 1일, 바그너 그룹 쿠데타가 실패한 뒤에 바그너 그룹이 벨라루스의 버려진 기지를 이용할 가능성이 커지자 젤렌스키 대통령은 북부 전선에 대비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전력을 보강하기로 했다.#
3. 문화 교류
3국 모두 동슬라브 문화권에 속해 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서쪽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정교회를 믿는다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3국 모두 키예프 루스 시절에 키릴 문자를 받아들였고 문화적으로도 정교회 문화권에 속해 있다.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서는 폴란드의 지배하에서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등 동방 가톨릭 교회가 생겨났으나,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은 지역에서 사멸하였다. 오늘날 동방 가톨릭이 우세한 지역은 우크라이나의 갈리치아 지역과 자카르파탸 지역으로 과거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였던 곳이다.러시아어, 벨라루스어, 우크라이나어는 언어적으로 동슬라브어군에 속하다보니 비슷한 어휘들과 표현이 많으면서도 차이점도 존재한다. 그러다보니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러시아어를 구사할 줄 안다. 특히, 벨라루스는 친러정책을 실시하면서 러시아어가 벨라루스어와 함께 공용어인 반면, 우크라이나는 대기근과 관련된 기억 및 체르노빌 사건 등으로 반러정책을 실시하면서 러시아어를 배제하고 있다.
4. 관련 문서
- 러시아/외교
- 벨라루스/외교
- 우크라이나/외교
- 독립국가연합[10] / 유라시아 연합[11]
- 러시아-벨라루스 연맹국
- 러시아/역사
- 벨라루스/역사
- 우크라이나/역사
- 키예프 공국
- 몽골-타타르의 멍에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 러시아 제국
- 소련 /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벨라베자 조약 / 소련 해체
- 신냉전(유로마이단 / 2014년 크림 위기 / 돈바스 전쟁 / 2020년 벨라루스 시위 /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 러시아-우크라이나 국경 / 러시아-벨라루스 국경
- 러시아/경제
- 벨라루스/경제
- 우크라이나/경제
- 동슬라브 / 러시아인 / 벨라루스인 / 우크라이나인 /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 러시아어 / 벨라루스어 / 우크라이나어 / 정교회 / 러시아 정교회 / 우크라이나 정교회 / 동방 가톨릭 교회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동유럽 국가
[1]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을 계승하였다.[2] 오늘날의 벨라루스 일대는 과거에 흑루테니아와 백루테니아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얀 루테니아를 뜻하는 루테니아 알바가 오늘날 백러시아 즉 벨라루스 국명의 기원이 되었다.[3] 벨라루스 각지에 둔전을 설치하고 현지 농노 여성들에게 1년에 한 명씩 낳도록 강요한다든지. 물론 당시 동유럽 농노 사회에서는 만삭 임산부나 산모가 출산한 직후에도 아무 배려 없이 중노동을 시켰다.[4] 일반 농민으로 농사를 짓는 경우에도 루테니아인 정교회 농민들보다 훨씬 더 적은 세금을 부과받는 특혜를 누렸다.[5] '현지화,' '토착화'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1934년에는 104개의 민족언어로 교과서가 출판되었다.[6] 우크라이나화 정책을 주도했던 미콜라 스크립닉은 1933년 숙청된 후 자살했고, 역사학자 미하일로 흐루솁스키는 1934년 11월 말경에 의문사했다. 1937년 11월 3일 카렐리야에서는 우크라이나인 지식인 290명이 집단총살되었다.[7] 크림 공화국 및 세바스토폴을 제외한 수치[8] 크림반도 합병, 돈바스 전쟁 이전 면적 기준[9] 벨라루스의 경우 러시아나 우크라이나보다는 좀 더 나은 상황이다.[10]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독립국가연합의 회원국들이지만,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갈등을 빚으면서 탈퇴했다.[11] 유라시아 연합에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가입했지만, 우크라이나는 가입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