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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 벨라루스 |
1. 개요
독일과 벨라루스의 관계에 관한 문서2. 역사적 관계
2.1. 중세
벨라루스와 독일은 서로 폴란드를 사이에 두고 있어 중세 초까지는 접촉이 적었다. 그러나 1200년 리보니아 해안 지방에 정착한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이 폴로츠크 공국을 공격하고 다우가바강 수운 무역을 방해하면서 독일 기사단과 폴로츠크 공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폴로츠크 공국에서 독일 기사단의 요새를 공성하는데 실패하면서 전쟁은 독일 기사단의 승리로 끝나고 이는 중세 폴로츠크 공국의 몰락으로 이어졌다.폴로츠크 공국의 몰락에 뒤이어 폴로츠크 공국과 수운을 통해 무역하던 키예프 루스의 본진 우크라이나 일대가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이후 백루테니아와 흑루테니아의 여러 소규모 공국들은 킵차크 칸국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혹여나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이 다시 침공하지는 않을까 두려움에 떨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독일 기사단의 침략으로 곤경에 처한 리투아니아인과 이해 관계가 맞물리며 루테니아의 여러 공국들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별 다른 저항없이 투항하기 시작했다.
이후 13~14세기 벨라루스 전역이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벨라루스의 민스크, 나바흐루다크 등등의 도시들은 독일식의 도시자치법인 마그데부르크 법(Magdeburger Recht)을 적용받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리투아니아 대공국 측은 크림 반도와 독일, 폴란드 일대의 유대인들이 대공국 내 도시에서 상공업에 종사할 권리를 보장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독일계 이디시어를 사용하는 아슈케나지 유대인이 벨라루스 각지에 대거 정착하게 되었다.[1]
독일 기사단에 맞선 그룬발트 전투 당시 백루테니아의 기병 상당수가 폴란드군, 리투아니아군과 함께 참전하여 승전을 거두었다.
2.2. 근세
폴란드-리투아니아 치하에서 상당수의 독일인들이 벨라루스 각지에 정착하였다. 독일어권에서 종교 개혁이 발생한 영향으로 벨라루스 일대에도 기존의 전통적인 가톨릭이나 정교회 대신 개신교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다만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독일인들 대다수가 루터교회를 믿고 있던 영향으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귀족들은 이들과 자신들을 차별화하기 위해서, 루터교회 대신 칼뱅교회나 유니테리언을 믿던 편이었다.2.3. 근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폴란드 분할로 멸망한 이후 러시아 제국이 벨라루스를 장악하였다. 러시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이 직접 국경을 맞대는 상황에서 벨라루스 지역은 프로이센과 교역이 활발하였다.2.4. 20세기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 문서 참고하십시오.제1차 세계 대전 중 벨라루스인들은 독일 제국의 지원을 받아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독일이 항복하자, 볼셰비키 러시아는 벨라루스를 침공하였고 이후 벨라루스는 소련의 일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벨라루스는 3년간 나치 독일의 지배를 받았다. 나치 독일은 벨라루스 중앙 라다라는 괴뢰정부를 세웠고, 벨라루스인을 학살하는 등의 만행[2]을 벌였지만, 1944년 소련군에 밀려 철수했다.
2.5. 21세기
1991년 소련 해체가 되면서 벨라루스가 독립되자 이후 독일은 벨라루스의 독립을 인정하고 수교를 맺었으며, 베를린에서 벨라루스 대사관을 설립했고, 민스크에도 독일 대사관이 설립되었다.독일은 유럽연합의 대표 국가로서 유럽 내 아직 구소련 권위주의 체제를 상당부분 유지하고 있는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정권과 갈등이 있다. 루카셴코 정권의 탄압이 늘어나자 독일로 망명하는 벨라루스인들이 늘고 있다.
3. 문화 교류
독일에는 상당한 수의 벨라루스인이 체류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독일의 문화와 언어 등은 벨라루스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상술한 마그데부르크 법이나 종교개혁은 물론[3] 벨라루스의 유대인 인구가 사용하던 이디시어 역시 독일어 계통 언어이기도 하다.4. 관련 문서
- 독일/외교
- 벨라루스/외교 / 유럽연합-벨라루스 관계
- 유럽 평의회
- 독일/경제
- 벨라루스/경제
- 독일/역사
- 벨라루스/역사
- 독일인 / 벨라루스인
- 독일어/ 벨라루스어 / 이디시어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동유럽 국가
- 대국관계일람/아시아 국가/동아시아 국가
[1] 여담으로 크림 반도와 리투아니아를 연결하는 무역에 종사한 유대인들은 카라임이라 하여 아슈케나짐과 별개의 종파로 이들이 사용한 모어는 카라임어이였다.[2] 벨라루스는 이때의 초토화로 대부분의 유서 깊은 도시들이 파괴당했으며 벨라루스의 민족문화 대부분이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러시아 제국 치하에서 서서히 사라져가던 벨라루스 문화는 공산정권과 알렉산드르 루카셴코의 집권으로 사실상 소멸했다.[3] 오늘날 벨라루스는 정교회나 국가 무신론에 영향을 받은 인구가 많지만, 벨라루스 역사나 문화에 있어서 근세 당시의 종교 개혁의 영향이 적은 편은 아니었다.